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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사유와 멜랑콜리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민애•한우리 옮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2023, pp. 9-250.

"아니, 이건 좀 다시 생각해 봐야겠는데."(146)


 두 번역가 님 중 어느 분께서 쓰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해설에 따르면 "햄릿은 우유부단한 인물의 전형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근대적 인물이었다."(875, 강조는 내 것)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는 합리적이었기 때문에 우유부단해졌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동일한 상황에 놓였을 때에 격정적으로, 즉시 행동에 돌입한 레어티즈와 달리, 햄릿은 미친 척 가장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복수가 이루어질 최적의 타이밍을 계산했으며, 친서를 위조하는 등 자기의 이익에 맞게 상황을 조작했다. 그러나 장시간에 걸쳐 숙고된 이 모든 합리적 선택들이 결국 햄릿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레어티즈는 생각을 거칠 새도 없이 슬픔과 분노에 휩싸였지만, 그에 비하면 햄릿은 끝없이 생각의 매개를 경유하는 한 마디로 말해 우울한 인간으로서 살고 죽는다. 이 비극의 심장을 관통하는 것은 사유와 멜랑콜리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고리다.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숙부의 주연에서 햄릿이 비로소 혼자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은 자살이다. 그는 스스로가 처한 상황에 전적으로 몰입하기보다 그로부터 거리를 두며 "세상만사" 일반을 역겨운 것, 자신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해한다(27). 그에 따르면 "허큘리스"와 닮지 못한 나약한 존재인 자신은 "가슴이 터지는 한이 있어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28). 햄릿이 침묵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즉시 복수를 감행할 경우 반역죄인이 돼 사형에 처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복수를 감행하지 않을 경우, 왕이 된 숙부가 약속한 대로 차대 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햄릿은 처음부터 우울한 인물로 등장한다. 곧바로 자기의 선택지를 고르지 못하고 이도 저도 못할 때, 이 상황도 잔인하고 저 상황도 굴욕적일 때, 즉 어떤 미래를 선택해도 절망적일 때, 사람은 우울에 빠진다. 달리 말하면 우울의 원인이란 '이도 저도 못함'으로 상황을 진단해내는 합리적 사고다. (그것이 부재했다면, 햄릿은 레어티즈처럼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자마자 폭도들을 이끌고 왕궁에 쳐들어갔을 것이다.)

 아버지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령을 만난 후 햄릿의 반응도 상당히 이상하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결코 자신만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뒤틀린 시대로다. 저주받은 내 운명이여, / 그걸 바로잡기 위해 내가 태어나다니!"(59) 냉소적으로 보았을 때 햄릿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중요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자신의 문제를 실제보다 더 큰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그의 우울감은 증폭된다. 이후에도 햄릿은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를 이어간다. 복수심에 불타는 레어티즈와 재회하자 그는 "허큘리스가 제아무리 애를 써 봤자 고양이는 야옹하고 울 것이요, 개는 자기 좋은 일이나 할 테니까"(226)라고 말하며--처음과 달리 스스로를 허큘리스로 생각할 만큼의 자신감은 회복했지만--본인이 초래한 레어티즈의 슬픔에 무관심하다. 그에게는 자기의 슬픔이 세상에서 가장 무게 있는 슬픔이며, 자기의 슬픔이 곧 세계의 슬픔이다.

 그러나 햄릿이 스스로의 우울에 대해 그 어떤 자기반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 나처럼 둔하고 미련한 놈은 몽상하듯 서성이며 아무 말도 못하고 있으니. 아무 말도. 왕권도 귀중한 생명도 잔인하게 빼앗긴 선왕을 두고 입을 다물고 있으니. 나는 비겁한 인간이란 말인가? [...] 아, 빌어먹을 이 모욕을 감수할 수밖에. [...] 그렇지 않으면 벌써 그 비열한 놈의 시체를 뿌려 하늘의 매가 살찌게 했을 거야. 그 흉악하고 음탕한 악당. 잔인하고 간사하고 추잡한 악당! 아, 복수다! 정말이지 난 얼빠진 놈이야."(99-100)

 이러한 자기반성--정확히는 자기혐오--는 그를 어떤 종류의 실천으로 내몰지만, 거기서도 햄릿은 계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곧 햄릿은 "내가 본 유령은 악마인지도 몰라"라고 의심하며, 허구의 연극을 왕 앞에서 시연함으로써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한다(101). 여기서도 그는 제 복수의 정당성을 재고 있다. 뒤이어 왕이 방백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관객만큼은 햄릿의 복수가 정당하며, 그의 고민이 불필요함을 깨닫는다. 물론 우리의 햄릿은 여전히 복수에 임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 어느 쪽이 더 고상한가? / 가혹한 돌팔매의 화살을 참고 맞는 것과 / 밀려드는 역경에 대항하여 맞서 싸워 끝내는 것 중에."(108)

 햄릿은 아직도 자신의 생존과 이후 잇게 될 왕권을 위해 굴욕을 감수하는 선택지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계속되는 우유부단함의 와중에 그는 그가 이미 함께 잔 것으로 추정되는 오필리어--그녀가 섹스의 정체를 알고 있음은 이후의 광기 어린 노래들에서 자명하다--를 상처 입히며, 연인의 입장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햄릿은 숙부가 혼자 기도를 올리는 사이 그를 암살할 기회를 완전히 놓쳐버리고 만다. 회개하는 이는 지옥에 가지 않기 때문에 최고의 복수가 아니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아니, 이건 좀 생각해 봐야겠는데."(146) 이유에의 민감성이야말로 합리성의 정의일 때에, 이 대사는 햄릿의 활달한 이성이 낳은, 그리고 깊은 우울감에서 동반되는 완벽주의를 보여준다. 다음의 대사에서 드러나는 레어티즈의 태도와는 상반되는 성향이다. 레어티즈에게는 자극과 반응 사이에 사유의 매개 및 그로 인한 망설임이 없다. 

"충성 따윈 지옥으로 떨어져라. / 군신 간의 맹세는 끔찍한 악마에게나 주라지. / 양심이고 신앙이고 지옥 끝으로 곤두박질쳐라. / 난 천벌도 두렵지 않다. 이승이고 저승이고 무슨 소용이야. / 무슨 일이 닥쳐와도 / 내 반드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이오."(189)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햄릿 자신의 입을 통해 우울한 이성은 진정한 이성이 아님을 천명한다. "신은 우리에게 앞뒤를 살필 수 있는 분별력을 주었지만 / 그 능력, 신성한 이성을 쓰지 않고 녹슬게 하라고 준 것이 아니야."(178) 덕--이 경우 용기--와 결합되지 않을 경우, 사유는 올곧은 사유가 되지 못하며 기껏해야 제 주인을 생각들의 미로를 맴돌게 할 뿐이다. 친서 위조를 통한 왕과의 기싸움 이후 이어지는 호레이쇼와 햄릿의 대화가 그 예시다. 햄릿은 호레이쇼의 말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누가 이의를 제기하지도 않았는데도 과장된 자의식 하에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데만 집중한다. 둘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은 햄릿이 현실이 아니라 머릿속 생각의 세계 속에 갇혀있음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호레이쇼: 그러나 길든스턴과 로젠크란츠는 죽었겠군요.
햄릿: 그거야, 그 친구들이 자청한 것이 아닌가? / 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네. / 그 친구들의 파멸은 그들이 초래한 결과니까 말이야. / 하찮은 놈들이 두 거물이 / 주고받는 칼싸움에 끼어든다는 건 위험한 일이지.
호레이쇼: 허, 이런 왕이 있을 수가?
햄릿: 그러니 자네 생각에 내가 임무로써 선왕을 시해하고 / 어머니를 더럽혔으며, 당연히 왕위에 오를 나의 앞날을 막고 / 나의 목숨마저 노리고 온갖 속임수를 쓰는 이놈을 처리하는 것이 완전히 양심에 따른 행위가 아니냔 말이야. [...]"(231)*

*양심의 가책에 마음을 쓰는 햄릿과 달리 숙부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도 "모든 일이 잘되겠지"(146)라고 말할 정도로 뻔뻔하다.

 다행히 레어티즈와의 검술 시합이 제안되자 햄릿은 뒤늦게나마 자신에게 복수의 기회가 왔음을 깨닫고 용기를 낸다. "일찍 죽는 것이 대수인가? / 순리를 따르세."(239)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자신에게 마땅한 선택지를 즉각, 거의 기계적이고 자동적으로 고른 레어티즈는 일종의 모럴 지니어스다. 반면 햄릿처럼 실존적으로 취약한(existentially vulnerable) 존재는 오랜 망설임과 생각을 거쳐야만 비로소 마땅한 선택지, 덕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근거에 대한 합리적 자기의식 없이 선택된 덕은 덕이 아니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레어티즈도, 햄릿도 모두 반쪽짜리 행위자인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극의 끝에 가서 죽음을 맞는다.

 ⟪햄릿⟫이 비극인 이유는 인간성의 핵심을 이루는 바로 그것이 곧 인간에게서 생명(력)을 박탈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합리성야말로 인간을 참다운 인간으로 만들어주지만,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그것이 (덕과 결합되지 않는 한) 곧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한다. 레어티즈는 만약 그가 처음처럼 격정으로 모든 일에 반응했더라면 햄릿을 죽이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미래를 계산하기 시작한 나머지, 합리성을 발휘해 왕의 계략에 동참한 나머지, "내 음모에 내가 다쳐 죽게 되었으니"라 읊조리는 결말을 맞는다(245). 햄릿 역시 만일 사람들이 자신이 유령을 본 것을 믿어주지 않을까 봐 고민하며, 반역죄에 처해지지 않으면서도 복수에 성공할 방법을 찾느라 머리를 굴리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숙부를 죽이고, 어쩌면 대중의 사랑에 힘입어 왕권도 차지했을 수도 있다. 그의 신경증 어린 사유에 연인 오필리어가 희생된 것이 안타깝다. 내가 햄릿에게 너무 가혹한 것일까?


 "연극의 목적이란 예나 지금이나 / 이를테면 자연에 거울을 비추듯이 / 선한 것은 선한 모습 그대로, 추한 것은 추한 대로, / 이 시대와 이 시절의 참다운 모습을 / 명료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네."(118-119) 무대 위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후세계와 유사하게 작동한다. "거기는 속임수가 통하지 않으니 / 만사가 있는 그대로 나타나고 우리가 범한 죄가 / 속속들이 드러나거든."(145-146) 그러나 극은 심판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