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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플라톤, <파이돈>

플라톤, 박종현 역, <파이돈>, 서광사, 2003

 죽음 앞에서 차분한, 심지어는 들떠 보이는 소크라테스가 제 의연함의 근거들을 논증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죽음의 수련, 또는 예행연습이기에(feat. 피에르 아도) 진정한 철학자가 제 수련의 궁극목적이었던 죽음을 두려워 함은 있을 수 없다.

 죽음이란 혼과 몸의 분리(chorismos)에 지나지 않는데, 철학자는 “몸에 관련된 [...] 보살핌(289)”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탐구에 있어서 몸을 동반자로 대동(291)”하는 감각을 신뢰하지 않으므로, 몸으로부터 혼을 말하자면 탈출하게 해주는 죽음은 그녀에게 기쁜 소식이다. ‘몸과 관련된 고통이나 즐거움’과 ‘몸을 통한 감각적 지각(aisthesis)’은 엄연히 상이한 것이지만, 모두 진실로 가는 유일한 길인 혼의 추론(logismos, “이성logos 고유의 능력(293 각주 76번)”으로 이후 『국가』에서 ‘직관(noesis)’과 ‘추론적 사고(dianoia)’로 나뉜다)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함께 묶인다. 몸이 추론을 방해하고 혼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까닭이 1) 몸과 관련된 고통이나 즐거움이 집중력을 흐리거나 여가 시간을 빼앗아서인지, 아니면 2) 잡념은 없는데 다만 감각이 부정확한 정보를 나르기 때문인지 사실 불분명하다(296-297). 아마 둘 다이겠지만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두 범주를 동일시하는 발상 자체가 무척 흥미롭다. 이후 353쪽, 82e에서 감각의 기만적 특성이 욕망으로부터 온다는 막연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기는 하다.

 올바름 자체,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와 같은 본질(ousia)은 몸이 결부되지 않은 순도 100%의 혼에게만, 즉 일종의 “순수화(정화: katharsis)”를 거친 사람에게만 파악된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가능한 한 혼이 그 자체로 홀로 살아가게끔 버릇을 들(300)”여야 한다. 다시 말해 철학은 몸의 활동을 억누르는 자기통제의 고행이자, 혼의 자유(풀려남, 해방, lysis)를 쟁취하기 위한 문자 그대로의 ‘몸부림’이다. 왜냐하면 철학자가 아직 살아있는 한 그녀가 몸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워지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철학, 또는 지혜사랑이라는 활동이 제 목표를 달성하는 일의 본질적 불가능성, 즉 지혜에 도달하는 일의 불가능성이 방증된다. (니체가 왜 플라톤을 미워했는지도 알 만해진다. 『도덕의 계보』에서 금욕주의를 질병이라 부르던 그...)

 혼의 독립적인 실재에 대한 논변들도 흥미롭다. 첫 번째 논변은 생성(genesis)을 대립되는 것들 사이의 상호이행으로 정의하는 데서 시작한다(312). 그러므로 산 자들은 죽은 자들로부터 생겨나며 이 윤회를 위해 “죽은 자들의 혼은 어딘가에 있는 게 필연적(315)”이다. 두 번째 논변은 상기(anamnesis)에 대한 논변인데, 읽으면서 상기가 ‘기억remembrance’이기 이전에 ‘연상association’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한 것’을 보면 ‘~함 자체’를 상기하게 되는데, 전자는 후자와 닮았으나 모자라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모자란 것보다 그것과 대비되는 완전한 대상을 “먼저 알고 있었을 것임이 어쩌면 필연적(325)”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모자란 것은 감각적 지각을 통해 인식하게 되므로, 완전한 것에 대한 앎은 감각적 지각이 시작되기 이전에 즉 “태어나기 이전에 갖게 되었던 게 필연적(327)”이 된다.*** 그리고 그 앎의 주체로서, 몸과의 결합을 통한 출생 이전의 혼의 독립적인 실재가 요구된다.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상기론을 토대로, 출생과 함께 형상에 대한 앎이 망각(lethe)되지만 “나중에 이것들과 관련해서 감각적 지각들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언젠가 이전에 우리가 갖고 있던 그 앎(지식)들을 도로 갖게” 되므로 “우리가 배우는 것(manthanein, 배움mathesis)이라 일컫는 것은 자신의 것”이었던 “앎(지식)을 되찾아 갖게 되는 것” 즉 “상기하게 되는 것(329-330)”이란 결론을 내린다. 세 번째는 형상 개념을 통한 논증인데, 이는 비교적 뒤편에 나오므로 이후 정리하기로 한다.

 상기론과 관련하여 들었던 의문은 첫째*, 왜 ‘~한 것’은 ‘~함 자체’에 못 미치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를 들어 같은 것들은 왜 같음 자체에 이르지 못하는가? 종이 같다 해도 서로 다른 개별자이기 때문일까? 소크라테스는 이후 ‘~한 상태의 한결같지 못함’을 부족함의 이유로 든다(339). 그렇다면 한 개별자의 자기동일성의 경우에는 무엇이 모자란 것일까? 인식의 시점 차이? 둘째**, (~한 면에서) 모자란 것에 대해 알기 위해 반드시 (~한 면에서) 완전한 것에 대한 앎이 선행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만약 이것이 모자란 것이 모자란다는 판단의 대상이 되기 위해 완전한 것에 대한 앎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논증이라면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모자란 것을 그것의 모자람에 대한 규정 이전에 단순히 어떤 것으로서 인식하는 일 자체는 모자란다는 규정 이전에도 가능할 것이다. 다행히 소크라테스는 전자의 설득력 있는 쪽을 논증하는 듯하고(325), 이와 같은 논증은 데카르트의 유한성의 관념을 통한 신 존재 증명에도 활용된다. 셋째***, 지각을 통해 개별 대상들이 (~한 면에서) 모자란다는 판단에 이르렀고, 그와 같은 판단보다 (~한 면에서) 완전한 대상에 대한 앎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모든 지각 일반에 (~한 면에서) 완전한 대상에 대한 앎이 선행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두 번째 의문과 관련해서, (~한 면에서) 모자란 것을 그것이 모자란다는 규정 없이 단순히 어떤 것으로서 지각할 수 있는 노릇이고, 이와 같은 단순한 지각을 위해 그와 별도의 특수한 형상(~함 자체)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혼의 독립적인 실재와 본질들 또는 형상들의 실재는 서로 함께 가는 것이다. 하나는 존재하는데 다른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 사태는 불가능하다. 감각적인 지각을 통해 개별 대상들을 인식할 때 그것들의 모자람의 기준이 되는 본질들의 존재가 확실해질 것인데, 애초에 본질들이 모자람의 기준이 되려면 그것들이 이미 알려져 있어야 하며, 그 앎의 주체가 혼이기 때문이다. (Cf 이후 후설의 본질과 플라톤의 본질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혼과 본질들은 “최대한의 의미에서 있(333)”다. 존재의 정도를 나누는 발상도 무척 신선하다. 보통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더 존재하거나 덜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의 근원』에서 진리가 드러나고 은폐되지 않는 장소 중 하나로 존재자들 중에서 가장 존재하는 것의 접근/근처(“die Nähe dessen, was schlechthin nicht ein Seiendes ist, sondern das Seiendste des Seienden” Martin Heidegger, Der Ursprung des Kunstwerkes, 2012, Frankfurt am Main, 강조는 필자)를 꼽는데, 이것이 혹시 플라톤의 형상과 유사한 것일까 싶다. 이에 비해 존재의 정도가 떨어지는 몸과 개별 대상들은 주지하다시피 지성이 아닌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고, 나아가 복합적인, 즉 해체 가능한 것이자 덜 고귀한 것이 된다. 여기에는 순수한 것은 단순하고 불순한 것은 복합적(여러 모습임, polyeides, 343)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한 가지 논쟁이 될 만한 생각이 이어진다. 죽음이 몸으로부터의 혼의 분리라면, 모든 사람이 죽을 경우 똑같이 몸을 잃으니 평등하게 순수해질 것만 같지만 - 즉 모두가 행복해질 것 같지만 -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혼은 몸과 결합되었을 동안 몸의 영향을 받는지라, 방탕한 생활 방식에 익숙해진 혼들은 죽음 이후에도 이승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반면 저승에서든 이승에서든 행복한 혼들은 덕스러운 혼들, 형상에 대한 앎을 가진 혼들뿐이다. 덕은 곧 앎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에게 앎 없이 덕을 실천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된다. 그러나 아렌트의 경우 『인간의 조건』에서 선이란 선을 행하는 자가 그것을 알지 못할 때 오히려 진정한 선이 된다고 주장한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에서도 라짜로는 자신이 선하거나, 선함으로써 행복하다는 것(이 점에선 소크라테스의 생각과 일치한다만)을 모르는 상태로 수많은 선행을 베푼다. 자신이 선하다는 것을 알면서, 또는 자신의 행위가 선함을 알면서 그것을 행하는 일은 어쩌면 일종의 오만이나 허영심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반론이 이어진 뒤의 내용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논변혐오(misologia)’에 대한 응답으로 이데아설이 부상했다는 역자의 각주(373 각주 249번)다. 이후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는 논변혐오와 수반되는 회의주의에 격렬하게 반발한다(374, 90c). 뭔가를 모르겠으면 사태를 탓하지 말고 자신을 탓하자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앞선 자연철학자들이 참된 원인(정신적인, ‘좋음’과 관련된 원인)이 아닌 원소나 에테르처럼 “여러 가지 이상한 것들(397, 98c)”을 들어 세계의 질서를 설명한 데 대한 소크라테스의 불만 역시 인상적이다. 그에 따르면 자연철학자들은 “진짜 원인과 그것 없이는 원인이 결코 원인일 수 없는 것(399, 99b)을 구별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것들이 아름답게 되는 것은 아름다움으로 해서(410, 100e)”, 즉 아름다움에 관여해서metexis 또는 아름다움이 그것에 나타나서parousia 또는 그것과 아름다움이 결합돼서koinonia(나아가 같은 이름을 지니게 돼서, 415, 102b)이지 반짝이가 붙어서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둘로 됨의 원인 역시 나눔이 아니라 둘임에 대한 관여다(412, 101c).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형상인’ 개념과 관련하여 영감을 불어넣어줬을 것이다.

 혼의 독립적인 실재에 대한 세 번째 논변이 이에 이어지는데, 바로 어떤 것은 그것과 대립되는 것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A이면서 ~A일 수는 없다!) 그것과 대립되는 것에 대동되는 성질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논변이다. 예를 들어 눈은 차가움을 대동하는데, 차가움은 뜨거움과 대립되므로 눈은 뜨거울 수 없다. 뜨거운 눈은 일종의 파괴를 거친 셈이기에 더 이상 눈이 아닌 것이다(이는 뜨거운 눈의 불가능성이 ‘필연’은 아니라는 흄의 인과론과 대립된다. 애초에 그는 Matters of fact와 relations of idea를 구분하므로 눈의 예시와 이어지는 2의 예시를 동일한 선상에 놓는 것에 대해서부터 반대할 것이다). 또 2는 짝수임을 대동하는데, 짝수임은 홀수임과 대립되므로 2는 홀수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혼은 생명을 대동하는데, 생명은 죽음과 대립되므로 혼은 죽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런 것인 한 파괴 역시 거칠 수 없다.

 마지막에 덧붙은 소크라테스의 지구론은 로고스보다는 뮈토스에 호소하는 내용으로 솔직히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 대화편이 사실 그대로의 기록이 아닌, 일종의 편집 작업을 거친 팸플릿이라면 사실상 없어도 되는 부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를 ‘불경죄’로 고소한 아테네인들의 무지함을 보여주는 데는 효과적이라는 생각이다. 그의 마지막 말 또한 로고스가 아닌 뮈토스에, 종교적인 관습을 준수하는 일로 소요된다.

 이렇게 소크라테스의 최후가 묘사되었다. 교환학생 시절 <파이돈>을 읽었을 때는 절반쯤에서 포기했던 게 한이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철이 좀 들었는지 완독에 성공했다. 앞으로 더 철이 든다면 보다 훌륭한 철학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개그를 이해했다면 당신은 나의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