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G.W.F. 헤겔, <정신현상학>, §486-536(서문 및 A. 자기소외된 정신의 세계) 요약

G.W.F. 헤겔, 임석진 옮김, ⟪정신현상학⟫, 지식산업사, 1988. 발제를 위해 작성했으며, 사진은 한길사에서 2005년에 나온 판본으로 찍었다.


자기소외된 정신 - 서문, A. 자기소외된 정신의 세계

 의식의 추상적 형태들을 논했던 이전의 장들과 달리 ‘정신’ 장은 구체적인 역사를 사는 개별 자기의식적 주체들의 운동을 그려내고, 이 과정에서 세계 자체의 주체성 또는 자기의식을 주제화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헤겔이 실체 자체가 주체가 되는 양상을 그리려 한다고 독해할 수 있다. ‘정신’ 장은 ①그리스 도시국가와 로마 제국에서 각각 구현되고 상실됐던 ‘참다운 정신’, ②봉건주의에서 출발해 절대군주제, 자본주의의 도래 및 프랑스 혁명기까지를 느슨하게나마 반영한 ‘자기소외된 정신’, ③개인의 자유를 강조한 칸트 철학 및 독일 낭만주의 운동을 겨냥한 ‘자기확신하는 정신’의 장으로 나뉜다. 본 발제문은 ②자기소외된 정신 장 가운데서도 계몽의 시간이 도래하기 이전만을 다룬다. 별도의 출처 표기 없이 페이지 수만 명시한 경우, 지식산업사에서 출간한 ⟪정신현상학⟫(임석진 역, 1989)의 인용임을 밝힌다.

 

서문(597-601)

 법률의 세계에서 비롯한 소외는 교양의 세계에까지도 이어진다. 주체에게 소외의 본질은 “[자신]들의 삶의 실체가 [자신]들 외부에 놓여 있다[…]는 감각”이다(찰스 테일러, 정대성 옮김, ⟪헤겔⟫, 그린비, 2014, p.333). 다만, 이 새로운 세계의 자기의식적 주체들은 자신들의 소외를 도야[교육, 문화Bildung]의 동력으로 삼아 스스로를 지성적, 정치적, 경제적 문명 일반에 적응시키고자 한다. 자신에게 타자로 다가오는 세계, 그 안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없는 전체와 통일되기 위해 기존의 자연적인 자기를 부정하고자—스스로를 ‘외화*’시키고자—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도야가 자기부정을 필수불가결한 계기로 내포하기 때문에 도야에 뛰어든 자기의식적 주체들의 주관적 정신, 나아가 그들이 이루는 객관적 “정신은 오직 자기 자신을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서만 즉 자기소외된 것으로서만 생각할 수 있다.”(장 이폴리트, 이종철 옮김, ⟪헤겔 정신현상학 II⟫, 2014, p.77) 그리하여 자기소외된 정신의 세계는 참다운 정신의 세계가 보여줬던 “조화로운 총체(성)”을 결여한, “분열되고 양분된 세계”다(장 이폴리트(2014), 75). 헤겔은 참다운 정신의 세계에서는 의식[시민]과 실체[그리스의 도시국가]가 직접적으로 매개 없이 통일되어있었기 때문에 “배타적[독자적] 자기”도 “배타적[독자적] 현존재”도 성립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서문을 시작한다(598). 오히려 저 통일의 해체, 즉 소외를 경유해서만 비로소 실체는 독자적인 현존재로서 조성되고, 개별적인 자기도 현실화되어 실체와 진정한 합일에 이를 수 있다. 법률의 세계 이후로 현실은 자기의식적 주체들에게 외부적이고, 폭력적이며 그들에게 소원한 것으로서 다가왔다고 앞서 지적한 바 있는데, 사실 이러한 소외 또는 외화는 정신적 실체를 형성할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자기의식적 주체들 자신을 존립시켜주는 힘이기도 하다. 요컨대 정신의 이 새로운 단계에서 자기와 실체는 상호간에 소외되어있으면서도 바로 그 특유한 양상 하에서 서로를 현실화한다. 이에 따라 자기의식적 주체는 둘로 이분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자기의식적 주체는 “독자적 존재로서의 대상적인 현실에 대한 의식” 즉 자신을 소외시키는 현실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현실적 의식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의식적 주체는 사유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본질 사이의 내밀한 합일을 꾀하는—대상적 현실로 뻗어나가기보다,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에게 머무르고자 하는—순수의식이기도 하다.

*‘소외(Entfremdung)’와 ‘외화(Entässerung)’의 차이에 대해서는 장 이폴리트, 이종철 옮김, ⟪헤겔 정신현상학 II⟫, 2014, p.84의 각주 10번을 참고할 것. 후자는 자연적 자기의 포기와 외적 표출만을 지칭하지만 전자는 “그것이 스스로에게 소원해지는 것까지도 함축하고 있다.”

 상술한 이원론은 자기소외된 정신에 관한 논의 전체를 지배하며, 의식의 분화에 따라 정신 또한 “서로 분리 내지는 대립된 이중의 세계”를 이룬다(599). 현실적 의식은 문화와 교양의 세계를 이루고, 순수의식은 문화와 교양세계의 무상성을 깨닫고 피안의 세계를 사유한다. 이때 순수의식은 신앙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순수의식은 이처럼 신앙으로서 피안으로의 도피를 갈구하며 차안의 세계 자체를 소외에 빠뜨리는가 하면, 스스로에게 복귀해 차안세계의 모든 것에서 자신만을 발견하는 보편적 자기로 고양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보편적 자기로 고양된 순수 통찰은 “일체의 대상성을 배제, 제거하여 마침내 모든 즉자적[그 자체로 있는] 존재를 대자적[자신에 대한] 존재로 변화”시킨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의 주지주의적 관점에서 탐욕스럽게 소화해버린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그러한 순수 통찰은 신앙을 비판하면서 “계몽의 역할을 떠맡게” 된다. 그러나 계몽은 그 전개의 과정에서 현실을 오직 “유용한 것(das Nützliche)”들로만 환원시키는, 흡사 공리주의적인 입장에 섬으로써 자신이 비판한 신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그것의 진상으로부터 소외시킨다. 그럼에도 계몽이 초래한 세계의 전복, 즉 혁명은 “절대적 자유”를 낳음으로써 “소외됐던 정신[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복귀”하게 해 자기의 회복 재발견을 도모한다(601). 모든 외화를 극복한 “자기[는] 스스로를 보편자에 결부시키”며, 자기소외된 정신이 거주하는 교양의 세계로부터 자기확신하는 정신이 거주하는 도덕적 의식의 세계로 현상학자의 시선을 이동시킨다(장 이폴리트(2014), 78 및 83 참조).

 이상이 A, B, C 절을 통해 헤겔이 그려낼 교양세계의 머리와 꼬리의 윤곽이다. 필자는 장 이폴리트의 다음 서술이 이상의 전개가 가진 정수를 표현해낸다고 생각한다. “생은 오직 자기대립을 통해서만 발전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소박한 통일[…]로부터 시작하여 오직 분리와 대립의 계기를 거치고 나서야만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 어떠한 생성의 경우이든 그 첫 번째 계기는 직접성의 곧 자연의 계기이다. 즉 그것은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될 계기이다. […] 말하자면 자기는 오직 그 대립—형성, 도야로서의 외화를 통해서만 그 자신의 보편성을 획득할 수가 있다.”(장 이폴리트(2014), 85, 강조는 필자)


자기소외된 정신의 세계

(i) 고귀한 의식과 비천한 의식

 헤겔은 거듭, “자기의식이 스스로의 인격성을 외화함으로써 그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는 운동”에 대해 강조한다. 여기서 외화[Entäußerung]란 직접적으로 인륜적 실체와 밀착되어있던 “자연적 상태를 벗어던짐으로써 자연적 존재로부터 소외되고자 하는” 행위이자 교양을 쌓는 행위다(604). 이 외화 가운데서만 비로소 자기의식적 주체는 현실성과 타당성을 획득하는데, 이는 자연적 존재만으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행위를 통해서 [획득]된 것”이기 때문에 외화하는 자기의식적 주체는 법률의 세계에서의 사적 인격체보다 말하자면 훨씬 존엄한 지위를 누린다(603). 그리고 “스스로 교양을 쌓아 가는 개체성이 펴 나가는 운동은 곧바로 일반적인 대상적 본질로서의 실체의 생성, 즉 현실적인 세계의 생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605) 요컨대 교양 쌓기 또는 도야라는 자기부정을 매개로 개체성과 실체 모두가 존립하게 된다.

 그러나 부정이 곧 이 모든 지속과 존립, 곧 긍정의 근원이기 때문에 “도대체 현존하는 것은 […] 저마다가 지닌 특성을 바로 그 자신과 반대되는 것으로 전도[시키]게 마련이니, 오직 이러한 소외만이 그 자신의 본질을 이루며 동시에 그를 보존하는 것이기도 하다.”(607) 헤겔의 이 의미심장한 문장은 A절 전체의 전개를 예고해준다. 추후 상술하겠으나, 교양과 문화의 세계는 그 자체로 분열되고 혼란스러운 역사철학적 시공이다. 해당 세계의 현실을 지탱하는 권력은 절대적인 동시에 무력하고—정확히 말하면 절대적이기 때문에 무력하고—부는 감사의 대상인 동시에 경멸의 대상이다. 또한 서로의 사이에 심연이 놓여있는 듯했던 고귀한 존재들은 비참한 존재들과 어느덧 구별이 불가능해지며, 순수한 봉사의 언어는 이기적인 아첨의 언어로 전도된다. 여기서 우리는 주로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란 프레이즈로 흔히 요약되는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를 엿볼 수 있다. 어떤 것은 끝내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가진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이 비동일성 또는 차이야말로 각 항의 자기동일성을 존립시킴 역시 밝혀지고, 이상의 모순은 결국 해당 모순이 지양된 새로운 형태로의 고양 및 보다 진정한 자기의식, 자신의 ‘정체성[Identität]’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헤겔은 이어서 각 자기의식적 주체들의 도야를 통해 실체화된 전체 세계가 순수의식에게, 그리고 현실적 의식에게 각각 어떻게 수용되는지 나눠 살펴본다. 먼저 순수의식은 자신과 동일한 것은 선[좋은 것, das Gute]으로,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은 악[나쁜 것, das Schlechte]으로 판단한다. “이것은 도덕적인 선과 악간의 구별로 이해되서는 안 된다. […] 그것들은 순수의식 속에서 단지 한 항의 다른 항으로의 전화의 완전한 불가능성, 근본적인 분리의 필연성, 매개 불가능한 이원론의 필연성만을 표현한다.”(장 이폴리트(2014), 91) 이와 같은 판단의 기준은 구체적 현실에서 국가권력과 에 대한 판단에 적용된다. 헤겔에 따르면 순수의식은 처음엔 국가권력을 선으로, 부를 악으로 판단한다. “만인에 의한 노력의 결과”인 국가권력을 통해 자기의식적 주체는 “자신의 본질이 [그곳에서] 표명되어 있음을 알아차리거니와 […] 그들 자신의 보편성에 대한 의식”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의식적 주체의 행위를 통해 국가가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는 “객관적인 존재의 성격”을 취하게 되면 “어느덧 이것은 타자를 위한 존재로 변모되어 […] 이미 직접적으로 그 자신에게 반대되는 다름아닌 부를 의미하게 된다. 물론 부가 단지 피동적이며 무가치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것 역시 보편적인 정신적 실체이며 동시에 만인의 노동과 행위로부터 지속적으로 생성되어 가는 결과”다. 개인은 이기심을 발휘하는 가운데, 즉 “스스로 향유를 누리는 가운데 만인에게 향유를 누리도록 해 주는가 하면 또한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도 […] 만인을 위해 노동하는가 하면 또한 만인을 그를 위하여 노동한다”(611). 여기서도 우리는 국가권력이 그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전도되는, 둘 사이의 대립이 소멸되는 변증법적 운동을 엿볼 수 있다.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순수의식의 판단 역시 결국은, 처음에서와 달리 두 가지 양상으로—“이중적인 양식으로(612)”—이루어짐을 예견할 수 있다. 홀게이트에 따르면 그 가능성은 다음과 같이 정리되며, 실제로 이후 순수의식이 권력을 도리어 억압으로, 부를 모두를 포용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가능성이 논의된다(614-615).

판단의 관점﹅ 현실의 계기 국가권력 유사한 인륜적 실체
개인적 향유 추구 [자유주의, 개인주의 사회]
보편적 근거 추구 [사회주의, 공동체주의 사회]

(스티븐 홀게이트, 이종철 옮김, ⟪헤겔의 정신현상학 입문⟫, 서광사, 2019, p.242 참고해 도표화.)

 물론 순수의식에게 국가권력과 부는 “한낱 대상으로 주어진 데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는 “그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관점을 취하든지 간에 국가권력과 부가 자체로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정신에 대해서 동일성을 지니는가 아니면 불상등한 관계에 있는가”가 판단의 기준이라는 점이다(613, 강조는 필자).* 그런데 상술한 판단은 “이들 두 원리[자기동일성과 자기부등성]를 분리된 상태에 놓고 다루는 까닭에 한낱 추상적인 판단양식에 그칠 뿐이었으니 구체적인 현실의식으로서는 자체 내에 이들 두 개의 원리를 함께 지님으로써”(615, 강조는 필자) 국가권력과 부와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국가권력과 부 중 하나를 선으로, 다른 하나는 악으로 간주했던 순수의식과 달리 현실적 의식은 둘 모두와 자신을 동일시하거나, 둘 모두를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에 따라 위의 표와 유사하면서도 사뭇 상이한 도표를 그릴 수 있는데, 국가권력과 부 모두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의식은 고귀한 의식으로, 모두를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의식은 비천한 의식으로 정의된다.

현실적 의식의 지위 ﹅ 현실의 계기 국가권력
고귀한[edelmütig] 의식 선(복종) 선(감사)
비천한[niederträchtig] 의식 악(억압으로 인식, 통치자 증오) 악(허망하다고 인식, 베푼 자 증오)

(스티븐 홀게이트(2019), p.243 참고해 도표화.)

*그렇기 때문에 대상에 불과한 저 실재들이 비로소 정신적인 성격을 띨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정신적 매개적 행위”가 “어느덧 이 피규정성[국가권력과 부]이 하나의 [고유한 실재성과 생명력을 가지는] 타자가 되도록” 만든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614). 나아가 의식은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규정을 내릴 수 있지만, 의식 자체는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 긍정성과 부정성의 원리 모두를 제 안에 함께 지니기 때문에 분열되지 않고 단순한 것으로 남는다.

Q. 현실의식의 판단이 계기마다 갈릴 가능성—예컨대 권력은 긍정적으로, 부는 부정적으로 간주할 가능성—은 어째서 고려되지 않는가?

 고귀한 의식과 비천한 의식에 대한 헤겔의 성격 규정은 굉장히 명료하다. “고귀한 의식은 바로 그 자신의 단순한 본질과 이의 활동을 […] 공공권력 속에서 간취하면서 동시에 이 본질에 대한 실제적인 복종이나 내적 존경을 바”친다. “[…] 이 의식은 결국 부도 역시 그 자신과의 관계 속에 있는 어떤 본질로 간주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자신에게 향유를 안겨 주는 자를 은인으로 여기는 가운데 스스로 감사의 뜻을 표해야만 할 의무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이른다.” 반면 비천한 의식은 “국가의 통치권을 속박의 도구, 즉 독자적인 자기존립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간주하고 그 지배자를 증오하는가 하면 또는 흉계를 품은 상태에서만 그에게 복종할 뿐이므로 언제라도 그는 모반을 행할 수 있는 일말의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이 된다. […] 부를 통해서도 다만 특수한 개별자로서 느낄 수 있는 덧없고 값어치없는 향유의 의식을 누릴 뿐이므로 […] 부를 아끼면서도 동시에 이를 멸시하는가 하면 또한 그와 같은 향유의 무상함[…][을] 바라보면서 모름지기 부를 소유하는 자에 대한 자신의 관계도 소멸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른다.”(617-8)*

*이후 “비천한 의식은 고귀한 의식의 진리로” 밝혀진다. 즉 고귀한 의식은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의 정체성이 지닌 내적 논리에 따라 비천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폴리트는 마르크스가 바로 이와 같은 “변증법의 혁명적 성격에 주목했다고 진단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한 의식과 비천한 의식간의 대립은 사회적 내지 경제적인 두 계급간의 대립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쟝 이폴리트(2014), p.101.) 헤겔에게 있어 관건은 말하자면 인식론적인 자기동일성 여부일 뿐인 것이다. 헤겔과 마르크스 사이의 연관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운동가와 현상학자 사이에 잔존하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러나 국가권력과 부는 아직 의식의 대상일 뿐, “그 자체로서 자기의식을 이루고 있는 것도 아니”고, 개별 자기의식적 주체들이 이 실재를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정신적 실체로 벌써 고양시킨 것도 아니다. 즉 국가권력과 부의 ‘실재함’은 아직 “술어에 지나지 않을 뿐, […] 이들 자체가 주어의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다(618). 그럼에도 고귀한 의식은 국가권력을 “자기의 본질로, 즉 자기의 목적과 절대적 내용으로 의식”하기 때문에 국가권력을 위해 자신의 모든 특수성, 소유나 향유를 희생한다. “이것이 바로 여념이 없이 봉사에만 전념하는 영웅적 정신이다.” 이와 같은 자기희생, 자신의 개별적 실존으로부터의 자기소외를 통해 비로소 고귀한 의식은 자신의 본질과 합일되고 교양을 쌓으며, 여럿으로부터 존경을 받는다. 한편, 고귀한 의식의 노력을 통해서야 마침내 국가권력은 보다 참된 의미에서 실재하는 것으로 진화한다. “한낱 사유된 상태의 일반자[보편자], 즉 즉자적 본체에 불과했던 국가권력은 바로 이와 같은 운동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반자[보편자], 즉 현실적인 권력을 지닌 것이 된다.”(619, 강조는 필자)

 하지만 여전히 국가권력은 자기의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국가권력의 현실적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고귀한 의식이 “한낱 자기의 현존재만을 국가권력에 바쳤을 뿐, 결코 그의 본유적인 내적 존재(sein Ansichsein)마저도 희생시킨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고귀한 의식이 희생하지 않은 특수한 개체성의 면모가 잔존하며, 그는 “국가권력이 군주적인 개인의 의지가 아닌 본질적인 의지”인 한에서만 봉사하는 탓에 단지 “그 나름의 영예를 누리는 데 그칠 뿐”인 “거만한 시종”이다. 이때 고귀한 의식이 군주에게 건네는 말은 충언의 형태를 띠겠으나, 충언들이 상충할 경우 군주는 무엇이 최선일지 결정하지 못한다. “국가권력은 아직도 통치권력이라고 할 수 없”으며 진정한 의미에서는 “실제로 아직도 현실적”이지 못한 것이다(621, 강조는 필자).

Q. 봉사에만 전념하는 영웅적 정신이 희생했던 특수성과, 이 정신이 희생하지 않은 본유적인 내적 존재는 각각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그 둘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고귀한 의식이 여전히 ‘내면에서는 독자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이 문제인가?

 문제는 이처럼 “개별자의 대자적인 자기존립성(Fürsichsein) 즉 의지로서는 아직도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은” 고귀한 의식은 “전체를 위한 복리를 논하면서도 실은 자기에 한해서 특별히 최상책이 될 수 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는 국가권력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지 않는 한, “자기위주의 입장”을 지키고 있음에 틀림없으며, “이러한 입장은 분명히 일반적인 공공의 복리를 위한 조언을 [실제로 공리를 위한 것인지] 애매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621, 강조는 필자). 이처럼 고귀한 의식이 국가권력에 반해 자신의 특수한 의지를 쫓을 경우, 자기가 “국가권력과 일치하지 않는 불상등한 관계를 지닌 […] 비천한 의식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고귀한 의식이 이와 같은 위선의혐의(스티븐 홀게이트(2019), p.244, 강조는 필자)에 맞서 자신의 순수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즉 헤겔의 표현으로는 “대자적인 자기존립만을 고수하려는 태도[마저] 진정으로 희생시킬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러한 자립적 주체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와 같은 정도로 완전하게 자신을 내던지면서도 또한 이러한 자기외화 속에서 스스로를 유지, 보존할 줄도 아는 그런 희생[Aufopferung]이” 이루어져야만 한다(622). 이러한 진정한 자기소외가 있어야만 “비로소 국가권력도 고유한 그 스스로의 자기의 상태로[자기의식을 갖춘 현실적 실체로] 고양되기에 이른다.(623)”

Q. 고귀한 의식은 현실적으로 반드시 비천해지는가, 아니면 홀게이트의 해석대로 비천한 존재로 보일 “위험을 감수”하고 위선의 “혐의”만을 받을 뿐인가? 헤겔의 단정적인 어조를 얼마나 단정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ii) 정신의 본질적 계기로서 언어

 헤겔에 따르면 이러한 진정한 자기소외는 “오직 언어(Sprache)를 통해서만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언어야말로 다름아닌 자기, 즉 순수한 자기로서의 현존재성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이 언어 속에서만 […] 어느덧 이 개별성이 타자를 위해서 있는 것으로 바뀌어진다.”(623, 강조는 필자) 언어의 기능은 첫째, 특수한 의지를 쫓느라 불순해진 고귀한 의식을 순수한 자아로 환원시켜주고 둘째, 그를 자기만을 위한 대자적 존재를 넘어 대타적인 존재로 전환시켜주는 것이다. 요컨대 언어는 고귀한 의식을 개별적 자기의식적 주체가 아닌 보편적인 자기로 고양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어떻게 하여 언어는 이 두 기능을 수행하고, 그리하여 자아에게서 보편성을 끌어낼 수 있는가? 이는 언어가 “자아[나, Ich]를, 즉 오직 이 자아[나] 자체를 언표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외화로써 “스스로를 언표하는 자아는 분명히 [타인에게] 청취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를 통한 “자기소멸 그 자체만이 그[고귀한 의식]의 지속을”, 그리고 그를 통한 국가권력의 지속을 보장해준다(624).

Q. 언어는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자기소멸을 추동하는가? 오히려 발화자의 개성을 강화하곤 하지 않는가?

cf. “‘나’를 말함에 있어 나는 여타의 모든 ‘나’가 말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 나는 객관적인 나가 되는 것이다. 나는 개별적인 자기의식에로 고양된다.”(장 이폴리트(2014), 106) / “언어는 이제 보편자와 개별자, 실체와 자기라는 양 극단 사이의 매개항이다. 언어는 스스로를 자기 자신의 대립물로 정립하면서 이러한 양 극단 각각을 자체 내로 반성, 복귀시킨다.”(장 이폴리트(2014), 107)

 나아가 “자기의식이 […] 순수한 자기란 오직 소외를 통한 매개작용[언어]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이 자각을 통해 비로소 “정신은 바야흐로 정신성을 띤 것으로 현존”할 수 있게 된다(625). 국가권력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언어는 교양의 세계에 정신적 존재를 부여해 준다.”* 앞으로의 전개를 미리 예고하자면 예컨대 “아첨의 언어는 부를 본질성에로 고양시킬 것이다. 분열의 언어는 자기소외되어 있고 또한 자신의 부등성 속에서 스스로에게 투명해진 정신 자체가 될 것이다.”(장 이폴리트(2014), 107)

*Q. 이폴리트의 해당 해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국가권력이 “이제야 비로소 자기로서의 정신적 원리를 갖”춤으로써 “묵묵히 봉사에만 전념하던 영웅적 정신[Heroismus des stummen Dienstes]은 아첨을 일삼는 영웅적 정신[Heroismus der Schmeichelei]으로 변모해 간다.(627)” 이제 고귀한 의식은 국가권력이라는 추상적 보편자가 아닌, 개별적 자기의식을 가진 군주에게 봉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폴리트는 ‘짐은 곧 국가이다’라는 명언을 언급하면서 “헤겔의 변증법적 논의는 사실상 루이 14세의 이 유명한 구절에 대한 주석”이며, 비로소 국가가 개체적인 보편자이자 보편적인 개체성이 되었다고 해설한다(장 이폴리트(2014), 109). 확실히 태양왕을 연상시키는 헤겔의 군주는 귀족의 아첨하는 언어를 통해 “무한정한 권력” 그리고 다른 모든 국가 구성원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유한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 결과 그는 고독하지만 만인에 의해 인정받는 보편적 권력을 획득한 절대군주가 된다(628). 고귀한 의식들의 봉건제가 막을 내리고 절대군주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익살스러운 텍스트 구성을 통해 이 군주의 절대적 권력을 선언하자마자 바로 상대화시킨다. 헤겔에 따르면 군주가 보편권력을 가진 절대군주일 수 있는 이유는 “고귀한 자들인 귀족이 […] 어떤 장식품이라도 되는 듯이 왕좌의 주변을 에워쌈으로써 권좌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 즉 군주에게 그가 누구인가를 되풀이해서 얘기해 주는 데 있다.” 절대군주의 권력은 결코 독립적이지 않으며, 귀족들의 찬양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절대군주마저 자기소외의 상태에 처한다. “[…] 국가권력에 안겨진 독자적인 정신이란 오직 고귀한 의식의 행위와 사유를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현실적 존재와 이를 위한 자양분을 얻어내는 것이기도 하므로 이러한 권력은 오히려 스스로가 소외된 자립성임에 틀림없다.”(629, 강조는 필자) 하지만 국가권력이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자기의식의 계기를 획득했음은 틀림없다. 이러한 자기의식적 권력의 소외 또는 외화, 즉 권력이 “오직 지양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국가권력이 부의 형태를 띠고 실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630)”

Q. 국가권력이 자기의식의 계기를 획득하고 소외됨으로써 부의 형태로 전환된다는 헤겔의 서술은 설득력 있는가? 부야말로 국가권력과 대립하며 그것의 바깥에 자리하던 것이기 때문인가?

cf. “국가권력은 보편적 작품—절대적 사상 자체—으로서, 그 내부에서 제 개인의 보편성이 표현된다. […] 그러나 […] [이러한] 사실은 잊혀졌다. […] 따라서 제 개인의 단순하고 영기(에테르)와도 같은 실체는 오직 그것이 대타적으로 되어 경제 생활 일반의, 즉 부 내지 국가자원의 개별화 속에서 표출될 경우에만 보편성을 띠는 것이다.”(장 이폴리트(2014), 195)

 이 지점에서 주목할 만한 아이러니는 다음과 같다. 고귀한 의식은 군주의 권력을 현실적이고 절대적인 실체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야말로 절대군주를 자기소외의 상태로 밀어넣는 장본인이 된다. 고귀한 의식은 따라서 “자기의지를 포기함으로써 스스로의 내면을 소외시키는 [양상으로] 자기 자신과의 극도의 불일치를 빚는 가운데 모름지기 일반적인 실체[보편적인 권력]를 자신에게 굴복시키면서 그 실체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전적으로 불상등한 관계에 놓이도록 한다.(630-631)” 그런데 이와 같은 국가권력과의 “불상등한 관계”는 헤겔이 고귀한 의식이 아닌, 비천한 의식의 성격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여기서 분명히 밝혀진 것은, 고귀한 의식이 이른바 비천한 의식으로 불렸던 것에 대한 판단을 통하여 내린 바 있던 바로 그 규정이 소멸되면서 동시에 어느덧 여기서는 비천한 의식도 또한 소멸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하여간에 비천한 의식은 보편적인 권력을 대자적인 자기목적적 존재에 종속시키려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 것이 된다.(631, 강조는 필자)”

 그토록 고귀했던 의식이 어떻게 비천한 의식으로 전락하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둘 사이의 대립 자체를 지양해버리는지 계속해서 파헤쳐보자. 국가권력과 동일시된 부 역시 고귀한 의식에 의해 대상화된다. 고귀한 의식은 권력의 덕택에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워져 “이제 보편적인 은혜를 베푸는 입장에서 현존하게” 된다. 처음에 고귀한 의식은 국가권력과의 관계에서와 달리 “스스로의 대자적 존재를 보존”하면서—즉 자신을 전적으로 희생하지 않으면서—부와 직접적으로 관계 맺으며, “그 대상을 인정하[고] 또한 은혜를 베푸는 자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그러나 부 역시 국가권력과 마찬가지로 대자적, 독자적 실체로서 “자신을 향유의 대상으로 삼아서 이를 정복하려는 뜻을 지닌 사람에 반대해서 자기 자신을 고수”한다(631). 이 때문에 “고귀한 의식이란 스스로가 간직하고 있는 자기가 어떤 외타적인 의지의 힘에 눌려 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과연 이 의지가 그에게 이 자기를 양도할 것인지 어떤지는 다만 그 외타적 의지에 좌우된다는 것을” 자각한다(632, 강조는 필자). 쉽게 말해 대자적인 고귀한 의식은 자신이 “부의 세계에서 다른 개인들에 좌지우지된다는 것[…]에 대해 민감해진다. […] [그는] 그가 누리는 복지 전체가 지나치게 타인들에 의존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그가 달성한 진정한 만족에 대한 그의 감사는 세계와 그 세계의 우연성을 접하면서 크나큰 무력감에 의해 줄어든다.”(스티븐 홀게이트(2019), 247, 강조는 필자)

 고귀한 의식이 부의 세계에서 느끼는 긴장관계의 핵심에는 단순한 무력감 그리고 그의 비천해짐 이상의 현상학적 진리가 자리하고 있다. “자기라고 하는 인격성 자체가 어떤 타자라고 하는 우연히 마주친 인격성[…]에 좌우되어 있음을 발견”하면서 그는 “스스로의 자기확신 자체를 가장 비실재적인 것으로” 자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를 가능케 한 시혜자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은 결국 자신을 자의적으로 좌지우지하는 존재를 향한 마음이 되므로 실질적으로는 “자기비하의 감정이며 동시에 가장 신랄한 분노의 감정”으로 화한다. 사실상 자기는 다른 자기도 아닌 다른 자기의 재산, 그러니까 사물에 종속된다. 예컨대 부유한 자는 “한끼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상대인 빈자를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의 오만은 그로부터 도움을 받는 타자의 반항을 불러일으키지만, 부자는 그 반발심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둔감하다. [그리고 이 부자 역시 누군가에게 자신의 부를 의존하므로, 분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부 앞에서의 자아의 분열—예컨대 감사와 분노의 공존—은 곧 파멸이다. 그러나 파멸을 맞이해 자아가 아무 대응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일종의 항거를 수행하며 이로써 “자립적인 또 하나의 자기위치를 확립”한다(634). 극단적인 자아분열 가운데서도 실제로 자기동일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천한 의식이 (어느덧 국가권력처럼 보편적인 실재가 된) 부에 반항하면서도 그것을 갈구하는 언어, 비인격적 사물인 ‘부가 자기다’라고 판단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장 이폴리트(2014), 114, 강조는 필자). 이와 같은 분열[Zerrissenheit] 언어는 “스스로를 […] 모순 속에서 발견하며 또한 스스로를 세계의 본질로 간주”하는 자기들의 언어로서, 아첨의 언어의 일면성을 극복한다. 아첨의 언어는 상대가 비실체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추앙하는 간신의 언어와 같은 것인 반면, 분열의 언어는 상대의 견고함을 인정하며 그 앞에서 무력해하면서도 반항심을 잃지는 않은, 비유하자면 나이 지긋한 혁명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분열을 표현하는 언어야말로 […] 교양의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완전한 언어이며 속에서 참으로 살아 움직이는 정신”이라 주장한다.

*헤겔은 부에 대한 분석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어간다. 처음에 부는 “언제라도 방기되어질 수 있는 실재”였다. 그러나 부는 “분양, 공유성에 의해서 어느덧 즉자적인 본원성을” 갖추게 된다. “이렇듯 부가 자신을 희생시킨다고 하는 스스로의 사명을 완수할 때 비로소 이 부는 […] 곧 보편성을 띠면서 동시에 실재가 되는 것이다.(634)”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던 부가 자신의 독자성, 즉 개별성—선택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를 포기하면서 즉자적 보편자로 고양된 셈이다. 그럼에도 부는 이전에 성취한 바 있는 자기의식적 성격을 유지하기 때문에, 말하자면 자신만의 생명력, 스스로 운동할 수 있는 힘을 획득한다. 이때 부를 “받아들이는 의식의 편에서 볼 때는 그 자체[부]가 본래 허망하게 탕진되”는 것이자 “독립적이면서도 자의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바로 그 부를 누리고 있는 입장에 있는 자기를 제압하는 위력”으로 이해된다. 부가 이처럼 막강하고 무엇보다 광범위한 위력을 갖추게 되면서, 부유하지만 비천한 자에게서는 자신과 공동체를 공유하는 타자와의 조화로운 공존에 대한 일말의 의식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분열의 언어를 구사하는 자기의식적 주체는 “절대적인 자기분열 속에서도 여전히 절대적인 자기통일성”을 유지한다. 자기는 자신을 타자로서 대상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이러한 [타자화된] 자기가 어떤 다른 내용을 지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 내용은 절대적인 대립의 형식과 함께 […] 단 하나의 자기를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들 사이에서 비로소 “교양과 문화를 실질적으로 싹트게 하는 세계의 정신이 현존하기에 이른다.(637, 강조는 필자)” 교양과 문화란 개념상 자기부정을 통한 자기확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분열된 의식은 […] 세계의 종말에 대한 의식이다.” 이폴리트는 이 의식을 “혁명 [직]전의 정신상태”라고 묘사한다(장 이폴리트(2014), 119). 교양의 세계는 결국 종말론적 분위기가 감도는 소외와 전도[Verkehrung]의 향연이다. 가면이 없이도 운영되는 가면무도회장인 셈이다. “[…] 권력과 부라고 하는 현실적 실재나 […] 고귀한 의식이나 비천한 의식 등 그 어느 것도 [부동의] 진리일 수 없다 […] 모든 계기마다가 서로 전도되는 상태에서 뒤바뀌는 가운데 결국 이들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반대물로 될 뿐이다.”* 헤겔은 이러한 혼란상을 특별히 부정적으로 보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다만 “진정한 정신은 바로 이와 같이 절대적 분리 상태에 있는 여러 계기의 통일”이며 “정신의 현존재라는 것은 그 어느 때나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여지없이 찢어내다시피 하는 판단(639)”을 수행함으로써 “자기해체를 일삼는 […] 유희”에 빠져든다고 담담하게, 심지어는 지적인 희열마저 담긴 듯한 문체로 언표할 뿐이다. 분열된 의식은 분열되어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분열 및 만물의 절대적 전도를 자각하기에까지 이름으로써 자신의 의식에서 “개념*이 지배적인 역할을” 하게 할 뿐 아니라 “기지에 넘치는[geistreich, entertaining]” 언어를 구사할 줄 알게 된다(640, 강조는 필자). 보편적, 절대적 전도 가운데서 무도회의 절정은 물론 진리 자체가 기만[Betrug]을 내용으로 가진다는 근원적 사태에서 도달된다.** 단순한 의식을 가진 누군가가 선악이, 고귀함과 비천함이 각각 고정되고 자기동일적인 성질이라 말한다면 그는 현실로부터 유리된 “변종(Espéce)을 구성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643).

*예컨대 보편적 권력은 군주라는 개체성의 옷을 입고 독자성을 획득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 자신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부라고 하는 무력한 실재에 지나지 않는다.” 또 부 앞에서 자기의식적 주체는 타자에 의해 통제되는 단순한 사물과 같이 취급되지만 그 가운데서 오히려 “자기 자체 내로 복귀”한다. “[…] 일단 가한 것으로 규정됐던 것이 어느덧 부당한 것으로, 그런가 하면 다시 부당한 것으로 규정됐던 것은 가한 것으로 바뀌어지게 된다.(638)”

**여기서 헤겔은 디드로의 소설 ⟪라모의 조카⟫를 언급한다. ⟪라모의 조카⟫의 주인공은 그 어떤 성격으로도 규정되지 않으려고 하며, 그 무규정성이야말로 그에 대한 유일하게 올바른 규정이 된다. 장 이폴리트(2014), pp.116-119.

Q. 이 대목에서 ‘개념’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때 “전도된 세계의 전면적인 해체에 대한 요구”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교양세계의 무상성을 깨달은 분열된 의식만이 제기할 수 있는 것이며, 헤겔은 이 정신이 실제로 자신의 요구를 이미 성취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의식의 분열이 그 스스로를 자각하며 또 스스로를 언표한다는 것은” 세계의 혼미와 자신에 대해 “조소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동시에 이것은 그 모든 혼란과 착란이 차츰 사그라져 들어가는 소리를 스스로 엿듣는 것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도, 무언가를 조소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무언가가 이미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모든 현실과 규정된 개념의 공허함[Eitelkeit] 가운데서 “실재하는 세계[] 자체 내에서 이중의 반성, 복귀를 행”하게 된다. 세계의 이와 같은 자기 안으로의 반성은 한편으로는 지금, 여기의 “자기 자신에게로 귀착된 정신”이 “현실세계[…]를 여전히 자기의 목적이며 또한 직접적인 내용으로 삼는” 양상으로 진행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의 순수한 보편성, 혹은 사유 속에서 [정신]의 안목이 […] 자기 내면에만 쏠림으로써 현실세계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가 하면 […] 하늘을 우러러봄으로써 다만 현실세계의 피안”을 대상화하기에 이른다.(644-5, 강조는 필자)

 반성의 첫 번째 형태는 만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그것들에 깃든 모순을 간파해낸다. 그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 바, […] 모든 사실, 사물이 전도되어 있다는 점[진상]을 바르게 표현할 줄” 안다. 그러나 그는 “불일치와 반목의” 관점에서만 세계를 파악하기에 실체를 “일괄해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결여하고 있다(645). 헤겔은 이 같은 양상으로 반성하는 의식이 “부질없는 자만심”을 가진다면서, 그는 “자기가 권력과 부를 제압하면서도 그 자신은 결코 이 두 가지 위력이 자기의 본질을 이루는 것으로는 간주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가 그들을 지탱하는 위력일 뿐, 권력과 부 자체는 한낱 부질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재치있는 언어로 표현”하는 것만을 “최고의 관심사"로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이야말로 교양세계의 핵심이기에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바로 이 순수한 자기가 정신적이며 보편타당한 자기”로서 자각된다(646). 다만 이 보편적 자기는 세계를 철저히 공허한 것으로 취급하므로 그 어떤 “실체적 내용도 더이상 긍정적으로 파악[할] 수 없”으며 오직 “순수자아 그 자체”, 즉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한 자기의식의 이와 같이 순수한 자기동일성”만을 자신의 대상으로 가진다(646-7). 이 형태의 자기의식은 이어서 구체화되는 순수통찰의 맹아로 읽힌다.


2) 신앙과 순수통찰

 헤겔은 세계의 피안을 사유하는 신앙을 먼저 분석한다. 신앙에 따르면 “사유[das Denken]만이 이 세계[피안]의 절대적 요소를 이”루지만, 신앙은 여전히 구체적인 현실에 의해 조건화되어있기 때문에 오로지 예컨대 삼위일체와 같은 표상[Vorstellung]을 통해서만 자신의 목표인 사유에 가닿을 수 있다.

Q. “이렇듯 분열된 의식[신앙]은 이제야 비로소 즉자적으로만 순수의식의 자기동일성일 뿐이어서 다만 이것은 우리에 대해서만 깨우쳐질 수 있을 뿐, 결코 대자적인 위치에서 자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647)”라는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신앙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기동일성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반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신앙의 즉자적 자기동일성을 간파하는가?

 이어 헤겔은 신앙을 다른 의식 형태들과 대조하면서 그 정체성을 뚜렷이 하고자 한다.* 결정적으로 신앙(또는 믿음)은, 물론 종교의 맹아이기는 하나, 종교와도 구별된다. 왜냐하면 종교는 “즉자대자적인 전체적 의미 속에서 나타나”야만 하기 때문이다(649). 종교와 신앙의 구분을 선고하는 이 대목의 의미가 아주 분명하지는 않지만, 종교의 경우엔 종교적 의식이 절대자—믿음의 내용—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반면** 신앙의 경우 앞서 자신의 동일성조차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고 헤겔이 일갈한 바 있거니와, 자신의 유일한 실재이자 목표인 피안이나 절대자와 합일되기는커녕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도피하기에만 바빠 여전히 소외된 의식에 그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앙은 스토아적 의식과 달리 사유[사상, Gedanken]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 또한 타당한 것으로 취급하며, “그 실재[가] 비현실적인” 도덕적 의식과 달리 “현실의 피안에서나마 분명히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실재로 군림한다.” 또한 법칙 검증적 의식과도 달리 “구체적 현실로서 규정될 수 있는 성질의” 실재를 취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실재가 지니는 현실성이란 어디까지나 순수의식의 현실성을 의미할 뿐, 결코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의식의 현실성은 아니”라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648). “왜냐하면 순수사유의 그와 같은 현실성이란 곧 구체적인 의식이 지니는 현실성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하기 때문이다(649).”

**종교적 의식은 그것이[, 곧 자신은] 절대적이거나 신적이지 않다고, 오히려 그 자신과 다른 절대자에 대한 인간 의식으로 [스스로를] 이해한다. 그럼에도 종교적 의식은 절대자가 이러한 구별 자체를 극복해서 인간과 하나가 된다고 이해한다. [...] 종교는 자신과 다른 절대자에 대한 의식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 자기-의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종교적 인간들은 그들이 연결되어 있는 절대자 속에서 스스로를 보는 것이다." 스티븐 홀게이트(2019), p.247(강조는 원저자). 

 그런데 헤겔은 신앙이 구체적 현실세계로부터 소외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소외의 상태에 처해있기도 하다고 말한다. “[…] 순수의식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스스로 소외되어 있음으로써 신앙이란 이와 같이 소외된 순수의식의 한쪽 측면을 이룰 뿐이다.” 순수의식의 다른 한쪽 측면은 순수 통찰을 이루는바, 그것은 모든 것의 전도를 통찰해내므로 어떤 구별도 구별로서 성립하지 못함을 간파하는 “단순한 의식”이다. 이 “단순한 의식은 순수한 자존적, 대자적 존재이면서도 […] 결코 어떤 특수한 개별자를 뜻하는 대자적 존재는 아니며 오히려 그 자체가 보편적인 자기이면서도 더우기 이 자기는 사물의 안정된 본질적 실재를 공략하여 그 속으로 삼투해 들어가는 불안정한 운동”이다(650, 강조는 필자).

 순수 통찰은 “자기 자신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확신”으로서 “의식에 대립해 있다고 여겨지는 일체의 대상적인 실재를 박멸함으로써 이[박멸된 대상적 실재]를 의식에 버금가는 하나의 존재로 되게 하는 부정성의 위력에 깃들인 절대적 개념으로서의 순수한 사유”이다. 신앙은 “[피안을 지향한다는] 긍정적 보편성 또는 즉자적 [다시 말해 대자성을 결여한 잠재적] 존재라고 하는 한정된 의미를” 가지는 반면 순수 통찰은 부정의 힘을 휘두를 줄도 알고, 모든 대상을 탐욕스럽게 제 의식 안으로 들임으로써 가능한 한 가장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광범위한 자기의식을 그것도 현실적으로 행사한다. 문제는 이 순수 통찰마저 소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헤겔이 명료하게 해설하고 있지는 않지만, 애초에 순수통찰또한 신앙과 함께 보편적 소외와 전도의 세계의 무상성에 대한 일종의 저항적 초월 및 순수의식의 자기복귀에로의 노력으로부터 싹텄기 때문에 나란히 소외의 그림자 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제 신앙과 순수통찰을 본격적으로 비교해보자. “순수통찰의 고유한 대상을 이루는 것은 오직 순수자아일 뿐이다. 이에 반하여 긍정적인 것이나 혹은 안정된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신앙으로서의 단순한 의식은 실재라고 하는 내면적 본질(das innere Wesen als Wesen)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렇게 볼 때 순수한 통찰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내용도 지니지 않는다고 하겠으니,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대자적 존재일 뿐이기 때문인 데 반해서 신앙에게는 통찰이 결여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내용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651-2)” 둘 사이의 차이를 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앙[Der Glaube] 순수통찰[die reine Einsicht]
공통점 ①순수의식임
②”교양과 문화라는 현실세계로부터의 귀환을 의미”함(653)
③자기소외된 정신임
④서로에게서 독립적이지만 “서로가 순수의식에 대립되는 구체적인 현실세계에 관여하며 각기 순수의식의 내부에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관계를 맺고 있”음(653)
차이점 ①개념이 아닌 사유 속에서이긴 하지만, 긍정적 내용을 가짐
②현실성과 자기의식 즉 대자적 존재 결여
③표상을 통해 초감성적 세계라고 하는, “본질적으로 자기의식과는 생소한 어떤 타자”와 관계(652)
①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내용 결여
②현실성과 자기의식 즉 대자적 존재 가짐
③타자가 아닌 ”자기만이 바로 그 자기의 대상”(652). 구체적으로 말하면 타자를 자기화해 모든 구별을 철폐함.

 헤겔은 여기서 표상을 통한 “믿음의 의식이 절대적 대상”으로 삼는 것의 “내용과 의의는 […] 순수의식의 보편성으로까지 고양된 실재하는 교양의 세계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654). “신앙은 현실세계로부터의 도피[…]지만 거울의 유희에서 보듯, 동일한 실체가 때로는 세계의 권력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 때로는 절대존재,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장 이폴리트(2014), p.125) 물론 개별적인 자기의식이 가지는 신앙은 “눈앞의 현실 속에서 완전하게 그 [자신의] 목표를 성취할 수” 없으며, 오직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만 사유할 수 있다. “[…] 이 피안의 세계가 영원한 존재의 외화를 통하여 현실계로 접어들기는 하였으나 다만 이것은 개념적으로 파악하지 않은 감각적인 현실에 불과할 뿐이다.(655)” 이 감각적 현실은 다른 모든 감각적 현실들과 거리를 가지므로, “스스로 자기를 현현시키는 정신의 현실성을 뜻하는 개념”이 신앙에서 나타나지는 못한다. “그러나 순수통찰의 경우에는 오직 개념만이 구체적 현실성을” 지닌다(656, 강조는 필자). 순수통찰은 “우연적이며 개별적인 의식”으로 남지 않고 자신의 개념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모든 대상적인 것은 […] 자기의식이라고 하는 의의를 지녀야만 하며 또한 이 자기의식은 하나의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순수통찰은 모든 자기의식이 지녀야만 할 자기소유[소유물, Eigentum]일 수밖에 없다”고 헤겔은 결론 짓는다(657).*

*Q. 마지막 논증을 이해하지 못했다.

 “[…] 마침내 이 순수통찰은 모든 의식을 향해서 너희들은 모두가 바로 너희들 자신이 있는 바 그대로의 모습으로 너희들 자신으로 있어야 한다고, 즉 너희들은 [모두] 이성적[vernünftig]이어야만 한다고 소리 높이 외치는 정신이 되는 것이다.(658-9, 강조는 필자)” 이렇게 하여 순수통찰은 계몽의 작업을 떠맡게 되며, 신앙을 자신의 대립물로 규정하고 자신의 타자를 비난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