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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G.W.F. 헤겔, <정신현상학>, §596-671(C. 자기확신하는 정신: 도덕성)

G.W.F. 헤겔, 임석진 옮김, ⟪정신현상학⟫, 지식산업사, 1988을 주 판본으로 삼아 '아름다운 영혼의 발생'을 중심으로 독해했다. (사진만 한길사에서 2005년에 나온 판본으로 찍었다.) 아직 인용을 하는 데 서툴러서 불안하고 스스로에게 짜증이 난다. 최대한 꼼꼼하고 윤리적인 자세로 임하는 수뿐이다.


정신현상학에서 아름다운 영혼의 발생 연구

1. 서론: 양심(Gewissen) 아름다운 영혼(Schöne Seele) 사이의 관계

 양심적 행위자와 아름다운 영혼 사이의 대립은 ⟪정신현상학⟫에서 주인과 노예 관계를 결정짓는 생사투쟁만큼이나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을 연출한다. 양심적 행위자는 자신의 신념을 의무로 알고 주저없이 행위에 임하지만, 아름다운 의식은 자비 없는 판단을 일삼으며 양심적 행위자의 행위에 내재할 수밖에 없는 개체적이고 특수한 내용만을 들추어내 처음부터 의무의 이행이 아닌 오직 그것만이 행위의 목적이었으리라고 비난한다. 이에 양심적 행위자는 자신의 신념에 따른 행위가 보편적 옳음을 담지하지 못한다는 유한자로서의 한계를 자각한 후 허물없이 그 죄를 고백하고는, 아름다운 영혼 역시 같은 고백으로 응답하기를 기대한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영혼 역시, 행위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진 무한자로서의 지위와 그것이 보장하는 보편성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개체적이고 특수한 기준에 따라서만 행위자를 비난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영혼은 그 고백에 응하기는커녕 비평의 관점을 버리지 않고 “냉혹한 마음”을 견지한다(홀게이트, 2019: 272). 다만 그 냉혹함이 오래 가지 못할 뿐이다. 보편적 옳음을 향한 열망과, 언제나 한정적으로 규정된 내용만을 가지기에 저 열망의 충족 불가능성을 지시하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아름다운 영혼은 견디지 못하고, 자신과 같은 한계를 지닌 양심적 행위자를 용서하기에 이른다.

*Siep(2014)은 이 사태를 아름다운 영혼이 “[자신]의 기준들을 구체화할 수 없다—그것은 그 어떤 형태의 적용으로도 자신의 보편성을 희생시킬 의지가 없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Ludwig Siep,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Daniel Smith, Hegel’s Phenomenology of Spirit,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p.199.

 이 같이 역동적인 서사 가운데서 양심적 행위자는 아름다운 영혼이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자 모멸감과 분노로 불타오르고, 아름다운 영혼 또한 양심적 행위자의 고백으로 인해 기존의 자기를 포기하게 될 만큼 고통스러운 현기증의 상태로 내몰린다. 두 정신의 형태들 사이의 화해를 극적으로, 심지어는 신성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처럼 치열한 대립을 빚을 수밖에 없는 두 정신 형태 사이의 “절대적 차이”다(807). 하나는 행동하고, 다른 하나는—판단은 행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본다면—행동하지 않는다. 하나는 특수한 신념에 개입함으로써 한결같이 유한자로 머무르는 듯이 보이고, 다른 하나는 그 어떤 신념에도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무한자로서 남기를 원한다.

 그러나 헤겔은 두 정신 형태 사이의 절대적 차이뿐만 아니라 연속성 역시 드러낸다. 추후 2.2에서 상술하겠지만, 양심이 언어를 통해 자신의 신념을 그것이 무엇이든 보편화시킬 수 있다는 절대적 확신을 갖추게 되면 현실의 모든 대상이 마치 주체의 내면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양 그 속으로 집어삼켜진다. 이처럼 한 주체의 속으로 집어삼켜진 대상은 현실성과 현존재성을 상실한다. 이 같은 서술을 염두에 둔다면 아름다운 영혼은 양심이 의식으로서의 경험을 이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통과하게 되는 국면처럼 보인다. 만일 양심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화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면, 두 정신 형태가 절대적 차이를 보인다는 서술은 과장 섞인 것이 되고 만다. 반대로 설령 양심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화함이 우연적인 비약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어째서 상대를 이끌거나 뒤따를 수 있는 정신 형태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기는커녕 그토록 치열한 대립으로 치닫게 되는지는 여전히 설명을 필요로 한다.

 본 글은 위 의문들에 답할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아름다운 영혼은 양심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발생하기에, 둘은 연속하면서도 끝내 대립으로 치닫는지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에 필자는 아름다운 영혼이 특정한 분기의 계기를 거쳐 양심으로부터 파생된 파생태임을 주장할 것이다. 이를 근거 짓기 위해 본론에서는 첫째, 두 정신 형태들이 공유하는 지평으로서의 양심의 고유한 특성들을 분석할 것이다. 둘째, 양심으로부터 아름다운 영혼이 파생되는 가능한 분기의 계기를 (i)추상화와 (ii)자기방어적 공격으로 나누어 각 파생의 경로를 그려내볼 것이다. 결론에서는 이와 같은 해석적 작업의 의의를 구체화할 것이다.

 ⟪정신현상학⟫에서의 ‘양심’ 개념을 다룬 기존의 문헌들은 주로 양심적 행위자와 아름다운 영혼 사이의 대립과 화해 과정, 즉 용서와 상호인정의 문제를 취급했다. 그러나 본 글은 양심의 파생태로서의 아름다운 영혼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의 문제에 집중함으로써 이후 용서와 상호인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근본조건, 궁극적으로는 각 주체가 타자 속에서 자신을 직관함으로써만 가능한 절대정신의 현현이 발발할 수 있는 근본조건을 따지고자 한다. 인용된 ⟪정신현상학⟫의 페이지수는 임석진 역의 지식산업사 판본(1988)을 따라 괄호 안에 명기했다.

 

2. 본론: 양심의 파생태로서의 아름다운 영혼

 양심이란 도덕적 자기의식이 제 안의 모순과 진정성의 결여를 자각한 뒤 이르게 되는 자기확신하는 정신의 새로운 형태이다. 도덕적 자기의식은 순수한 의무와 불순한 외외적, 내적 자연 둘 모두가 필연적으로 충족을 기다린다는 모순에 맞닥뜨리고는, 순수의무의 입법자이자 순수의무와 자연적 현실 사이의 조화를 주재하는 신이라는 초월적 실재를 도입함으로써 저 모순을 종합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는 오히려 순수의무의 현실적 이행을 자신의 술어로 삼아야 할 대상으로 알고 있던 개별적 주관 정신들로부터 그들의 본질을 박탈한다. 개별적 주관 정신들은 결국 순수의무와 유한자로서의 행복 및 갖가지 의욕 사이, 신의 거처인 피안과 자신이 위치해있는 현실 사이를 마치 진자처럼 혼란스럽게 오가다, 이 자리바꿈(치환[Verstellung])의 운동으로도 봉합되지 않는 내재적 균열로 인해 지양되고 만다. 도덕적 자기의식의 자리를 차지하는 보다 고양된 정신의 형태가 바로 순수의무도, 자연적 특수성도 초월적 실재가 아닌 개별자의 내면으로부터 함께 산출함으로써 기존의 모순들을 빚지 않는 양심이다.*

*Moyar(2011)은 양심이 도덕적 자기의식과 같은 모순을 빚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도덕적 자기의식이 행위를 오직 행위의 보편적 조건들에 의거해서 가치평가했던 것과 달리, 양심은 수행된 행위의 개인적[개별적] 내용을 평가의 타겟으로 삼는다. 이 내용은 추상적 보편적 요구사항이 아니라 개인적인[개별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있다.” Dean Moyar, Hegel’s Conscience,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p.154.

 “이러므로 자기의식 그 자체는 스스로 우연성을 지닌 가운데서도 완전한 자기 타당성을 지님으로써 이것이야말로 그의 직접적 개별성을 곧 순수지이며 순수행동으로, 그리고 다시 참다운 현실이며 참다운 조화로서 깨우치는 것이 되겠다.”(763)

 필자는 우선 이처럼 “그 자신[이] 절대적인 진리이며 또한 존재임을 확신하는 정신”(763)으로 정의되는 양심의 고유한 특성을 ‘무한정성과 한정성의 공존’이라는 열쇠말로써 잡아내고자 한다.

 

2.1. 무한정성과 한정성의 공존

 헤겔에 따르면 양심은 최초로 (i)오직 현실에만 뿌리내리고 있는, (ii)단일한 즉 자기동일적인 정신의 형태이다. 도덕적 자기의식처럼 피안을 쫓거나 분열돼있지 않는다는 뜻이다. 게다가 양심이 가진다는 저 내용은 (iii)“의무와 법과 그리고 일반 의지에 대한” 내용이다(766). 여기서 특히 (i)은 양심의 구체성을, (iii)는 양심의 보편성을 보장해준다. 따라서 ⟪정신현상학⟫의 오랜 여정 가운데서 현상학자는 양심을 통해 처음으로 ‘구체적 보편자’를 발견하게 된다. 이제 보편적 가치를 가지는 순수의무와 특정한 현실에 얽혀있는 구체적 개별자는 매개 없는 통일의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 양심은 더 이상 도덕적 자기의식처럼 즉자적인 의무의 매체에 불과하지 않다. “결국 양심이란 이렇듯 긍정적이며 일반적인 매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각기 다른 여러 도덕적인 실체[즉자적인 의무]들을 거세하거나 근절시키는 부정적인 일자 내지는 절대적인 자기라고 하겠으며 더 나아가서는 어떤 특정한 하나의 의무를 이행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으로 정당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깨우치고 또 이를 행하는 의무에 준하는 단순한 행동일 뿐이다.”(766) 신을 찾던 개별자의 방황은 원래 자신이 서 있던 자리에서 끝을 맺는다. 양심이 “도덕적 순수성을 자기 내부에 정립함으로써 감성적인 것과 도덕적인 것이 결합”되는 덕분이다(767).

 요컨대 헤겔은 양심을 “즉자대자적으로 타당한 내용”(769)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대자적 존재, 심지어는 일종의 도덕적 천재로 낭만화해 묘사한다. 이와 같은 양심의 정체성은 타인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양심은 행위에 임하고 또 행위에 대해, 예컨대 그 가치를 자신에게 절대적인 것으로서 언표함으로써 타인에게 해당 행위의 보편적 타당성을 인정 받고 상호주관적인 현실에 안착한다. 그가 따르는 의무는 확언과 주저없는 수행에 힘입어 타인에게까지 일반화될 수 있는 객관적 의무로, 즉 “의무에 대한 신념이 곧 의무 [자체]”로 받아들여진다(777). 그러나 이처럼 대타적인 계기를 도입하는 것은 양심에게 양날의 검이다. 양심은 자신이 기존에 가졌던 대자성이 독자성인 동시에 고립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신념에 대한 타자의 인정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 역시 깨닫는다. 왜냐하면 그는 어디까지나 “절대적 수다성으로서의 사정, 즉 상황” 가운데서, 즉 절대적일 수 없는 상대적인 그만의 맥락에서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자신이 그 많은 상황을 […] 양심적인 입장에서 고려했다는 듯이 내세우는” 허세는 부릴 수 없는 것이 된다(773). 그 결과 양심이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는 형식적인 사실 자체는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그 내용의 보편적 타당성을 인정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화한다(Moyar, 2011: 156 참고).

 이로써 양심은 자신의 신념과 행위가 가진다고 믿었던 순수의무로서의 필연성, 보편성, 일반성을 상실하고 만다. “결국 이것은 양심의 진리도 도대체가 개별자의 자의이며 동시에 한낱 무의식적이며 자연적인 존재로서의 개별자가 지니는 우연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775) 여기서는 도덕적 자기의식을 괴롭혔던 순수성과 현실성 사이의 대립이 다만 새로운 차원에서 되풀이되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적 자기의식은 신의 실재를 요청함으로써 현실성을 부정하는 움직임을 취했다면, 양심은 순수의무의 순수성을 순전한 형식주의적인 성격으로 규정하고, 그리하여 순수의무의 내용이 그 자체로는 공허해 대신 내용으로서 투입된 개체의 자의를 의무로 위장시키는 것이라 부정한다. 다시 말해 양심은 “일반적 효력을 지닌 즉자적 본체로서의 의무 속에 그 자신의 자연적 개체성으로부터 연유된 내용을 밀어넣”게 되는 것이다(779). 이처럼 밀어넣어진 각자의 자의는 당연히 상호충돌하되, 모두가 자신의 자의를 순수의무로 생각할 것이므로, 동등한 권리를 가진 채로 충돌한다. “[…] 모든 내용은 모름지기 그것이 한정된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밖에 모든 다른 내용과 동일선상에 놓”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더 올바르게 보이는 자의라 할지라도, 즉 “그 자체 내의 특수적인 것은 지양해 버린 듯이 보일지라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777)

 대타적 계기를 도입함으로써 양심이 처하게 되는 이중성은 ‘무한정성과 한정성—같은 뜻으로 무규정성과 규정성—의 공존’이라 명명될 수 있다. 한편으로 양심의 무한정성은 양심적 행위자의 1인칭적 시선에서 성립하는 절대적 자유로부터 비롯한다. 양심은 그것이 무엇이든 자신이 옳은 것이라 믿기만 한다면, 그리고 그 신념을 단언하고 행위에 옮길 수만 있다면 그것을 의무로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자유는 동시에 양심적 행위자가 객관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일관성을 잃고 오직 주관적인 판단에 입각해, 자신의 ‘입맛에 따라’ 선악을 구별할 여지를 남긴다. 

 “[…] 한정적이면서도 고정된 존재로서의 매체 자체나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상화된 의무란 모두가 이 행동하는 정신에게는 한낱 계기에 지나지 않을 이다. 따라서 이 정신은 자기가 행동하는 바 그 진상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드러내 보여준 것을 다시금 변위, 변조하거나, 아니 그보다도 오히려 이 단계에 이르자마자 곧바로 그것을 변위시켜 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이 실존하는 참모습이란 그에게 있어서 결코 이와 같이 외면으로 드러내 보여진 의무이거나 그에 대한 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이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 확신으로 간직하고 있는 현실이며 규정일 이기 때문이다.”(781, 강조는 필자)

 타인으로서는 “이 양심을 악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782). 행위의 내용이 타인에게 실질적인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법철학⟫에 따르면 설령 누구에게나 무해한 행위라고 할지라도, 타인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주관 속으로 고립되어 행위를 결단하는 과정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다(Brownlee, 2013: 83 및 88 등지 참고).

 다른 한편 양심의 한정성은 주지하다시피 행위란 개별자에 의해 특정하고 사실상 유일무이한 상황 가운데서 결단될 수밖에 없으므로 그 행위의 옳음이 다른 상황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지 의심스러우며, 타인 역시 이와 같은 의심을 바탕으로 양심적 행위의 보편적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데서 온다. 물론 양심에게는 타인의 회의에 맞서, 또는 애초에 회의가 발발하기 이전에 미리 언어로서 자신의 신념을 보호할 권리를 가진다. 헤겔에 따르면 양심이 구사하는 언어는—고백과 용서의 언어에 이르기 이전부터 이미—정신의 현존을 가능케 하는 언어의 진정한 본질을 보여준다. 언어는 양심적 행위가 가지는 신성성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행위를 추동하는 신념의 구체적인 내용과 배후의 의도 등은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비로소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신념을 언표하는 단언(Versicherung)의 언어는 추후 즉자적인 의무와의 무매개적 통일성을 담지하는 교단(Gemeinde)의 언어로 발전한다. 정신이 자신을 정신으로서 그저 확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을 정신으로서 아는 단계로까지 나아갈 경우 “이 의식은 자기의 지를 곧 종교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789 그리고 Siep, 2014: 201 참고.) 따라서 언어는 종교라는 정신형태의 도래를 예비할 뿐 아니라 양심의 한정성과 무한정성을 중재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한정된 내용을 가질 수밖에 없는 양심에게 그것을 보편화시킬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양심이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정신으로 남되, 도덕적 자기의식에서와 같은 모순으로 찢기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기제인 것이다.**

*“행위는 가치의 담지자로서의 자기표현적 개인성[개별성]과 연결되지 않는 이상 타인들에 의해 가치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이유(claim)가 없다. 문제는 나의 의무로서의 행위에 대한 나의 개입(commitment)이 어떻게 타인들에게 충분히 명시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 그로써 그들이 행위를 내가 그것을 의도한 조건들(terms)에 따라 평가할 수 있는지이다.” Moyar(2011), p.159.

**황설중(2019) 역시 유사한 해석을 내놓는다. “[…]한 개인의 양심은 그 순수성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타자에 대한 존재(Sein für Anderes)라고 하는 보편성을 지니지만, 과연 다른 개인들(의 양심들)이 이런 개별적 양심의 선택과 결정을 승인해 줄 것인가에 대한 의혹은 항상 남을 수밖에 없다. 현실적인 삶의 터전 위에서 어떤 행위란—비록 그것이 양심에서 나온 것이라 (주장한다) 하더라도—한정된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이제 이런 분열을 지양하고자 양심이 다시 붙드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황설중, <헤겔 ⟪정신현상학⟫에서의 언어>, ⟪철학연구⟫ 제47집, 2013, p.109.

 

2.2. 분기의 계기

 그러나 언어로써 무한정성 및 보편성을 거머쥔 양심은 앞서 언급했다시피 일관적인 신념과 행위 패턴을 견지하지 않고 태도의 무한교체를 일삼을 수 있다. 만일 언어를 통해 성취한 무한정성을 양심이 제어하지 않으면 단순히 태도를 교체하는 것을 넘어 아무런 구체적 태도도 내세우지 않는 무위에 이를 수도 있다. 양심이 그 어떤 형태로도 구체화될 수 있다면, 아무 형태로도 구체화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무위의 양태를 가지는 양심은 그 어떤 행위에도 임하지 않는 와중에 외화의 힘, 즉 현실과 접촉할 역량을 상실한다. 그는 무한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자신의 목소리가 진정으로 실체적인 즉자 또는 현존재에 가닿지 못하고 오직 스스로의 내면 속에서 메아리치는 것만을, 자신에게로 “환귀”하는 것만을 엿들을 뿐이다(791). 이처럼 변질된 양심이 바로 아름다운 영혼이다.

 “[…] 환귀는 결코 의식으로서의 자기가 바로 이 환귀를 통하여 즉자대자적일 수 있다는 의의를 지니는 것은 아닌바, 왜냐하면 그에게 본질적인 실재란 결코 즉자적인 것이 아닌 오직 의식 자체일 이기 때문이다. 이에 못지않게 의식은 또한 현존재적인 양태를 지닐 수도 없으니, 왜냐하면 대상적인 것이 여기서는 현실적인 자기에 대한 어떤 부정적 요소로 등장할 수는 없을 뿐더러 이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자기도 역시 구체적인 현실상에까지 다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791, 강조는 필자)

 그런데 양심이 아름다운 영혼으로 변질되는 사태는 단순히 가능한 일로 치부할 만큼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바꿔 말해 이 변질은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그저 그런 현상이 아니라 특정한 계기들을 거쳐 개연적으로 발생하는 데다 절대정신의 현현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2.1에서 상술한 특성을 가지는 양심을 행동하는 양심적 행위자와 행동하지 않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분기시키는, 그리하여 양심으로부터 아름다운 영혼을 파생시키는 구체적인 계기가 무엇인지 탐구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해석해낸 두 가지 가능한 분기의 계기들은 곧 추상화와 자기방어적 공격이다. 이 중에서도 핵심적인 계기는 추상화이고, 자기방어적 공격의 계기는 부차적인 것으로서 추상화의 계기가 발동할 수 있는 배경을 제시해줄 것이다.

 

2.2.1. 추상화

 아름다운 영혼이 양심으로부터 파생되는 가장 핵심적인 양태는 양심의 극단적인 추상화를 거쳐서이다. 교단의 언어를 구사하기에 이른 양심은 헤겔에 따르면 “일체의 외면성 그 자체가 소멸돼 버린 바로 그 자신의 깊은 내면에로—다시 말하면 자아=자아라고 하는 직관의 상태로 복귀”한다. “이렇듯 직관된 상태에서는 자아야말로 일체의 본질성이며 현존재성을 뜻한다.” 이제 양심은 세계의 모든 것을 오로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비롯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는 겉보기와 달리 주관과 현실 사이의 조화 같은 바람직한 사태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아가 대자적 성격을 띠도록 하는 것과 그리고 자아에게 즉자적인 양태를 띠고 나타나거나 혹은 현존재로서 나타나는 모든 이 더 이상 의식 자체를 위하여 아무런 지주나 실체의 구실을 수도 없는 그러한 추상의 상태로 움츠러들고 말았다.”(789, 강조는 필자). 제어되지 않는 무한정한 위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된 양심적 주체는 그 어떤 현존하는 실체든 해체하고 붕괴시켜 자기의 내면으로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주체에게는 그에 맞설 진정한 의미의 대-상(Gegen-stand)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에 관한 의식이란 오직 자기에 관한 지일 뿐이다. 이제 온갖 생과 정신적인 본질성은 빠짐없이 이러한 자기 속으로 복귀함으로써 마침내 이 모든 것은 자아 그 자체와의 상이점을 상실하기에 이른다.” 헤겔은 이제 양심이 지와 진리의 현실적 통일이기는커녕 “절대적 허위(Unwahrheit)”가 되었다고 일갈한다(790). 양심은 외화력을, 그로써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했으므로 그렇다.

 이렇게 양심은 “그 자신의 내면에 간직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자태가 행동과 현존재에 밀려들어옴으로써 오욕될 수도 있다는 불안에 떠는” 영혼이 된다. 그는 현실 속의 진정한 대상이 아닌 “자기가 스스로 산출해 내는 […] 허황된 대상”만을 가질 뿐이다. 또 대상에 대한 인식을 위시한 자기인식 가운데서 자기 자신마저 비본질적인 대상으로 전락시켜 “자기의 상실만을 자초”한다(791). 동시에 이렇게 상실된 자기, 즉 모든 것을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산출할 줄 아는 막강한 자기에 대한 동경을 품는다. 무소불위의 창조력에 대한 동경과 현실에서의 절대적 무력감을 모두 품은 주체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이 대목에 이르러 헤겔은 처음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이름을 부른다.

 “마침내 자기가 간직하고 있는 여러 계기는 이와 같이 투명한 순수성 속에 담겨지게 되거니와 여기서 불행하면서도 이른바 아름다운 마음[영혼]이란 것은 어느덧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광채를 잃어가면서 마치 공중으로 사라져 가는 무형의 아지랭이와도 같이 소멸돼 버리고 만다.”(792)

 그런데 (i)이 소멸—이자 동시에, 역설적이지만 아름다운 영혼의 실질적인 생존 양태—는 정확히 어떤 이유로 발발하는 것인가? 이 의문은 다른 두 가지 핵심적 의문들과 결합된다. 하나는 (ii)어째서 행동과 현존재가 아름다운 영혼을 오욕되게 만드느냐는 의문으로, (i)에 답하기 위한 예비적 질문이다. 또 하나는 (iii)‘자아=자아’의 공식을 구현하기에 이른 양심의 성취, 즉 자아와 대상의 동일시야말로 헤겔이 자신의 철학에서 목표하던 바가 아니었느냐는 의문이다(Siep, 2014: 55 참고). 이 세 의문들에 공통적으로 답할 수 있게 해주는 열쇠말은 바로 ‘타인’ 그리고 ‘인륜적 공동체’이다. 주관정신으로서의 자기는 비록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아무리 막강하고 심지어는 절대적일지라도 엄연히 특정한 인륜적 공동체 안의 자기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가 독자적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타인과 상호인정의 관계를 이룩해야만 한다(Wilford, 2019: 498 참고).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표현하면 정신은 반드시 사회적인 정신이라는 이 사실을 실마리로 삼는다면 세 질문들을 역순으로 대답해나갈 수 있다.

 첫째, 자아와 대상 사이의 구별을 지양하고 둘의 통일을 도모하는 것이 헤겔의 학적 목표일 때, 모든 대상을 자신의 내면 속에서 산출하고 또 교체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영혼은 어째서 헤겔의 철학적 천사가 아닌 악마가 되는가? 우선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서설에서 학문의 이상을 논하며 “절대적인 타재성 속에서 순수하게 자기를 인식하는 , 바로 이러한 영기와도 같은 것이 다름아닌 학문의 근원과 토대가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지식의 보편적 형태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83, 강조는 필자).* 그러나 아름다운 영혼의 대상은 헤겔이 앞서 말한 “타재성(Anderssein)”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아름다운 영혼이 자신의 대상과 이루는 통일도 헤겔이 지향하는 통일이 아니다. 왜 그러한지는 같은 사태에 대한 두 가지 표현으로써 해명될 수 있다. 한편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대상은 아름다운 영혼과 무매개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타’재가 아니며, 비자립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름다운 영혼의 대상은 현존재를 결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타‘재’가 아니며,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헤겔이 자아와 대상 사이의 동일성을 목표로 삼을 때의 “대상”이란 현실적이고 자립적인, 외타적 존재여야 한다. 동시에, 그 존재는 자아가 그 안에서 자신을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아와 동등한 주체성을 지녀야 한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는 대상은 타인뿐임은 ⟪정신현상학⟫에서 ‘자기의식’ 장을 통해 이미 알려져있다. “자기-의식은 그것과 다른 자기-의식과의 관계 속에서만 순수한 자기-의식을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스티븐 홀게이트, 2019: 137, 강조는 필자). 따라서 아름다운 영혼은 타인들로부터 절연되어 자신의 내면만을 모험하기에, 헤겔의 학적 요구를 만족시키는 주체가 아니다.

*Siep(2014), p.55 참조.

 둘째, 어째서 행동과 현실적인 현존재는 아름다운 영혼을 오욕되게 만드는가? 이를 위해 잠시 López(2012)의 통찰력 있는 목소리를 빌리고자 한다.

 “양심은 그러므로, 인정된 것의 모든 구체적 영역으로부터 고로 의미있는 행위들로부터 떨어져있는 의무의 순수한 개념에 적합한 침묵 상태(muteness)에 남아있고 싶지 않다면 행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 한편으로 그렇다면, [양심]은 행위해야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양심]은 각 행위에 대해 그것이 자신에게 의미하는 바와 타인들에게 의미하는 사이의안티테제 있을 임을 늘 알아야 한다. 위반(transgression) 본성적 가능성은 언제나 발발한다. 왜냐하면 나와 타인 사이의 관계의 핵심에는 심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López, 2012: 60, 강조는 필자)

 헤겔은 순수주체는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함으로써 제 본질을 보존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로써 텅 비고 빈곤해짐을 꿰뚫는다. López(2012)가 “침묵 상태”로 표현한 이 빈곤을 타개하려면 양심은 행동해야만 하고, 그렇게 하자마자 현실에 진입함으로써 현존재를 획득할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진입된 현실이 사적인 것이 아닌 인륜적 공동체 내에서 전개되는 공적인, 상호주관적인 현실이라는 사실이다. 헤겔에게 현실이란 본성적으로 상이한 자기들과 함께하는 현실로, 그 안에서는 수많은 타인들이 수많은 관점과 상황에서 웅성거리고 또 분주하고 있다. 이들은 2.1에서 양심의 한정성을 논하며 상술한 바와 같이 양심적 행위자의 안티테제를 성립시켜 양심적 행위자의 행위를 자신들의 절대적 신념에 대한 위반으로, 즉 그만의 상대적인 정당성만을 갖는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이는 아름다운 영혼이 동경해 마지 않았던 자신의 절대성을 붕괴시킨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영혼이 겪는 오욕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헤겔에게 보편성의 상실이 대타적 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보편성과의 대립은 “또 다른 개별자” 즉 타인을 향한 대립과 반드시 함께 발생한다(792). 개별자는 행위 가운데서 특수한 내용을 취하기 때문에만 보편성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내용이 타인의 내용과 충돌하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아름다운 영혼의 발생과 소멸에서 ‘타인’ 그리고 ‘인륜적 공동체’가 중요한 열쇠말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첫 번째 물음을 통해 아름다운 영혼의 소멸의 필연성을, 두 번째 물음을 통해 아름다운 영혼의 소멸의 개연성을 확보하였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영혼은 어째서 소멸하는가?’의 질문에도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아름다운 영혼의 “무형의 아지랭이와도 같[은] 소멸”(792)이 텍스트에서 돋보이는 바와 달리 결코 그것의 발생과 동시에 발발하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해당 인용문에 언급된 소멸은 아름다운 영혼이 자신의 고립을 뚫고 양심적 행위자로서의 타인과 마주한 후, 그와 대립하는 가운데 서론에서 필자가 설명한 바와 같이 개체적이고 특수한 기준을 토대로 상대방을 비평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무한정성을 상실할 때 비로소 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무한정성이란 아름다운 영혼을 양심으로부터 파생시켜준 계기인 극단적 추상성과 통한다. 비평의 개체적이고 특수한 기준을 가지는 순간 아름다운 영혼은 현실성 있는 내용을 획득하며 그 자신도 현존재로서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Firnet(2015)은 아름다운 영혼이 가지게 되는 이 기준이 그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온 것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Firnet, 2015: 189 참고). 구체화와 함께 아름다운 영혼의 정체성을 이루는 고립 또는 절연이 파괴되고, 고백과 용서의 언어를 통한 상호인정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타인 및 공동체와의 대면 가운데서 구체적 내용을 획득함으로서 아름다운 영혼이 소멸한다는 이 대답은, 아름다운 영혼의 발생이 타인 및 공동체로부터의 고립 가운데서 구체적 내용을 소지하지 않을 때, 즉 추상화가 발발할 때 이루어진다는 2.2.1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2.2.2. 자기방어적 공격

 앞서 2.1에서 필자는 양심의 무한정성을 논하면서 그것이 자유롭게 결단하는 행위들이 타인에게 악으로 비춰질 수 있으며, 그 이유로 결단의 전적인 주관성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 ⟪정신현상학⟫ 본문에서 헤겔은 다른 이유를 든다. 그에 따르면 타인이 특정 자기의 자의를 악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이들 타인도 역시 그[특정한 자기]와 마찬가지로 자유로이 방면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여기서 이들은 자기 자신만이 그와 같이 드러내 보여진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스스로의 의식 속에서 이와 같이 밖으로 드러내진 것을 해체시키고 판단하며 설명하는 가운데 이를 파멸시킴으로써 그들 스스로의 자기를 보존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서술되어있다(782). 여기서 헤겔은 아름다운 영혼의 출현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황상 이와 같은 서술은 아름다운 영혼에 걸맞은 성격의 것이다. 이상의 서술을 통해 아름다운 영혼이 파생하는 배경, 또는 경로를 재구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특정한 양심적 행위자가 출현해 자신의 자의적인 신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공표한다. 그런데 이 공표를 청취한 이들 중에는 이 양심적 행위자의 신념과 대립되는 신념을 가진 타인, 아니면 적어도 그 신념의 절대성을 의심하는 타인이 존재할 수 있다. 헤겔이 상황의, 그에 따른 관점의 수다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했음을 상기하면 이러한 비판적 청취자의 존재는 단순히 가능한 것을 넘어 필연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취자로서는 앞선 양심적 행위자의 행위를 비평함으로써 그와 양립할 수 없는 자신의 내면을 보호할 동기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이 청취자가 이와 같은 보호만을 일삼을 뿐, 실제로 구체적인 신념을 가지지도 그에 따라 행위에 임하지도 않는다면 극단적 추상성 가운데서 아름다운 영혼으로 전락한다. (물론 2.2.1에서 밝혔듯 저 자기보호 속에 이미 현존재성과 구체성의 씨앗이 들어가있지만 말이다.)

 

3. 결론

 이로써 아름다운 영혼의 발생을 양심의 추상화 및 자기방어적 공격의 결과로 해석하는 작업을 마무리지었다. 이와 같은 해석적 작업의 의의는 최소한 세 가지이다. 첫째, 서론에서 개괄한 용서 및 상호인정의 가능조건인 양심과 아름다운 영혼 사이의 동일성의 근원을 추적한다. 2.1에서 제시한 양심과 아름다운 영혼의 공통된 특성 가운데서도 무한정성의 제어 불능이 양심을 추상화시켜 아름다운 영혼을 파생시킨다는 필자의 해석은 두 정신 형태들이 근본적으로 동종의 것이며, 용서 및 상호인정에 이르기 이전에 이미 상호연속적임을 보증한다. 둘째,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경험을 지배하는 ‘즉자-대타-대자’의 구조가 ‘양심, 아름다운 마음, 악과 그 용서’ 절에서도 되풀이됨을 보여준다. 장 이뽈리뜨에 따르면 헤겔에게 “모든 생은 근원적인 직접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분열과 매개의 시기를 거친 후에 이 직접성으로 복귀하는 식으로 생성, 전개된다.”(장 이폴리트, 2014: 223.) ⟪정신현상학⟫의 ‘정신’ 장 자체가 개인이 인륜적 공동체와의 즉자적 통일의 상태로부터 교양의 세계에서의 외화를 거쳐, 더 이상 외화의 산물이나 타인에게 좌지우지되는 순전한 대타적 존재에 머물지 않고 타인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하는 대자적 존재가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의 축소판이 양심과 관련된 대목에서도 재현된다는 것이 본 글의 주장을 통해 보증된다. 행위하는 의식과 판단하는 의식은 양심이라는 공통의 정신 형태 속에서 즉자적으로 통일되어 있다가, 양심 일부의 추상화를 계기로 행위하는 양심과 판단하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분기된다. 둘은 서로를 자신의 타자로 보며 대립의 날을 세우지만, 결국 상대방에게서 자신의 면모를 발견하는, 즉 대자적 인식을 성취하는 상호인정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셋째, ⟪법철학⟫의 도덕성(Moralität) 장의 내용을 예비한다. ⟪법철학⟫에서는 아름다운 영혼이 양심으로부터 기원할 수 있는 악의 가장 궁극적인 형태로 기술되며, 아름다운 영혼의 국면을 거쳐서 비로소 도덕성의 세계관이 인륜성의 세계관으로 이행한다. 그런데 필자의 해석에 의거한다면 이와 같은 헤겔의 주장은 ⟪정신현상학⟫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양심의 파생태이며, 그것이 용서와 상호인정을 거쳐 소멸함으로써 비로소 절대정신이 현현하고 객관정신에 해당하는 종교공동체에 대한 헤겔의 서술이 개시된다. 서론에서 제기했던 의문으로 돌아가면, 헤겔에게 대립과 연속성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대립이 오히려 연속을 이끈다. “[…]서로가 정반대되는 것은 오직 서로의 대립을 이루는 가운데서도 어디까지나 서로가 전적으로 삼호침투된 완전한 내적인 것을 뜻하는 셈이다.”(808) 이 인용문과 일맥상통하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의 서설에서 선보인 아름다운 비유로써 이 글을 끝마치고자 한다.

 “[…] 활짝 핀 꽃은 오히려 그 자신이 거두어들인 열매로 인해서 식물의 거짓된 현존재임이 밝혀지면서 이제 그 열매는 꽃봉오리를 대신해서 식물의 진리로서 등장한다. 물론 여기서 이들 양측이 지니는 형식들은 서로가 구별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들은 서로가 용납될 수 없는 입장에서 상호 배척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들 서로의 형식은 그 자체의 유동적 성질에 의하여 상호간의 유기적 통일을 이루는 저마다의 계기를 뜻함으로써 결코 이들은 서로가 상치될 수 없는 관계에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어느 것도 없어서는 안 될 필연적 계기를 이루는 것이다(60-61).”

 

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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