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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아이리스 머독, <바다여, 바다여>

 "세월이란 사람들의 현실로부터 우리를 갈라놓고, 사람들을 떼어놓아 유령으로 바꿔놓[는다고들 하]지. 그게 아니라, 그들을 유령이나 악마로 변형시키는 건 오히려 우리야. 과거에 대한 쓸데없는 선입견들이 그런 환영을 만들어내고는 유령 헬렌을 위해 트로이의 영웅들이 싸우게 만들었듯이 힘을 발휘하지."(II-177)


 소설은 바다의 광채와 식도락에서, 물빛과 아스파라거스에서, 그러니까 완전한 행복과 낙원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1인칭 화자인 주인공 찰스는 바다가 드러내는 모든 시청각적 세부를 흡수할 줄 아는 이지적인 인물이다. 또 식사 한 끼도 허투루 먹는 법이 없도록 삶의 물질적인 면모 역시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계를 은퇴했지만 여전히 정력적인 그에게서 독자는 좋게 말하면 (기껏해야) 예민하고, 나쁘게 말하면 강박적인 제왕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가 자신의 세계에 군림하는 방식은 수다스러운 설명을 통해서다. 그는 자유와 방랑을 사랑하는 척 가장하지만, 모든 것을 자신의 이성의 통제 하에 두고자 한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고, 모든 사건은 설명을 할 수가 있다."(I-35)

 하지만 소설의 초입에서부터 이미 그는 자신의 설명력이, (진리치를 가질 수 있는 주장에 대해 근거를 제시하는 힘으로서의) 이성이 가닿지 못하는 사건에 맞닥뜨린다. 뱀과 같이 생긴 바다 괴물을 만난 후 다섯 가지나 되는 가능한 원인을 검토하고, 각각의 신빙성을 저울질하지만, 그는 그럴듯한 설명을 찾는 데 끝내 실패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디테일은 설명을 향한 그의 제왕적 노력과 사건의 발발 사이 시간적 차이다. 달리 말해 그가 사건에 대한 해석을 해내는 일과 습격을 그저 당한 일 사이에는 시간차가 있다. 파토스는 로고스에 선행하며, 후자는 한 발 늦고 마는 것이다. 이성의 실패는 첫 장부터 이 긴 소설의 주제의식으로 자리잡는다.

 "저속했고 잔인할 정도"였던 연극계를 떠나, 회고록을 씀으로써 제 삶을 진실되게 이해하고자 하는 와중이기에, 설명을 향한 찰스의 집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I-52, cf. I-54; I-241). 그렇기 때문에 그가 유명해지기 전, 학창시절 육체적 관계 없이 사랑한 하틀리가 왜 자신을 매몰차게 떠났는지의 문제는 찰스를 지독하게 괴롭힌다.*

"하틀리의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 아마도 내 연애 사건들은 모두가 하틀리에게 그녀가 얼마나 옳았는지를 보여주려는 악착 같은 시도였는지도 모른다."(I-125)

"아,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I-130)

*그러나 찰스의 원래 의도는 하틀리 이후의 연인이자, 그를 성인의 감정과 사랑의 세계로 처음 이끌어주었던 클레멘트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첫사랑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이 소설 속에서 결말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변주되는 테마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이 곧 진짜배기 사랑과 거짓된 사랑--곧 자의적 환상--을 구분해주는 한 개의 (불완전한) 징표가 되기 때문이다.

 찰스의 무지는 하틀리에 대한 환상--본인들의 관계가 순결했으며 심지어는 성스러웠다는 믿음--을 증폭시킨다. 그렇게 하틀리가 자신과 같은 마을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찰스는 하틀리를 스토킹하기 시작하고, 급기야 그녀를 감금하기에 이른다. 그의 광기 가운데서, 그러니까 (이성에 대한 표면적인 이해에 따르면) 이성의 부재를 가리키는 상태에서조차 그가 원하는 것은 이유, 근거, 설명이다. 하틀리에게 집을 나간 양아들, 타이투스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가 사실은 찰스의 아들이 아니냐는 오해로 인해 남편 벤이 그녀를 괴롭혀왔다는 것을 듣게 된 찰스의 이성은 하틀리에게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주체성과 자유의지를 박탈 당한 연약한 소녀의 이미지를 두텁게 덧씌운다.

"하틀리, 이러면 난 참을 수가 없어요. 설명이라도 해줄 수가 없어요?"(I-195)

"왜 그녀는 내가 돕지 못하게 하고, 나를 '끼어주지' 않는가? [...] 혹시 그녀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며, 나를 만날 만큼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I-202f.)

 과거의 순수를 되찾겠다는 자신의 주관적인 욕망과 객관적인 선, 실제로 올바른 사태가 서로 일치한다는 오만이 찰스라는 인물을 특징짓는다. 그렇게 온갖 다양한 성격을 지닌 인물들과, 속된 말로 막장 드라마 같이 느껴질 정도로 극적인 사건들이 폭발하듯 연달아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3인칭의 시점이 아닌 1인칭의 시점을 고른 머독의 선택이 정당화된다. 도덕적 성장에 이르기 전까지의 찰스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로서 동분서주하며, 독자는 일종의 불쾌감, 심하게는 혐오감을 갖고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그러나 찰스만이 부덕한 것은 아니다. 환상 속에서 살면서 자신의 이성을 진실이 아닌 거짓에 봉사시키는 이가 찰스 뿐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머독은 아주 정교하게 무지의 보편성과 덕의 어려움을 드러내는 설정들을 이곳저곳에 배치해두었다. 벤 역시 전쟁이 끝난 후 더 이상 용맹한 영웅이 아닌, 자신의 잔혹한 전사적 기질을 방출할 도리가 없어 느끼는 무력감에 허우적거리는 인물이다. 그는 찰스에 대한 질투심, 하틀리에 대한 불신, 타이투스에 대한 증오에 제멋대로 불을 지핌으로써 그 무력감을 은폐하고, 자신의 화를 정당화할 만한 근거를 찾아나선다(e.g. I-289). 당연하지만 그의 노력들은 현실에 대한 직시를 방해하기만 한다. 그의 아내 하틀리도 가족의 불행이 전부 자기 탓이라는 죄의식에 시달리면서 타이투스를 보호해야 할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다(e.g. II-72). 그 때문에 타이투스는 자신이 미움 받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 또한 현실과 다른 자신만의 비련의 서사 속에 갇혀 지낸다(e.g. II-44). 한편 리지는 자신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찰스에게 동반자 길버트를 떠나면서까지 헌신한다(e.g. I-276).

 도대체가 아무도 진실을, 그리고 진실된 세계 속에서 자신이 할 일을 모르는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면 욕망과 이성 사이의 통상적인 대립은 어느새 무너져있다. ⟪바다여, 바다여⟫에서 이성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게 해주는 권능이 아니라 주체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환상과 방어 기제를 강화할 뿐이다. 바다뱀 사건에서 암시되었듯, 로고스는 파토스를 뒤따라간다. 이때의 환상이 꼭 환상의 주인에게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머독이 소설 속에서 그려내는 환상들은 오히려 상당히 고통스러운 것들에 가깝다.

 머독이 강조하고자 하는 이성의 실패는 무엇가(what is the case)를 묻는 지적인 이성을 넘어 무엇이 이루어져야 하는가(what should be the case)를 따지는 실천이성의 실패이다.* 찰스는 정말이지 끈질기게, 끊임없이 계획하는 영혼이다. 그는 언제, 어떻게, 무슨 행위에 돌입함으로써 절대선 하틀리를 절대악 벤에게서 구출해낼 것인지--본인이 쟁취해낼 것인지--고민한다. 즉 철학적 용어로 그는 실천적 숙고와 실천적 추론(practical deliberation & practical reasoning)의 괴물이며, 문자 그대로 행위(하는)자(agent)의 전형이다(e.g. I-229f.). 그의 숙고의 결론이 도덕이나 진실한 사랑은커녕 폭력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은 행위 중심의 윤리학에 대한 머독의 반감을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참된 삶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서도 터질 수 있는 지뢰와 같은 자유를 어쩔 줄 몰라하며 무엇을 해낼 것인가를 규정해내는 의지가 아니다. 그런 무한한 의지는 도덕을 가장하지만, 결국에는 욕망의 손을 비밀스럽게 들어준다. 이기적인 탐욕을 거둔 다음, 그리하여 세계에서 본인에게 유리한 환상의 베일을 걷어낸 다음 무엇이 진실로서 드러나는가를 지켜보는 주의 깊은 시선, 그리고 그 결과 풍요로워진 내면의 삶(inner life)이 인간을 참된 삶에로 이끌어준다. 거의 유일하게 덕을 대변하는 인물인, 찰스의 사촌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린 무척이나 내성적이고 비밀스러운 존재이고, 그 내향성이 우리에게서는 가장 놀라운 점이어서, 이성보다도 훨씬 놀라운 거지. [...] 우린 모두 너무나 저 잘난 멋에 살아서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재주가 아주 훌륭해."(I-254)"

*궁극적으로 머독은 그녀의 철학적 작업들에서 소위 'is-ought'의 구분, 기술적인 것(the descriptive)과 평가적인 것(the evaluative, the prescriptive) 사이의 단절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왜냐하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이미 모종의 도덕적 관점 혹은 지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머독의 철학으로부터 소설에로 이루어지는 삼투 현상은 그녀의 소설이 지니는 문학적 가치를 떨어뜨리는 감이 있다. 좋은 문학은 작가의 철학에 구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보부아르의 ⟪초대받은 여자⟫에서도 비슷한 삼투를 읽어낼 수 있다.


 문제는 저 욕망의 악화, 머독이 ⟪선의 군림⟫에서 자아-지우기(unselfing)라고 부르는 작용이 능동적으로 일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처음부터 반성과 소크라테스적 검토 없이도 절로(spontaneously) 선한 '덕스러운 소농(virtuous peasant)'으로 태어나거나, 아니면 찰스처럼 파국에 치닫고 모든 풍파를 수동적으로 겪어낸 다음에서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깔개로 몸을 감싸고 반듯하게 누워 두 손을 배에다 포개고, 나와 하틀리 사이에 모든 일이 순조롭게 되고, 평생 충실하게 잊지 않았던 보람이, 신비주의적인 인연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헛되거나 상실되지를 않고 좋은 결과를 이루도록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마치 내 기도를 들은 혼령에게 꾸중이라도 들은 듯 나는 나 자신을 지워버리고 오직 하틀리만을 위해서, 그녀가 행복해지고, 타이투스가 집으로 돌아오고, 남편과 그녀가 서로 사랑하기를 기도했다. 그것은 훨씬 어려웠다. 사실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어서, 아무리 좋은 생각만 하려고 애를 써도 아까 마음속에 있었던 유혹이 그토록 단호하게 멀리 쫓아버렸어도 다시 옆에 기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피치인가 벤인가, 이름이야 어떻든, 그녀의 남편은 질투가 심한 폭군이고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일까? 그렇다면 혹시......? 결국 나는 아침까지 하틀리에게서 편지가 오지 않으면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방갈로로 찾아가기로 작정했다. 그 까닭은......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I-210f., 강조는 나의 것)

*머독의 철학적 사유에 영향을 준 시몬 베유는 ⟪중력과 은총⟫에서 수난(고통, malheur, affliction)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파괴적인 애착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베유처럼 아사하기를 택하지 않는 한) 수난은 자발적으로 찾아나서게 되는 무엇이 아니다.

 이는 내가 보기에 머독의 윤리학이 가장 현실적이 되는 지점인 동시에 현실에서의 소용이 적어지는[literallly unhelpful] 지점이다. 날카로운 독자는 정말 자아를 지워냄(unselfing)이 가능한지--무엇이 자아를 지워낸단 말인가?--, 다만 (베유적 수난으로 인해) 자아의 삭제-당함(being-unselfed)만이 가능한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묻게 된다. 이는 윌리엄스 식으로 말하면 도덕적 행운이 걸린 문제이기도 하다. 머독 자신도 이를 인지했기에 ⟪바다여, 바다여⟫를 기점으로 그녀의 후기 문학세계에서 기적과 신비주의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H. Spear 2007, p. 94)? 찰스는 마침내 상황을 읽어내는 자신의 시선을 변경시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성장하지만, 이는 그 자신은 그에 대해 아무 통제력도 없는 로시나의 원한, 페레그린의 살의, 잔잔한 바다 자체의 살의, 제임스의 신비한 능력, 우연에 불과한 은총 등등이 없었더라면 결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여, 바다여⟫는 소설 속에서나 해피엔딩이고, 우리네 현실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결론을 내놓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덕스러워질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가 않다. 비록 변화가 있다고 해도 그 범위는 백만 분의 1밀리미터밖에 안 되리라. 가엾은 혼령들이 가버리면 평범한 의무와 평범한 관심만이 남는다. 인간은 조용히 살면서 자질구레한 좋은 일들을 하며 아무도 해치지 않을 수도 있다. 당장은 내가 할 만한 자질구레한 좋은 일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내일은 하나쯤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II-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