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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물

진리의 짧은 자서전(2017.2)

 처음 습작을 시작했던 시절에 끄적였던 글들 중 그나마 완성도가 높았던 아이다.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부족한 대로 약간의 수정만 거쳐 아카이빙해둔다. 2017년 2월이라니 4년도 더 전인데, 글재주는 부족했어도 열정만큼은 무모할 정도로 컸었어서 오히려 그리운 느낌도 있다. 나는 글재주의 기준에선 얼마나 발전했을까. 열정의 기준에서는 얼마나 깊어졌을까. 스물넷에서 스물일곱이 되는 사이, 무엇을 잃고, 대신 무엇을 소화했을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중간에 내가 소설 쓰기를 진심으로 포기했었다는 사실이다. 이 문장을 대단한 과거형으로 쓸 수 있어 다행이다.


유년기

 스스로 돌이켜본 나의 어린 시절은 토막나 있다. 7살 이전의 기억은 가물가물하다는 말도 부적절할 정도로 무에 가깝다. 그래서 나란 역사의 초창기는 친척들의 우스갯소리를 통해서만 복원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나는 돌잔치 때 연필을 잡아 할머니 할아버지의 자랑거리가 됐다. 그런데 또 유치원은 가지 않았단다. 대신 피아노 학원을 다녔는데, 또래 아이들이 체르니100을 칠 때 바이엘조차 떼지 못해서 일찍이 때려 쳤다고 한다. 태권도도 빨간 띠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만 다니겠다며 떼를 썼다나. 애답지 않게 장난감 가게를 무심히 지나쳤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 꼬마가 유독 책에는 집착하더라는 거다. 하루에 한 권씩 꼭 읽어 치웠고, 그러지 못하면 꾸벅꾸벅 졸면서도 종잇장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친척들이 진술한 바의 진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내가 확실히 기억할 수 있는 건 초등학교 입학 이후뿐이다. 그것도 1, 2학년 시절의 기억은 몇몇 장면들만 사진처럼 남아 있다. 8살, 입학식 날 운동장에서 같은 반 친구들이 처음으로 모였을 때, 나는 유행하던 유아스포츠 브랜드의 연보라색 파카를 걸치고 있었고 나와 키가 똑같아서 옆에 섰던 아이는 똑같은 외투인데 색깔만 주황색인 옷을 입고 있었다. 9살, 어느 점심시간에 아끼던 팔찌가 끊어지는 바람에 복도에 떨어진 구슬들을 하나하나 주워야 했다. 다들 멀찍이 보고만 있었을 때 한 남자아이만이 나를 도와주었다. 먼지투성이 바닥을 만지느라 둘의 손들은 시꺼매졌고, 우리는 함께 개수대에 가서 동시에 물을 틀었다. 나란히 손을 비볐지만 다른 성별의 아이와 대화하는 게 부끄럽고 낯설었던 나이라서 마지막에 고맙다는 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남자아이가 뭐라고 대답했었던 것 같은데 그만 잊어버렸다.

 그러고 나서는 나이가 두 자리 수를 찍었다. 10살은 오묘한 나이다. 가장 다양한 아이들이 모여드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어떤 아이들은 아직도 유아로서의 고집과 철없음을 고수하는 한편, 어떤 아이들은 몇 배로 성숙하거나 똑똑하다. 발육이 뒤떨어져 동생들만큼 작고 야위어있는가 하면, 벌써 어깨가 벌어져 있거나 허리가 잘록하기도 하다. 나와 친했던 한 아이는 10살 때 벌써 바지에 첫 피를 묻혔다. 운명이 가혹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1년 전 함께 구슬을 주웠던 남자아이와 3학년이 돼서도 같은 반을 배정받았다. 미예, 그 아이의 이름은 미예였는데, 얼굴과 입술이 붉고, 손이 큼직했다. 우린 여전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 사이에 어색한 벽이 있었다. 아니, 아닌 것 같다. 사실 다른 남학생들과는 장난도 꽤 많이 치고 꿀밤도 주고받고, 체육시간에 원을 만들면서 손도 곧잘 잡았는데 그 아이와는 왠지 그러기가 어려웠다.

 한편 나는 책만 많이 읽었다 뿐이지 시험 점수는 시원치 않았다. 국어 성적만 좀 괜찮았고, 나머지 과목들은 점수의 십의 자릿수부터 암울했다. 엄마는 학부모 모임에 다녀온 뒤로 조급해졌는지 내게 나머지 공부를 권유했다. 딱 3학년부터 원하는 학생에 한해서 저녁까지 교실에 남아 공부를 하고 갈 수 있었다. 우리 반에선 4명의 아이들이 나머지 공부를 신청했다. 그들 중엔 나와 미예도 있었다.

 말이 나머지 ‘공부’였지 넷이서 논 기억밖에 없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종례 이후에 어디론가 사라지셨다가 우리가 집으로 가야 하는 시간인 6시가 돼서야 교실에 잠깐 나타나서, 머릿수가 그대로인 것만 확인하고선 후다닥 퇴근하셨다. 덕분에 우리는 틈만 나면 교실을 빠져나가 숨바꼭질과 술래잡기를 했다. 뛰다 지치면 학교 운동장의 알록달록한 정글짐 안으로 들어가 수다를 떨었다. 

 미예는 대개 조용했다. 하지만 말수만 적을 뿐 상냥했는데, 특히 내게 자주 미소를 지어줬다. 나머지 남자아이 둘은 심한 수다쟁이였다. 홍일점이었던 나는 과묵하지도, 말이 너무 많지도 않았다. 우리 넷의 대화는 그렇게 균형이 맞았다. 시시콜콜한 잡담에서부터 반 친구들에 대한 칭찬과 악담, 유행하는 게임의 아이템 시세, 선생님들과 관련된 뜬소문, 장래의 유치한 소망 등 모든 것에 대해 재잘댔다. 당연히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에게만큼은 투명한 유리 같았다.

 나머지 공부가 끝나면 우리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겁도 없이 어두운 동네를 활보하거나 누군가의 집으로 몰려 들어가서 눈치 없이 저녁을 얻어 먹었다. 특히 금요일엔 미예의 부모님께서 늦게 들어오셔서 늘 그의 집에서 모여 놀았다. 미예가 사는 단독주택은 작고 곧 무너질 듯이 허름했는데, 그 안엔 더 작고 더 위험해 보이는 다락방이 있었다. 바닥이 삐걱거리고 천장은 어른이 설 수 없을 만큼 낮았지만 우리에게만큼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우리는 그 좁은 공간으로 꾸역꾸역 들어가서, 미예의 방에서 가져온 램프를 켰다. 그러면 넷이 둘러 앉아 정글짐 아래서 못다한 수다를 이어나갈 수 있었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글짐 속에서는 말할 수 없는--아무래도 구멍이 숭숭 뚤려있으니까--비밀을 털어놓기도 했다. 어느 날 남자아이 한 명은 자기가 실은 지금의 짝꿍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다른 남자아이는 자기가 실은 야한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미예는 마치 여러 비밀들 중 어떤 것을 말할까 고민하는 것처럼 고개를 여러 방향으로 흔들다가 실은 자기 엄마가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의 폭로에 견줄 만한 비밀이 없었다. 머리를 굴리다가 별 수 없이 시답잖은 소리를 하고 말았다. 실은, 나 공부를 좋아해, 라고 쭈뼛대며 고백했다.

 그 순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우리는 모두 나머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었으므로 대충 맥락을 살피다가, 숨겨둔 사랑과, 때이른 취향과, 어머니의 불륜만큼 충격적인 말을 나름대로 엄선했던 것 같다. 나는 공부를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가정사를 공개한 미예보다도 거센 반응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반응들, 그런 표정들은 10살 때나 마지막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수다가 지루해질 때면 카드나 보드게임을 갖고 놀았다. 화투나 트럼프 카드를 쥐고 제대로 부리는 방법도 모른 채 명절 때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본 것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그리고 부루마블. 부루마블을 통해 우리는 처음으로 큰 세상을 접했다. 나는 뉴욕과 파리가 서로 붙어 있기에 같은 대륙의 도시인 줄 알았는데, 훗날에야 둘 사이에 대양이 흐른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과자 하나만 먹어도 동이 날 법한 재산을 걸고 내기를 했다. 게임에서 지면 아쉬웠지만, 이긴 사람은 딴 돈으로 다음날 아이스크림을 사야 했다. 오래 두고 먹기 위해서 무조건 쭈쭈바로 고르곤 했고, 너무 아끼는 바람에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서 벌컥 마셔버리는 날도 잦았다.

 하지만 겨울에 접어들자 늘 하던 게임들에 질려버렸다. 우리는 매뉴얼을 보지 않고도 마닐라에 빌딩을 지으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아는 수준에 이르렀다. 동전이라도 모아서 새로운 보드게임을 사자니 돈이 얼마 없었다. 나는 애꿎은 쭈쭈바 탓을 했다.

 구세주는 미예였다. 미예는 금요일이 되기 전마다 새로운 보드게임을 하나씩 생각해 왔다. 이면지에 판을 그리고, 서로 다른 색의 돌멩이나 지우개를 말로 삼고, 핑킹가위 같은 것으로 카드를 예쁘게 오려 매주 색다른 놀이법을 창조해낸 것이다. 사다리를 최단경로로 이어 곤경에 빠진 여행자를 구출하는 단순한 놀이부터, 팀을 짜서 말을 규칙대로 움직여가면서도 먼저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머리 아픈 퍼즐까지 다양했다. 게임 판을 어찌나 잘 꾸미던지, 미예는 공장에서 찍은 것 같은 그림들을 손쉽게 그려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예는 처음 보는 신기한 게임을 만들어 왔다. 판도 말도 없고, 짧은 문장이나 숫자가 적힌 카드들만 잔뜩 있었다. 게임의 이름은 심오하게도 ‘원인-결과 게임’이었다. 게임의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잘 섞은 문장 카드들 중 2개의 카드를 순서대로 뽑아야 한다. 처음 뽑은 문장이 첫 번째 원인, 두 번째로 뽑은 문장이 최종 결과가 된다. 이어서 숫자 카드들 중에서도 하나를 뽑는다. 거기에 적힌 수만큼의 중간 사건을 설정해서 원인과 결과를 매끄럽게 연결하면 성공이다. 돌아가면서 카드를 뽑는데, 원인과 결과를 그럴 듯하게 잇지 못하는 사람은 지고 만다. 매끄러움을 판단하는 건 나머지 참가자들의 몫이다.

 예를 들어서 문장 카드로 ‘달을 본다’와 ‘트림하다’를 뽑고, 숫자 카드에 2라 적혀 있다고 하자. 참가자는 ‘달이 뜬 게 첫 번째 원인이고, 그로 인해 두 개의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트림을 하는’ 일련의 과정에 막힘이 없도록 즉석에서 이야기를 지어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동그란 달을 보고, 동그란 빵이 생각나서 다음날 아침 단팥빵을 사먹었고, 목이 말라져서 탄산음료를 마셨고, 그 결과 트림을 했다”라고 말하면 차례가 무사히 넘어가고 다음 사람이 카드를 뽑는 식이었다. (이때 '사건'의 기준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정해졌다.)

 처음엔 규칙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미예의 설명과 함께 두세 판을 돌리고 나니 그보다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아무리 성숙해봤자 고작 열 살이었기 때문에 대충 똥, 오줌, 바보, 방귀 같은 소재를 이용하면 재미도 그럴 듯함도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넷이 돌아가면서 매일 새로운 문장 카드들을 만들어온 덕에 이 게임은 반복해도 질리지 않았다. 미예의 게임 덕분에 우리는 다락방에서만큼은 모두가 이야기꾼이 되었다.

 그러다 불쑥 12월이 찾아왔다. 나머지 공부도 마지막 날에 이르렀다. 그 날은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어김없이 방과 후 미예의 다락방에 모여 원인-결과 게임을 즐겼다. 겨울바람이 튼튼치 못한 벽과 낡은 창문을 가뿐히 뚫고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우린 추운 줄도 모르고 깔깔댔다. 아래층에서 가져온 이불로 몸을 동동 싸매면 손이 시린 것을 빼고는 버틸 만 했다.

 그 날은 미예가 문장 카드를 준비한 차례였고, 여느 날과 다름 없이 우리는 배꼽을 쥐어가며 플레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저녁이 깊어지면서 카드는 몇 장 남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순서는 미예였다. 그런데 최종적으로 뽑힌 두 문장 카드가 이상했다. 늘 단순한 행동 사항만 적혀 있던 문장 카드에 처음으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우리 넷 중 둘의 이름이었다. 미예, 그리고 나의 이름 진리가 소년의 삐뚤삐뚤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 카드엔 “미예가 일어선다”, 두 번째 카드엔 “진리가 운다”라고 적혀 있었다. 미예가 준비한 판에 내가 우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니, 그가 대체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한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나는 숫자 카드가 무엇이 나올 것인지에 내 모든 행운을 걸었다. 제발 5나 6, 적어도 3이나 4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예가 뒤집은 숫자 카드는 1이었다.

 난 그 아이가 내게 거센 꿀밤을 먹일 거라고 말할 것 같았다. “미예가 일어나서, 진리에게 꿀밤을 먹이므로 진리가 운다”라고. 이런 것 말고는 그럴 듯한 연결고리가, 어린 아이를 울리는 확실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가 일어섰다. 미예는 분명히 다리를 떨면서 내게 다가왔다. 말로 하는 게임이었는데도 굳이, 후들거리면서까지 걸어서, 내 앞에 섰다. 정말 문장카드대로 무언가를 벌일 것처럼 날 쳐다봤다. 다른 두 남자아이들은 미예의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서 앉아만 있었다. 나는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미예의 일격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이를 앙다물었다. 미예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어떤 열기의 점근을 통해 알아챘다. 이제 미예가 꿀밤을 때리는 건가. 그런데 어째서 양 쪽으로 따뜻해올까…… 허리 숙인 미예는 나를 때리지 않았다. 대신 나의 두 볼을 그 큰 손으로 감싸고 내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었다.

 순간 세계가 먹먹해졌다.

 미예는 그날의 게임에서 이겼다. 동시에 다락방의 모임도 끝이 났다. 나는 부모님을 졸라서 겨울방학에 훌쩍 이사를 갔다. 미예는 새로운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 3월이 넘어 이미 새 학기가 시작된 어느 날, 작년 12월의 기억이 겨우 희미해져가던 시기에 생존 신고라도 하듯 짤막한 편지 한 통을 보내왔다.

 "네가 원하면 10년 후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보자."

 나는 곧바로 미예가 말한 “같은 날”은 편지를 받은 3월의 봄날이 아님을 알았다. 미예가 서투르게 마음을 드러낸 그 저녁, 더 이상 잊을래야 잊을 수 없게 된 그 날임에 분명했다. 장소는 당연히 과거의 다락방일 테다. 그는 열 살 때 이미 스무 살의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스무 살이 돼버리고 말았다.

스무

 주변의 화장들이 진해지고 하루에도 몇 번씩, 문득 한없이 외로워지면 스무 살이 된 것이다. 그러나 몸으로 마음으로 제 아무리 어릴지라도 얼른 강한 어른이 돼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여태까지는 주입되어만 왔던 목표들이 제거되고, 성숙의 방향과 목적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경주로는 아무 표지 없는 광야로 돌변한다. 술을 마실 수 있으려면 이런 거대한 대가쯤은 치러야 한다는 듯이.

 신기하지만 10살 때 다락방에서 했던 고백은 커가면서 실제로 이루어졌다. 나는 학교를 옮긴 11살 이후론 시쳇말로 공부벌레가 되었다. 초등학교 때는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중학교 때부터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촉망 받는 수재로서 전교생 앞에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무슨 상도 수여 받았다. 나는 미예와 있었던 일, 그리고 그 편지에 숨겨진 의도를 당시로선 차마 이해할 수 없었기에 책들로 도피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입맞춤의 기억은 더 붉고 선명해져 갔다. 내 안의 아이는 그 기억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 했고, 내 안의 소녀는 이해하고 싶어했다.

 나는 성장이 흔히 수반하듯이 점점, 아름다워지는 일에 관심을 두었다. 16살 때 용돈을 모아 처음으로 치렁치렁한 원피스를 사고는 장롱 중앙에 걸어두었다. 17살이 되자 두발검사 날 꾀병을 부려 결석하면서까지 머리를 길렀다. 18살부터는 눈화장을 배우고 매일 입술을 칠했다. 도서관에 갈 때마저 주황색, 분홍색, 빨간색 이렇게 세 가지 색의 틴트를 들고 다녔다. 19살 땐 향수 진열대에도 기웃거렸다. 그렇게 가진 것이라고는 책 속의 지식과, 아름다움의 베일로 보일 듯 말 듯 꽁꽁 싸매진 성인의 세상에 대한 막연한 설렘뿐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비로소 종이가 아니라 욕망들로 이루어진 진짜 세상에 내던져졌다.

 나는 세상이 활자 그대로일 줄로 알았는데 철저하고, 처절하게도 아니었다. 내가 배운 것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세계에 대한 잡담 같은 것이었다. 나는 똑똑했지만 무능력했다. 아는 것은 많았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머나먼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타원의 넓이를 구하는 법은 달달 외고 있었으나, 지금 내게 주어진 거친 폭포 같은 시간의 양질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며, 이 땅에 선 나의 입지가 얼마나 좁은지에 대해선 무지하기만 했다.

 한편 낭만으로 가득 찰 줄 알았던 대학생활은 평범하거나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맹목적인 오락이 나의 기대를 가장 배반했다. 술판이 벌어지기만 하면 모두의 속내가 난해해져서 누구와도 관계를 안정적으로 끌고 나갈 수 없었다. 다들 마음속과 머릿속과 말과 행동이 달랐다. 사중의 엇박자를 저마다 연주하니 지나치게 시끄러웠다. 나는 여태껏 모차르트의 화음 가득한 악보 같은 것만을 접해왔는데, 세계는 불협화음들로만 이루어진 엉터리 합주에 가까웠다. 감정과 지성과 언어와 행위가 서로 첨예하게 긴장하고 충돌하는 막장 콘서트. 문제는 나 또한 내가 싫어하는 그들과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한 술 더 떠서 엇박자들이 가장 거대하고 복잡하게 뒤엉킨 사회는 보고 있자니 답답해서 손 놓고 무관심을 자처해야만 잠들 수 있었다. 어른이 되는 일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불편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금 책 속으로, 나에게는 제2의 자궁과 같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사변적인 이론가가 돼서 영원히 책들의 세상 안에 머물고 싶었다. 어쩌면 그게 나의 이름과 가장 걸맞은 인생일 것 같았다. (돌잔치에서도 연필을 잡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글자들 속에 있을 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진리를 향해 쉬지 않고 내달렸다. 닥치는 대로 철학의 고전들을 읽기 시작했고, 몰이해의 벽에 부딪히면 2차 문헌을 찾아볼 정도로 벌써 성실한 상태였다. 내 성실함의 근원은 지적 호기심보다도 정복욕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나는 읽은 책의 목록을 수첩에 꼼꼼히 정리해가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희열에 차올랐다.

 그러면서도 활자가 아닌 격정으로 건축된 속세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나는 속옷 가게 쇼윈도의 마네킹이 입은 란제리를 오래도록 관찰했고, 캠퍼스를 오가는 남학생들을 힐끔거렸다. “10년 후 같은 날 같은 시각”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미예는 무엇을 예상하고 나의 스무 살을 보고자 했던 것일까? 더 정확히 말하면, 열 살의 그는 스무 살의 나로부터 무엇을 바란 것일까? 그저 처음으로 애정을 고백한 여자아이가 십 년 후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던 것일까? 이는 단순하긴 해도, 여전히 어떤 욕망이었다. 사실 모든 욕망은 단순하다. 복잡한 욕망 같은 건 없다. 아무리 돌려 말하고 수식어를 붙여도 더욱 기본적인 기대들로 환원될 수 있는 법이다. 가장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염원, 식욕과 성욕보다도 더욱 밑바닥에 있는 인간의 화염은 제 마음대로 세계를 먹어 삼키겠다는 야망이다. 아무리 얌전한 사람도 그저 얌전한 방식으로 세계를 먹어 삼키려는 것일 뿐이다. 미예는 나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 했든 간에, 세상의 일부를 이로 씹어 꿀꺽, 목구멍 뒤로 넘기고 싶었던 것 같다. 열 살 때 그는 이미 스무 살의 나를 향해 포식의 화살을 쏘아두었다.

 스무 살의 미예를 만나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밥을 먹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기껏해야 제대로 입을 맞추고 몸을 섞는 일일 것이었다. 나는 그가 위험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사실 위험해도 좋았다. 어쩌면 나는 아름다운 위험을 기대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 스무 살의 나는 그를 만나기를 원했다. 이사를 가면서까지 그를 피했던 10살 때조차 10년 후엔 그를 볼 작정이었는지도 모른다.

 결전의 날이 되자 나는 망설임 없이, 그러나 두근거리면서 버스에 올라탔다. 스무 살이 된 미예의 모습을 상상하며 한 정거장씩 지날 때마다 내 판타지를 가미해 묘사를 추가했다. 그때도 늘 뒷자리에 앉았으니, 지금은 키가 훌쩍 더 커져 있을 테다. 변성기가 지나 목소리는 낮아지고, 인중과 턱 밑은 면도한 자국으로 거뭇거뭇하겠지. 얼굴은 조금 변했을지 몰라도 손아귀는 여전히 넓으리라. 불현듯 나는 이왕이면 그가 작곡가가 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채화가여도 괜찮았다. 물감이든 음표든 여하간 책 보는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고 있길 바랐다.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너무나 매력적이니까. 10년 전에도 그는 충분히 창의적이었고 제멋대로였으니까. 그는 10년 전의 이야기를 꺼낼까? 당연히 꺼내리란 생각에 갑자기 광대가 찌릿찌릿하며 열이 올랐다. 그때 버스가 종점이자 목적지에서 멈춰 섰다.

 12월의 고향은 쌀쌀했다.

 그대로인 구석도 있었지만 변한 건물이 더 많았다. 흙먼지가 날리던 바닥도 직사각형의 벽돌로 정비되어 있었다. 나는 세월이 흘렀으니, 동네가 똑같기를 기대하는 쪽이 더 바보겠지 싶다가도, 변화를 감지할 때마다 심장의 박동이 조금씩 본래의 박자를 놓치는 것 같은 착각에 젖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익숙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미예가 살던 집은 허름하긴 해도 이곳의 격변 속에서 살아남아있었다. 2층에 난 작은 창문, 그 너머 추억의 다락방이 있을 창엔 불투명한 커튼이 쳐져 있었다. 안에 누가 있는지 밖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는 집의 입구로 다가갔다. 초인종을 누르려던 순간, 문이 조금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미예인가? 커튼 뒤에 미예가 서 있는 걸까?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입가가 간지러워지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 동시에 문득 울컥하고 울적해지기까지 했는데,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거실엔 불이 꺼져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 햇살 덕분에 웬만한 가구들은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워낙 오랜만에 방문하는 탓에 다락방을 빼고는 어떤 물건들이 있었는지 그 배치가 어땠는지 기억나지가 않았다. 지금의 거실이 미예가 살던 그때와 전적으로 같은지 아닌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래도 구석에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그것만큼은 내가 잊지 않은 제자리에 잘 붙어있었다. 심호흡을 한 뒤 계단을 올랐다. 걸음을 거듭할수록 천장이 낮아졌다. 나중에는 배가 아플 정도로 허리를 구부려야지만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이렇게 좁은 곳을 어렸을 땐 쉽게 드나들었다는 것이 알알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다락방에 도착했을 때 나는 어쩌면, 어쩌면 당연한 장면과 마주했다. 미예는 없었다. 바람만 세게 불어오면서 커튼자락을 괴롭힐 뿐이었다. 그런데 커튼의 주름들 사이사이에 유성매직으로 무언가 흐릿한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제야 자세히 기억이 났다. 이 커튼은 10년 전엔 없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 이 글씨들은 미예가, 언제 썼는지, 15살에 썼는지 19살에 썼는지, 아니면 오늘 오후에 쓰고 다녀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당장의 내게 보내는 메시지일 터였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커튼의 천을 만지작거렸다. 그곳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진리야, 우린 다른 왕국에 살게 되었어.”

 아아…… 아름다움이 내게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