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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번역

에드문트 후설, <형식 논리학과 초월론적 논리학> §96 (b) '초월론적 유아론의 가상' 번역

E. Husserl (Hrsg. von P. Janssen), Formale und Transzendentale Logik: Versuch einer Kritik der logischen Vernunft, Martinus Nijhoff: den Haag, 1974(Hua XVII), s. 248-249, 모든 강조는 필자.

 초월론적 현상학이 어째서 유아론이 아닌지 후설이 변호하는 대목이다. 그에 따르면 초월론적 현상학은 '나를 위해 주어진(=나에 의해 구성된) 우리를 위한 세계'를 단순히 의식에 대한 해석(Auslegung)을 통해 도달할 뿐이다. 달리 말해, 의식의 구성적 성취를 아프리오리하게 기술하고자 할 뿐, 타인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는 나의 계기에 불과하기에 존재하는 것은 자아뿐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상정(postulieren)과 지시(aufweisen) 사이의 대립이다. 후설은 의식의 구성적 성취를 해석함에 있어 특정한 기준이나 전제를 상정하기보다 "나 자신 자체 속에 놓여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지시의 탐구 방식을 선택한다(Hua XVII, 249). 여기서 그는 첫째, 해석자가 해석에 앞서 기존에 상정된 모든 전제 또는 선입견의 타당성을 괄호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진정하고 단순한 지시란 그와 같은 괄호치기 이후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 그것도 해석자가 자신이 어떤 전제 또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투명한 이해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렇게 믿고 있다(Hua VIII, 156). 해석에 대한 후설의 이 같은 입장들은 순수한 소여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당연시한다는 점에서--그러한 순수성을 보장하는 환원의 가능성을 맹신한다는 점에서--그리고 순수하게 주어진 소여에 대해 마찬가지로 순수한 직관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굉장히 나이브하다. 환원에서 순수 소여에 대한 직관으로 이어지는 후설의 해석론에 대해서는 다소간 분석철학적인 성격을 띠는 엄격한 비판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248] §96 (b) 초월론적 유아론의 가상.

 객관적 세계의 구성이라는 다단계의 문제설정 전체가 동시에 말하자면 초월론적인 가상의 해소라는 문제설정과 같다는 점은 거의 말해질 필요가 없다. 초월론적 가상은 이전에 일관적인 초월론적 철학에 착수하고자 한 모든 시도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며, 대부분의 경우 마비시켰다(zumeist lähmt). [초월론적 가상이란] 초월론적 철학은 필연적으로 초월론적 유아론으로 이끌어질 수밖에 없다는 가상이다. 만일 나에 대해[나를 위해] 존재타당성을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이 나의 자아 속에서 구성된다면, 실제로 모든 존재자가 내 고유한 초월론적 존재의 한갓된 계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수수께끼의 해소구성적 문제설정의 체계적인 전개(Aufwicklung) 속에 놓여 있다. 구성적 문제설정은 나에 대해[나를 위해] 항상 거기 존재하는, 항상 나의 경험으로부터 의미를 가지고 의미를 보존하는 세계에 대한 의식사실 속에 놓여있으며 그리하여(dann) 체계적인 등급(Stufenfolge)에 따라서 전진하는 지시들 속에 놓여 있다. 그 지시들의 목표(Absehen)는 그런데 이러한 의식사실 자체 속에 포함된, 그 속에서 세계라는 의미가 [249] 내재적으로 건립되었고(aufbauen) 앞으로도 건립되는 삶의 현행성들과 잠재성들(또는 습성들)을 현실적으로 개시하는(aufschließen)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다른 것일 수 없다. 세계는 지속적으로 우리를 위해 거기 있지만, 우선 나를 위해 거기 있다. 이때 나를 위해 거기 있는 것은 또한 이것[다음과 같은 것](dies)이고 오직 그로써(daher) 그것은 나를 위해 의미를 가지는데, [바로] 세계가 우리를 위해 거기 있으며 하나의 동일한 것으로서[,] 그리고 이러저러하게 상정된(postulieren)--그리고 이를테면 이성과 감정의 관심 [사이]의 화해에 완전히(gar) 걸맞게(passend) '풀이된(interpretieren)'--의미의 세계로서가 아니라 우선 그리고 최초의 근원성 속에서 경험 자체로부터 꺼내져 해석되어야 하는(herauslegen) 의미의 세계로서 [거기 있다는 것이다.] 최초의 것은[가장 일차적인 것은] 그러므로 경험세계를 순수하게 그 자체로 탐문함이다. 세계경험의 진행 속에 완전히 몸담고 살아가면서(sich einleben) 그리고 세계경험의 일관적인 충족의 모든 열린 가능성들 속에서, 이때 나는 시선을 경험된 것과 그것의 보편적인, 형상적으로 포착되는 의미구조들에 겨눈다. 이로부터 이끌어내지는(geleitet) 것은 그러면 되돌아가 물어지는데, 이러한 존재의미 및 그것의 단계들을 위해 의미를 구성하는 현행성들과 잠재성들의 형태들과 내용물들에 따라서 그렇다. 이때 다시금 아무것도 상정되어선 안 되며 [무언가에] '걸맞게' '풀이'되어선 안 되고, 도리어 지시되어야 한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 저 궁극적인, 궁극적인 것으로서 그 배후에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유의미하게 따지고(erfragen) 이해할 것이 없는 그런 세계이해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러한 순전히 구체적인 해석의 진행 속에서 유아론의 초월론적 가상이 버틸 수나 있는가(standhalten)? 그것은 오직 해석의 이전에만 등장할 수 있는 가상이 아닌가? 왜냐하면, 말해진 것처럼, 타인의 그리고 타인을 위한 세계의 [의미가짐, 그것도] 나 자신 속에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의 의미가짐(Sinnhaben)이 [내 의식 속에] 사실로서 미리 놓여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여기서는 그러므로 [어떤] 사실, 즉 나 자신 자체 속에 놓여있는 것을 밝혀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주제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D씨: 과연 후설이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목표로 삼는 '무전제성'이 정말 아무런 전제도 없는 백지 상태를 말하는가?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은 이남인(2012)에서 변호된 것처럼, 그저 태도 변경으로서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vs 나: 신비로운 절차가 아니라는 데 대해서는 이남인(2012)과 동의하지만,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이 쉽다는 데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 경우 환원의 수행의 어려움에 대한 후설의 서술들 및 환원의 철학사적 혁신성과 충돌한다. '세계-존재'에 대한 믿음 중지가 가능하다는 것은 언어--저 단어의 단순성--가 주는 착각이다. 실제로 환원 대상이 되는 것은 무한에 가까운 개수의 개별 사태들이다. 그것들에 대해 모르는 채로 한꺼번에 환원을 수행할 수 있는가? vs D씨: 판단중지의 개별 대상이 모두 투명하게 인지될 필요가 있는가? 판단중지의 대상의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 무관심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그 무관심이 명시적일 필요는 없다. vs 나: 무관심이 명시적이지 않다면 정말 내가 무관심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