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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작은 바울(2018.5)

가장 아끼는 소설들 중 하나. '나는 나의 작품의 피조물이다'라는 유치하고도 진지한 필명으로 내놓았던 독립출판물에 실려있다.

©정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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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입고] 나작피,정수지 - 불 : gaga77page

[gaga77page] 독립책방카페 gaga77page [ 입고문의 | gaga77page@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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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류장 가까이에 음식물 쓰레기봉투들이 나뒹군다. 냄새가 고약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셔츠 소매로 코를 막으려던 순간, 비둘기 한 마리가 시야의 구석에 등장한다. 비둘기는 뒤뚱거리면서 주황색 봉지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다가간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일어서지 못하는 오뚝이처럼 옆으로 쓰러져 있는 봉투에 관심을 보인다. 자세히 보니 봉투를 여미는 부분의 매듭이 풀려 내용물이 약간 쏟아져 나왔다. 악취의 원흉 같지만 비둘기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쳐 쓰러진 사람의 입처럼 벌겋고 긴 틈 속으로 정수리를 처박을 뿐이다. 썩어가는 음식물을 쪼아 먹기 위해 비둘기의 목이 주황색 봉투 속으로 들어갔다 나가기를 반복한다. 나는 그 모습이 확실히 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눈을 떼지 못한다.

 비둘기는 식사를 마친 뒤 더러워진 목을 부르르 떨며 봉투 바깥으로 유유히 빠져나온다. 새 주제에 자신이 무얼 했는지, 어떤 음식을 먹은 것인지 알 리가 없다. 순간의 식욕을 채웠다는 만족감만이 그의 작은 두뇌를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다른 비둘기들도 음식의 냄새를 맡은 모양이다. 하나 둘씩 주황색 쓰레기봉투의 근처로 날아들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무엇을 향해 오는지 모르고 있다. 나는 서너 마리의 배고픈 새들이 음식물쓰레기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진풍경을 바라보다가, 무지를 무기로 한 그들의 전쟁을 뒤로 한 채 버스에 올랐다.

 이 시간의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다. 앉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으며, 붙잡을 봉이라도 가까이에 있으면 다행이다. 손잡이까지 멀리 떨어져있다면 온 힘을 두 발에 집중해야지만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오늘도 가뜩이나 피곤한 몸이 무게중심을 잃지 않으려 발등에 핏줄을 세운다. 버스가 방향을 틀거나 속도를 낼 때 약간씩 휘청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일단 올라탄 이상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세 정거장쯤 지나면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만원 버스는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나 덥다. 와이셔츠가 끈적끈적하고, 콧등은 이미 촉촉하다. 일찍이 극에 달해있던 피로가 견뎌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눈이 서서히 감기면서 시야가 희미해지고,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고개도 뒤로 젖혀진다......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것만 같다. 조금 있으면 감각이 무뎌지고 자의식마저 사라지는 게 아닐까? 지금의 내게 확실하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대로를 질주하던 버스가 급하게 멈춰 설 때에, 다른 승객들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잔뜩 힘을 주고 선 두 발뿐이다. 나의 모든 기력은 양말 안에 갇힌 발가락들에 집중되어 있다. 머리와 가슴속은 땀으로 찬 어항 속의 수초처럼 힘없이 흐물거린다.

 ......안 돼. 더위와 고단함으로 자의식이 완전히 지워지기 전에 무엇이라도 해봐야 한다. 영혼에 꽂는 몇 밀리리터의 수액처럼 질문을 하나 던진다. 나는 오늘 무슨 일을 했는가. 메모로 빼곡한 달력과 10포인트보다 작은 글씨로 쓰인 약관, 그리고 꽁초로 가득한 재떨이가 물음이란 갈고리에 의해 의식의 화면 위로 끌려나온다. 방문일자를 미리 정해둔 고객이 때맞춰 사무실을 찾아오면 나는 약관을 내민다. 고객에게 이런저런 서류들을 보여주면서 약관에 사인하라고 설득하는 일이 이어진다. 이윽고 나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사인된 약관을 돌려받고, 고객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한다. 돌아와서는 납보다 무거운 침묵을 자처하며 창문 밖으로 검은 머리를 내민 채 담배를 피운다. 마치 몇 분 전의 수다스러움은 자의에 의한 게 아니었다는 듯이, 꿋꿋이 침묵을 지킨다. 고개를 돌려보면 옆 사무실에서도 누군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아는 사람이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가 입을 조금씩 벌린 채로 하늘을 노려보고 있다. 그 벌겋고 긴 틈 속으로 담배들이 들어갔다 나가기를 반복한다.

 오늘은 무려 열다섯 명이나 사무실을 다녀갔다. 한 명을 맞을 때마다 적어도 15분은 쉬지 않고 혼자서 떠들어야 한다. 나는 모든 고객을 대상으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기로 되어있다. 그 중 반 정도는 진실이고, 반 정도는 과장이 보태진 것이다. 동일한 이야기를 몇 백번씩 떠벌리는 동안 나는 몇 백 번, 진실과 거짓 사이를 허우적거리는, 그러나 아마 거짓 쪽에 조금 더 가까울 의미심장한 문장들을 반복한다. 그것들이 완전한 거짓은 아니라는 점만이 나를 위로해준다. 이 최소한의 양심이 나에게 담배를 피울 자격을 부여해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또 한 개비를 물었다. 차내에서 흘린 땀을 방금 닦아낸 바람에 라이터를 찾는 손가락이 미끌미끌하다. 젖어버린 옷을 계속 입고 있기가 영 찝찝하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양복을 벗어던지고 샤워부터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집으로 향할 생각은 없다. 집에는 아마 거실이라고도, 부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좁은 공간에 내 친구 경이 누워 있다. 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니다. 그가 잠을 자는 것을 난 본 적이 없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일어날 때에도, 밤이 되어 다음날 출근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갈 때에도 그는 베개조차 없는 매트리스 위에서 다만 ‘있’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게으름은 그로부터 쾌락을 느끼는 자에 한해서만 게으름이 된다. 반면 그는 언제나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렇게 한때는 매트리스 대신 빨래건조대가 놓였던 그곳에서 경은 몸을 비스듬히 뉘인 채 마른 숨을 쉬거나, 내 방 서랍에 넣어둔 담배를 몰래 집어가 길가에서 피우고 돌아올 뿐이다. 그리고 내가 퇴근하면 서랍 속의 담배를 훔쳐 피웠노라고 이실직고한 뒤 연거푸 사과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다...... 아니, 예전까진 그랬다. 요즘은 내가 일부러 서랍에 담배를 두지 않고 와이셔츠의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니 그의 하루는 훨씬 더 단조로워졌으리라. 경은 더 이상 담배조차 피울 수 없다.

 경이 부엌 겸 거실과 침실만으로 이루어진 내 작은 전셋집에 들어와 산지도 꽤 오래되었다. 문득 기분이 야릇해져 핸드폰의 달력을 보니 오늘이 딱 1년째 되는 날 같다. 1년 전, 서울에 갓 올라 온 그는 지낼 곳이 필요하다며 학창시절의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나를 찾아왔다. 짐이라고 하기에도 조촐한 그의 백팩 속에는 그와 내가 살던 동네에서 여러 교회들이 경쟁적으로 나눠주곤 했던 무료 노트와 싸구려 깜장 볼펜 두 자루, 셔츠 두 장과 청바지 하나, 헐렁한 트렁크 속옷 몇 벌이 전부였다. 아차, 가방 옆면의 주머니를 불룩하게 채웠던 담뱃갑과 라이터를 깜빡했다. 당시의 경은 자신의 돈으로 담배를 사서 피웠다. 한 갑을 너무 빠르게 피워버리는 나에게 한 개비쯤 빌려줄 여유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경의 지갑이 지금보다 두둑한 덕도 있었지만, 그의 성격이 지금보다 명랑해서이기도 했다. 그런 호시절이 있었기에 나는 나중에 서랍 속에서 담배가 하나 둘씩 사라져도 곧바로 쓴 소리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제는 내가 서랍을 비워버렸으므로, 더 이상 사라질 물건도 없다.

 문득 흡연자에게조차 담배연기는 맵다는 생각을 한다. 흡연은 쾌락일까, 고통일까? 피우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니 쾌락일까? 스스로 폐를 좀먹게 하는 일이니 고통일까? 잠시 생각해봤으나 아무래도 모르겠다. 담배를 피우면서 거울을 보지 않기에 내가 어떤 표정으로 그것을 물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예전에 경과 얼굴을 맞대면서 불을 붙였을 적엔 실없는 농담으로 몇 번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만, 혼자서만 피우는 요즘에는 통 웃을 일이 없다. 마찬가지로 혼자가 된 경은 어땠을까. 담배를 피울 때마저 표정이 어두웠을까. 아니면 담배를 피울 땐 그나마 유쾌해 했을까.......

 그런데 흡연이 쾌락이든, 고통이든 대체 내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어차피 그만 둘 수도 없다. 나에게 흡연은 쾌락도 고통도 아닌 무한한 반복에 불과하다. 술도 마찬가지다. 나는 짧아진 담배를 구둣굽으로 짓밟은 뒤 버스정류장을 떠난다. 그리고 집에서 멀지 않은 포장마차로 향한다. 경과 함께 산 지 1주년이 된 것을 기념해서 우습지만 나 홀로 파티를 하려고 생각한다. 그런 구실이 없다 해도 어차피 술을 마실 작정이었으나, 어쨌든 간에 명분을 붙이는 일은 위안이 되어준다.

 포장마차는 큰길이 아닌 지름길을 통해 가면 버스 정류장에서 나름 가깝다. 문제는 지름길을 택할 경우, 길의 막바지에 이르러 어느 건물과 건물 사이의 매우 비좁은 틈을 통과해야 한다는 점이다. 몸을 옆으로 돌리고 배에 잔뜩 힘을 주어야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비좁다. 애초에 사람이 다니도록 설계된 공간이 아니어서 더 그랬다. 두 건물 모두 이십 년은 족히 넘었는지, 틈을 지나 갈 때면 주황색 벽돌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 가끔씩은 발밑으로 쥐가 돌아다닌다. 쥐는 결코 커 보이지 않는 구멍 속으로 회색 몸뚱이를 필사적으로 쑤셔 넣다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곤 한다. 21세기의 서울엔 쥐가 거의 박멸된 줄 알았는데, 그들의 왕국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건재한 모양이다.

 바람마저 갇힐 것 같은 그 틈을 벗어나면 마치 대단한 장애물을 넘은 것처럼 뿌듯해지고, 드디어 붉은색 천막 하나가 시야의 구석에 들어온다. 그 안에서는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께서 요리를 하고 계신다. 나는 술을 마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의 미소를 보기 위해, ‘나를 향한 미소’라는 것이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포장마차에 가는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나는 큰 고민 없이 지름길을 택한다. 그 길이 빠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어려운 지점을 통과한 뒤에 조용히 찾아오는 보람이 좋다. 기분이 좋은 상태는 나처럼 무기력한 인간에게 아주 드물고 소중한 사건이니 최대한 자주 도모해줘야 한다. 곧 건물과 건물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각오를 하고선 인적이 드문 골목 쪽으로 발을 돌린다. 이제 앞으로 네 개의 교회를 지날 것 이다. 첫 번째 교회는 아득한 꼭대기 층에 자리를 잡아 교회가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두 번째 교회는 허름한 빌라의 지하로 내려가야만 예배당이 나온다. '↙예배당'이라 쓰인 에이포 용지가 입구 언저리에 붙어있는데, 비가 올 때마다 잉크가 번져서 날이 개면 누군가 새로운 용지로 대체해두곤 한다. 세 번째 교회는 그나마 부유한지 어엿한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쓰고 있다. 번듯한 네온사인 십자가가 옥상에서 하늘을 향해 핏빛으로 번쩍거린다. 마지막으로는 늘 창문을 열어놓고 있어 찬송가 소리가 새어나오는 교회를 지나야 한다. 이 네 교회는 분명 외양이 다르고, 아마 교파마저 조금씩 다른 것 같지만, 근처 어딘가에 크고 작은 십자가를 세운 것만큼은 동일하다. 생각해보니 포장마차의 사장님께서도 식기류와 요리도구들이 놓인 선반 가운데에 나무십자가를 하나 올려두셨다. 그 옆엔 사도 바울의 편지 한 줄이 목판에 새겨져 선반의 나머지 절반을 차지한다. 그 목판 때문에 그릇들은 남은 비좁은 곳에 쌓일 대로 쌓인 형편이다.

 그 구절이 바울의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건 ‘고린도 전서’라는 이름을 알아봤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나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 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니고 또래 친구들을 따라 간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를 교회에 계속 나가도록 붙들어준 것은 친구들이 아닌 교회의 어른들이었다. 나는 성경 구절들을 곧잘 외워서 그들의 칭찬을 받곤 했다. 인정에 으쓱해지자 욕심을 부려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읊겠다는 포부를 품었으나, 역시나 첫 번째 복음서에서부터 지쳐버렸다. 그래도 성인 예배에까지 기웃거리며 이런저런 잡다한 사실들이나마 주워들으려고 노력했다. 어려운 설교를 들으면서도 졸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게 기분이 좋았다.

 집안 사정으로 이사를 가게 되자 더 이상 그 교회에 나가지 못했 다. 나는 성경 공부에 따르는 인정이 그립긴 했지만 이사를 간 곳에서 새 교회를 찾을 만큼 신앙심이 깊지는 않았다. 그 뒤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십 년 남짓 성경을 펼쳐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바울’이라는 인물만큼은, 나에게 언제나 의문스러운 존재로 남아있었다.

 이 사랑받는 사도의 과거는 기독교의 열렬한 박해자였다. 심지어 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러 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신성한 부름을 받고 새 신념에 눈떴다고 되어있다. 그 후로 바울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사도로 환골탈태한다. 지금은 나처럼 성스러움에 무덤덤한 인간의 뇌리에도 남아있을 정도로, 서울 한 구석의 포장마차에서도 그의 문장을 찾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나는 비좁은 길을 통과한 뒤 천막 속으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들자마자 보이는 바울의 문구를 읽는다.

 ‘너희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 전서 16:14’

 “소주 한 병에 오돌뼈 하나 주세요.”

 의자를 하나 차지했을 무렵, 바깥공기를 쐬어서 다 마른 줄 알았던 와이셔츠가 다시 젖어있었다. 설마 그 좁은 틈을 지나가느 라 애썼던 것 때문일까. 나의 체력은 실로 한심한 수준이었다. 목욕이 더욱 간절해졌지만 맨 정신으로는 경의 멍한 눈빛과 마주하고 싶지 않다. 일단은 소주잔을 들고 볼 일이다. 그러고 보니 9시가 넘었는데도 아직 저녁을 먹지 못했다. 계속 담배를 피우니까 입안이 텁텁해져서 배고픈 줄도 몰랐던 것 같다. 배가 고픈 줄 알았다고 해도 근무 중에 밥을 챙겨먹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늘은 무려 열다섯 명이나 사무실을 다녀갔기 때문이다. 계약을 마치고 건물을 나서려는 고객과, 사무실이 있는 층으로 올라오는 새 고객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나기까지 했다. 그 정도로 바쁜 날에는 밥은커녕 잠깐 담배를 피울 여유마저 감지덕지하다. 한 개비를 모두 태우기도 전에 다음 고객의 발걸음소리가 들려오고, 나는 아까운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끈 뒤 은단을 먹거나 향수를 뿌리느라 분주해진다.

 하여간 이제는 잔향을 내버려두어도 괜찮은 곳에 왔다. 내 몸에 남은 담배 냄새가 아무리 지독해봤자 어차피 오돌뼈 따위의 진한 냄새에 곧바로 묻혀버릴 테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의 후각도 취기로 인해 무뎌져있다.

 주문을 받자 아주머니께서 미소를 지으신다. 그 순간 하루의 피로가 잠시 잊혔다가, 그녀가 냉장고로 손을 뻗으면서 등을 돌리자 다시 밀려오고, 친근한 초록색 병과 맑은 유리잔이 내 앞에 놓인 뒤에도 나를 떠나지 않는다. 조급해진 나는 어서 병뚜껑을 연다. 문득 그것이 나사를 푸는 소리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특히 고장 난 기계의 나사를 푸는 소리처럼 들린다. 고치기 위함일지, 더욱 망가뜨리기 위함일지는 가늠할 수 없다.

 “오돌뼈는 조금만 기다리세요.”

 사실 빈속에 소주를 마시니 죽을 맛이다. 뱃속이 한 가득 쓰라리다. 마치 내 배의 윤곽이 어떻게 잡혀 있으며 장기의 내부가 어느 정도로 넓은지 알려주는 것만 같은 고통이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언짢은 감각을 원했기 때문에 안주도 없이 몇 잔씩이나 비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퇴근길에만 오르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내가 여전히 실재한다는 증거를 원한 것이다. 몸뚱이가 윤곽과 부피를 가지는 데다가 아픔을 느낄 줄도 아니 아직 살아있기는 한 모양이라고, 자위하며, 차차 소멸할 듯이 움츠러드는 나의 영혼에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것이다.

 마침 건너편 테이블에서 서넛 정도 되는 회사원의 무리가 '위하여'를 외치며 술잔들을 부딪치고 있다. 저들은 무엇을 위하여 건배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나만의 건배사, 그러니까 침묵에 힘입어 더욱 빠른 속도로 소주를 들이켰다. 뒤늦게 오돌뼈가 나왔을 무렵엔 벌써 한 병을 더 시켜야 했다.

 “천천히 마셔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천천히 마셔요.”

 일단은 아주머니의 권유를 감사히 받아들인다. 테이블 위에는 썰린 대파가 뿌려진 오돌뼈 한 그릇과, 냉장고에서 갓 꺼내져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청록색 소주병이 놓여있다. 그러고 보니 경과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오돌뼈를 먹었다. 그때는 아주머니 대신 경이 내게 천천히 마시라는 말을 해줬던 것 같다.

 ‘임마, 천천히 좀 마시라.’

 우리 지방사투리가 섞인 친근한 어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제나 지금이나, 빠르게 취해버리고 싶은 내 마음만큼은 똑같은 모양이다. 그날 경은 자신이 쓰고 있던 장편소설에 대해 두 시간 동안이나 떠들었다. 그 다음날 내가 출근해야 하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밤을 샜을 것이다.

 “이 인물은 가정 형편이 이런 성격을 만들었다이가. 아버지가 어렸을 적에......”

 “그런데 이제 이쯤에서 그 사건이 터진다. 희극적인 비극이 되는 거라고. 웃기지 않나? 비극적인 희극은 없는데, 비극은 희극적일 수 있다는 게. 주인공이 여기서 어떤 행동을 하냐면......”

 “결말 말이야, 고민을 좀 했거든. 처음엔 주인공을 병들게 만들려 했었다. 인물 하나 죽이는 것만큼이나 완결성을 높여주는 게 또 없다이가. 해피엔딩 같은 걸 잘 쓰기는 힘들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 봤지. 내가 이 글을 통해가 ‘인간의 쇠퇴’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나? 인간은 불완전하니 언젠가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캐도, 글고 현실을 묘사하는 게 소설가의 일 중 하나라캐도, 내가 몰락의 메시지를 전할라고 펜을 들었었나? 절대 아니었거든. 그래서 고심 끝에 결말을 바깠지. 결국 주인공은......”

 원래 소설가란 그런 인간인가? 자신이 만든 세계에 대해, 별이 반짝이는 밤부터 태양이 뜨는 새벽까지 쉬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간...... 반면 나는 내 삶에 관해서 단 한 시간도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고객과 담배와 소주, 그리고 연약해져버린 우정이 생각나는 전부이다. 목록에 몇 가지를 굳이 추가한다면 만원버스와 땀에 젖은 와이셔츠 정도다. 그리고 내 빈약한 인생 의 요약본에서 무언가 하나를 반드시 빼라면, 자아 혹은 영혼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내 삶은 30분의 수다거리도 못 되는 한편 소설가의 세계는 저 혼자서 밤을 몰아내고 성큼 내일로 내닫는다.

 그러나 지금의 경은 실패한 소설가이다. 실패한 소설가란 소설로 돈을 벌지 못하는 작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수입이 적어도, 혹은 초보적인 수준의 창작에 머무른다고 해도 진지한 태도로 소설을 쓰는 한에서 그는 어엿한 소설가이다. 오직 이야기 하나로 기나긴 어둠을 통과할 수 있는 자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몇 백 편의 글을 냈어도 더 이상 소설을 쓰지 못한다면 실패한 소설가가 되고 만다.

 두 달쯤 전, 경은 어느 신생 문예지에 여태까지 모아둔 전 재산을 투자하다시피 했다가 사기를 당했다. 유명출판사에서 새로운 문예지를 내려는데 거기에 돈을 좀 보태면 당신의 장편소설을 연재하게 해주겠다는 말을 믿은 것이다. 분명 허술한 거짓말이었을 텐데 거기에 그만 넘어가버리다니! 아무리 경에게 바보 같을 정도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고 해도,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는 믿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가서야 그 사기꾼이 경의 가까운 친척이었던 데다가, 경의 장편소설이 이미 공모전에서 몇 차례 낙방하고 투고로도 성과를 보지 못한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 경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을 테다.

 하지만 당시의 선택으로 인해 경은 현재 몰락하는 중이었다. 몰락의 배경은 다름 아닌 내 부엌의 허연 매트리스 위. 베란다로 밀려난 빨래건조대의 자리에, 영혼의 줄기가 말라비틀어진 경이 세 달째 누워있었다.

 사건이 터진 후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밥도 하루에 한 끼 이상은 제대로 먹지 않는 것 같았다. 늘 구립도서관에 찾아가 빌려 읽던 책도 손에서 놓았다. 한 번은 반납 기한을 한참 놓치고도 멍하니 허공을 쳐다볼 뿐인 그를 대신해서 내가 도서관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귀찮거나 짜증스러운 건 둘째 치고 일단 놀랐다. 남의 책이든, 자신의 글이든 간에 경이 더 이상 활자가 적힌 것을 붙들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적응할 수 없었다. 그는 문장을 위해, 문장에 의해, 그 한 줄 한 줄의 힘에 의지해 사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경이 읽고 쓰기를 포기했다는 말은 그의 영혼이 죽어버렸다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런 경이 안쓰러워 그를 위로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함께 술을 마셔줬고, 경이 일할 만한 직장을 알아봤으며 그가 좋아하던 작가의 신작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악화됐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특히 그 유명작가의 신간은 건네주지 말았어야 했다.

 소설을 아직 쓰고 있었을 무렵, 그는 내가 출근해서 집에 없는 동안 내 침실의 책상에서 퇴고 작업을 했다. 그가 자신의 침대로 써 오던 매트리스도 원래는 내 침실에 있었다. 한때 우리는 정답게 같은 방에서 자고 일어났던 셈이다. 사무실에 가느라 집안에 잘 붙어있지 않았던 나와 달리 경의 생활반경은 매트리스 위와 책상 앞의 의자로 한정되어있었다. 경은 그에 불만이 있기는커녕 자고 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사기를 당하고 나서는 집필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지, 자신의 매트리스를 침실 바깥의 거실로 빼버렸다. 담배를 훔치기 위해 몰래 서랍을 열러 돌아갔다는 사실만큼은 애석하지만, 어쨌든 경은 그 끌려나온 매트리스 위에 누워 이따금씩 계란프라이를 해먹거나 내가 아침에 남긴 밥을 긁어먹고 김치통의 국물을 마시는 것 외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또는 너무 나지막해 들리지 않는 말들을 중얼거리거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한숨소리도 마찬가지로 매우 작았다. 경이 한숨을 쉬었다는 사실을 그 숨소리로써 아는 것이 아니라, 매트리스가 느닷없이 바스락거리는 것으로부터 겨우 알아내는 정도였다.

 영혼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장편소설이 빛을 발하지 못하고 끝내, 어느 폴더의 한낱 파일 혹은 먼지 쌓일 원고뭉치로 남는다는 것이 작가에게 가져다주는 공허란 그런 것이었다. 11쪽짜리, 25 쪽짜리, 기껏 해봤자 50쪽에 이르는 중단편소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분량과, 처음 연필을 들기 한참 전부터 시작되었을 계획, 집필에 들인 모든 시간, 영감, 노력, 설렘과 고투...... 이런 빛나는 것들이 암흑 한 가운데로 내쳐지는 것이다. 실패를 딛고 다시 동굴 밖으로 나선다면 소설가로서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겠지만, 경은 동굴의 심장부까지 파고들어가 그 깊숙한 그림자 속에서 영영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실패한 소설가였다.

 나는 점점 그런 경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기가 어려워졌다. 곁에 있으면 나까지 우울해지기 일쑤였고 안 그래도 암담한 마음에 불필요한 짐을 얹는 느낌이었다. 만약, 만약에 내 안에 여유가 넘쳤더라면 그를 위로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도 여의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영혼의 촛불도 이미 위태롭게 껌뻑이고 있었다. 그에게 불을 빌려주겠답시고 섣불리 촛대를 기울일 수 없었다.

 여기에 현실적인 문제들이 겹친 것도 사실이다. 비록 무척 적은 양이긴 했지만 세 달 전부터 경은 내가 사온 음식을 제 것처럼 먹었고, 휴지 같은 생필품을 구해 채워 넣는 일도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게다가 전세라고는 해도 각종 공과금이나 적은 액수의 월세 정도는 추가적으로 내야 했는데, 이 역시 혼자 살았을 때처럼 오롯이 내가 부담하고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용돈이나마 벌어주었던 자잘한 투고도 관둔 경으로서는 수중에 돈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겠지만, 미안하다는 말을 계속 듣는다고 해서 내 기분이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엔 “미안하지만”--경은 모든 말을 이렇게 시작한다--담배 한 갑만 사다줄 수 없겠냐고 부탁을 해오는데 순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날 나는 담배를 사다주기는커녕 집안 서랍에 있던 담배까지 모두 사무실로 옮겨와 버렸다. 집에 바로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것도 흰 매트리스 위의 창백한 그를 보는 일이 껄끄럽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씩 살펴보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이유들이다. 존재에도 감히 양과 정도가 있다면, 그는 평범한 인간의 16분의 1만큼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히 그를 부양하는 일이 아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에게 들어가는 액수를 따지고 보면 더욱 미미했다. 과장을 보태, 내가 오늘 하루 술을 마시지 않으면 복구되는 수준의 지출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옹색하게 굴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인간적인 대응이었다. 나는 바울 같은 성인(聖人)이 아니었으니까. 경의 말마따나, 불완전하기 짝이 없어 그로 인해 몰락이 예정된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두 병을 모두 비우니 생각이 앞으로 뻗어나가지를 않고 고장난 오디오 플레이어처럼 한 구간에 머무른다. 어젯밤 경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에서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어제도 그는 빨래 건조대 옆에 시체처럼 누워있었고 나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진탕 마시고 돌아간 상태였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매트리스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어서 핏줄이 잔뜩 선 듯 따가워진 눈으로 친구의 초점 없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경아, 고마 고향으로 돌아가라.”

 “.......”

 “서울에서 많이 애썼다 아이가. 돌아가가 부모님 집에서 일이라도 도아라.”

 부모님이라는 말을 듣자 경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등을 구부리면서 무릎을 들어 올려 두 팔로 껴안았다. 그 모습은 영락없이 겁에 질린 어린이였다.

 “내도 니 이라고 있는 거 보기 힘들다.”

 나는 이 말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벌써 절망해버린 아이 같은 그의 모습을 보는 게 정말로 힘에 겨웠다. 안쓰러워서, 연민이 과해서 힘이 들었다기보다는 쇠퇴하는 인간인 그가 추해보였기 때문이다. 너무 추해서 화가 날 수준이었다. 경의 헝클어진 머리칼과, 내 자의식처럼 흐릿한 그의 눈동자가 내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술기운이 강하게 올라오면서 광대의 표면 그리고 가슴 깊은 곳이 후끈해졌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는 말 안 할라 캤는데, 여기 니 집 아이다. 내 집이다.”

 “.......”

 “니 이라고 있는 거, 아무리 우리가 친구 사이라캐도 민폐인 거 모르나.”

 “......미안하다.”

 “또 그 미안하다는 타령이가. 진짜 미안하면 짐 싸라.”

 “.......”

 “왜 못 돌아가는 거고? 부모님께 실패했다고 말하기 싫어서 그런 거가. 서울 와서 실패하는 사람이 한 둘이가. 니가 이라고 버티는 게 더 실패자 같다. 일단은 돌아가서 집밥도 묵고 마음 추스리면서 지내봐라. 또 혹시 아나,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 또 서울에 오게 될지.”

 “.......”

 “이 집에서 내 혼자 살기도 버겁다. 퇴근하고 나면 남 힘든 거 지켜봐줄 힘이 없다고. 내가 지금 대체 니한테 뭘 해줄 수 있겠노. 니한테는 부모님이 필요하지 내가 필요한 게 아이다. 제발 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나가라.”

 그 마지막 세 글자에 경은 곧바로 엎드려서 나의 종아리를 붙잡았다. 나는 그 촉감에 거의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우선 그의 손끝이 너무 차가워서 당황했고, 나의 유일한 양복에 그의 거친 손이 닿는 것이 거북해서, 그리고 조금 뒤엔 내가 친구의 손길에 거북함을 느꼈다는 사실이 거북해서 또 한 번 당황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뻗은 손을 피해 이미 멀찍이 물러나버린 상태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확인한 그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부모님 아신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로 말문을 열었다. 밀려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한 눈에도 야윈 등이 보였다.

 “니 짐 뭐라 했노.”

 “내 투자한 잡지도, 소설도 망한 거 아신다고.”

 “하?”

 “......사기꾼이 큰아버지였던 것도 아신다.”

 나는 오랜만에 그가 긴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잠시, 사정을 알고 나니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럼 왜 안 돌아가는데? 내는 니 부모님한테 말하기 죄송해서 그런 줄 알고 여태껏 참았다. 여태껏 내 바빠 죽겠는데도 니 시다바리 짓 다 했다고. 근데 이미 아신다고? 니 그럼 지금 나한테 민폐 끼칠라고 작정해서 여기 눌러앉은 거가?”

 “사기 당했다고 알렸을 때 전화로 무슨 말을 들었는지, 니는 모를기다!”

 이번에도 쥐 죽은 듯 있을 줄 알았던 경이 허리를 다시 꼿꼿이 펴고 응수해왔다.

 “집에서는 큰아버지가 아니라 내를 탓했다. 사기꾼이 아니라 나를 욕했단 말이다. 왜 재주도 없는 놈이 예술을 한다캐가 이 꼴을 냈냐고, 느그 큰아버지 원래 그런 사람인 거 알믄서 니가 조심했어야지 뭐 한다고 서울까지 가가 만나고 지랄을 했냐고 그러시드라. 처음부터 가게 안 돕고 혼자 상경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댄다.”

 그의 희멀건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되어 있었다. 안쓰러움보다 불쾌감이 앞선 것도 내가 성인이 아니어서였을까. 경의 사정을 몰랐던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씩씩거리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의 사정을 백 퍼센트 알아들은 것도 아니었다. 사실 너무 어지러워서 경의 말이 명확하게 들려오지 않았고, 피곤한 나머지 제대로 들으려는 의지도 그닥 남아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울먹이면서 이야기한 탓에 음절들이 뭉개지는 것도 나의 몰이해에 한 몫 했다.

 “어릴 때부터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속만 썩이드만 와 커서도 그 꼬라지냐고 뭐라카드라. 집 나갔을 때 이미 정 뗐으니까 인자 가게일은 도울 생각도 말라 하셨다. 니 그렇게 좋아하는 서울에서 글이나 끼적거리믄서 알아서 살란다. 이런데 돌아가겠나. 갈 수나 있겠나.”

 “니는 사람 말귀도 못 알아먹나? 겉으론 그렇게 말해도 속으로는 돌아오길 바라고 계실 기다......”

 “그렇다캐도 당장 가서 얼굴 뵐 수 있겠나? 지금 내 처지에 그런 말을 듣고도? 니라면 할 수 있나? 나는 못 본다. 아직은, 당장은 못 보겠다.”

 “아니 시발, 그게 니 사정이지 내 사정이가!”

 나는 자리를 박차면서 울부짖었다. 경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내가 갑자기 일어나면서 만들어진 충격으로 인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나는 여전히 울고 있는 그를 내려다봤다.

 “니가 지금 자존심 지킬 때가? 내 지금 니한테 부탁하는 거 아 이다. 집세 내는 사람으로서 나가라고 명령하는 기다. 이해 안 되나?”

 문득 넥타이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풀어서 매트리스 근처의 바닥에 던졌다. 경은 구겨진 채 바닥에 내팽개쳐진 넥타이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예의 개미만한 목소리로 되돌아갔다.

 “진짜 미안타. 내 이제 정신 차리가 일도 하고, 방세도 보탤 테니까......”

 “됐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나가라. 더 이상 니 꼴 보기도 싫다.”

 나는 경의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 분노에 차있었지만 잔뜩 술에 취한 상태이기도 했기에 빠른 속도로 잠에 들었다. 잠들기 직전, 경이 소리 내어 우는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듣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경이 우는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르겠다. 악몽 같은 현실이거나 현실 같은 악몽이었고, 어느 쪽이든 간에 기분이 나빴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 일어났을 땐 경 역시 매트리스 위에서 잠에 들어 있었다. 한 번도 내가 출근할 때 눈을 감고 있던 적이 없었는 데, 오늘은 시퍼런 안색을 하고서 분명히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끝끝내 집을 나가지는 않는다고, 맘 편히 잠이나 처자는 뻔뻔한 새끼라고 생각하면서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를 주워 급하게 맸다. 넥타이는 구둣발로 짓밟힌 담배처럼 구깃구깃했다. 그렇게 눈두덩이 퀭한 경을 뒤로 하고 아침에도 만원인 버스를 타러 나갔다. 또 다시 정신없는 하루가 흘렀다. 나는 열다섯 명의 고객을 만났고, 열한 개비의 꽁초를 사무실의 재떨이에 버렸으며, 양복에 담배 냄새가 밴 채로 어제와 똑같이 포장마차에 앉아있다.

 시간이 늦어질수록 포장마차 안으로 더 많은 손님들이 들어온다. 저마다 나처럼 사정이 있어 집으로 직행하지 못하는 모양이 다. 다들 집안에 미운 친구를 한 명씩 모셔놓았을까. 아니면 미운 남편, 미운 아내, 미운 자식일까. 나는 아직도 집에 들어갈 마음이 생기지 않아 소주를 더 시킨다. 아주머니의 걱정 섞인 충고를 들으면서도 새로운 병을 열고, 내 안의 나사가 또 한 번 풀리는 것을 느낀다. 그것이 아마 마지막 나사였나 보다. 주변이 시끌벅적한데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조금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치 버스를 탔을 때처럼 눈이 감기면서 의식이 흐려진다. 나는 아까보다 배가된 피곤과 근심에 취해 꾸벅꾸벅 졸다가, 나 자신의 딸꾹질 소리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 순간 철판에 무언가를 굽고 계신 아주머니의 등 뒤로 바울의 글이 적힌 목판이 눈에 들어온다. 내 영혼의 어떤 촉수가 그 문구에 감응하기라도 한 걸까, 목판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시야에서 희미해진다. 약 2000년 전, 바울이 고린도의 교회에 남긴 인사말, 너희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나를 오랫동안 사로잡아온 의문은 대체 왜 바울이 사도로서 선택되었냐는 것이었다. 도대체 왜, 열렬한 신자가 아니라 열렬한 박해자가 부름을 받았단 말인가? 가장 열심히 반대한 자보다 열심히 믿어온 자가 선택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어린 시절 처음 바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반응도 그랬다. 나는 ‘하나님이 왜 나쁜 사람을 골랐는지 모르겠다’는 문장을 일기에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불현듯, 소위 전지전능하다는 존재가 무언가 예상치 못한 선택을 했을 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에 이른다. 나 같이 평범한 사람은 예상할 수조차 없기에 더욱 뜻이 깊어지는 그런 의도 말이다. 그리고 친구에게 못된 말을 쏟아낸 다음 날, 우연히 바울을 떠올리게 된 것도 신의 의도에 따른 것이라면...... 더 이상 신앙이 없는 나에게도 바울의 개심이 계시하는 바가 있을 것 같았다. 최악의 박해자에서 최선의 사도가 된 바울의 삶은 인간이, 불완전한 인간이 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신은 인간의 개선을 허용하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격려하기도 하는 게 아닐까? 그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어렴풋이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경에게 옹졸했던 시간들에 대한 후회에 사로잡혔다. 글을 쓰지 못하게 된 지금의 경은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보호와 위로가 필요하다. 반면 나는 좁지만 집이 있고, 밉지만 직업이 있으며, 적지만 돈이 있다. 연락이 자주 오가지는 않으나 어쩌다 찾아가면 나를 반드시 반겨주시는 부모님도 계신다. 어쩌면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경이 다시 일어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 설령 그가 끝내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최대한 상냥하게 경을 대해야 할 처지에 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친구로서 경에게 다했어야 할 도리를 깨닫는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사과한다면, 그가 홀로 설 기회를 한 번 더 갖게 해준다면 나는 변화할 수 있을까? 무서울 정도로 졸렬했 던 나도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걸까?

 나는 마지막 병을 반이나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난다. 급하게 계산을 마친 뒤 천막을 뛰쳐나간다. 얼른 집으로 가야 한다. 어제 내가 뱉은 말 때문에 곧 떠나버릴지 모르는 경을 붙잡아야 한다. 아니면 혹시라도 그가 이미 집을 나갔을까 봐 안절부절 못하면서, 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배에 잔뜩 힘을 주고 건물과 건물 사이의 비좁은 틈을 지난다. 창문으로 찬송가가 흘러나오는 교회를 지난다. 건물 한 채를 통째로 쓰고 있는 교회를 지난다. 허름한 지하실에 예배당이 있는 교회를 지난다. 옥탑방처럼 아득한 꼭대기에 ‘복음’이라 써 붙인 교회를 지난다. 이 밤까지도 신을 노래하고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나의 집 쪽으로 가면서 점점 검은 침묵 속으로 흡수되어버린다.

 집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빌딩의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늘 반복된 일과였다. 그래서 나의 주머니엔 이 시간을 위해 아껴둔 담배 한 개비가 남아있다. 하지만 오늘은 입에 물지 않으련다. 내 폐를 태우면서 덧없는 안정을 취하는 대신 몇 분이라도 일찍 친구의 곁에 이르러 내가 상처 낸 영혼을 보살피겠다. 나는 부디, 경이 아직 매트리스 위를 떠나지 않았길 기도하면서 문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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