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성염 역주, 『고백록』, 경세원, 2016 (번역이 충격적으로 매끄럽다!!!)

 『고백록』은 돌아온 탕아의 신에 대한 찬가이자 그 앞에서의 겸손에 대한 찬가다. 1권부터 9권까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스스로의 생을 되돌아보며 불변하는 최고선인 하나님을 저버리고 열등한 선들—이교도 문학, 수사학, 공동의 악행을 통한 유대감, 마니교, 성적 욕망, 허영심 등—에 탐닉했음을 고백하며, 참된 행복에 대해 모르던 그와 같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게 되었는지를 회고의 형식으로 기술한다. 10권부터 13권까지는 인간적 욕망, 시간,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만의 독창적인 철학이 전개된다.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느끼고 배운 것을 정리하고, 10권부터 13권까지는 간단하게 요약/논평을 하고자 한다.


1. 신비체험을 겪은 이에게, 신비체험 이전의 나날은 신의 부재가 아닌 신의 침묵이 지배하는 시간으로 해석된다.

2. 아우구스티누스, 나아가 신학자들의 딜레마는 가변적인 지상적 존재자들을 부끄러워하면서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구제해야 한다는 데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적 존재자들을 멸시하면서도 정당화하며, 신이 가호하는 영역으로부터 밀어내면서도 그 안에 포섭시킨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선이되, 선에는 위계가 있으며, 다만 드높은 선을 저버리고 열등한 선으로 향하는 의지의 전도가 곧 악이 된다. 이 악에 실체가 없음은 마니교를 등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목숨처럼 소중한 믿음이다.

3. 표면적인 현상으로부터 더욱 근원적인 것으로 파고들어가는 일, 가변적인 것들에서 눈을 돌리고 그것을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불변하는 것들을 직관하는 일. 7, 17, 23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물체로부터 하느님께로 점차 상승(p.260)”한다. 플라톤은 유사한 작업을 스스로 행하며 그것을 죽음의 수련이라 불렀고,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두 사람의 방향성을 계승했다. 후썰에게는 현상학적 환원이 진리로 가는 동종의 열쇠였고 말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기능하는 서양철학적 서사가 있음을 발견할 때의 희열은 철학하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4. “말하자면 말씀이 살이 된 것입니다.(7,18,24)” ‘말씀’과 ‘살’이라는 이미지의 충돌이 이 표현을 무게감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5. 아우구스티누스와 후썰의 공통점. 후썰의 경우 의미의 원천인 초월론적 주관이 모든 의미있는 존재자를 존재케 하며, 의미있는 존재자는 그 의미있음 및 존재를 통해 의미의 원천을 소급지시한다. 마치 아우구스티누스가 “모든 것은 당신께로부터 존재하며, 그것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분명하기 이를 데 없는 증거만으로 당신께로부터 존재함을(7,20,26)” 고백하듯이. 그러나 후썰의 접근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지나치게 인식론적이고 오만하게 여겨질 것이다. “보는 그 대상만 아니고 본다는 사실 역시 받지 않은 것처럼 뽐낼 것이 아(7,21,27)”니기 때문이다.

6. 곳곳의 여성혐오. 대표적으로 어머니 모니카의 유순한 성품을 찬양하는 9,9,19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과거의 관점이라는 걸 알면서도 철학사 내에서 여성혐오를 발견할 때마다 솔직히 힘이 빠진다.

7. 사람이 어떤 것을 진리로 믿는 데는 이성뿐만 아니라 사전적인 직관과 감정, 그가 처해있는 사회적인 맥락 역시 관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오늘날 많은 무신론자/불가지론자들로 하여금 신앙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벽인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전혀 없었다. 그에게 신은 거의 자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다만 그 신이 누구고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나아가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상실에 대한 불안을 유독 크게 느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성격이 그를 영원하지 못한 행복은 행복이 아니라는 그리스도교적 직관으로 강하게 이끌었을 것이다. 한시성과 소멸이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cf. 아우구스티누스가 학문에 몰두하는 양대동기인, 죽음에 대한 공포와 진리에 대한 사랑은 사실 일맥상통한다.)

 물론 같은 안식이라면 영원하지 못한 안식보다는 영원한 안식이 더욱 큰 평안이 되리라는 명제에는 어떤 성격을 지닌 사람이든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거대해진, 더없이 낭만화된 평안에 얼마나 큰 가치를 부여할 것이냐는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영원한 안식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믿어온 나에게는 저 명제가 거의 무가치하기까지 하다. 삶은 결국 불안 속에서 간헐적이고 발작적으로 이는 활력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불안에 동의하는 일, 심지어는 만족하는 일이 좋은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연습이라고도 생각한다.

 부끄럽게도, 또 불행하게도 내가 이 연습에 성공한 적은 없다. 서양철학의 역사 역시 지속적으로 이 불안을 견디지 못했다고 읽힌다. 파르메니데스 이래로, 어쩌면 불변하는 아르케를 찾고자 했던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부터 철학자들은 변화에 대한 수치심과 그것이 전제하는 소멸에 대한 은밀한 또는 노골적인 공포를 느껴왔다. 반면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쉽게 말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강박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진리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변하지 않는 것이어서, 또는 그런 것이어야만 해서였을까? 어쩌면 그저 특정한 방향으로 기울어진 해석들--다시 말해 진리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이 누적된 결과일 뿐인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진리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작업마저 해석의 문제라는 데 인간 지식의 근본적인 한계와 아름다움이 자리한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가변성에 대한 경멸이 헤브라이즘/그리스도교 전통 내부에서도 그 씨앗이 발견되는지, 아니면 철저히 플라톤주의의 영향에 따른 것인지이다. 이 질문은 성경을 꼼꼼히 읽어봐야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10권 요약 

“당신의 눈으로 보시기에도 제가 저에게 의문점이 되고 말았으니 제 자신이 곧 번뇌입니다.(10,33,50)”

 아우구스티누스는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제 안에 있는 신에 대한 이해를 구한 뒤, 현재의 자신에 대한 고백을 이어나간다.

 자기인식의 가능근거는 신에 대한 인식이며(10,6,9) 신에 대한 인식의 가능조건은 열린 마음(10,6,10)과 영적인 감관인 기억의 작동이다. 기억은 신체 감관을 통해 마음에 인각된 외부 대상들의 표상imagines뿐 아니라 정감affectiones 및 수와 같은 추상적 개념rationes 자체 또한 저장해놓고 있다. 특히 추상적 개념의 경우, 오롯이 기억의 힘만으로 습득되었으므로 “이미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10,10,17)”에 인식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인식의 타당성은 “자기 내면에 거처하는 신적 광명Magister에 문의(p.363 각주 86번)”함으로써 얻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식 이론인 조명설은 여러 모로 플라톤의 상기론을 연상시킨다.

 행복 역시 이미 기억되어있는, 그럼에도 수의 개념과 달리 “획득해야 한다고 애쓰”게 만드는 개념이다(10,21,30). 행복은 모두에게 공통되며 다른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10,22,31). 이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받은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을 세속에서 가능한 것이자 인간적인 한계 내에서 달성되는 것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하나님] 곁에서, 당신을 두고, 당신 때문에 기뻐함, 그것 자체(10,22,32)”만을 행복으로 규정한다. 그가 “세상의 순경(10,28,39)”이라 부르는 인간적 행복은 모두 무상하며 불행에 대한 두려움으로 덧씌워져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무상하지 않은 영원한 행복을 기억하고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은 그들이 “사람을 차라리 불행하게 만드는 다른 것들에다 더 마음을 쓰기 때문(10,23,33)”이거나 “자기들이 진리라고 [잘못] 사랑하는 바로 그것(10,23,34)”이 거짓임을 자인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억 속의 신은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으로 현존한다. 기억을 통해서만 발견되므로 그 안에 현존하는 동시에, 정신animus의 불변하는 정신으로서 기억 바깥에 현존한다(10,17,26이나 10,25,36). 한편 신의 자비만이 행복에 대한 인간의 희망을 가능케 한다. 행복을 위한 신의 명령 중 하나는 절제이고, 절제 역시 신의 자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호기심), 그리고 세속의 야심을 경계하고자 한다.

Q1. 『고백록』은 돌아온 탕아의 겸손에 대한 찬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 앞에서 자신을 낮추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이를 단순히 사적인 생활의 모토로 삼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윤리로서 확립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노력의 대표적인 예는 인간의 선업을 모두 신의 은총 덕으로 돌리는 태도이다(10,2,2나 10,4,5). 은총은 그 정의상 타율적이며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1)선을 행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자유의지가 (선을 향해) 작동하는가? 다시 말해 인간의 선업을 일으키는 원인 중에 인간의 의지가 포함되는가?

이에 “‘의지의 분열’ 같은 표현으로 보아 포함되지만, 그 선의지 역시 하나님의 덕”이라는 대답이 예상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은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그 어떤 선업도 이룰 수 없는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2)아우구스티누스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악에 대한 마니교의 설명이 지닌 문제, 즉 악의 원인이 인간 바깥으로 귀속되는 문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악의 원인이 ‘신이 자비를 베풀지 않기로 함’으로 이해될 소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나아가 (3)인간의 의지 역시 그다지 자유롭지 않은 것이 되지 않는가? 선을 행할 경우엔 그것이 신의 은총 덕분이 되고, 큰 선보다 작은 선을 탐함으로써 악을 행할 경우 오직 그 경우에만 의지가 오롯이 인간의 힘으로 발휘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때 인간의 의지는 자유의지가 아니라 단순한 악의지가 된다. 이에 “악 역시 더욱 극적인 회심을 예비하는 자비의 산물이다”라고 대답하기엔, 그 경우 악은 악이 아니거나 악이 신의 소행이 되며, 신이 내린 자비의 산물에 실체가 없어지는 일까지 생긴다.

위 문제의 구체적인 예로 ‘명령의 역설’을 들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은 인간에게 절제를 명령하지만(10,29,40), 절제는 선업이므로 그 명령에 따르는 일 역시 명령자의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당신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절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10,31,45)”). 그런데 명령자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명령을 명령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명령의 성격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cf) 인간의 자유의지가 구현되는 표면적 차원과 모든 것이 신의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심층적 차원의 구별?

cf2) 1차적인 원인으로서의 신의 계획/궤도 설정, 2차적인 원인으로서의 개개인의 의지적 결단. 은총은 그런데 어느 단계에서 개입하는가.

Q1-1. 아우구스티누스의 절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겐 절제가 아니라 즐거움의 지나친 억제, 즉 ‘목석같음’으로 여겨질 것이다. 지상의 쾌락 자체가 문제인가, 아니면 그 과도함이 문제인가?

Q1-2. 건강을 위해 음식을 먹는 일은 허락되지만, 음식을 먹는 일은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로서 쾌락을 낳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욕구를 충족하면서 쾌락을 느끼지 않는 일이 가능한가? 혹은 이 불가능성이야말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가?

Q1-3. 쾌락의 향유가 경건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신보다 사랑하는 것이 생기기 때문인가? 오히려 쾌락을 느끼면서 신이 이토록 즐거운 삶을 인간에게 선물했다는 논리도 가능하지 않은가?

Q2.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은, 형상보다 모자란 현실의 존재자들을 인식함은 형상에 대한 선행적인 앎을 전제하며, 따라서 형상에 대한 앎은 상기anamnesis라는 플라톤의 상기론을 연상시킨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조명설은 플라톤의 상기론을 어떻게 계승하거나 비판하는가?

cf) 앎의 출처(탄생 전의 기억 vs 자기 안의 신)/앎의 방식(대화 및 상호질의 등의 철학 vs 문의)/앎의 기제(상기 또는 연상 vs 조명illuminatio)/앎의 대상(불변하는 형상)/앎의 양상(지혜사랑 vs 하나님에 대한 사랑)

Q2-1. 망각의 기억됨이라는 역설에 부딪침에 있어(10,16,24-25) 아우구스티누스는 망각에 대한 기억/앎과 망각된 개별 사태들에 대한 앎을, 나아가 망각의 개념과 망각의 작용을 혼동하는 것이 아닌가? cf) 무지의 지, 무의 존재

Q3.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 안에서가 아니면 제가 어디서 당신을 만나 당신을 배워 알았겠습니까?(10,26,37)”이나 “당신 안에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을 것들[피조물](10,27,38)” 등의 표현에서 ‘신-안의-존재’라는 존재 개념을 펼친다. 이때의 ‘안의’, ‘안에서’, ‘안에’ 존재함은 어떤 존재 양태를 가리키는가?

cf) 하나님 안에서의 배움=하나님으로부터의 배움. 형상이 내포된 근원(누스)이라는 신플라톤주의적 아이디어.

*

11권 요약

 “기대하는 바가 주시하는 바를 거쳐서 기억하는 바로 옮겨간다.(11,28,37)”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음이 분명한 이유는 그것들이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가변적인 피조물의 경우 존재하기 전과 존재 사이가 뚜렷이 구별된다. 창조의 연장은 신의 말씀이다. 가변적 존재자들이 시간에 구애받는 것과 달리 하나님의 곁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영원히 발설(11,7,9)”된다. 창조의 동기는 마치 플로티누스의 최고선인 일자가 스스로를 보존하면서도 확산되듯 하나님이 “거저 베푸는 선성(11,10,12 각주 68번)”이다. 단, 플로티누스의 필연적 유출설에서와 달리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피조물이 선할 것을 의도하면서 자유로운 창조를 행한다.

 마니교도들과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더냐?”라고 물으며 “전에는 한 번도 조성할 일이 없는 것을 조성하려는 의지라는 것이 발생했는데 어떻게 그것이 정말 영원이라는 말인가? [...] 피조물 또한 왜 영원하지 않단 말인가?(11,10,12)”라고 힐문한다. 그들은 시간을 초월해있는 신을 시간을 통해, 시간에 갇힌 채 바라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 피조물도 만들어지기 전에는 아무 피조물도 만들어지지 않았다(11,12,14)” 그리고 “[시간 역시 피조물이기에]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하늘과 땅이 만들어지기 전인] 그때는’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11,13,15)”는다고 못 박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인 비시간적 영원과 대비되어 가변적 존재자들의 존재를 지배하는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기 시작한다. 시간 탐구의 어려움은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현재마저 “그것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는 바로 거기에 있(11,14,17)”다는 데 자리한다. 현재는 간격/폭/지속/연장이 없는 점이기 때문이다(11,15,20).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과거와 미래를 회상하거나 예언한다. 이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로서, 그러나 점적인 것이기보다 지속하고 연장을 가진 현재로서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회상의 경우 “지나가버린 사건 자체가 아니고 그 사건들이 지나가면서 감각을 통해서 영혼에 마치 발자국처럼 새겨놓은 표상, 그 사건들의 표상에 의해서 개념된 언어들이 우러나는 것(11,18,23)”이다. 기대/예감의 경우 “이미 존재하는, 닥쳐올 것들의 인과 혹은 표징이 보(11,18,24)”이는 것이다. 현재 역시 주시하는 시선의 지향물로서 영혼 속에, 기억 속에 존재한다. 그렇게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11,20,26)”가 된다. 시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이기보다 영혼/기억이 작용한 결과임이 밝혀지는 대목이다.

 나아가 사람들은 시간을 재기도 한다. 시간을 객관적인 것으로 생각할 경우 측정은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난다(11,27,34).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과거와 미래), 간격이 없기 때문에(현재), 또는 종점이 없기 때문(지나가고 있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측정되는 것은 객관적인 시간도, 물체의 운동도(11,24,31), “지나가버린 사물들 [자체]”도 아니라 “그것들이 지나가버린 다음에도 [...] 남는 그 인상 [...] 현전하는 그 인상(11,27,36)”이다. “주시는 지속을 갖고 있으며(기대와 회상을 함께 작동시키므로), 존재하게 될 미래가, 주시를 거쳐서, 과거라는 비존재를 향하게 된다.(11,28,37)” 시간이 영혼의 확장distentio임은 일종의 분산dissipatio을 가리키며, 이는 영원이 함축하는 모든 것의 동시적 집중과 대비된다.

 폴 리쾨르는 인간의 시간인식을 집중의 이완의 변증법으로 설명하며, 이는 후썰이 현재에 대한 원본적인 직관은 늘 파지와 예지를 동원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통한다.

Q1. 현재는 왜 영혼 속에 존재하는가? 간격/폭/지속/연장이 없다고 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 사유의 한계로 인해 그 특유한 존재에 대해 말하지 못할 뿐인 것은 아닐까?

Q1-1. 시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이 아닌, 영혼/기억이 작용한 결과라면 왜 서로 다른 영혼을 지닌 모든 사람에게 같은 시간이 보장되(는 것처럼 보이)는가?

cf)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 속에서 감지되는 주관적, 인식론적 시간과 “운동의 변화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객관적, 존재론적 시간을 구별하고 있다(12,11,14).

Q2. 마니교도들의 힐문에 대한 답변은 사실 하나님이 비시간적인 존재임을 보임으로써 해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에 대한 이토록 세밀한, 어찌 보면 세속적인 탐구를 고백록에 포함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cf) 시간에 구애되는 인간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영원을 사는 신 사이의 심연을 보이기 위해?

cf) 현상학자 후설의 경우, 아우구스티누스의 주관적 시간 개념을 이어받아 인간의 시간의식을 의미의 보편적, 절대적 기원으로 설정한다. 후설의 시간의식은 각각의 모든 존재자를 어떤 특정한 존재자로서 해석해내는 작용의 원천이다. 그런데 물 자체의 존재에 대해 판단을 중지한 후설에게 ‘인식됨/의미를 가짐’과 ‘존재함’ 사이의 간극은 없다. 의미의 기원이 되는 인간의 의식은 존재의 기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에 대해 탐구한 이유가 인간과 신 사이의 심연을 보이기 위해서였다면, 후설은 그를 계승했으면서도 정반대되는 결론을 낸 것으로 보인다. 시간의식에 대한 탐구를 통해 도리어 인간의 신적이고 창조적인 면모를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

12권 요약

 “당신의 지존 앞에서 제 미천한 언어가 고백을 드립니다, 당신께서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고.(12,2,2)”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1장을 해석하며 태초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과 땅이 무엇인지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땅이란 “전적으로 무는 아니”되 “아무런 형상을 갖추지 못한 어떤 무형(12,3,3)”의 질료이므로 마치 가지적이거나 감각적인 형상을 갖춘 듯이 상상되어선 안 된다. 질료는 “[한] 형상으로부터 [다른] 형상으로 건너가는 그 전환(12,6,6)”의 담지자로서 자신의 창조주와 달리 (형상을 만날 경우) 시간에 따라 가변적이 된다. 이러한 땅은 성자에 해당하는 말씀/태초principio/지혜—“모든 피조물에 앞서 창조된(12,15,20)”—안에서 무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무로부터의 창조 개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증명한다.

 창조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이 “무형의 질료에다 보이는 형상(12,8,8)”이 부여되어 물질세계 또는 자연사물이 탄생한다. 물론 이 창조가 성경에 쓰인 대로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은 아니다. 질료는 이미 형상화된 채로 창조되며, 다만 소리가 노래에 우선하듯이 그런 방식으로만 형상에 우선한다. 시간은 형상의 변화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하늘과 땅 그 자체의 창조 당시에는 아직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대목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이나 4원인론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태초에 만들어진 하늘이란 “어떤 지적인 피조물”로서, “당신[하나님]과 함께 영원하지는 않고 단지 당신의 영원에 참여(12,9,9)”하는 천사와 같은 영적 존재들을 일컫는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하늘의 하늘이라고 부르는데, 땅은 형상 없이 그 자체로는 시간적 성격이 없고 하늘의 하늘 또한, 본래는 가변적이나 성부이신 하나님께 스스로를 의탁하므로 마찬가지로 시간적 성격을 갖지 않는다. 이것의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늘과 하늘 및 무형의 질료가 “날짜 언급 없이(12,13,16)” 창조되었다는 점을 든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성서 해석이 절대적이라고 믿지 않는다. 모세가 성경을 쓸 당시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가는 자신 안의 신으로부터 확실성을 보장받는 세계의 진리—이를테면 세계는 창조된 것이라는 점—보다도 불확실하다(12,25,35). 그럼에도 진솔한 신앙과 사랑의 원칙을 준수하는 한, 성서에 대한 여러 해석들은 서로 공존할 수 있다. 성경이 모든 것을 명시하고 있지도 않거니와, 단일한 진리가 아니라 “다수 인간들의 지각이 다양한 진리를 발견하(12,31,42)”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Q1. 성자가 최초의(비록 시간적인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피조물이라면 어떻게 성부와 일체를 이루는가? “당신으로부터 나셨으며 당신과 동등하시고(13,5,6)”라는 표현은 어째서 모순이 아닌가?

cf) 성자의 탄생은 제작이나 창조와 질적으로 다르다. 본질이 같은 존재자—이렇게 말해도 된다면—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 간의 본질이 유사할 뿐이라고 주장했던 아리우스 파는 이단으로 몰렸다.

Q2. 해석의 다양성은 어느 한도 내에서만 보장되는가? 그 한도는 어떻게 정해지며, 단순히 이견을 낸 자와 이단자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자신 안의 신으로부터 확실성을 보장받는 세계의 진리”는 충분히 객관적인가?

cf) “너무 육적인 해석들은 제외하고 하는 말이지만(12,30,41)”

cf) 텍스트, 전통, 인간적 이성과 경험

*

13권 요약

 “그러니 보십시오, 삼위일체이신 저의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13,5,6)”

 전권에서는 창조의 질료인, 형상인, 작용인(하나님의 의지)이 설명되는데, 13권은 창조의 목적인을 설명하는 것으로 문두를 열고 있다. 창조의 목적은 창조주의 필요가 아니라 피조물의 행복,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관에 따르면 영원한 안식이다. 이로부터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역설적인 존재임을 유추할 수 있다. 철학사적으로 보면, 탄생 이전에 육체로부터 자유로웠던 영혼이 알고 있던 형상들을 탄생 이후에 다시 기억하고자 하는 활동인 철학, 즉 지혜에 대한 사랑이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뒤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어 엿새 간 창조에 대한 우의적인allegorical 해석이 제시된다. 빛의 생김은 천사와 같은 영적 피조물들이 하나님께 전향하여 그의 비추임을 받고 영원에 참여하는 존재로서 형상화되는 과정을 뜻한다. 물 위에 감돌던 것은 성령이다. 성령은 인간에게 내려져 인간을 쇄신시키는 등 피조물과의 교류가 활발한데, 이는 플로티누스의 영혼이 질료를 형상화하는 작용을 연상시킨다. 해와 달과 별은 저마다의 수준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내려지는 상이한 원리들, 말하자면 지혜의 종류에 해당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아가 물과 땅을 구별하며 전자는 기적을 통해서만 신앙을 가지는 이방인들의 영역으로, 후자는 보이지 않는 것도 믿을 줄 아는, “절제할 줄 아는 [생]혼(13,21,31)”들의 영역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이것들에 이어 인간이 최후로 창조되었다는 내용은 인간에 대해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가리키는가? 인간은 물과 땅의 짐승들처럼 종류대로, 즉 운명적인 정체성이 있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하나님의 모상을 품은 채로 창조됨으로써, 무지에서 출발해 제 안에 자리한 신의 뜻을 자력으로 탐구하라는, 즉 “지성의 새로움을 갖고서 재형성(13,22,32)”되라는 임무를 지고 태어난다. 이 모상은 인간이 짐승들에 대해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한편 인간 중 여성은 보다 열등한 오성 또는 욕구를, 남성은 이성 또는 지성을 상징한다는 내용으로부터 여성을 지배의 대상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이해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상식처럼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창조의 마지막에 도래하는 안식일은 “저녁 없는 평화(13,35,50)”, 즉 상실의 위험이 전혀 없는 영원한 행복이자 참된 행복의 유일한 가능성, 나아가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희망 및 목적을 가리킨다.

Q1. 삼위일체는 “불가분의 구분”이자 “각위는 단순하면서도 다양하게 존재하고, 세 위는 자체로는 무한자이면서 서로 간에는 한정이 되”어야 하는 등 설명함에 있어 모순어법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신비(13,11,12)”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하나님]의 품에는 모순이라는 것이 없(12,25,34)”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언한다. 그렇다면 신비의 영역은 인간의 논리적 사유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가? 그에 대해서는 학(學)이 불가능하고 오직 신앙만이 가능한가?

cf) 알 수 없는 것을 알기 위한 인식론적 궁여지책으로서의 기도, 탄식, 시 등의 종교언어. 이성적 언어만이 실체에 다가가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Q1-1. “당신의 존재가 변함없이 인식하고 의욕하며, 또 당신의 인식이 변함없이 존재하고 의욕하며, 또 당신의 의지가 변함없이 존재하고 인식합니다(13,16,19)”라는 문장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특히 인식이 의욕한다거나, 의지가 인식한다는 내용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

Q2. 플로티누스의 유출설과 그것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론 사이엔 어떤 유사점 및 차이점이 있는가?

cf) 이상성, 「플로티누스와 어거스틴의 창조론에 관한 고찰」, 『신학논단』 33권, 2003, pp.109-138) 및 『서양고대철학 2』 참조

 

플로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유사점

원인 없는 원인인 일자와 만물을 창조한 성부(단, 삼위일체 창조)

사유자로서의 지성과 지혜/말씀(logos)으로서의 성자

질료를 형상화하는 영혼과 인간을 사랑으로 쇄신시키는 성령

가변성 유무에 따른 존재론적 위계(가변적일수록 열등함)

하위 존재의, 신비체험을 통한 상위 존재로의 회귀

유출/창조 이후에 시간이 비로소 탄생함

모든 존재자는 그 근원 덕분에 선함(단, 플로티누스에게 질료는 악)

악은 독립적 실체가 아닌 선의 결여

최고선은 자신의 선을 확산시킴/거저 베품

차이점

일자는 물질세계 초월

일자는 의지를 가지지 않음(의지 있음은 변화의 가능성을 뜻함)

세계는 일자의 필연적 유출의 결과

정신이 일자에게, 영혼이 정신에게 종속

질료는 선의 전적인 부재로서 악 그 자체

성부는 물질세계를 초월함과 동시에 그에 내재함

성부는 의지를 가짐

세계는 성부의 자유의지에 따른 창조의 결과(창조활동과 불변함이 모순된다고 보지 않음)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질료가 그 자체로 악 아님, 악은 열등한 선으로 기우는 의지의 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