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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50225 기대 속에 사슬이

나를 향한 S의 우정 담긴 시선.

 시끄러운 알람 시계를 장만했다. 꺼버리고 다시 자는 날도 있지만, 옛날보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게 됐다. 밤이 늦으면 자야 한다는 감각. 오전에도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감각. 그리고 햇살은 생각보다 오래 지상에 머무른다는 감각 등을 익히고 있다.

 피아노를 치러 집 뒷쪽의 작은 공터를 지나는데, 공터의 가생이에 흐르는 개울 같은 것 위로 나무들이 무성했다. 어떤 나무 하나가 지나치게 녹색이어서,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졌다. 아직 발명되기 전의 공업 용품처럼 빳빳하고 원색적으로 초록인 이파리 위로 햇볕이 왁스처럼 흘러내렸다. 나는 초록의 원형이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네가 아는 모든 초록의 원형. 자연에 속해 있지 않은 것만 같은 색이었다. 그로부터 묘한 생명력을 느꼈다. 정확하게는 생명력보다 생동감을 느꼈다.

 너무 길게 쓰면 끝까지 읽히지 않을지도 몰라 불안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날, 사생활이 들키고 싶은 날도 있는 법이다. 어제는 꽤나 알차게 보냈다. 아침에 블랑코 커피 바에 가서 새로운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봤고, 버나드 윌리엄스의 ⟪윤리학과 철학의 한계⟫를 읽으면서 와우, 대단하다, 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론을 비판함에 있어, 그 핵심적인 부조리를 꿰뚫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런 부조리를 왜 누가 욕망했을까?'를 물으며 오류의 동기까지 추적하는 끈기가 대단하다. 하지만 동시에 윌리엄스의 끈기에는 치졸한 구석도 있어서, 마치 끊임없이 투덜거리는 천재 아들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마음이 될 때가 있다.

 잠시 집으로 가 점심을 해먹고 다시 도서관에 자리를 잡았다. 머독의 ⟪바다여, 바다여⟫ 초반부를 지나며, 나르시시스트 알파 메일(=주인공 찰스)의 심리를 가늠했고 옆자리의 미유키와 농담을 주고 받았다. 정말 오랜만에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했고, 뿌듯했지만, 텀블러를 런닝머신에 두고 나왔다. 점심보다도 대충 저녁을 해먹은 뒤 다름슈타트로 가는 기차편을 미리 끊고 침대에 누웠다. 로이돌트 교수 님과 4월에 면담을 하기로 했다. 

 요즘 자기 전 머독에게 영향을 미친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을 펼쳐본다. 처음 열어봤을 때에는 너무 난해해서 튕겨져 나왔는데, 끈질기게 넘기다 보니 동일한 주제들이 변주만 되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아(le moi)는 탐욕스럽기 그지없어서 세계의 실재를 은폐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본인의 소유욕을 투사해 결국에는 애착이라는 이름의 사슬에 구속되고 만다. 본인만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도 함께 망가뜨린다는 쪽에 가깝다. 실재를 투명하게, 정당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지워나가야(effacer) 하며, 그로써 욕망이 만들어낸 기만적인 환상으로부터 풀려나야(détacher) 하고, 욕망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공허를 기꺼이 견뎌야 한다. (내가 읽기로는) 급기야 스스로가 공허가 되어, 즉 지상에서 사라져줌으로써 신과 실재 사이의 소통을 재개해야 한다. 자기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것의 탐욕스러운 환상들으로 인해 신과 실재 사이의 소통이 방해되었었기 때문이다.

 확신은 없지만 저 탐욕의 무게가 곧 중력이며, 그로부터의 해방이자 본인의 소멸이 은총이 아닌가 싶다. 금욕적인 것을 넘어 자기파괴적인 책이며, 그것도 노골적으로 그렇다. 레비나스가 연상되는 지점도 있지만, 베유에게서는 삶을 추동하는 타 존재자와의 불가피한 연결 같은 테마조차 안 보인다. 그녀가 생명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레비나스가 갑자기 니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와우.

 머독, 베유,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내가 연구하는 양심의 윤리학이 윤리학의 유일한 선택지가 아님을 암시한다. 달리 말해 양심을 주제화하는 것 자체가 이론가의 특정한 성향이 반영된, 윤리학적인 동시에 윤리적이기까지 한 선택인 것이다. 양심의 윤리학은 자아를 윤리의 중심에 두고 심지어 그에게--그의 충동이든, 이성이든--일종의 절대성마저 부과한다. 반면 저 셋은 오히려 자아를 지우는 것이 선에 다가가는 길임을 강조하는 철학자들이다. 그들, 특히 아이리스 머독의 논리를 갈무리하면 다음과 같다.

 도덕은 선택이 아니라 시선의 문제다. 선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게 관건이다. 따라서 있는 그대로의 선을 보는 데 방해가 되는 것은 치워버려야 하며, 자아야말로 그 방해물이다. 도덕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외국어에 가깝다. 당신의 예술작품에 대해, 당신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다. 푸른 색 대신 붉은 색을 골라도 되고, 붓을 놓고 주먹으로 캔버스를 쳐도 괜찮다. 하지만 외국어 공부는 다르다. 당신은 독일어의 문법을 당신 마음대로 변경할 수 없다. '사자'는 남성명사이며, 제멋대로 여성 정관사를 붙일 수 없다. 잘하고 싶은 욕망이랄지 변덕, 무지, 망각, 자만, 노력 부족과 같은 자아의 효과들은 외국어 공부의 적이다. 심지어는 당신의 성향도. 당신이 무모하되 힘이 넘치는 사람이든, 신중하지만 소심해서 남이 울기보다는 내가 우는 게 편한 사람이든 '사자'는 똑같이 남성명사다. 도덕도 그와 같다. 자아를 지움으로써(unself), 선으로 하여금 군림하게 하라.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외국어로 예술 작품을 써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어로 시를 쓰는 사람들의 클럽까지 있는 마당에. 자아가 개입된다고 해서 도덕이 조심스러운 관찰에서 막무가내인 자의의 문제로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그 본질이 법칙일지, 덕일지, 최대의 복리일지는 몰라도 아무튼지 간에 보편적으로 옳은 무엇이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도덕이 외국어 문법을 닮았다. 하지만 그 보편적 선을 나만의 현실, 나의 성향이 지배하고 나의 싱그러운 타인들이 함께하는 현실에 옮겨놓는 작업은 놀라울 만큼 창의적이다. 뿐만 아니라 무모한 인간과 소심한 인간에게 도덕이 동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완전히 부조리하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저들이 이렇게까지 부조리한 이론을 펼쳤을 리 없다고 생각이 되고, 아마 내가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거나 꼬투리를 잡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도 욕망이란 중요하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고, 누군가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고, 다시 둘로 돌아왔을 때에 그리워하는 것은 생명의 정의 그 자체이자 인간적 삶의 필요조건이다. 베유가 원하는 것이 인간성으로부터의 탈피라면 나와 그녀는 딱히 충돌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멸로써, 소멸자로서 비로소 인간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내 눈에는 모순이다. 욕망해야 한다, 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어차피 욕망한다. 욕망하고 있다. 올바른 대상을 올바른 때에 올바른 방식으로 욕망해야 할 뿐이다. 그렇게 좋은 삶을 살 수 있다.


 인정받지 못하는 곳에 자유가 있다. 기대 속에 사슬이 있고, 사슬 자국이 남은, 그치만 자국만이 남은 팔로 허공 휘젓기. 한 줄기 바람 만들기. 다음 순간 사라지지만, 오롯이 내것이며 상쾌한 바람. 내가 꾸고 싶은 꿈이자, 미래의 작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