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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모놀로기온>

캔터베리의 안셀무스, 박승찬 옮김,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온』, 아카넷, 2012

 신앙의 (이성적) 근거에 대한 명상의 한 예

 1. 안셀무스의 집필 환경은 연구실이 아니라 수도원(베네딕트 수도원)이었다. 『모놀로기온 프로슬로기온』은 작정하고 책을 뒤져가며 연구한 결과물이 아니라, 수도원 생활의 일환으로 또는 수사로서 신에 대해 명상하던 가운데 동료들의 권유를 받아 기록한 것이다. 수련으로서의 철학, 철학으로서의 수련.

 2. 이 글은 성서의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성적으로 사유하는 한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을 (예컨대 이슬람교 신도여서 설령 믿지 않더라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의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셀무스는 아무런 전제나 믿음 없이 논증하지 않는다. 그 경우 첫째, 그는 수사로서 성서와 균열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미리 정해놓고 있는가? 그가 전제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많으며 그것과 결론 사이의 간극은 어느 정도인가? (물론 전제를 가지게 된 동기가 무엇인지가 논증 과정의 논리적 정합성/철학적 가치를 침해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둘째, 그가 이성만으로 논의를 전개하겠다고 할 때 그 이성은 어떤 이성인가? 시대정신"의 눈치를 보는" 이성(김영원 선생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대정신을 가진 우리가 안셀무스를 이해하는 이유는?

 3. "[본성에 관한] 명칭들은 나에게 그들의 특성을 통해 그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사성을 통해 암시하는 것이다. [...] 이 본성은 형언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를 단어들을 통해 결코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182)"와 같은 구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탐구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64, 65장)의 질문이 야기된다. 이러한 질문은 시간, 삼위일체, (노자적 의미에서의) 도道 등 탐구를 하면 할수록 더욱 더 많은 아포리아를 낳는 많은 주제들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4. "[...]한 사람이 침묵하고 있는 사람에게 <무엇에 대해서 말하고 있느냐>라고 물으면 <무에 대해서de nihilo>라는 대답을 듣게 된다(56)." 인상깊었던 구절. 

 5.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해[물론 자신을 통해] 존재하"는 최고존재와 "그것으로부터 그것을 통해 그것 안에 존재(67)"하는 피조물 사이의 간극. 이 존재론적 격차에 대한 민감성이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초월론적 주관과 세계 사이의 관계도 이와 유사하다고 읽혔다.

 6. 존재의 등급을 나누는 고중세철학 특유의 사유는 낯선 만큼 언제나 매력적이다. "이것[최고존재]만이 단순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존재하며, 다른 모든 것은 반대로 거의 존재하지 않거나 간신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변화할 수 없는 영원성 때문에 이 정신은 <존재했다>거나 <존재할 것>이라고 결코 서술될 수 없고 단순히 <존재한다>고 설명될 수 있다. [...]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 한 번 그랬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또 앞으로 그럴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흘러가는 극도로 짧고 간신히 실존하고 있는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간신히 존재하는 것이다(109-110)." '간신히'라는 부사가 이토록 무게감 있게 또 쓰일 수 있을까?

 7. "만일 살고 느끼고 생각하는 임의의 실체들에게서 사고하는 것, 즉 이성적인 것을 빼앗고, 이어서 감각하는 것을, 그 다음에 살아 있는 것을, 끝으로 남아 있는 순수한 존재마저 빼앗는다면, 점점 파괴되어 가는 이 실체가 점점 덜 존재하게 되고, 끝에 가서는 점차로 무로 이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도대체 누가 모르겠는가?(118)"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점점 '줄어드는' 존재의 모습이 어렴풋이 시각화되었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서 희랍어 강사가 자신이 철학을 좋아하는 것은 예컨대 잠재태가 현실화된다는 철학적 명제를 접할 때 그 명제가 불러일으키는 어떤 이미지에 매혹되기 때문이라고 쓰였던 것이 생각난다. (들뢰즈의 소진 개념도 연상된다. 살아있지 않고 순수한 존재만 가진,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순수한 존재의 역량을 내뿜는 존재자로서의 소진된 인간.)

 8. 구시대의 여성혐오(42장). "부성적인 원인이 모성적인 원인을 어떤 방식으로든 앞서가기 때문에, 자식을 낳기 위해 아무런 다른 원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또 다른 앞서는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저 어버이에게 <어머니>라는 명칭을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합하다"라든지, "항상 아들이 딸보다 아버지와 더 유사하(140)"다든지. 이런 것을 기록해놓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동시에 무시하거나 망각하고 싶은 욕심도 있다. 분노를 유지하는 일은 내게 가치있는 피로감을 안긴다.

 9. 신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인간의 도구는 "이성적인 정신(184)"이다. 인간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최고존재의 본성과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선불교 식의 수행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한 걸까? 끙.) 아무튼 "이성적인 피조물은 그에게 자연적인 권능을 통해 각인된 [최고존재의] 표상을 의지적인 작용에 따라 표현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 그렇게 몰두해서는 안 된다(186)." 인간 실존의 목적을 한 마디로 정리한 뒤 안셀무스는 왜 신자에게 보상이, 불신자에게 영원한 불행이 예정되어있는지를 논증한다. 어느 쪽이든 그들의 영혼은 불멸한다.

 10. 세계가 무질서하지 않고, 부조리하지 않다는 믿음이 안셀무스의 탐구를 견인한다(205).

 이하는 내용 정리.


I. 최고존재에 대하여. "모든 선은 동등하거나 상이하게 선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모든 것은 다양한 선들 안에서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는 어떤 것에 따라 선한 것이다.(34)" 이로부터 "그 자체를 통해per se 선"한, "자기 자신을 통해서 선"한 큰 선과 "자기 자신과는 다른 어떤 것을 통해 선"한 것의 구분(35)이 도출된다. 전자에 해당하는 이 어떤 것은 최고선이다. 선뿐만 아니라 존재에 대해서도,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의 어떤 것을 통해 존재(37)"한다. 이 어떤 것은 최고존재이며, 모든 존재의 근원이다. "진리는 전적으로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것이 다수라는 것을 배제(38-39)"하며, 그 근원은 다른 비근원적인 것보다 "더 훌륭"하고 "가장 위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다른 모든 것을 x하게(선하게, 존재하게, 생명 있게, ...이런 본성들) 만드는 동일한 성질이자 다른 x한 것들이 x한 원인은 (1)하나이고, (2)그 자체를 통해/그것으로부터만 x하며, (3)최고로 x하다(그 x가 어떤 것이냐에 달려있긴 하지만 탁월하기도 하다). 이때 첫째, 무한퇴행을 피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다른 어떤 것도 능가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어떤 본성이 [유일하게] 존재(40-41)"한다고 언명하는 것은 세계가 부조리하지 않다는 전제를 깔고 있지 않은가?(물론 유일성/단순성을 논증하는 길은 여럿이 있긴 하다. 단순성의 선함, 결합요소에 의존하지 않아야 함 등) 둘째, 신의 존재를 우주론적으로 증명--우주의 존재자들의 존재를 통해 증명--하게 해주는 (2)는 자명한가? 다른 모든 것을 x하게 하면서 자신은 x하지 않은 어떤 것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는가?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안셀무스가 이토록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면, 그 확신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스스로도 신의 선함과 존재를 확신하고 있고, 그가 속한 사상적인 맥락에서 누구도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아서일까?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만 해도 그리스도교적 교리들이 정립되지 않았고, 다른 사상들과 지적 헤게모니를 두고 대결하고 있었다. 최고선이 존재한다는 일원론적 세계관이 확신이 아닌 아직은 조심스러운 증명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반면 안셀무스의 시대에는 유일한 신의 선함과 존재가 이미 확립된 바였던 데다, 글의 예상독자가 수사였으므로 그것들이 더더욱 자명하게 여겨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김영원 선생님).

II.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하여. 최고존재는 "자신을 통해 또는 자신으로부터 존재한다.(49-존재론)" 이러한 사실은 일종의 비유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인식론). "빛과 비춤과 비추는 것이 서로 관계하는 것처럼 본질essentia과 존재esse와 존재자ens가 상호관계를 맺"는다. "여기서 존재자는 현존하는 것existens 또는 실존하는 것subsistens를 뜻한다.(50)"

 최고존재는 변화되거나 파괴될 수 없으므로 피조물의 질료인이 될 수 없으며, 창조 이전에는 도구 삼을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도구를 통해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작용인으로서 창조한다. 이때, 무는 존재자의 질료인가? "[...]<결코 어떤 것이 아닌 것>은 어떤 사물의 질료도 아니다(52)"라는 구절에서는 아닌 듯하다가도 "그것[피조물]의 근원이 되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57)"다고 할 때는 맞는 것만 같다.

III. 말씀을 통한 창조에 대하여. "<정신이나 생각으로 말함mentis sive rationis locutionem>"이란 "사물 자체를 그것이 미래의 것이든 이미 존재하는 것이든 상관 없이, 사고의 날카로움으로 정신 안에서 바라본다는 의미(60)"다. 다시 말해 현존하는 것으로 직관함이다(175). 이 말씀이 (신에 의해 행해지면) 마치 예술가가 머릿속 형상으로써 작품을 빚듯 세계가 창된한다. 물론 이 창조는 완벽히 자족적이라는 점에서 예술가의 창작과 다르다. 아마 플라톤의 <티마이오스>가 촉발시킨 게 아닐까 싶은, 예술작품으로서의 세계라는 관념은 언제 접해도 매혹적이다.

 최고존재와 관련해서는 그것이 어떠한가에 대해 말해질 수 없고,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만 말해질 수 있다. 어떠한 것은 어떠함(?) 자체를 통해서만 어떠할 수 있지만(?) 최고존재는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존재하므로 논리상 스스로가 그 어떠함 자체와 동일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테면 정의롭기보다 정의로움 자체, 즉 정의이고, 생명이고, 단순성이며 미이다. 신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라는 안셀무스의 문제의식은 부정신학의 전통을 연 위 디오니시우스의 <신의 이름들>을 상기시킨다.

IV. 장소와 시간에 대하여. 장소와 시간은 존재자를 제약한다. 한 장소에 전체로서 있는 존재자는 그것의 어떤 부분도 다른 장소에 있을 수 없다. 시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최고존재는 "장소와 시간의 어떤 견제를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피조물)의 본성과 법칙으로부터 자유롭다(95)." 이와 같은 자유에 대한 강조는 '창조 이전에 하나님은 무얼 하셨느냐'는 마니교도들을 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박을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존재는 모든 장소와 시간에 존재하는데, 이 존재는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존재하는 다른 피조물들의 존재와 구별된다. "비록 언어의 관습 때문에 동일한 어구가 존재한다(사용된다) 할지라도, [표현된] 사물의 차이를 통해 서로 다른 의미를 지(97)"니게 되기 때문이다. '항상semper' 같은 표현도 최고존재에 대해서 쓰이면 "영원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101)"된다. '실체'에 대해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모든 실체는 차이와 혼합과 우유Milch>_<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최고 본질의 불변하는 순수성에는 일체의 혼합과 변화가 접근 불가능(105-6)"하므로 최고존재가 실체일 때의 '실체'와, 피조물이 실체일 때의 '실체'는 상이한 뜻을 가진다. "만일 그것이 다른 것들과 어떤 이름을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매우 다른 의미diversa significatio로 이해되어야 한다(106)."

 인간의 언어는 신을 묘사/설명하기 위해 적합하지 않다. 신이 x일 때(x=실체, 미, 생명, 지혜, 정의, ...) 그는 x이되, 즉 우리가 그의 x임을 긍정할 수 있되 여타 x들이 x인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x이므로, 우리는 그의 x임을 또한 부정해야 한다. 넘침의 표현으로서의 부정,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을 통해서만 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관념은 위 디오니시우스로부터 비롯하는 부정신학 전통의 특성이다.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형언하고자 하는 종교언어의 특성이기도 하다.

V. 말씀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성령은 사랑으로 표현된다. 최고존재는 "최고로 단순"하므로 "그것[이] 자신의 말함과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은 필수적이다(114)."

 안셀무스는 다시금 인간 인식의 본질적 한계를 피력한다. "이런 것[말씀을 통한 창조와 피조물들이 그 말씀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가장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이 얼spiritus[최고존재]이 만들어진 것을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아는가를 인간적인 지식으로는 포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130)." 그렇기 때문에 안셀무스는 '어떠한가'라는 존재론적 물음과 '그 어떠한 것을 어떻게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한가'라는 문학적인-이렇게 불러도 된다면-물음을 함께 던진다. 45장, 57장 등지 참고.

VI. 사랑, 나아가 삼위일체에 대하여. 기억과 인식으로부터 사랑이 발출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랑 없이는 기억과 인식이 불필요하고 소용없다.  최고존재의 사랑은 "그 자신 만큼 그렇게 [큰]"데, "최고 얼이 아니라면 [...] 최고 얼과 동일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사랑은 최고 얼이다(157)."

 서로 다르지만 하나인 것(들)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의 문제가 재차 야기된다. 삼위일체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무한한-리쾨르의 표현을 빌리면-"되새김질(폴 리쾨르, 김한식/이경래 옮김, 시간과 이야기 1권, 문학과 지성사, 1999, p.34)"을 낳는 것 같다. 이때 안셀무스는 "파악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연구하는 사람은 추론을 통해 그것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인식에 도달했을 때, 비록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완전히 통찰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스스로 만족해야 한다(178)"고 말한다. 신학자가 느끼는 경이이자 슬픔이 드러난 구절이 아닌가 싶다. "이 본성[최고존재]은 형언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sicuti est>를 단어들을 통해 결코 묘사할 수 없기 때문(18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