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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프리드리히 니체, 이상엽 옮김,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6.

 카페 '한남 작업실'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대목들 중 하나. 

 

 니체가 자신의 삶의 자취를 되돌아보며 쓴, 역자의 표현을 따르면 "철학적 자서전"(190)이다. 이제까지의 저서들이 담았던 사상들의 요점이 '가치의 전도'를 중심으로 정리되어있으며, 각 저서가 쓰였던 맥락을 작가의 입으로 듣는 기회를 누릴 수 있다.

 역자에 따르면 이 책의 제목인 'Ecce Homo'는 "본래 기독교 ⟪신약성서⟫에서 로마의 총독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가 가시관을 쓴 예수를 가리키며 한 말"이라고 한다(191). 이로써 독자들은 어째서 니체가 이 책을 "디오니소스 대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는 이항대립으로 끝맺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189, 강조는 원저자). 그는 오랜 세월 유럽인의 현존재와 사상을 지배해온 형이상학적 이원론과 기독교적 도덕관념을 정면에서 뒤엎고자 한 것이다.

 종래의 형이상학적 이원론은 차안과 피안, 육체와 순수한 영혼을 구별한 뒤 허구에 불과한 후자를 위해 전자를 경멸해왔다. 이와 같은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 말하자면 '대지에 대한 증오'에 맞서 니체는 운명애(amor fati)의 사상을 내세운다.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육체적 삶] 앞에서의 거짓"(64)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상주의인 기독교적 도덕은 위선에 불과한 이웃사랑 및 동정심과, 자기애를 억압하는 자기희생을 강제함으로써 사제들의 기만적이고 병적인 힘에의 의지만을 충족시켜왔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맹목은 [...] 삶에 대한 범죄인 것이다."(179, 강조는 원저자) 니체는 진정한 지혜와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면 내세와 선의 개념을 폐기할 수 있고, 폐기해야 한다고 거듭 역설하며, 자신을 새로운 "'진리'의 척도를 손에 넣은 최초의 사람"(152)이자 인간의 내적 본능--힘에의 의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지--을 간파한 심리학자(77 등지), 무엇보다도 "다이너마이트"(168)로 규정한다. 기존의 모든 데카당한 경향성과 규범들을 파괴한 뒤 하나뿐인 대지를 사랑하는 초인이 탄생할 새 토양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토양 위에서는 긍지와 자기애, 욕망의 실현, 육체의 건강, 삶에 대한 긍정과 같은 디오니소스적 가치들이 겸손과 자학, 금욕, 정신의 원한, 그리고 피안으로의 도피를 대신해 새로운 덕으로 통용된다. 니체는 자신의 덕분에 유럽인의 가치체계가 완전하게 전도되고, 유럽 문화의 역사는 완전히 새로운 운명적 전환점을 맞는다고 믿었다.

 그런데 이상의 내용은, 비록 ⟪이 사람을 보라⟫에 대한 요약을 통해 얻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니체의 다른 저서들에서 주장된 바들과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본 글은 내가 읽은 니체의 다른 저서들에서는 비교적 두드러지지 않았던, 그러나 주목할 만한 이 책만의 고유한 요소들을 살피고자 한다.

 첫째는 니체가 자신의 철학적 작업들을 '생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점이다. 그는 인류의 구원이 "영양 섭취(Ernährung)의 문제"(31, 강조는 원저자)에 달려있다면서 좋은 공기 속에서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잠을 자는 일을 독서보다도 사유에 이로운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정신을 일종의 신체기관으로 보는 니체의 독특한 심신관에서 비롯한다. 구체적으로 말해 니체는 기존에 경시되어온 육체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인간이 육체와 정신으로 이분된 존재가 아니라 여러 육체적 의지들이 복합된 일원적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정신을 '내장'으로 비유한다. 그가 철학서에서 알코올을 비판하고, "장소와 기후의 문제"(36, 강조는 원저자) 그리고 휴양의 질에 집착하며 정신의 활동을 신진대사와 유사한 것으로 보는 데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에게 현실(Realität, 실재)은 근본적으로 육체적이다. 이제까지의 학자들은 이 사실로부터 비겁하게 도피해 거짓만을 탐닉해왔다.

 "나에게서 정신의 영양 섭취가 단절되었던, 쓸모 있는 것은 하나도 배우지 않았던, 먼지에 파묻힌 학술적인 허튼소리는 아무 의미가 없다 [...] 고대의 운율학자들을 그 나쁜 눈을 해 가지고 철저하게 더듬어 나가는 것 [...] 내가 바로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니!--나는 완전히 메말라 있고 완전히 굶주려 있는 나 자신을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 그 후로 나는 실로 생리학과 의학과 자연과학을 공부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107, 강조는 필자)
 "인식은 약자들에게 허용되어 있지 않다: 데카당들은 거짓을 필요로 한다. 거짓은 데카당의 생존 조건 중 하나다."(87, 강조는 필자)

 

 둘째는 '독일적인' 거의 모든 것에 대한 니체의 노골적인 경멸이다. 니체는 독일인들을 얕은 교양과 반유대주의,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재건된 그리스도교, 국수주의에 의해 오염된 민족으로 규정한다(156). 니체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살고 있는 국가의 철학과 문화는 타락 그 자체다. 타락의 가장 충격적인 징후는 (염세주의를 아폴론적 서사와 디오니소스적 합창의 통일로써 극복한 그리스인들의 비극 정신을 계승한 줄 알았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파르지팔' 이후 "경건해진 것"이다(111). 니체는 "음악이 세계를 미화하고 긍정하는 그러한 특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더 이상 디오니소스의 피리가 아니라는 것"에 괴로워한다(155).

 "'독일 정신'은 나에게는 역겨운 공기다 [...] 내가 독일인에 대한 탁월한 경멸자로 간주되는 것은 심지어 내 명예심에 속한다."(162-163, 강조는 원저자)

 

 셋째는 니체가 저서의 구성과 위풍당당한 문체라는 양식(Stil)의 요소들을 통해 긍지와 자기애에 대한 자신의 사상을 간접적으로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저서를 구성하는 챕터들의 제목--'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등--은 곧바로 이유가 명백한 이목을 끈다. 혹자는 니체가 혹시 이성을 잃은 채 조광증의 영향 아래에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닌지 의심을 품을 것이다. 그러나 사유가 굉장히 명료하게  개진되는 ⟪우상의 황혼⟫이 완성된 직후 이 책이 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물론 니체가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 늘 과도한 확신을 가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 제목들 그리고 제목에 충실한 내용들은 니체의 사상을 부각하기 위해 의도된 문예적 양식의 실현으로 읽혀야 한다. 자기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초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자기상실(Entselbstung)의 도덕에 대한 투쟁"(116)을 개시하면서 기존의 도덕에서 배척해왔던 이기심을 신성한 것으로 천명하기에 이른다. 그의 철학은 단순한 사상이 아니라 "복음"(153, 강조는 원저자)인 것이다.

 "사제가(사제의 은폐된 모습인 철학자도 포함하여) 특정한 종교 집단의 내부에만 있지 않고 전체적인 지배가 되었다는 [...] 결정적인 징후는 바로 비이기적인 자에게 어디서든 부여되는 무조건적 가치와 이기적인 자에게 어디서든 표출되는 적대감이다. [...] 생리학자는 그러한 가치의 대립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만약 유기체의 내부에서 가장 사소한 기관이라 할지라도 자기 보존, 자신의 힘의 보충, 자신의 '이기주의(Egoismus)'를 철저하게 관철하는 데 약간이라도 실패한다면, 유기체 전부가 퇴화하게 된다."(116, 강조는 원저자)

 

 이 외에도 우주의 섭리를 신뢰하는 가운데서 악조건을 선용하라는 스토아주의와의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사이 은밀한 유사성(89 등지), 독서가 자생적 사유 일반을 방해한다는 비판(56), 페미니즘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들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79-80), 노동자의 비인격화에 대한 비판적 통찰(94), 폭발을 철학의 이념으로 내세우는 대목(100),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을 선취하는 듯한 영감에 대한 묘사(127-128), 형상 없는 질료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념(143) 등이 흥미로웠다.

 "[영감 속에서] 모든 것은 가장 가깝고 가장 적합하고 가장 간단한 표현으로 스스로를 보여준다.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기억하면서 말한다면, 사물은 스스로 다가오고 스스로 비유가 되어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128)
 "그[차라투스트라]에게 인간이란 하나의 무형식이고, 하나의 재료이며, 조각가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보기 흉한 돌이다."(143)

 


 내 짧은 생을 돌아보니 당장 전공하고 있는 후설의 책보다 니체의 책을 더 많이 읽었다. 어떤 책에서든 감춰지지 않는, 이따금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강하게 느껴지는 그의 자기애와 자신감이 부러운 요즘이다. 그는 자신의 초인 개념이 대중적으로는 악마적인 것으로 낙인 찍힐 것임을 예견하면서도 어째서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초인은 정말 악마가 아닌 것이 맞을까? 나는 여전히 이타심과 타인에 대한 희생적인 배려, 모든 인간 사이 평등의 '선함'뿐 아니라 '고귀함'에 대한 믿음까지도 붙들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니체의 주장이 정말 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오후 나는 카페의 거친 벽에 대고 잘 모르겠다고 중얼거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