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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장 이뽈리뜨, <헤겔의 정신현상학 II> '자기확신적 정신' 발췌 및 메모

장 이뽈리뜨, 이종철 역, ⟪헤겔의 정신현상학 II⟫, 문예출판사, 2014

  
매일의 일상 

 6월에는 헤겔의 용서 개념을 탐구해보고 싶다. 이폴리트의 표현들 중 인상깊었던 구절들을 발췌 및 필사하면서 탐구를 개시하련다. 지금 헤겔을 가르쳐주시는 교수님께서는 이폴리트의 헤겔 해석을 거의 신성시하시는데--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들린다--솔직히 입문자 입장에서는 독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홀게이트의 쉬운 대신 간략한 해설서보다는 훨씬 구체적이고 복잡한 논의들까지 포괄하고 있어서, 가장 어려운 원문을 보기 전에 뇌를 고뇌에 적응시켜주는 기능이 있다.


1. 양심 일반

 "정신은 더 이상 실체가 아니고 오히려 전적으로 자기 자신 속으로 복귀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정신은 총체적인 견지에서 주체가 된 것이다. 모름지기 이러한 것이 양심(Gewissen)으로서의 자기가 표현했던 것인 자기확신적 정신이다."(214, 강조는 원저자)

➔ 정신은 이제 그 자신의 대상을 자신 바깥에서 찾는 자기소외의 상태에서 벗어났다. 정신은 주체일 뿐 아니라 사실상 자신의 대상과 신념까지도 스스로에게서 끌어내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거나 또는 심판하기에 이른다.

 "'사상[사태] 자체'의 개념[...]은 우리가 그것이 각인과 만인의 작품, 즉 인간에 의해 정립된 바로서의 실재, 따라서 단순히 발견된 자연의 사물로서의 사물(Ding)을 대체했던 실재와 동일시됨을 볼 때 비로소 우리에게 그 충분한 의미를 보장했다. 이 인간 작품은 인륜적 정신 속에서, 가족과 민족 속에서, 사회적 유기체 속에서 [...] 그 실체성을 획득했다. 그리하여 그것은 교양의 세계[...]에서 권력, 부, 천국, 유용성, 일반의지 등의 형태로 외적 실존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상 자체'는 술어라고 하는 특성을 상실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행동하는' 주어(주체)가 되었던 것이다. [...] 정신은 자신의 역사를 창출하는 인간 주체가 되었다. 정신은 더 이상 보편자를 그 자신의 밖에 지니지 않으며, 더 이상 우주에 대립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것을 자체 내에 담지, 흡수해 버린다. 정신은 자유로운 주체이다."(215, 강조는 원저자, 밑줄은 필자)

➔ 개인이 공동체와의 즉자적, 무매개적 통일의 상태로부터 자발적 외화 또는 비자발적 소외를 거쳐, 이제는 외화의 산물이나 타자들에게 좌지우지되는 대타적 존재에 머물지 않고 대자적, 자기인식하는 존재가 된 정신에 대한 깔끔한 서술이라고 느꼈다. 이뽈리뜨의 말마따나, "모든 생은 근원적인 직접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분열과 매개의 시기를 거친 후에 이 직접성으로 복귀하는 식으로 생성, 전개된다."(223)

 "개별자란 그 행동이 언제나 유한한 행동인, 즉 그 자신의 자유 속에서 한계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고 그리하여 자체 내에서, 즉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된 그 자신의 특수한 견해 속에서 악 자체를 발견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행동하는 의식이다. 여기서 보편자는 판단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행동하는 의식과 대립되어 그 자신의 한계, 즉 행동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한낱 판단한다는 사실 속에 놓여 있는 한계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판단하는 의식죄 짓는 의식은 자기의식의 두 가지 형태인데 그들은 주인과 노예나 혹은 고귀한 의식과 비천한 의식의 그것처럼 그들 상호간의 역할을 교환한다. 그러나 이 변증법에서 정신은 자체 내에서 악과 화해하여 절대정신이 된다. [...] 그러므로 정신이 자기 자신을 절대정신으로 파악하는 것은 모름지기 이와 같은 지양(Aufhebung) 속에서, 즉 죄의 의식 속에서가 아니라 죄에 대한 용서의 의식 속에서이다."(217, 강조는 원저자, 밑줄은 필자)

➔ ⟪법철학⟫에서도 양심을 가지고 행위하는 개별자는 자신만의 상대적이고, 특수한 신념에 불과한 것을 절대적, 보편적 진리로 간주함으로써 필연적으로 악을 범한다고 주장된다. 행위의 구체적인 내용이나 그것이 야기할 결과와 무관하게, 행위가 도출되는 형식적 과정 가운데서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로부터의 절연 또는 단절이 발생하기 때문이다(이폴리트의 234쪽 서술도 참고). 한편 아무런 행위에도 임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위 '고매함'과 '순수함'을 유지한 채 다른 행위하는 개인들을 단죄하는 의식도 악하기는 마찬가지다. 그 둘이 상대의 고백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용서할 때 비로소 정신은 절대정신이 된다[절대정신으로 스스로를 의식한다].

Q. 여기서 "보편자는 판단하는 의식"인 이유가 뭔가? 왜 판단하는 의식이 보편자인가?


2. 행동하는 양심[양심적 행위자]와 양심의 언어

 "인간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에 구속되어 있다. 그의 개체성은 경험적인 존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는 여기나 혹은 저기에서 실존한다(Dasein)."(218)

➔ 이폴리트는 헤겔의 양심적 행위자를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하며, "양심을 야스퍼스가 말하는 실존의 '역사성'과 비교할 수 있다고 믿는다. [...] 그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자기란 이미 자신의 역사성을 담지한 실존이다."(219, 강조는 원저자)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절대적으로 순수한 의무를 고집하는 칸트의 도덕적 의식은 "완벽한 실천 불능"의 상태를 맞는다(221). 정언명령을 통한 도덕법칙의 도출은 철저히 형식주의적이어서, 아무런 구체적인 내용도 규정하지 못하거나 서로 모순되는 내용을 동시에 허락하기 때문이다. 반면 양심적 자기의식은 자신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이 확신하는 도덕을 행하는 의식이다. 즉 역사와 상황을 초월하지 않고 그 안에 뿌리 내리고 있다.

 "헤겔적인 언어로 표현하자면, [크레온이나 안티고네와 같은] 인륜적 정신은 전적으로 진리이지만 절대적인 자기확신은 결여했던 것이다. 양심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순수히 자기확신이다. 그것은 법, 참된 질서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근원적인 사실로서의 자기의 자유, 모든 결단의 원천이다. 안티고네는 그녀가 따랐던 법의 기원을 알지 못했다. [...] 현실적인 자기는 그것이 실체적 정신, 즉 희랍의 도시 국가 내지 가족의 습속을 박차고 나올 때 비로소 일체를 자기 자신 속에 장악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현실적 자기는 어떤 것이 그 자신의 내면적 확신, 그 자신의 신념과 무관하게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224, 강조는 원저자, 밑줄은 필자)

➔ 부모님의 품을 떠나는 사춘기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사춘기 시절의 나도.

 "자기는 단독으로 결정하며, 오직 단독으로서만 결정한다. [...] 궁극적으로 볼 때 이러한 자유는 자의(Willkür)일 것이다. 바로 여기서 선한 의식(Gewissen)은 그것이 아직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바로서의 악한 의식임을 발견한다. 선한 의식은 자신의 유한성을 자각할 것이며, 죄책감 곧 어쩔 수 없는 죄의식을 지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돌만이 순진무구하기 때문이다.'"(225, 강조는 원저자, 밑줄은 필자)

➔ 헤겔이 기독교적 원죄론을 접하지 않았더라도 이와 같은 통찰을 낳을 수 있었을까 궁금하다.

 "보편성은 신념이 자기의식들간의 관계를 전제하는 한에서 바로 이 신념이다. 내가 신념을 가질 때, 나는 나의 신념이 나 자신에 대한 것 못지 않게 타인들에 대해서도 타당하다고 전제한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신념에 대한 인정을 모색하거나 요구하는 것이다. [...] 추상적 보편자가 구체적 보편자로 되고 행동하는 자기를 초월해 있는 의무가 인간 공동체로서의 보편적인 자기의식으로 된다."(231, 강조는 원저자, 밑줄은 필자)

 "신념은 즉자적으로 보편적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나의 지[앎] 속에서 그들 자신을 확인,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사태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가정된 일치는 사실상 분열되어 있다."(235, 강조는 필자)

 "그러면 무엇이 자기의 표현의 참다운 양태, 즉 만인에 의해 감지될 수 있는 객관적인 것인 동시에 이 객관성에도 불구하고 자체 내에 자기의 주관성을 보존하는 그런 양태가 될 수 있는가? [...] 보편적 자기로서의 자기의 현존재는 오직 언어, 곧 로고스가 될 수 있을 뿐이다. [...] 언어는 보편자를 진술하며, 또한 스스로에게 감각적인 현재성을 부여한다. 언어는 정신의 진정한 표현이다. [...] 그 내면적인 신념 속에서 스스로에 대해 확신하는 자기를 보편화하는 것은 오직 언어뿐이다."(236-7, 강조는 필자) 

cf.  "의식은 신념을 진술하는 언어 속에서만 현존재가 개별적인 동시에 보편적임을, 즉 만인의 자기동일성임을 발견할 것이다. 행동하는 개별적 의식은 이 신념의 언어 속에서 보편적 의식이 될 것이다."(233)

Q. 언어로써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양심적 행위자로부터 관조자에 불과한 아름다운 영혼에 이르는 경로가 서술되어있지 않다. 하나의 주체가 행위에서 성찰로 이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두 종류의 주체가 공존하는 것인가? 전개상으로는 후자여야 할 것 같은데 헷갈린다.


3. 아름다운 영혼

 "[...] 이 자기의식[아름다운 영혼]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외화시키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즉 규정되고 외면적인 내용을 개념에 부여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성의 진공 속으로 침잠하여 그 어떤 적극적 행동도 펼칠 수 없게 된다."(239)

 "[헤겔의] 초기 저작들에 나타난 아름다운 영혼은 그 순수성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운명과 대면하기를 거부했다. [...] 세계로부터의 그의 분리는 그의 운명이었다. 최대의 결백은 최대의 악과 양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제시된 아름다운 영혼의 소묘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면서도 우리가 방금 묘사했던 특징들을 간직하고 있다. 아름다운 영혼은 여전히 '세계로부터의 도피, 세계 속에서의 행동의 거부, 즉 자기상실로 끝나고 마는 거부'에 다름 아니다."(242)

Q. 아름다운 영혼은 어째서 "신적인 것에 대한 직관"이자 다만 대상과 외화력(die Kraft der Entäußerung), 실재를 상실한 "절대적인 자기의식"인가?(242)

A. 아름다운 영혼은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구체성과 특수성[개별성?]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행동의 편파성에 반대"(244)하기에 그 어떤 유한한 행위의 궤적 속으로도 자신을 가두지 않으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무한한 정신, 신적인 직관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확신하는 자아의 이 두 가지 형식[아름다운 영혼과 양심]은 서로가 그 한계를 인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행동하는 의식은 자체 내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의 유한성에 의해 함의된 죄를 발견해야만 하고, 또한 보편적 자기의식은 이 동일한 유한성을 유한자로부터 그의 분리 속에서 자각해야만 한다. 유한한 정신과 무한한 정신--그러나 이는 유한자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에 악무한이다--의 이와 같은 화해가 정신의 최상의 변증법이다."(244, 강조는 필자)


4. 악과 용서

 "[...] 이 두 형태는 양심으로부터, 내적인 자기확신으로부터 전개된다. 그것들은 그것들의 공통원천을 개별적이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보편적이고, 직접지이면서도 그에 못지 않게 순수지인 이 확신 속에 지니고 있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행동하는 정신인데, 이 정신은 존재 속에서 자신의 현실성을 행동으로서 정립하여 그 행동의 정당성을 직접적으로 확신한다. 다른 하나는 아름다운 영혼으로서, 이 영혼은 점차적으로 행동의 특정한 내용을 포기하면서 자신의 생이 분쇄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순수한 주관성 속에서 자아의 보편성을 언표한다."(245, 강조는 원저자, 밑줄은 필자)

➔ 예전에 'xx씨는 흰 운동화를 신고 거기에 진흙이 묻을까 두려워서 바깥에 나가지 않는 아이 같아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생이 분쇄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이뽈리뜨의 표현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던 이유다. 나는 아름다운 영혼의 아름다움에도, 그 추함에도 모두 공감한다. 

 "실존에는 일정한 편협성이 있다. 이 편협성이 실존의 심원성을 이루기도 하지만 실존에는 엄밀히 말해서 이 편협성과 결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근원적인 자유, 즉 우리가 정확히 [그] 위상을 설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근본적인 자유와 결부된 죄의식이 수반되고 있다. [...] 행동하는 정신이 그 자신의 말들 속에서 언표하는 보편성과 그의 행동의 특수한 내용 간의 대비는 마침내 그 자신에게 현시되어, 정신은 자기 스스로 그 자신의 내면 속에 들어 있는 악을 의식하게 되는, 말하자면 죄 지은 의식이 되는 것이다."(247, 강조는 원저자, 밑줄은 필자)

➔ 헤겔은 양심적 행위자가 보편성을 표방하는 언어와 특수하기 그지없는 행위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자신의 죄스러움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와 같은 깨달음에 이를 만큼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나는 만약 사람이 세상에 발을 내딛기 위해선 편협해질 수밖에 없는 거라면 적어도 내가 편협하다는 것을 알기는 하자고 다짐한다. 그런 동시에 그 편협함에 대해 지나치게 자책하지 않을 필요성도 인지하고 있다. 언젠가 '그 어떤 사소한 행위에도 윤리적인 함축이 있고 따라서 잘못이 될 가능성이 있으니 삶에 대해 너무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는 조언을 Y가 해주어서 무척 고마웠던 적이 있다. 죄됨 또는 죄스러움은 매우 특별하고 드문 사건, 현저히 돌출되는 사건이 아니라 평범한 데다 비일비재하기까지 하다는 말로 이해됐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장 지저분한 밑바닥을 기는 유해한 벌레의 지위로부터 그저 존재할 뿐인 사람으로 격상된, 한 순간에 회복된 느낌이 들었었다. 그러니 ⟪정신현상학⟫에서 자기확신적 정신에 대한 논의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내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헤겔은 내 삶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이제 낡았는가 하면 새로운 얼굴로 되돌아오는, 영원히 회귀하다시피 하는 고민을 덤덤하면서도 진정성을 담아 대신 서술해주었다. 심지어는 나를 간접적으로 용서해줌으로써 위로해준 것이다.

 "악에 대한 의식은 따라서 행동상의 유한성과 내재적인 요구인 자기의식들 간의 상호인정의 지반 사이의 대립과 연관되어 있다. 나는 나의 신념을 타인들에게 언표함으로써 보편자를 인정한다. 그리고 나서는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자의적으로 격상시킨 나의 위선에 대한] 판단을 기다린다."(248, 강조는 원저자)

 "[...] 심판하는 의식의 형식에서의 보편적 의식은 그가 심판하고자 하는 죄 지은 의식과 동일한 것으로서 우리에게[철학자 또는 현상학자에게] 드러난다. [...] 그가 위선을 악으로 낙인 찍을 때, 그는 사악한 의식이 스스로를 그 자신의 법칙 위에 정초시켰던 것처럼 그의 판단을 그 자신의 법칙 위에 정초시킨다. 다시 말해서 그의 열의는 이미 그가 행하고 있고 생각하는 것의 정반대를 수행하는 것이다. [...] 이 의식은 그 자신이 악하고 편파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행동하는 의식이 [자신의 악을] 고백하게 되는 것은, 다시 말해서 또 다른 고백을 기대하는 하나의 고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완전히 타인에게 열어 보이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 속에 들어 있는 위선을 자각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실제로 악에 반대함으로써 그는 행동하는 대신에 심판하며 이러한 비실제적인 판단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잘못] 간주한다. 그는 판단행위가 현실적인 행위로 취급되기를 바라는 위선에 다름 아니다."(248-9, 강조는 원저자)

Q. 아름다운 영혼의 판단은 어째서 행위가 될 수 없는가? 그도 자신의 판단을 통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유한성과 편협함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행위'란 '보편적 옳음이 되기를 주장하는 행위'란 의미일까?

 "인간의 행동이란 개체성에 대한 제한된 표현이며, 이러한 한계 내에서 그것은 열정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 개체성을 통해 행동하는 정신의 표현이며, 그 점에서 그것은 보편적 행동인 것이다. 심판하는 의식은 구체적이며 생동적인 전체를 파괴시킨다. [...] 위인의 행위 속에서, 그는 행동의 한 계기에 지나지 않는 불순한 동기만을 끄집어 내어 비난한다."(250, 강조는 원저자)

➔ 자신은 무조건적으로 옳다는 가정 하에 타인을 무조건적으로 단죄하는 사람들, 사람인 주제에 스스로를 신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내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깨닫게 해준 구절이다. (이렇게 쓰고는 아, 내가 이렇게 공격적인 문장도 쓰는구나 싶어 흠칫 놀란다.)

 "그가 거울 속에서처럼 자신을 판단하는 의식 속에서 그 자신을 볼 때, 행동에 관여된 의식은 자기 자신 속에 들어 있는 악을 인정하고 그 자신에게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 둔다. 악을 용납한다는 것은 다른 자아와 그 자신의 자아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그는 동일한 용납을 기대하는데, 이는 그들 상호간의 동일성을 표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판단하는 의식은 자신의 판단을 고집한다. 그는 이와 같은 고립에의 절대적 의지, 이와 같은 타인들과의 연속성을 단절을 고수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악으로 확증하는 '냉혹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 그러나 이제는 동등성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냉혹한 마음을 해체시켜 그것을 보편성에로 고양시키는 것은 고백하는 의식을 통해 이미* 표현된 동일한 운동이다.' 따라서 용서의 '예'는 화해의 말이요, 자아의 다른 자아 속에서의 인정--이와 같은 상호교환 속에서 절대정신을 현현시키는 죄의 용서--이다. 절대정신은 결코 유한한 정신에 대립된 추상적인 무한한 정신이나 자신의 유한성을 고집하여 언제나 자신의 타자로서의 차안에 남아 있는 유한한 정신이 아니다. 절대정신은 이 두 자아의 통일이며 대립인 것이다. 따라서 자아=자아라는 등식은, 만일 우리가 그 동일성 못지 않게 그 이원성을 강조한다면, 모름지기 그 구체적인 의미 전체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251 강조는 원저자, 밑줄은 필자)

➔ 데리다는 ⟪용서하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출간된 강의록에서 헤겔의 용서 개념이 타자들 사이의 '동일성'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을 생각하면, 그리고 사태 자체를 생각해도 잘못된 비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Q. 저 '이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냉혹한 마음은 어쩌다 화해를 결심하게 되는가?

 "정신의 참다운 무한성, 그 구체적인 무한성은 이와 같은 타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신은 인간적인 유한성과 인간적인 고통을 무시할 수가 없다. 반대로 유한한 정신은 한계 속에 갇혀 있지가 않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또한 부단히 그 자신의 초월을 향해 추동된다. 바로 이 초월행위야말로 정신의 유한성에 대한 가능한 치유이다."(254)

 "신은 인간의 역서 너머에 초월적인 심판자로서 정립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인간의 역사 자체가 신의 게시인 것이다. 죄의 용서라고 하는 테제에서 시작한 경험의 새로운 분야, 즉 탐구해야 할 인간 경험의 새로운 차원이 우리에게 열려 있다. 이것이 종교의 주제가 될 것이다. 절대정신은 우리에게 현시된다. 따라서 종교의 현상학이 연구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절대정신의 현현인 것이다."(256-7, 강조는 원저자)

➔ 이뽈리뜨는 유한자 내에 자리한 무한자의 가능성을 죄 지은 자 내의 성령으로 해석하며 어째서 ⟪정신현상학⟫이 이 대목에서 종교라는 주제로 이행하는지 해설하고자 한다.

Q. 용서에서 정신의 절대정신으로서의 자기의식으로 가는 구체적 경로를 여전히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언니가 떡볶이를 시켰다고 한다. 그러니 오후 공부는 여기까지!!! 원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궁금한 지점들이 대강 정리돼서 기분이 좋다. 밤에는 이리가레에 대한 발표를 하나 듣고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를 마저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