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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자크 데리다, <용서하다> 요약

자크 데리다, 배지선 옮김, ⟪용서하다(pardonner)⟫, 이숲, 2019

 홀로코스트를 결코 속죄할 수 없는 사태, 따라서 용서할 수 없는 사태로 규정하는 장 켈레비치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용서의 본질을 파고드는 강의록이다. 개인적으로 데리다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해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의 아티클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러므로 먼저 Lawlor가 작성한 데리다에 관한 SEP 아티클을 인용 및 요약해 그의 사상 일반의 윤곽을 그려본 뒤, 그 토대 위에서 용서라는 구체적인 주제를 다루는 이 책을 요약하고자 한다.


I. 데리다 사상의 윤곽

Lawlor, Leonard, "Jacques Derrida",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Fall 2019 Edition), Edward N. Zalta (ed.), URL = <https://plato.stanford.edu/archives/fall2019/entries/derrida/>을 번역하여 인용. 모든 강조는 필자에 의한 것이다.

 Lawlor에 따르면 "데리다의 유명한 용어 "차연différance"[…]은 기계적 반복 가능성 대체 불가능한 [어느 사건의] 특이성에 내부적이지만 그럼에도 둘은 서로에게 이질적인 것으로 남는 [...] 관계를 가리킨다. [...] 달리 말하면, 데리다에게서 순수성에 대한 취향은 부적절함(impropriety)에 대한 취향, 그러므로 불순함에 대한 취향이다. [...] [데리다의] 기본적인 논증은 언제나 다음을 보이고자 한다. [바로] 그 누구도 대체 불가능한 특이성과 기계적 반복가능성[...]을 서로의 외부에 서는 두 실체들로 분리시킬 수 없으며, 누구도 하나를 다른 하나로 환원시킴으로써 하나의 순수한 실체(속성들 또는 양상들을 가지는)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반복 가능성(repeatability)과 특이성(singularity)의 분리 불가능성 및 필연적인 교차는 후설의 파지와 예지의 개념에 의해 영향 받은 것이 분명한, '지금'에 대한 경험을 분석하려는 시도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데리다에게 "현재는 그러므로 언제나 부재와 복합되어있다"는 의미에서 특이한 동시에 반복 가능하다--즉 불순하다.

 순수한 것의 필연적 오염에 대한 데리다의 교설은 근원에 대한 탐구에도 똑같이 겨누어진다. 그에게 ‘순수한 근원’ 또는 ‘순수한 초월론적 인식조건’과 같은 것은 없다. 그것들은 늘 근원 이후의 경험과 섞임으로써 소위 ‘오염’되어있다. "[...]만일 근원이 언제나 [자기동일적이지 않고] 이질적이라면, 아무것도 확실성 가운데서 그 자체로 주어지지 않는다. 주어지는 모든 것은 자신이 아닌 것으로서 주어진다. 이미 지나간 것이나 곧 올 것으로 말이다. [...] 지식 자체, 진리 자체, 무언가에 대한 지각이나 직관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믿음(faith), 위증(맹세 위반, 배신, perjury), 언어는 근원에 이미 존재한다."

 근원은 본질적, 필연적으로 오염되기 때문에 "모든 경험은 뒤늦음의 면모(an aspect of lateness)"를 가지게 된다. "나는 언제나 근원을 뒤늦게 [놓친] 것만 같이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은 늘 벌써 사라져버린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든 경험은 그렇다면 늘 정시에 일어나지 못하고, 데리다가 햄릿에서 인용해오듯, 시간은 "균열돼있다(out of joint)." [...] 균열된 채로[라면], 시간은 필연적으로 불의이거나 폭력적이다."

 근원적 현재뿐 아니라 자아 역시 이 오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순수한 자아도, 순수한 자기사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로 나에 대한 경험은 결국 타자에 대한 경험이다. 후설이 상정한 절대의식의 영역 안에서조차,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다고 해도 나 자신의 이야기를 동시적으로 듣지 못한다. 나는 언제나 한 발 늦게 파지된 나의, 시간에 의해 밀려난 타자의 이야기만을 들을 수 있다. 이 한 발 늦음, 어떤 "틈(hiatus)"이 곧 "흔적(trace)"의 개념 즉 "최소한의 반복 가능성(minimal repeatability)"의 개념을 정의해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의 흔적이 남았다는 것은 그것이 최소한 한 번은 반복됐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연장선에서 데리다는 후설이 ⟪이념들⟫ 1권에서 천명한 바 있는 모든 원리들의 원리, 즉 순수한 직관이 모든 인식 정당화의 원천이어야 한다는 원리를 부정한다. 왜냐하면 후설의 원리는 "기표와 기의의 연결(signification)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 직관, 순수 본질 또는 순수한 부여의 성격을 향한 지각의 목적(telos)"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후설은 자신이 이와 같은 목적론에 개입하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내비친다.] 모든 직관은 순수하지도 즉 자기동일적이지도 않으며, 다시 말해 자신이 아닌 것에 의해 침투되어있다. 파지와 예지로 인하여 '직관 속의 비-직관', '내 안의 타자'가 자꾸 생겨나는 셈이다.

 순수성의 불가능성을 기본적인 철학적 전제로 내세운 뒤 데리다는 그 불가능한 순수성을 고수하려는 시도를 곧 폭력으로 규정한다. 이때 "최악의 폭력"은 타자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모든 것을 철저하게 자신의 것으로 삼는(appropriate) 사태다. 점점 더 많은 타자들이 배제되어 "분립 없는[단순한] 주권(indivisible sovereignty)"이 탄생하는 것, 완벽한 면역 체계가 구성되는 일이야말로 가장 막아야 할 문제다. 그러나 자아는 결국 타자와 결부돼있기 때문에 이러한 타자의 배제는 결국 자신을 살해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데리다가 말하는 타자에는 동물 역시 포함된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은 하이데거 및 레비나스의 사상과 결별한다.

 이 폭력의 문제와 관련해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hospitality)"의 개념을 통해 초대받지 않은 타자조차 적대시하지 않고 그를 호의로 대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그와 같은 완전한 우정은 불가능하며 심지어 위험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환대에는 타자를 환영하려는 힘과 그로부터 물러나려는 힘이 공존한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무조건성과 조건성은 반복가능성과 특이성, 근원성과 파생성 또는 발생된 것의 성질처럼 서로 필수불가결하게 얽혀있다.]

Q. 그렇다면 환대하라는 것인가,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의 주장이 정확히 무엇인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Lawlor는 데리다를 일약 인텔렉츄얼 슈퍼스타로 만들어준 "해체"의 개념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시도하며 글을 끝마친다. 첫째로 "해체는 플라톤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이때 플라톤주의란 존재(실존, existence)는 대립항들을 가지는 식으로 [...] 구조화돼있으며 이 대립들은 위계를 갖고 있고, [따라서] 대립의 한 항이 다른 항보다 더 가치있다는 믿음으로 정의된다. 해체의 첫 번째 국면(phase)은 플라톤주의적 위계를 전복함으로써 이 믿음을 공격한다. 보이지 않는 것 또는 지성으로 접근 가능한 것(the intelligible) 그리고 보이는 것 또는 감각적인 것 사이, 본질과 현상 사이, 영혼과 육체 사이, 살아있는 기억과 기계적인 암기(rote memory) 사이, 므네메와 휘포므네시스(mnēmē and hypomnēsis) 사이, 음성과 글쓰기 사이, 마침내 선과 악 사이의 위계를 말이다." 해체의 두 번째 국면은 플라톤주의적 위계에 대한 "전복-환원(reversal-reduction)"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국면에서는 원래는 위계의 아래에 놓여있던 항, 특히 현상이 이제는 오히려 그 대립항의 근원 또는 출처로서 다시 쓰이게 된다(re-inscription). 이와 같은 재정의가 가능한 이유는 경험의 시간성이 하나와 다른 하나 사이의 차이를 결정할 수 없게(undecidable) 만들어 위계질서의 안정성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이 재정의 이후 데리다는 용어의 맞춤법(orthography)을 바꾸는 등의 시도를 통해 기존의 위계가 변화했음을, 지위에 변동이 발생했음을 알린다. 예를 들어 '차이'의 맞춤법에 변화를 줘 '차연'이라는 새 개념을 만드는 식이다. "차연은 [...] 그렇다면 "[기존의] 형이상학"이 자신의 결정을 내리기 위해 그 속으로 "끼어드는" 결정불가능한 출처다."

 해체의 두 번째 정의는 보다 정치적인 것으로서, 개념이나 주제의 역사를 추적하는 계보학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거나 비역사적인 패러독스 또는 아포리아를 따지는 형식학 또는 구조학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용서하다(pardonner)⟫는 후자에 가깝다.) 데리다가 ⟪법의 힘⟫에서 제시하는 "법과 정의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에 대한 아포리아"를 예로 들 수 있다. 데리다에 따르면 정의는 필연적으로 현재에는 완전히 달성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법을 어기거나, 근본 없는 법을 따르거나, 사건의 특이성을 고려하지 않고 법을 맹목적으로 따르거나 셋 중 하나의 덫에 반드시 걸리기 때문이다. "이 끊임없는 불의는 결정 불가능한 것의 시련(The ordeal of the undecidable)이 어째서 끝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다. [그 시련은] 계속해서 "유령"처럼 되돌아오며 "모든 현전(presence)에 대한 확신,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결정의 정의로움에 대해 확신시켜줄 모든 기준학을 그 내부로부터 해체시킨다.(Deconstruction and the Possibility of Justice, pp. 24–25)"

 해체의 세 번째 정의는 2000년에 발간된 에세이에서 나타난다. X의 해체란 X의 불가능성이 X의 적절하고 유일한 가능성이 되는 사태를 일컫는다. 가능한 X와 불가능한 X 사이에는 오직 동음이의의 관계만이 성립한다. 이와 같은 X의 예로는 "선물(기증, 증여, gift), 환대, 죽음 자체" 등이 있다. [이어서 고찰할 용서의 개념 역시 이 세 번째 정의에 따라서 해체적으로 재구성된다.] 세 정의 모두에서 해체는 결코 종결되지 않는 사유의 방식이다.


II. ⟪용서하다(pardonner)⟫ 요약

II-1. 용서와 기증[증여]의 유사성 많은 언어권에서 '용서하다'와 '기증하다', '주다' 사이의 언어학적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용서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하여 현재에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결코 단순한 기증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지만, 기증 자체가 용서를 구하는 행위라는 이유에서 서로 선험적으로 얽혀있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우리는 종종 "준 것 때문에" 용서를 구해야 하는 아포리아의 상황에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그 상황은 "어쩌면 내가 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상대에게 호소하는 일, 다시 말해 일종의 독, 무기, 주권의 확인, 더 나아가 강력한 힘의 실력 행사 같은 일이 될 수도 있"다(13). 이에 옮긴이는 기증은 결코 절대적이거나 순수한 기증이 아니며 그 기증 이후의 보답에 대한 압력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방적) 기증임'이라는 성질이 결정 불가능하다는 취지의 각주를 단다.

II-2. 집단적 용서의 아포리아 용서는 여러 가지 맥락들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종교적인 맥락에서는 신의 구원, 정치적인 맥락에서는--칸트가 극도로 제한해야 한다고 제안한--왕의 특별사면 등이 용서에 속할 것이다. 일상적인 용서 또한 당연히 상상 가능하며, 역사적 사건에 대한 용서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데리다는 집단적 용서의 가능성과 그 경우 누가 누구를, 언제, 무엇에 대해 용서할 것인가라는 첫 번째 아포리아를 제기한다.

 "집단적 용서의 문제는 한 그룹의 주체, 타인, 시민, 개인 등에 관련되거나, 그보다 더 복잡하게 (이 복잡성은 용서 문제의 핵심인데) 간청이나 시기의 다중성, 간청이나 순간의 다중성, '나'의 내면에 있는 하나 이상의 '나'와 관련됩니다. 누가 용서하는가? 누가 누구에게 어떤 시기에 용서해달라고 하는가? 누구에게 이런 '권리'나 '권력'이 있는가?(18-19)"
 "오늘 마주친 이 난해한 질문의 가장 두드러지고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형태[...]는 바로 '복수인 단수'입니다. 즉 '하나지만 그 이상인 대상, 그룹이나 집합, 공동체[예컨대 홀로코스트의 피해자들이었던 유대인]에 '용서'를 구할 수 있는가, 그럴 권리가 있는가, 과연 그것은 용서의 의미에 부합하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유일한 잘못이나 범죄에 그 피해 당사자가 아니라 타인에게 사죄하거나 피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20, 강조는 필자)"

 

 물론 용서의 이상적인 조건은 "용서의 두 당사자 간 절대적 고립성" 즉 피해자와 가해자가 단독으로 대면하여, 피해 당사자만이 용서의 배타적인 권리를 수행하거나 수행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인 것처럼 보인다(21). 그러나 집단적 용서의 아포리아가 상기하는 상황은 결코 이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나아가 용서는 사법적 처벌과 유관한 동시에 그로부터 독립적이므로, 처벌의 "시효 없음이 '용서할 수-없음(l'im-pardonnable)'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복잡성이 있다. 그러나 장 켈레비치는 '용서하다?(Pardonner?)'라는 글에서 데리다와 정반대되는 입장을 펼친다. 홀로코스트와 같이 처벌의 시효가 없는 비합리적 악에 대해서는 용서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켈레비치의 글을 꼼꼼히 따라가면서 용서의 (불)가능성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구하고자 한다.

II-3. 용서의 (불)가능성 데리다는 장 켈레비치가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해 전제하는 두 원칙이 보기보다 자명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장 켈레비치가 지키는 첫 번째 원칙은 "용서는 용서가 '요청돼야만' 용서에 동의하거나 용서에 동의할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27). 이에 데리다는 이 원칙이 "용서를 구해야만 용서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낳는다고 지적한다(29). 불가능한 일[용서를 구하지 않은 자를 용서하는 일]의 실현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용서의] 가능성의 문이 열리므로, "할 수 없는 일만을 할 수 있다는 아포리아"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35).

"궁극적 윤리는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용서받을 자격도 없는 것, 나아가 가장 근본적인 악마저도 용서하라고 명령할 겁니다. 불-가능을 실현하고 용서-불가능한 일을 용서하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만 용서는 [...] '의미'를 획득할 수 있고 용서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 용서할 수 있는 것, 사소한 것, 해명할 수 있는 것, 누구나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가 아닙니다(34-35)."

 

 두 번째 원칙은 "범죄가 너무도 무거울 때, [...] 더는 용서가 [가능한 선택지로서] 문제시될 수 없다"는 원칙이다(28). 그러나 데리다는 홀로코스트가 결코 만회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용서의 비도덕성, 즉 용서하지 않음의 도덕적 당위 및 정당성을 함축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첫 번째 원칙이 "할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라는 의미에서의 불가능성과 관련됐다면, 두 번째 원칙은 "해서는 안 되기에 불가능하다"라는 의미에서의 불가능성을 취급한다(39, 강조는 필자). 그러나 두 불가능성은 과거의 비가역성, 되돌릴 수 없음의 성질을 근본적인 조건으로서 공유한다. 그러므로 용서의 개념을 탐구함에 있어 "과거 사건의 부동성과 그 다양한 형태, 즉 역전 불가능, 망각 불가능, 소멸 불가능, 회복 불가능, 만회 불가능, 변경 불가능, 속죄 불가능 등" 그리고 "존재의 사건성"은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용서의 본질은 바로 시간, 과거에 대한 반박 불가능성과 수정 불가능성을 내포한 시간의 존재"다(41, 강조는 필자).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용서의 본질이 충분히 규명되지 못한다. 데리다는 칸트가 왕의 특별사면권에 엄격한 한계를 설정했다는 점과 더불어 그의 사유가 "일반적으로 용서는 피해자만이 할 수 있"으며 제3자와 무관하다는 결론을 내놓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데리다는 제3자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 "이런 단독 대면이 가능할까요?"라고 물으면서, "애초부터, 가정으로서, 용서는 제외된 혹은 제외돼야 할 제삼자의 등장을 암시하는 듯"하다는 기이한 주장을 펼친다(45, 강조는 필자). [악의 피해자나 가해자는 아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에 의해 영향을 받는 미래의 세대를 말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데리다가 제3자에게 피해자를 대신해 용서할 권리를 양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는 용서가 반드시 "근본 악의 괴물성과 맞서야" 한다면서(46), 자신의 주장의 해명을 잠시 미루고 파울 첼란의 시를 인용하며 용서의 요청--저/우리를 용서해주십시오라는 요청--즉 일종의 기증에 대한 기대를 주제화한다. 이는 용서와 속죄 사이의 상관관계를 탈피하기 위함인 것처럼 보인다. 속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즉 용서를 요청하지 않고 상술한 기대를 저버린다고 해서 용서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데리다는 생각하는 것이다.

 "용서-불가능 앞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그 지점에서만 정확하게 그리고 오롯이 용서의 가능성을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더불어 가능과 불-가능은 함께 묶여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봅시다(48, 강조는 필자)."
 "용서와 용서의 표현과 그 전달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반드시 뚜렷하게 확정될 수 없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확정될 수 없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것은 양면성, 회색 조의 불투명이 아니라 이론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지식 영역과 판단 영역, 소유할 수 있는 의미의 자아 출현에 이질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52)."

 

Q. 여기서 데리다는 용서의 가능성이 결정 불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용서가 가능하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전체적인 취지는 후자에 가까운 듯한데 전자에 힘을 싣는 구절들이 있어 헷갈린다.

 이어서 그는 유대인 학살에 가담하지 않은, 그러나 그 학살자들의 아랫세대인 독일인 비어트 하블링크가 장 켈레비치에게 보낸 편지를 자세하게 인용한다. 이 편지에는 장 켈레비치가 그토록 요청했던 바, 기대했던 바가 모두 담겨있다. 하블링크는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분노한 장 켈레비치에게 학살자들을 '대신해' 용서를 구하며, 죄 없이도 죄책감을 느끼고, 끝이 있을 수 없는 애도의 심정을 전한다. 나아가 장 켈레비치에게 자신의 집에 방문해달라는 환대의 메시지를 전한다. (즉 하블링크는 장 켈레비치와 데리다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일을 시도한 셈이다.) 장 켈레비치의 친구 프랑수아 레지스 바스티드는 하블링크의 편지에 큰 감명을 받지만, 장 켈레비치는 편지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그의 집에는 방문하지 않겠다고 단언한다. 다만 하블링크가 자신의 집에 온다면, 함께 음악을 연주하자고 제안할 뿐이다.

 이와 같은 장 켈레비치의 답장은 양면적이다. 그는 '미래의 용서'는 가능하지만, "자신은 [용서의 장벽을] 여전히 넘을 수 없고, 그런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69). 속죄 불가능한 잘못에 대한 용서는 역사가 "악의 동화, 망각, 애도와 뒤섞인 용서의 모호함과 더불어" 계속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70). 데리다는 치유되면서도 아물 수 없는 "무한한 상처"와 함께 역사가 계속되리라는 점 역시 용서의 아포리아에 해당한다고 말한다(71, 강조는 필자).

 "장켈레비치는 역사가 분명히 계속될 것이며 용서와 화해는 다음 세대에 가능하다는 것을 의심치 않고, 심지어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를 원치 않고, 자신을 위해서는 이를 원치 않으므로, 그가 바라는 것, 원하기를 받아들인 것, 원하기를 원하는 것, 원하기를 바라는 일을 원치 않습니다(69)."

 

Q. 미래의 용서는 "용서 자체를 애도하는 일, 그 용서를 애도하는 용서처럼" 될 것이라는 데리다의 언명은 무슨 뜻인가?(71)

 데리다는 잠시 장 켈레비치가 어째서 홀로코스트를 속죄할 수 없는 사태로 규정했는지 설명하겠다고 말한다. [강의록이라서 그런지 전반적으로 구성이 산만하다.] 장 켈레비치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인간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한 공격이다. 유대인들은 특정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 죄악시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치의 범죄는 속죄할 수도, 시효를 설정할 수도 없는, 인류 전체를 겨냥한 범죄이다. 이에 데리다는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째, 용서는 인간적인 무엇, 인간의 고유한 특성, 인간의 능력일까요? 아니면 신에게만 속한 것일까요? [...] 이 같은 경계의 문제는 단지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과 신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것의 사이뿐 아니라 동물이라 부르는 것, 인간과 신성이라고 부르는 것, 그 사이를 관통합니다. 둘째, 방금 말한 이 경계가 다른 여러 경계 중 하나가 아니므로 이 경계에 의존하는 모든 것은 또한 이 경계에 반향을 일으킬 겁니다. [...] 용서의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면, [...] 환대에 관해서도 주목했던 것처럼 무조건성과 조건성의 구별은 단순한 대립으로 환원될 수 없이 몹시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79-80, 강조는 필자)
 "누군가가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 변상하고자 하고, 용서를 빌려고 그 잘못에서 벗어나려 할 때만 그를 용서한다면, 이런 용서는 용서의 본질을 변질시키는 어떤 계산적인 논리에 휘둘리게 됩니다."(81, 강조는 필자)

 

Q. "용서의 전달은 단지 반복을 일으킬 뿐 아니라 이 반복을 통해 탈동일시, 분산과 확산을 일으킨다는 사실(84, 강조는 필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A. 용서라는 사태 자체는 반복되지만, 피해자와 가해자가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므로 그 구체적인 사태 자체는 특이하고 고유할 것이다.

 나아가 데리다는 두 번째 강의를 예고하기라도 하는 듯, 아직까지 "유보된 세 가지 문제"를 각각 따져보겠다고 말한다(84). 첫째는 과연 용서가 "반드시 정해진 어떤 단어-동사를 통해 말해져야" 하는지와 관련된 문제다(85). 이는 언어가 아닌 침묵이나 음악과 같은 것도 용서에 대한 요청 [또는 수락]의 수단이 될 수 있는지, 나아가 동물 역시 용서의 주체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는 동물이 발휘하는 자비의 사례들을 들면서, "언어적 표현과 함께 일어나는 다른 모든 상황을 제외하지 말고, 말로 표현된 것-너머의 용서 가능성, 나아가 인간적인 것이 아닌 용서 가능성과 그 필연성을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87).

 둘째는 용서가 기증과 마찬가지로 오직 불가능한 것이 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아포리아와 관련된 문제다. 데리다는 이 문제가 서양철학에서의 가능성, 힘 그리고 권력에 대한 담론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프랑스어 단어 'pouvoir'는 '~할 수 있다' 또는 '~할 능력이 있다'는 조동사인 동시에 '힘'을 뜻하는 명사이다.]

 셋째는 "용서와 위증의 결합"에 관련된 문제다(89). 데리다에 따르면 "모든 잘못이나 범죄, 용서하거나 용서받아야 할 모든 일은 위증이거나 위증이 전제"된다. 만약 그렇다면 더 큰 아포리아가 발생하는데, 바로 "위증[이] 그 운명으로 필연성이자 설명할 수 없는 숙명으로 이미 약속과 맹세의 구조, 명예의 말, 정의, 정의를 향한 욕구에 포함돼 있"다는 점이다(92).

 "따라서 정의 자체가 내게 위증하게 하고, 내게 용서의 장으로 들어가기를 촉구합니다. 나는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정당해지기 '위해'. 여기서 '위해'라는 말의 모호성을 잘 이해해주십시오. [...] 정당해지는 일은 부당하기 때문입니다. 정당해지기 위해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배신합니다. 나는 언제나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배신하고 마치 숨 쉬듯이 위증을 거듭합니다."(93-94)

 

Q. 여기서 '위증'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정의와 위증이 필수불가결하게 얽혀있다는, 위증이 말하자면 순수한 정의를 오염시킬 수밖에 없다는 데리다의 논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예컨대 헤겔이 양심적 주체는 악을 범할 수밖에 없다고 말할 때와 유사한 논지인가? 

 숱한 질문들을 던진 뒤, 데리다는 '감사'가 사실은 무자비하게 대하지 말아달라는 용서의 요청이 아닌지 물으며 강의를 끝마친다. 비록 일관된 서사가 전달되기보다는 파편화된 생각들이 조각보를 이루듯 불친절하게 제시되는 글이기는 하지만,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 나아가 결정 불가능성 일반에 대해 고민한다는 점에서 데리다의 사상 일반과도 연관성을 놓치지 않는 강의록 같다. 사실 헤겔의 용서 개념--데리다는 헤겔의 용서 개념이 타자들 사이의 동일시를 전제한다는 이유로 비판한다--과 데리다의 용서 개념을 비교해볼 수 있을까 싶어 읽기 시작했던 것인데,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이어지는 강의록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공부에는 정말이지 끝이 없다.


III. 사족

III-1. 커피머신이 고장난 카페라는 이상한 공간에서 작업했다. '카페 데스틸'이란 곳이었는데 커다란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였고 공간 전체가 신조형주의와 특히 몬드리안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있었다. 은퇴한 예술가의 새로운 아지트였던 걸까.

III-2. 데리다에 대해서는 그의 박사논문을 수박 겉 핥듯 읽어본 뒤로 처음 공부하는 것이어서, 혹시 잘못된 정보가 섞여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1.5.19 제주도 신창해안도로 쪽의 카페 데스틸에서.
사장님의 신조형주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