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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40929 역사가도 비평가도 아닌

리디아를 만나러 안트베르펜에 다녀왔다. 길가에서 아무렇게나 마주친 곳에 들어갔는데 내가 살면서 먹어본 연어 샌드위치 중 가장 맛있었다.
자연의 동물적인 나체도, 합리적이라 자부하는 인간 사이 상호작용도, 신이 보낸 독생자의 초월성도 액자 속에 들어가는 한--작품이 되는 한--그림 애호가의 눈에는 동일한 존엄을 누린다.
13유로짜리 호텔 조식 사진 보정해봤는데... 좀 멋진가요? 호텔 조식을 비싸다고 피할 일이 아니다. 저렇게 배부르게 먹으면 점심 값을 굳힐 수 있다.
길 가다 산 색연필로 오랜만에 그림을 그렸다. (6유로에 100개의 색연필을 한 통으로 판다기에 이렇게 싼 가격에? 라 생각하며 냉큼 집었더니... 20개 정도의 색깔을 가진 색연필이 색당 5개쯤 들어있었다. 빨강색이 하나뿐이어서 표현에 애를 먹었다.)
박사논문의 프로포잘을 쓰고 지낸다. 이 노트를 기반으로 쓴 1안은 뒤집은 지 오래고 2안도 상당히 빠른 시일 내 (어쩌면 내일!) 뒤집힐 예정이다.
과일이 풍족하면 행복해진다. 과일을 사랑하는 엄마의 주입식 교육이 통했다.
상기 사진은 연출된 이미지입니다.

 이런저런 문제로 9월 초중순 내내 안절부절 못하고 지내다 이번 주부터 내면의 평화를 되찾았다. 외부 사정이 크게 달라진 바는 없고 내가 어떻게 대처할지 정도만 결정한 것인데도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여기 있는 친구들과 한국인 언니들의 서포트가 도움이 됐다. 언니들은 내 블로그를 모른다... 수줍게 고백해요, 아이시떼룻! 아무튼 정오 전에는 일어나려 노력하고, 외식을 줄이고(맛있는 간장국수 레시피를 발견해 이틀에 한 번은 꼭 먹는다) 신학기를 맞아 새로 연 카페를 찾아다닌다. 설거지나 청소를 할 때는 샤이니의 옛날 앨범을 차례로 듣는데, 고3 때 하도 많이 들었다 보니 10년만에 만나는 곡들도 가사가 기억이 난다. 가끔 애인이 노래를 추천해주지만, 내 귀는 사실 그의 것만큼 세련되지 못하다. 얼마 전에는 남녀공학의 '삐리뽐 빼리뽐'을 들으면서 신나게 춤추듯 식당가를 걸었다.

 그래도 피아노 파빌리온에서 꾸준히 베토벤 소나타를 연습하고 있으니, 음악 청취의 스펙트럼이 좁은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19번 소나타의 2악장 연습을 시작했는데, 론도가 너무 빨라서 내가 과연 이걸 칠 수 있을지 처음에는 의심스러웠다. 살면서 그런 속도로 피아노를 쳐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8분음표만 있는 초반부에서 일찍이 알레그로로 몰아붙여야 하는데, 딱 분위기가 고조되는 마디부터 16분음표들이 개미집 앞 개미마냥 줄줄이 이어진다. 초보자를 위한 소나타라지만 타건의 정확도와 박자 감각 모두를 시험하는 악보라 생각한다. 다행히 치면 칠수록, 당연히 음반들에는 못 미치지만, 속도가 늘어나고 있다. 속도를 맞추기 위해 자꾸 손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는 점, 또 속도를 맞추느라 셈여림 조절이나 여타 표현에는 신경을 전혀 못 쓰는 문제만 고치고 싶다.

 공부는 잘 되어가지는 못해도 항상 재밌게 한다. 취미가 딱히 없는 나로서는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는 시간을 제하면 남는 시간을 공부에 올인하게 되는데, 다행히 아직까지는 지루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집중력을 높일 요량으로 고등학생 때처럼 삼색 펜과 형광펜을 이용해 텍스트를 요약하고, 여백에 질문이나 코멘트를 주석처럼 끄적인다. 최근에는 후설의 형이상학과 신학을 다루는 사후 유고 그리고 막스 셸러를 재밌게 읽었다. 후설의 사후 유고의 경우, 하루만에 일필휘지로 휘갈긴 것이거나 후설 자신도 결론을 못 낸 텍스트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화제인물에게 마이크를 들이밀어야 하는 운명인 기자처럼 최종 입장이 대체 무엇입니까? 라고 묻기보다는 그가 어떤 테제들, 어떤 목표들, 어떤 차원들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지 파악하고 그의 진자운동 자체에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고의 내용을 함께 사유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보다 마치 후설 생전에 출간된 작품만큼이나 무게감 있게 받아들이는 현 후설 스콜라십의 문헌학적 풍토에 회의감을 느낀다. 마음 같아서는 얼른 논문을 써서 지금의 논쟁들에 개입하고 싶은데, 박사논문과 관련된 이런저런 문제들이 확정되지 않아 퍼블리케이션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의욕만땅이고 현상학자라는 타이틀로 활동 중인 사람들에게 호기로운 악수를 청할 준비가 돼있다.

 셸러든, 후설이든 20세기 초의 철학자다. 완전히 옛 사람으로 취급해 히스토리언으로서 접근하기도, 동시대인으로 여겨 현재의 학문적 성과에 비추어 비판하기도 애매하다. 이를테면 클레안테스와 크리시포스가 세계는 정기적으로 대화재를 맞는다고 말할 때, '그런 불 안 나는데! 비과학적인데!'라고 떼쓰는 것은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유의미한 철학적 발언이 아니다. 당시의 역사적인 조건 하에서 그리고 스토아주의 체계 내에서 그런 테제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의미 있었는지 따지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그러나 셸러가 뇌 바깥의 정신을 말하며 동물보다 인간을 존재론적 우위에 둘 때는, 또는 후설이 인간만의 것인 이성의 보편적 목적론을 주장하며 초월론적 현상학자들의 클럽을 꿈꿀 때는 (초월론적 자아 소리 질러~ 예~ 학위 소지자 소리 질러~ 와우~) 다른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인간만의 작용인 것으로 주장되는 본질 추출--본질이 있는지 없는지는 차치하고서라도--과 같은 이념화(ideation) 작용은 뇌와 존재론적으로 별개인 정신적 기관의 산물이라기보다, 동물보다 그저 피질이 크고 뉴런 접속의 경우의 수가 상당히 늘어난 똑같은 뇌의 산물 같다. 그리고 '이성'은 흄처럼 논리적 인식이나 추론 능력 등으로 그 의미를 구체화하지 않는 이상 실체가 없는 개념 같다. '의식'이란 말도 인지과학 등에서 개념적으로 무용해진 마당에 하물며 '이성'이야.

 덧붙여 서구 세계의 철학자가, 본인들 스스로도 그리스에서 배타적으로 기원한 것으로 인정한 로고스를, 나아가 로고스를 활용한 사유 작용을 인간성의 핵심으로 주장한다면 그 자체로 의심스럽지 않은가? 자기가 하는 일을 인간의 가장 고유하고 탁월한 부분으로 내세운다는 게 미심쩍을 수밖에 없다. 동물들은 철가방 요리사 님처럼 팔보완자를 만들 줄 모른다. 팔보완자 만들기가 비로소 인간을 동물과 구분 지어줄 수 있는 바로 그것이 아니냐고 말해도 지금의 나는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다. 아마 팔보완자 만들기는 침팬지의 '자연적인' 능력과 질적으로 다르지 않아도 이념화 작용은 그렇다고 저승의 셸러와 후설이 반박할 것 같지만, 증명의 부담은 물리주의자보다도 그런 질적 차를 내세우는 쪽에 있다.

 무엇보다 이념화 작용, 사실에 본질을 부여하는 작용이야말로 많은 경우 인간을 동물보다도 못한 폐악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개별 유대인에게서 유대인임, 유대인됨, 유대인의 존재를 추출하고, 개별 여성에게서 여성임, 여성됨, 여성의 존재를 추출하고, 개별 팔레스타인인에게서 팔레스타인인임, 팔레스타인인됨, 팔레스타인인의 존재를 추출해 제멋대로 그 의미를 규정한 뒤 그를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판단의 근거로 사용하는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모두가 알고 있으니 함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휴머니즘의 문제의식 자체를 폐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사는 시대는 더더욱 휴머니즘을 필요로 한다. 이제 인간의 본성은 그 비교 대상이 동물이 아닌 기계다. 인간은 동물성도, 어떤 의미에서는 기계와의 친화성도 가지고 있다. 애초에 딥러닝을 수행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의 학습 및 의사결정 능력을 모델로 만들어진 것이다. 기계가 인류의 능력을 완전히 뛰어넘는 특이점에 도달하는 날이 그닥 멀지 않게 느껴지는 오늘,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개인의 실존적 쓸모를 고민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단 이 고민의 목표가 특권 찾기여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인간을 동물이나 기계와 구분하는 작업이 그 자체로 폭력적일 이유는 없다. 인간은 다른 포유류와 다르다는 것, 인공지능과도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작업은 단지 세상의 실제에 대해 겸손히 배워가는 일의 일부다. 그러나 그 차이를 위계로서, 정복의 근거로서, 군림의 보증(warrant)으로서 활용하는 것이 문제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해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사람은 전자와 후자 사이의 필연적인 연결고리를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우연적인 데 불과하다.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그렇다. 인간 그리고 동물 및 기계 사이의 종적 차를 오히려 차이를 존중하고 더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도모하는 계기로 활용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한다. 휴머니즘 자체는 보존하되, 그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자정 쯤 노트북을 열었는데 벌써 새벽이 되었다. 내일은 얀한과 훌리안, 제임스, 예시와 함께 '오필리아'라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점심에는 간장국수를 먹을 생각이다. 새로운 하루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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