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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요약

프리드리히 니체, 홍성광 옮김, ⟪도덕의 계보학(Zur Genealogie der Moral: Eine Streitschrift)⟫, 연암서가, 2020

카페와 지하철, 이불 속에서 틈틈이 읽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에 표지와 비슷한 색깔의 구두가 배송됐다! 여담이지만 ⟪도덕의 계보학⟫은 니체의 책 치고 여성혐오가 가장 덜한 편에 속하는 것 같다.

 ⟪도덕의 계보학⟫이 탐구하고자 하는 바는 '도덕 또는 선악의 기원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주제이자 발생의 문제다. 니체는 이 문제를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결하는 과정에서 당대뿐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기정사실화되는 선 즉 이타심, 동정, 희생, 인내, 겸허, 용서 등등의 가치 자체를 의문시한다. 결론적으로 니체는 선악의 기원을 ①고귀함, 능동성 및 긍지와 ②비천함, 반동성 및 원한 사이의 대립--그리고 전자에 대한 후자의 정신적인 복수--에서 찾는다. 나아가 진리를 (힘에의) 의지와 소망, 심지어는 취향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대범한 시도를 감행한다. ⟪도덕의 계보학⟫은 그야말로, 니체 자신이 자부심을 담아 인정한 것처럼 '투쟁적인 저서(Streitschrift)'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니체는 기독교와 칸트, 쇼펜하우어 등이 내세운 동정과 이타심의 도덕을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을 부추기며 본능을 억제하는 병적인 이상으로 진단한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는 강자에 대한 복수심과 원한으로 찬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노예도덕을 대신해 이기심과 지배욕을 숨기지 않으며 적극적으로 탁월한 적을 찾아나서는 그리스-로마적 전통을 복원하는 새로운 도덕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 새로운 도덕을 담지하는 불손한 "미래의 인간"은 "안티그리스도"로서 기독교적 도덕을 무효화하며, "무에의 의지"인 허무주의와 염세주의를 타파하고, 인간의 본능과 욕망 즉 대지 자체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차라트스투라와 같은 초인이다(149).

 본론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제1논문은 선악의 계보를 찾아 특히 '좋음'과 '나쁨'이라는 언어가 사용된 역사를 추적한다. 니체에 따르면 어느 언어권에서든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이 기본 개념"으로서 이로부터 "'좋음'의 개념이 필연적으로 발전해"왔으며, 반대로 "'비열한', '천민적인', '저급한'이 결국 '나쁨'이라는 개념으로 변화"했다(34-35). 그러나 귀족적인 인간들의 쾌활함과 긍지, 지배에의 의지에 대해 원한을 품은 이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자들을 "'악한 적'"으로 규정한 뒤 "그것의 잔상이나 대응 인물로 '선한 인간'을 생각해낸다--바로 자기 자신을!......"(53) 이로써 유대기독교 전통을 필두로 한 소위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이 시작돼 2000년 간 유럽 정신의 왜소화와 하향평준화를 이끌어왔다는 것이 니체의 진단이다. 이 노예도덕의 주체들도 결국은 자신들의 상대적 정의로움을 내세워 지배를 꿈꾼다는 점에서 (다만 병적인 방식으로) 힘에의 의지를 분출하고 있다. 이들의 지배욕은 자신들이 이를 천국과 이교도들이 이를 지옥에 대한 잔혹한 묵시록적 상상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제2논문은 한편으로 책임을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거래 및 계약관계로부터--인간의 고유한 탁월성은 그가 "가치를 재고 측정"하며 그에 따라 교환과 의무, 보상의 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데서 온다(104)--다른 한편으로 형벌을 책임을 다하지 않은 채무자에게 고통을 초래하고 그를 통해 느끼는 쾌감으로써 손해를 보상하는 잔인성의 축제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해석한다. 책임의 일종인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은 잔인성을 추구하는 본능, 억눌린 가해의 자유가 자기 자신에게로 향해진 자기학대에의 의지로 이해된다. 니체는 이와 같은 종류의 자기학대가 난무하고 오히려 격려, 고무되는 유럽 사회를 거대한 '정신병원'으로 비유한다. 해당 주장의 갓길에서 니체는 망각의 가치를 높이 사고(83-84), 이성의 기원을 형벌에 대한 기피 욕구에서 찾으며(91), 목격되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자유의지'의 개념이 고안되었다고 제안한다(103). 국가가 인간을 약속에 구속시킴으로써 예측 가능한 존재로 만들며(141), 조상에 대한 두려움과 부채감이 신 개념의 기원이라는 견해도 흥미롭다(136-7).

 제2논문에서 또 주목할 만한 지점은 x의 발생원인과 x의 효용성 및 목적을 분리하는 계보학적 관점의 구체화에 있다.

 "[...]모든 목적이나 모든 효용성은 어떤 힘에의 의지가 보다 힘이 약한 것을 지배하여, 그 약한 것에 자진해서 어떤 기능의 의미를 깊이 새겼다는 표시에 불과하다. 또 어떤 '사물', 어떤 기관, 어떤 관습의 전체 역사도 이와 같이 늘 새로운 해석과 정리라는 계속되는 기호의 연쇄일 수 있는데, 이때 그 해석과 정리의 원인 자체는 자기들끼리 연관성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그냥 우연히 잇따르고 교체될 뿐이다. 그에 따라서 어떤 사물, 어떤 관습, 어떤 기관의 '발전'이란 하나의 목표를 향한 진보가 아니며, [...] 오히려 그 발전이란 다소간 깊어지고 다소간 독립적인, 그 사물, 관습, 기관에서 벌어지는 제압과정의 연속이며, 그 방어와 반작용을 목적으로 시도된 형식의 변화이자 반격에 성공한 결과이기도 하다. 형식이 유동적인 것이지만, 그 '의미'는 더욱 유동적이다......"(116-7, 강조는 필자)

 

 그에 따르면 어떤 관습의 의미라는 것은 예컨대 형벌에서처럼 "불확실하고 [...] 뒤늦게 덧붙여지"는 우연이며, "근본적으로 다른 의도에 따라" 달리 이용, 해석, 정리될 수 있다(121). 그러면서 그는 "역사가 없는 것만 정의할 수 있을 뿐"이라 일갈한다(120, 강조는 필자).

 마지막으로 제3논문은 금욕적 이상을 본능의 퇴화, 피로의 누적, 생리학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주체가 자신 스스로를 보존하려는 시도로 규정하는 와중에, 신앙과 진리의 견고함(이 성립하기를 바라는 의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데까지 이른다. 니체의 논의는 관심의 배제와 "의지의 진정"(168)를 추구하는 칸트와 쇼펜하우어의 미학과 관심의 자극 및 행복의 약속을 추구한 스탕달의 미학을 대립시키면서 시작된다. 그러면서 미학의 영역에서 이와 같은 논쟁을 낳은 금욕적 이상이 철학자에겐 여태까지는 역사적으로 일종의 생존 조건--덕이 아니라--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철학자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금욕적 이상을 버려야 한다. 욕구가 거세된 무심한 직관보다는 "관점과 정동 해석의 상이성"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직 관점주의적 시각과 오직 관점주의적 '인식 행위'만이 존재할 뿐", 순수하며 시간성과 의지를 결여한 주관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러하다(193, 강조는 원저자).

 니체는 금욕주의를 온몸으로 담지하는 또 다른 주체인 사제들에게 주목한다. (그가 이후에 주장할 학자와 사제 사이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이 전환은 매우 자연스럽다.) 니체에게 금욕적 삶을 사는 사제들은 분열의 주체다. 왜냐하면 삶 자체에 대해 원한을 가지는 삶으로서 “금욕적 삶이란 하나의 자기모순”이기 때문이다(190).

"우리는 여기에서 자기 자신이 분열되기를 바라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자기 자신을 향유하는, 그리고 더구나 그 자신의 전제 조건인 생리적인 생활 능력이 줄어듦에 따라 점점 더 자신만만해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분열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191)

 

 사제들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고통의 원인을, (죄스러운) 행위 배후의 행위자 또는 영혼을 설정해줌으로써 고통을 마비할 수단을 제공한다. 그들은 "생활 감정의 전체적 약화, 기계적인 활동[단순노동 등], 조그만 즐거움, 무엇보다도 '이웃에 대한 사랑'이 주는 즐거움[우월감], 무리의 조직, 공동체가 번영하고 있다는 쾌감으로 개개인의 자신에 대한 불쾌감은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공동체의 힘의 감정에 대한 자각" 마지막으로 "감정의 무절제함 […] 열광"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통증을 완화시켜준다(222). (이 열광의 예시로는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열의 등이 있는 것 같다. 또 오늘날의 사회운동에서 중시되는 '연대'의 행위를 약자가 강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무리를 짓는 본능에 불과한 것으로 격하시키는 대목이 매우 논쟁적으로 읽힌다.)

 혹자는 현대 학문이 신앙의 금욕적 이상을 극복했다고 생각하지만, 니체는 오히려 당대의 학문이 "금욕적 이상의 반대가 아니라, [...] 그것의 가장 새롭고 가장 고귀한 형태 자체"라고 비판한다(241). (고전문헌학에 거대한 회의를 느꼈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단 한 번도 거리낌이 없었던) 니체에 의해 학자들의 엄격함과 꼼꼼함, 일종의 장인정신은 자기혐오를 감추기 위한 "자기 마비의 수단"으로 비하된다(242). 궁극적으로 학자들은 진리가 존재한다는 맹목적인 믿음에 부자유스럽게 사로잡혀있다. 그들은 “형이상학적 가치, 진리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을 가진 학문영역의 사제들이나 다름없다. "엄격히 판단해서, '전제가 없는' 학문이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246). 실증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 (사실상 현상학도 피해갈 수 없는 펀치.)

"그런 믿음에 구속되어 있는 존경할 만한 철학자들의 절제하는 삶, 마침내 부정도 긍정도 엄격히 금하게 되는 지적 스토아주의, 사실 앞에, 냉엄한 사실factum brutum 앞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자세, […] 해석 일반에 대한(능욕, 수정, 축약, 생략, 충전, 안출, 변조, 그 밖의 모든 해석의 본질에 속하는 것에 대한) 저 단념—이러한 것들은 대체적으로 말해서 관능의 부정과 마찬가지로 덕의 금욕주의를 잘 표현하고 있다(그것은 사실상 관능의 부정의 한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246, 강조는 필자) 

 

 그러므로 니체에게 신앙의 가치와 진리의 가치는 그 운명을 공유한다. "학문과 금욕적 이상은 하나의 지반 위에 서 있다 […] 이 두 가지는 똑같이 진리를 과대평가하고 있다.”(249) 니체는 존재하지도 않는 순수한 진리를 헛되이 탐하기보다--어차피 학자들은 저마다의 힘에의 의지가 이끄는 결론으로 미끄러질 것이다--"거짓을 신성시"하는 예술적인 창조를 시도하는 것이 훨씬 가치있다고 못박는다(249-250).


 열심히 요약을 시도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 책의 궁극적인 의의는 그 내용 자체보다도 중간중간 잠시 언급한 계보학적 방법론 즉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과 해결에의 접근법, 철학에서 역사적 사유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 마지막으로 절대성을 해석의 결과로 해소시키는, 어찌 보면 진정으로 학자답다고 말할 수 있는 비판적 태도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이를 '괴팍한 조심스러움'이라고 불러도 괜찮을까? 나는 이 책의 곳곳에서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나 데리다의 ⟪후설 철학에서 발생의 문제⟫ 등을 예지하는 듯한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니체의 철학적 정신이 그 추구하는 방향성이 가지는 노골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존중받는 이유를 알게 됐다. 개인적으로 철학서로서는 가장 유명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보다도 훨씬 가치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