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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플라톤, <에우티프론>

플라톤 『에우티프론』, 박종현 역, 서광사, 2003

 대화편을 공부하는 데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논증들을 하나하나 따지기보다는 전반적으로 느꼈던 점이나 유의하고 싶은 소크라테스의 태도를 중심으로 리뷰를 남기고자 한다. 

 1. 『에우티프론』은 『라케스』나 『카르미데스』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윤리적 덕목을 정의하려는 소크라테스의 노력을 담고 있다. 이 대화편이 특히 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경건이란 무엇인가’이다. 역자의 해제에 따르면, 윤리적 덕목의 의미를 규정하고 부덕함 또는 훌륭하지 못함과의 경계선을 긋는 일은 영혼을 돌보기 위해, 궁극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요구된다. 아테네인들이 무겁게 여겼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교훈은 ‘너 자신의 혼이 어떤 상태에 있어야 가장 훌륭(하게 기능)할지 깨닫고 그에 따라 실천하라’는 지침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이때 이를테면 경건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의 경우, 그녀는 자신의 기존 행위가 경건했는지 아닌지 검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어떻게 처신해야 불경함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영혼이 가진 기능(ergon)인 이성(logos)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사태로 좋은 삶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윤리적 덕목의 의미가 충분히 규정되지 않을 경우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는 타인과의 의견 불일치이다. 계산이나 측량이 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의견차가 나타나지 않는다. 서로가 합의한, 믿을 만한 판단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바른 것과 올바르지 못한 것, 아름다운 것과 추한것, 그리고 좋은 것과 나쁜 것”에 대해서는 신들마저 다툼을 벌일 정도로 “충분한 결정을 내리게 될 수가 없어서 서로 적이 될(p.50)” 수 있다. 소크라테스 자신도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이 멜레투스와 달라 불경죄로 고발되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에우티프론』에서의 논의는 단순한 지적인 유희가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이후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필요한 논거들을 찾는 과정으로, 아주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실천적인 지침을 갈구하는 어느 현존재의 절실한 탐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탐구의 과정에서 윤리적 덕목들이 가지는 지위의 이중성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윤리적 덕목들을 그 자체로 삶에서 추구할 만한 것들로서, 생활 속에서의 다른 훌륭함(arete)들보다 더 중대하게 취급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적 덕목들 역시 일종의 앎이자 기술이라는 점에서 예컨대 농사를 잘 짓기 위해 필요한 훌륭함과 종적으로 또는 질적으로 차별화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가 도덕적인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생활의 다른 영역들에 대한 지혜를 유비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이와 같은 동질성에 대한 믿음 때문일 테다.  

 2. 윤리적인 덕목들의 의미를 규정한다 함은 그 덕목을 실현하고 있는 모든 예시적 행위들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그래서 눈으로 볼 수 있는) 특성을 간파하는 작업이다. “내가 당신에게 대답해 달라고 했던 것은 이것, 즉 여러 경건한 것 가운데 한두 가지를 내게 알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그 특성(eidos) 자체, 즉 그것에 의해서 모든 경건한 것이 경건한 것이게 되는 그것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당신은 어쨌든 기억하고 있겠구려?(p.48)” 이 특성은 관련 행위가 지닐 수 있는 온갖 특수성에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떤 실천적 맥락에서든 동일하게 유지된다. 그런 동일성이 확보되어야만 훌륭함과 대립되는 훌륭하지 못함 역시 정의하고 그에 따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역자의 각주에 따르면 이 특성은 이후 중기 대화편들에서 이데아의 개념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초기 대화편인 『에우티프론』에서는 단순히 “어떤 사물이나 사람이 ‘보기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나 ‘형태’, ‘외관’, ‘모양’, ‘보임새’ 등”을 뜻한다. 이와 같은 초기의 의미가 이후 “‘성질’이나 ‘종류’, ‘종’ 등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는데, “우리가 어떤 부류의 사물들을 관찰할 때 그것들이 종류에 따라 ‘보이는’ 공통된 어떤 ‘성질’이나 ‘특성’ 또는 ‘형태’”가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데아가 전문용어가 되고 나면 단순히 육안에 드러나는 공통된 성질뿐만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참모습’이나 ‘본모습’이라 할 ‘본질적인 것’을 가리키(p.43)”게 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정의 사이의 간극은 크지 않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정의 사이의 간극은 꽤 크게 느껴진다. 또 한 가지 신기한 점은 눈으로 대변되는 감각기관을 통한 관찰이 그다지 경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사물의 이데아를 간파하는 데에는 플라톤에게마저 감각의 기능이 중시되는 게 아닐까.

3. 경건(의 특성/이데아)이 무엇이냐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에우티프론은 신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곧 경건함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논의의 중반부에서 소크라테스는 경건함이 신들의 사랑에 선행하는지 아니면 신들의 사랑이 비로소 어떤 것을 경건하게 만드는지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쉽게 전자를 택하지만 이는 보기보다 복잡한 문제이다. 근대에 가서는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가 형식적으로 비슷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달리한다. 데카르트는 신이 창조한 것이 곧 진리라는 입장에서, 이를테면 2+2=4인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참이어서 아니라 신이 그렇게 세계를 창조했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참됨이 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객관적으로 참된 것을 신이 알아보고 선택한다는 입장이다.

4. 경건의 본질(ousia)이 아닌 특정한,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말하자면 우연한 속성(우연히 처하게 되는 상황, pathos)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대해 에우티프론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반응을 보인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뭘 내놓게 되건,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 주위를 언제나 맴돌지, 그걸 우리가 어디에 세워두건, 도무지 그곳에 머무르지 않(pp.61-62)”는다. 이는 사태의 불변하는 본질을 말로써 직접적으로 규정할 수 없으며, 규정을 시도한다 한들 그 자체로 비판 받거나 본질이 아닌 속성에 불과하다고 비판받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읽힌다. 본질 인식에 대한 에우티프론의 비관주의(에우티프론이 (i)본질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는지, (ii)단지 사유의 한계를 지적하는지 아니면 (iii)본질도 있고 그것을 사유할 수도 있는데 언어의 한계만 지적한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에 반해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한 말들이 머물러 있을 뿐더러 부동의 상태로 확립되어 있기를(p.63)” 바란다.

 둘 사이의 티키타카는 모든 철학자들이 처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긴장 상태를 잘 보여 준다. 그 긴장 상태란 바로 지에 다가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지라는 역설이다. 철학자들이 욕망하는 불변하는 본질에 대한 앎은 본질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욕망하는 것에 다가서려면 기존의 인식을 초월하고,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는, 잘못 머물러 있었던 것을 몰아내고 더 옳은 것이 머무를 수 있도록 말하자면 앎의 바탕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그처럼 ‘더 옳아서 영원히 머무를 것’에 말로써 다다를 수 있는지에 관해 에우티프론과 소크라테스는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다. 에우티프론은 무지를 자각한 뒤 새로운 가설을 세운다 해도 그것 역시 몰아내질 것이라 생각하고, 소크라테스는 영원히 머무를 정의가 있다고 믿는다. 그런 소크라테스를 뒤에 남겨두고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에우티프론의 뒷모습은 단순한 도피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체념을 담지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