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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50206 백수의 마음


 글을 쓰기 위해 애써 우울한 척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바깥세상의 부산스러움과, 집 안에서 이런저런 영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싸구려 웃음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만 글을 쓸 수가 있고, 그런 탈주는 아무리 상쾌할지언정 약간의 헛헛한 기분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때의 공허란 불행과 전혀 다르다. 애초에 불행과 우울 사이에는 별다른 인과관계가 없다. 슬픔과 우울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나는 가뿐하게 우울하며, 우울하게 가뿐하다. 덕분에 글을 끼적이기 시작할 수 있었다.

 '인디펜던트 리서처'라 쓰고 백수라고 읽는다. 6개월 차. 오늘은 오후 네 시에 일어났고, 정신적으로는 이미 약혼식까지 올린 애인과 한 시간 정도 통화를 했다. 애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복통을 호소했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미안한 마음으로 깨달았다. 우리가 장거리 연애 중이라는 사실과는 상관이 없었다. 그의 고통은 내가 한국에 있었더라도 여전히 그만의 것이었을 테다. 나는 단지 내 과거의 성긴 기억만으로 배가 아픈 그의 세계를 상상할 수만 있었다.

 고통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쾌감, 의욕, 행복,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이 소위 마음속의 현상인 한 비슷한 말을 쏟아낼 수 있을 것 같다. 

 '상상'이라는 표현이 언어의 공공성이라든지, 공감의 놀라운 정확성 따위를 무시한다고 생각한다면(나도 자주 그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나는) 타자성이라는 사태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애인은 내게 타자이고, 실은 타자이기 때문에 내가 사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애인은 자유이고,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도 자유일 것이다. 좋게 말하면 도도하고, 나쁘게 말하면 고립되어있는...... 하지만 어차피 자유는 자의적인 가치판단의 결과에 따라 좋으면 고르고, 나쁘면 버릴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인간됨은 그렇게까지 여유로운 존재 양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는 삶, 그것이 무엇이든, 호흡의 총체든 사유의 연속체든 소위 송과선의 환영이든, 삶의 조건으로서 좋든 싫든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자유롭다. 그런데도 왜 마치 구속된 죄수인 양, (자유가 셀 수 있는 것이라면) 더 많은 자유를 원하고 마는 걸까? 아마도 내가 비밀스러움 이상의 무엇을 원하기 때문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비밀스러움도 그다지 원하지 않는다. 귀여움과 용서를 받을 수 있으리란 보장만 있다면, 나는 내 내장까지도 까발릴 준비가 돼있다. 그런 노출증이야말로 작가적 정신 또는 진정성이라고 아리송하게 불리는 것을 이룬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무한한 자비에 대한 욕망은 유아적이다. 우리가 내장 대 내장이 아닌, 예쁘장한 얼굴 대 잘생긴 얼굴로 소통하려 무던히 애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랑스러움으로 자비를 얻는 대타관계는 어린이의 전유물이고, 어른이라면 매력이든 능력이든 힘으로 권리를 얻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나도 나를 감추고 남도 자기를 감추는 일을 이해해주기, 나의 비밀과 남의 비밀을 모두 사랑하기가 어른됨의 조건일 테다.

 비밀 이상의 공적인 자유를 원하는 나의 마음은 아마 권력욕인 것 같다. 나는 사랑스러움을 가장한 채, 어쩌면 누구보다도 권력을 바라고 있다.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상 원하는 것은 남들이 내가 무엇을 하든 막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는 내가 무엇을 하든 남들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이다. 나와 타자 사이의 구분선과, 그에 따르는 제한이야말로 진짜배기 사랑의 조건임을 알면서도.

 저 모순 속에 나는 갇혀 살고, 그로 인해 우울해질 때도 있지만 다시 말하건대 슬픔과는 질적으로 다른 감각이다. 나르시시스틱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나는 내 삶을 때로는 은근히 때로는 노골적으로 즐기고 있다. 지금의 나는 기쁘게 우울하며, 우울하게 기쁘다. 덕분에 하루하루 살아나간다. 타지에서 기약 없는 미래, 인정 없는 공동체, 끝이 보이는 우정 들을 생각하면서도. 철학하는 삶이 여전히 너무 좋다.

 참으로 두서없다. 아무튼 은근히 잘 지내고 있어요. 방금도 슈퍼 가서 자두 네 알 사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