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은선, <도움받는 기분>
백은선, ⟪도움받는 기분⟫, 문학과지성사, 2021 화자는 무인 존재가 되고 싶다. 생명을 저주하는 삶이고 싶다. '0'이라는 기호를 동경하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민한다. 절망, 하강, 몰락, 우울에 대한 열정과 그로부터 따라나오는 역설적인 생기로 넘치는 이 시들을, 단순히 모순으로 취급해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떤 독법을 선택해야 할까. 어쩔 줄을 몰라서 그저 읽고 또 읽었다. 잘 와닿지 않은 구절도, 마음을 날카롭게 찌르는 구절도 모두 수용하려 애쓰며 페이지를 끝까지 넘겼다. 그렇게 내내 혼란스러웠던 마음으로, 아픔과 슬픔으로 가득한 이 시집의 끝에 다다랐는데 어째서 나는 '도움받는 기분'을 느낀 것일까? 그 숱한 아픔과 슬픔을 죄다 통과하고도 어째서? 이전에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박하게 평가..
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김연수 옮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혹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 민음사, 2008 제목에 굉장히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단순히 조금은 바보 같고, 위태로운 사랑에 빠졌을 뿐인 카타리나 블룸이 언론에 의해 테러리스트, 창녀, 체제에 위협적인 공산주의자 등으로 낙인 찍히면서 명예를 실추 당하고, 조금의 죄의식도 없이 자신의 아픈 어머니와 자신을 문자 그대로 죽음 또는 적어도 죽음에 가까운 억울한 처지로 내몬 기자 퇴트게스를 살해한다. 황색 저널리즘에 대한 작가의 분노가 거의 투명하다시피 한 인물들과 서사를 곧장 통과해 독자에게 아무런 매개도, 해석의 여지도 없이 전달된다. 아무리 이 글이 '소설'보다는 '이야기' 또는 '팸플릿'으로 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