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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페터 한트케, <어느 작가의 오후>

페터 한트케, 홍성광 옮김, ⟪어느 작가의 오후⟫, 열린 책들, 2010

 '작가'라는 직업에 로망을 가지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가진 로망은, 모든 로망이 그렇듯 키치하지만 다음과 같다. 작가는 여유롭게 늦잠을 잔 뒤, 옥색의 커튼 사이로 서서히 드세지기를 준비하는 햇빛을 느끼며 하루의 첫 숨을 고른다. 기지개를 편 뒤 침실을 나서면 부엌에서는 이미 함께 사는 동료 작가, 또는 동료 철학자, 또는 애인이 아침 겸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나는 오전엔 식욕이 왕성한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먹는 부어스트를 한 덩이 그리고 오렌지를 두 슬라이스 뺏어먹는 것으로 만족한다. 잘근잘근 먹을 것을 씹으며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좁지만 아늑한 공간에 가구들이 정확히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에 안정감 있게 붙박여있다. 내가 앉기도 전에 의자가 먼저 자기 자리를 찾아 앉아있는 것이다. 나는 그 사물들과 먼 친구보다도 가깝게 교감하다가 샤워실로 들어가 몸을 씻는다. 젖은 나를 커다란 흰 수건에 푹 안긴 뒤, 방으로 돌아가 편하면서도 세련된 옷을 챙겨입는다. 노트북과 수첩, 글이 풀리지 않을 때 읽을 책, 필통, 에어팟, 손목 보호대, 30mL짜리 양귀비와 보리 향 향수를 거대한 버킷백에 챙긴다.

 집에 나서기 전, 동료들과 가끔은 30분도 넘게 이어지는 잡담을 나눈다. 우리는 생활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세태에 대해, 서로의 건강에 대해, 가끔은 별것 아닌 사물에 대해--예컨대 새로 나온 일상용품 브랜드 따위--수다를 떤다. 그러는 사이 졸음은 날아가고, 공기는 우정 어린 생기를 띤 채로 흡입된다. 동료들의 배웅 가운데 나는 집의 문턱을 넘는다. 조용한 단골 카페에 가서, 내 단골 자리에 앉아 오늘 써야 한다고 계획한 만큼의 글을 쓸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가슴은 계획의 이행에 대한 예감으로, 그 예감에 따르는 긍지로 부푼다. 나는 성장하고 있다고, 성장할 것이라고 느끼고 의미 있는 시간들을 축적해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세계가 내 의미 깊은 삶을 몸소 축복한다 느낀다. 그러니까 나는 많은 것들과 합일되어있다는 충만감을, 아주 가차없이 소유할 것이다.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많은 작가지망생들이 비슷한 로망을 가지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는 이 로망들을 하나하나, 담백한 언어로 깨부수다 못해 아작내는 작품이다. ⟪어느 작가의 오후⟫에서 그려지는 주인공 '작가'의 오후는 절망적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불행하며, 비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끝이 없어 보이는 공허감에 시달린다. 공허를 자신의 유일한 애인으로 삼을 정도다.(81)

 작품은 그가 하루어치의 글쓰기를 마친 뒤 외출을 결심하면서 시작된다. 그가 외출을 감행하는 이유는, 하루의 일을 끝마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집이자 작업실에 머무를 때 '자기 자리에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가구들을 보면 "즉각 서먹서먹한 기분"을 느낀다. 그 낯선 사물들을 떠나 "도시의 불빛과 그것이 반사된 빛이 밤하늘에 충분히 비추어진다고 생각하면서 어딘가 어두운 곳에 앉아 있을 때만 그는 어딘가에 거주하고 있다는 감정을" 가진다.(19) 그러나--이어지는 서술에서 밝혀지겠지만--작가는 도시에서도 기대했던 안정감을 누리지 못한다. 한 순간 정도, 오직 자연에만 둘러싸여 있을 때 임시적인 행복을 느낄 따름이다.(74)

 문지방을 넘어,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작업실과 어느새 멀리 떨어진 교차로에 서면서도, 작가는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을 지워내지 못한다. 금방 전 나는 적절한 단어, 좋은 단어를 사용했는가. 자기의 생활에는 이념이란 것이 있는가. 애초에 좋은 글쓰기의 이념이란 무엇인가. 그는 글쓰기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강박장애 환자와 같다. 작가로서의 자신이 성장하고 있거나,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 역시 함께 엄습해온다. 작가는 여전히 스스로가 풋내기 작가 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28) 이 불안은 작가의 외출 내내 간헐적으로 이어지며 모든 걸음의 배경에 짙게 깔리는데, 다음의 한 문장으로 집약된다. 

"그토록 오랫동안 작품에 고무되어 열정적으로 일했음에도 여전히 확신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웠다."(67)

 

 또한 내면세계에 대한 집착이 길어져, 타인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새 본능적이 되어버렸다. 오랜 자기유폐의 흔한 부작용으로 보인다. 그는 신문판매원과 마음 편히 소통하지 못하고(41), 신문을 읽으면서 무의식적으로 또는 노골적으로 동요한다.(49-51) 글과 타인뿐 아니라 세상 자체에 대해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세계를 향한 작가의 광범위한 불안은 트로스가세, 독일어를 그대로 풀면 '추종자들의 골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개인적으로 이 대목은 나 스스로도 섬뜩한 기분으로 읽었다. 글 쓰기에 대한 확신의 부족, 그것이 모든 지나가는 젊은이들의 시선을 적의와 조롱의 시선으로 전환시키고, 내면의 수치심을 배가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토록 어색해했던 방으로 돌아가는 "열쇠꾸러미"(61)만으로 스스로가 무장되어있음이, 그러니까 사실상 적에 맞서 내세울 수 있는 안전장치가 아무것도 없음이 고백된다.

 "그는 그런 그들[젊은이들]의 생각을 비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때때로 그 자신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만, 그는 대중 연설가나 가수처럼 자신의 직위에 자신감을 갖고 남 앞에 나서서 발언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늘 침묵하는 편에 가까웠고, 우연한 기회에나 발언을 했으며, 나중에 그것이 공개될 때면 외면하고 싶은 마음, 그러니까 부끄러움을 느꼈다. 심지어 금기를 어긴 것처럼 죄의식을 느끼기도 했다."(57)

 

 이것이 40년 남짓 이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물론 그 전에도 일찍이, 데뷔서부터 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왔던 한트케의 글이라니... 그와는 전혀 다른 처지에서, 한 번도 성공해본 적 없는 작가지망생으로서도 그의 문장에 공감하면서 나는 작가는 근본적으로 불행한 직업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그래서 어느새 기계적으로 집착하는 대상--자기의 소설--에 대해서조차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한 일기에서 같은 문장을 쓴 바 있는데, 사람의 긍지와 수치심의 근원이 동일할 때, 그는 분열하지 않을 수 없다. 온 마음 온 혼으로 분열하면서, 작가는 환청을 듣는 듯이 사람들이 자신의 작업의 의의를, 그리고 그것과 지나치게 유착되어있는 자신의 존재 의의를 헐뜯는 목소리를 감각한다.

 "골목의 마지막 집들 부근에서--그러니까 그는 오늘 그렇게 먼 곳까지 간 것이다--작가의 패배가 또 한 번 입증되었다. [...] <당신의 문학을 기소합니다!>"(63-64, 강조는 필자)

 

 좌절한 작가는 사람과 스몰토크라도 나누겠다는 것도 아니고, 친구나 애인을 사귀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행인들의 대열에 끼어들"고자  하는 소박한 욕망을 품는다.(67) 그러면서 역시나 익명성을 갈망한다. 보통은 이름이 알려지는 편이 작가의 꿈이라고 쉽게들 생각되지만 말이다. 이제 작가의 여정--그가 동네를 걷는 일은 산책도 소풍도 아니고, 또 다른 힘겨운 여정인 것처럼 보인다--은 '싸구려 술집'으로 해석되는 카솀메라 불리는 음식점에서 이어진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를 힘겹게, 문자 그대로 '꾸역꾸역' 읽었을 때조차 한트케의 술집 묘사에는 어딘가 감동적인 면모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번에도 한트케는 그의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한다. 카솀메에서는 실재와 환상이 뒤섞이고, 쥬크박스의 음악이 비인간만이 줄 수 있는 안정감을 선물하며, "변두리 인생"(87)들 사이의 은밀한 유대감이 형성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작가는 자신이 내일 써야 할 글을 걱정한다. 오늘의 글과 내일 쓰여야 할 글 사이의 연결점이 상실되었다는 예감이 들자 "거울 속에는 그의 적이 보"이기 시작한다.(94) 그리고 다시 한 번, 작가됨에 대한 근본적인 죄의식이 부메랑처럼 되돌아온다. 이 죄의식은 이 작가가 특정한 누구인지, 어떤 작품을 쓰는지, 어떤 스타일을 구사하는지와 철저히 무관하게, 다만 작가라면 필연적으로 이는 것이다. 바로 글쓰기 자체가 죄가 아니냐는 의심이다. 작가에 따르면 책은 "월권행위"(95)이기 때문이다. 책은 어째서 월권행위인가. 한트케는 그것이 작가가 사람들의 비밀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조금은 너무 단순한 답변 같지만.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나를 격리시키고 옆으로 밀어 놓으면서 사회인으로서 나의 패배를 시인했다. 나는 평생 동안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제시켰다. 그들의 비밀을 잘 알고 있는 내가 환영받고 포옹받으며, 여기 사람들 사이에 끝까지 앉아 있을지라도 나는 결코 그들에게 속하지 않을 것이다."(97, 강조는 필자)

 

 카솀메에서의 체험 가운데서 또 다른 인상적인 대목은 바로 '입법자'에 대한 묘사다. 입법자는 한트케의 이상적인 작가상을 대변하는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입법자는 모두로부터 거리를 두면서도 주의를 늦추지 않고 있음으로써, 인식만으로 실천한다. "그[입법자]는 개입하면서가 아니라 보란 듯이 침묵하면서 싸움을 완화시켰다. [...] 그는 말없이 개별적인 사항들을 하나하나 받아들였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언의 답변을 주었다. [...] 그에게서 출발하는 힘은 말하자면 판단력이었다."(99, 강조는 필자) 한트케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장황하지 않고 과묵하게, 사태의 핵심을 조용히 꿰뚫는 자, 그리고 사람이 아니라 공간과 사건 자체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는 자가 곧 "이상적인 이야기꾼"이 아니겠냐고 선망한다.(100)

 입법자를 그렇게 선망한 뒤, 카솀메를 나와서도 작가는 폐허와 같은 도시를 배회한다. 그의 책을 번역하려고 하는 번역가를 만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글의 구조상 앞서 등장한 입법자와 대비되는 인물이다. 그는 원래 작가와 같이 자기만의 글을 쓰던 사람이었으나, 그 작업이 '직업화'되자 작가와 마찬가지로 죄의식을 느끼고 대신 아무런 죄의식도, 고통도 수반하지 않는 번역을 택한다(이건 다른 번역가들의 말도 들어봐야 할 것 같다!). 번역가가 글쓰기를 포기하게 된 과정, 일종의 수난은 그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김으로써 기술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나는 이 시기[처음 글을 쓰던 시기]에 글쓰기를 순수한 엿듣기이자 받아쓰기로, 눈에 보이는 원전 대신에 은밀한 원어를 옮기는 번역으로 생각했다오. 늘 꾸고 싶었던 꿈을 실제로 꾸게 된 거지. 그런데 내가 그 꿈을 그저 가끔씩 단편적으로 다룬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매일매일 기록하고 일종의 커다란 꿈의 책으로 마무리하려고 하면서 그 꿈은 점점 더 적어졌고, 또 점점 더 적은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오."(107)

 

 이어 자신에게 환상적인 행복을 선사했던 선명한 심상들을, 인위적으로 짜인 맥락 속으로 밀어넣는 것에 대해 번역가는 죄의식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괴로움의 끝에서 그는 자신에게 소설가로서 아무런 능력도, 개성도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기의심에 이른다. 그리하여 "글을 쓸 권리란 것을 느껴보려고 고통을 기다리지도 않"아도 되는, "확신할 수 있고 그 확신은 [유용하게, 의미있게] 활용"되는 번역가로 직업을 전환한다. 번역가의 죄의식은 작가의 죄의식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지만, 그 결론은 같다. 실은 나 역시 같은 결론에 미끄러진 적이 있었다. 글쓰기 자체가 죄라는 결론에 말이다. 글쓰기는 이기심의 산물이기 때문에. 자신을 표현하겠다는 이기심 하나로, 세계를 수단화하고 대상화하는 일이기 때문에. 한참 우울할 때에는 이 결론으로 되돌아가, 활자를 보는 것조차 공포스럽게 느끼곤 했다. 하지만 요즘은 저 이기심을 너무 악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스스로를 위해 세계를 수단화하지 않는 자가 과연 누가 있을까? 세계 자체가 자신을 활용하라고, 무엇이든지, 바닥을 끄윽끄윽 긁어서라도 자기에게로부터 무언가를 가져가라고 스스로를 드러내놓고 있지 않은가?

 작가는 번역가와의 만남을 끝으로 드디어 집에 되돌아온다. 그는 평소 잘 돌보지 못한 개에 대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며 그가 먹을 고기를 잘라준 뒤, 불을 끈 채로 샤워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울부짖는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고 누가 내게 말하는가?"(121)

 작가는 자신의 유일한 행위이자 직업을 수치스럽게 여긴다. 사회적으로는 휘발된 존재나 다름없다. 누구도 그를 편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 역시 다른 이가 편하지 않다. 고로 그 무엇도 자신을 충분한 존재감으로 채워주지 못한다. 그는 쓸모없다. 그는 무가치하다. 그는 무 그 자체이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작가'임'을 획득하는 일 즉 새로운, 보강된 존재를 갖추게 되는 대변신이 아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무화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맹세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일에 실패하지 말자고. 다시는 언어를 잃어버리지 말자고."(122)

 나는 어떠한가? 행복해지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의 존재를 점차로 삭감해가야 할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는 무로 소실될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작가가 되기를 꿈꿀 것인가? 내가 지금 이 그다지 조회되지 않는, 더욱이 탐독되지 않는 공간에, 정말이지 아파 죽겠는 손목으로, 공 들여 뭔가를 끄적이고 있는 행위 자체가, 어떤 확고하고도 힘겨운 대답을 전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