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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제지기오름(2021.8)

제지기오름

 
 

바닷소리의 데시벨에 맞서

해발 구십 미터 남짓의 작은 오름

엄마 아빠 손을 붙잡고

사실 그럴 나이는 훨씬 지나서

그저 일직선으로

성질 급한 아빠와

허리 아픈 엄마 사이의 간격을

어떻게든 조절해보며

오른다

 

바닥엔 세잎클로버 무리와

이름 모를 풀, 목재 계단 투박하게

이따금 새똥 짓궂게 그리고

나팔 악대처럼 모여있는 취나물

사이에서

올 여름 첫 모기들을 만난다

허벅지 위 융기한 붉은 오름

 

정상에서의 파노라마

땀에 젖은 바다를 내려다보고

다리 한두 번 긁적여본 뒤

두리번거리면 나무에 걸린 책갈피

독실한 누가 남기고 갔는지

신이 죽음의 짐을 내려놓게 해준단다

고개를 떨궈

 

솔방울로 축구를 한다

제지기오름의 어원이라던

어느 젊었을 절지기와 함께

그러나 산 사람의 패스는 차마

죽은 자에게 닿지 못하고

애꿎은 솔방울들만 걷어차일 때

열심인 만큼 외로운 것은 왜인지

 

그때 기다란 산풀 여럿이

온몸들로 공을 막아서고

기쁨으로 소리지르지도 않는 골키퍼

공격에 실패한 나는 가볍게

아빠와 엄마 뒤를 따라서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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