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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탈로 칼비노, <반쪼가리 자작>

이탈로 칼비노, 이현경 옮김, ⟪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2014 (표지 디자인이 완벽하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서의 원숙함은 아직 엿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칼비노의 젊음 그리고 좌파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고뇌와 연결지어 생각할 경우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수작이다. ⟪반쪼가리 자작⟫은 시작부터 풍자로 가득한 어른용 동화다. 사춘기의 문턱에 다가선 어느 소년의 시선에서 그가 속해있는 테랄바 가문의 자작의 굴곡진--문자 그대로 반토막난--생을 담고 있다. 메다르도 자작은 전쟁에 대한 별다른 두려움도 없이 호기롭게 십자군들의 전장에 나갔다가 정면으로 대포를 맞고는 몸의 반쪽을 잃는다. 반쪼가리가 된 자작은 공교롭게도 마치 하이드처럼 인간의 악만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의 본성을 따라 자작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사람들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아래에서 목수 피에트로키오도는 자신의 친척들을 죽일 교수대를 만들고(30), 자작을 키워준 유모 세바스티아나는 한센병 환자로 내몰리며(42-43), 의사 트렐로니는 세바스티아나가 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것을 알고도 자작이 무서워 그녀에게 거짓된 진단을 내린다(43).

 그러던 어느 날 '다른' 반쪼가리 자작이 돌아온다. 이 자작은 처음의 반쪼가리 자작과 달리 소위 덕성의 기사로서 우습게도 인간의 선만을 보존하고 있다. 그는 본성적으로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려고 하며, 사람들의 건강을 챙기고, 자신을 죽이려던 악한 자작에게마저 자비를 베풀고자 한다. 두 반쪽들의 공존은 테랄바의 세태를 완전히 뒤바꿔놓는데, 그 양상은 씁쓸한 웃음을 유도하는 칼비노의 언어를 통해 이렇게 표현되어있다.

"얼마 전부터 자작은 새총으로 제비들만 겨누었는데, 그는 제비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상처만 내어 병신으로 만드는 일을 즐겼다. 그러나 이제 붕대 감은 다리를 작은 부목으로 받친 제비들이 하늘에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 그 제비들은 마치 제비 병원에서 치료받은 회복기 환자들 같았고 그럴듯하게 말하자면 메다르도가 바로 제비들의 의사였다."(81)

 

 그런데 악한 반쪽의 잔인함에 치를 떨던 사람들의 기대와 달리, 착한 반쪽 역시 그의 지나친 덕성으로 인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는 악한 반쪽 대신 자신을 자작으로 옹립하고자 찾아온 수비대원들에게 악한 반쪽에 대한 자비를 호소함으로써, 결국 반란에 실패한 그들 모두가 교수형에 처해지는 일을 사실상 방조한다(100-101). 이어 '버섯 들판'이란 곳에 격리되었지만 매일 음악회를 열고 섹스를 즐기며,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보다도 넘치는 생명력을 자랑하던 한센병 환자들이 스스로를 부끄럽게 느끼도록 만들었다(103).

 절대악의 횡포를 기술한 뒤 그에 반해 절대선의 덕성을 치하하지만, 그 덕성의 '부작용'을 예화하는 방식의 서사 구조는 매우 단순해서 예리한 독자라면 거의 예측이 가능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동화적 분위기, 칼비노의 타고난 이야기꾼다운 서술이 독자로 하여금 끝까지 책을 쥐고 있게 만든다. 나아가 자작이 아닌 다른 인물들의 위선 역시 폭로함으로써 선악의 이분법이 정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얼마나 비실용적인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계속해서 흥미를 끈다. 종교생활의 일환으로 가혹한 노동을 일삼는 위그노교도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해달라는 선한 반쪽의 권고를 위그노교도의 대장인 에제키엘레 노인이 묵살시키는 장면을 그 예로 들 수 있다(95).

 두 반쪽들은 각자의 행보를 계속하다, 결국엔 숲속에 사는 여인 파멜라를 두고 연적이 되어 결투를 벌이기 위해 만난다. 결투의 끝에서 두 사람은 정확히 각자의 단면을 공격하고 쓰러진다. 언젠가부터 이 순간을 예감해 인간 해부학을 연구해온 트렐로니의 대봉합수술을 거쳐 온전한 사람으로 돌아오지만 말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실소를 자아내는 전개다. 자작은 절대악과 절대선의 경험 모두를 겪고 난 뒤 매우 현명해진다. "그는 행복한 생활을 했고 자녀를 많이 두었으며 올바른 통치를 했다." 다만 "[...]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서 온전한 자작 혼자서는 그것[행복한 시대]을 이룰 수 없"었을 뿐이다(114).

 어찌 보면 단순하기만 한 이 동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은 두 부분에서라고 생각한다. 첫째는 두 반쪽들의 사랑을 모두 받는 파멜라라는 인물의 정체다. 그녀는 어느 때에는 자신의 생활을 지키기 위해 초인적인 현명함과 용기를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때에는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바, 자신의 열망만을 따라가는 데 집착하는 평범한 인간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둘은 그다지 다르지 않은데 둘을 나누려는 내 시각에 문제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둘째는 소설의 화자이자 모든 사건의 관찰자인, 메다르도 자작의 조카의 정체다. 그는 전형적인 외로운 소년으로서 끊임없이 친구를 찾는다. 마을을 들끓게 하는 자극들을 즐기다가도 각 자작의 만행에 나름의 가치판단을 내리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즐거워하다가도 사춘기를 겪는 아이답게 쉽게 우울감에 휩싸인다. 이런 사항들이 꽤 세부적으로 묘사돼있음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그의 존재감은 사실상 소설 어디에서도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드놀이를 하러 마을을 떠나는 트렐로니에게 그가 가지 말라고 절박하게 외치는 장면으로 소설이 끝난다는 것은 굉장한 미스터리다. 소년이 인간의 숙명과도 같은 불완전성을 깨달았다는 의미일까?

 소설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을 인용함으로써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렇게 테랄바에서의 나날들이 흘러갔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색깔을 잃어버렸고 무감각해져 버렸다. 비인간적인 사악함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인간적인 덕성 사이에서 우리 자신을 상실한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