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때 엑소의 '늑대와 미녀'가 발표됐다. 일요일 저녁 때마다 어차피 주말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는 교실 문을 쾅 닫고, 불을 끄고, 친구들과 모여서 한 주의 음악 방송을 몰아본 기억이 있다. 후속곡 '으르렁'의 컨셉은 음악이나 의상이나 너무 뻔하게 느껴졌고, '늑대와 미녀' 쪽이 차라리 세련됐다고 생각했었다. 무대의 시작에 열두 명이나 되는 멤버가 백댄서도 없이 생명의 나무였나, 아무튼 뭐시기 마법적인 식물을 형상화하는 춤이 얼마나 심미적이고 파격적으로 여겨졌던지. 그 와중에 혼자서는 어느 누군가를 어렴풋이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온유를 좋아했었다. 학교 구석구석에서 샤이니의 무척 키치한 댄스곡을(이를테면 아미고) 들으며 수능특강 등등을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전 학교의 누구도 온유와 비슷하게 생기지조차 않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우스워진 일이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떠난 지도 이제는 십 년 남짓이 지났다. 중간중간 잘생겼다고 생각한 연예인은 몇 있었지만, 딱히 그 누구의 팬이라고도 말하기 어려웠다. 아이돌 노래를 찾아 듣지도 않았다. 그랬던 내가... 갑자기 왜 틴탑을... 좋아하게 된 걸까? 물론 아무런 원인도 추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아가면, 수련회나 수학여행 등 학생이 무대에서 춤을 출 만한 기회가 여럿 있었으며, 잘 추든 못 추든 모두가 어설프게라도 무대에 참여하는 관습 같은 것이 상당히 강한 규범력을 갖고 작동했다. 한편 젠더의 힘에 대한 자의식이나 감각 등등이 당시에는 거칠기만 했으니, 서로 다른 교복을 입는 사이에는 그 이유만으로 소위 내외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어느 과에 가든 여학생이 대다수였기에 전반적으로 남자아이들은 저들끼리 똘똘 뭉치려 했고, 특히 불어과 친구들이 그랬다. 2학년 중반에 편입한 친구까지 포함해도 일곱 명이 다였으니까. 그에 비하면 내가 속해있던 중국어과와 바다 건너 독일어과에는 남학생이 무려 열댓 명이 넘었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들의 존재감이 무척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눈에는 왠지 그때의 남자아이들 적어도 몇몇은 무엇을 하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머리가 아주 빠릿빠릿 돌아가는 편은 아니었던지라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는 시간으로 승부를 봤던 나에게 그들의 상대적으로 근심 없어 뵈는 안색이나 언행 같은 것은 부러운 마음을 안기곤 했다. 가끔은 몰래 열등감까지도 느꼈던 듯하다.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어과 남자애들 일부는 틴탑의 노래를, 독일어과 남자애들 일부는 인피니트의 노래를 골랐었다.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인피니트는 한 번만 선곡됐을 수도 있다. 적어도 틴탑은 최소 두 번 이상 선곡됐다. 수파러브랑 투유. 춤을 췄던 과 친구들 가운데 정확히 누가 있었고 누가 없었는지조차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틴탑' 하면 한창 중국어를 공부하던 고교 시절이 연상된다.
그때는 속도 좁았고 워낙 근시안적으로 살았던 시절이었던지라 부끄럽게도 우정을 크게 중시하지는 않았고, 자연히 또래 친구들에게 인기가 있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쓸쓸할 틈 없이 소속감을 느꼈던 것 같다. 당장 스스로에게 자아가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와 견고한 우정을 쌓고 자시고 할 능력도 없었으며, 그런 이유로 외로움 정도는 꽤나 자주 느꼈지만, 결코 쓸쓸함은 아니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누군가와는 반드시 윌리닐리 연결돼있다는 감각. 그땐 혼자서 울 곳조차 찾기가 어렵다는 생각에 너무 답답했는데 그 시절이 이렇게 문득 그리워질 줄이야.
아무튼 추억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친근함, 그리고 다들 한국 나이로 서른이거나 서른이 넘었는데도 몸이 부서져라 춤을 추고 라이브를 소화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에는 연예인이 연애를 하면 왜 팬클럽이 뒤집어지는지 저언혀 이해를 못했었다. 심지어 샤이니 사랑이 절정을 찍었던 고등학교 시절, 온유가 애프터스쿨의 정아와 열애설이 났을 때 옆반의 친구가 헐레벌떡 찾아와 하영아!!! 네가 정아보다 예쁘니까* 걱정하지 마!!! 라고 말해줬을 때도 마음은 너무 고맙지만, 내심 둘의 있는지도 없는지도 불확실한 섬씽과 내가 무슨 상관이지? 싶었던 나였는데... 자그마한 화면이나 보면서 헤실거리고, 리키나 니엘에게 애인이 있다면 쪼끔은 속상할 것 같다 생각하는 현재의 내 모습은 참 낯설다. 지금 내 마음에는 뭐랄까 무척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내가 느끼는 설렘이란 개인 대 개인의 설렘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상 상당히 내밀해야 하는, 그리하여 나 자신의 구체적인 인격과 구분되기 어려운 감정인 설렘을 익명적으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재미있다. 단순히 사실상 익명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익명적이어야 한다는 당위가 작동하는 것까지도 재밌다. 개별적인 인격으로서 돌출되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팬됨의 윤리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쪼끔은 속상하게 생각이 되는 걸까? 그들이 연애를 한다고 하면 좋아하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니 이념상으로는 응원해야 할 텐데. 만약 질투심이라면 내 팬심은 모노가미의 연애 원칙에 어긋나는 걸까? 이를테면 나는 서로 배타적인 사랑을 약속한 애인에게 당장 무언가 윤리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 걸까? 틴탑 좋아하는 철학과 대학원생 여기루 모여~
*거짓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신기한 사실이 있다. 분명 처음에는 리키를 콕 집어서 맙소사 나랑 동갑인데 춤 어떻게 이렇게 춰? 정도의 생각으로 애정을 개시했던 것 같은데 보다 보니 나머지 멤버들도 좋아졌다. 리키는 정말 무릎이 나가겠다 싶을 정도로 몸을 움직이는 게 눈에 보이고 그게 매력인데, 반면 니엘의 춤에는 (물론 이 또한 노력의 산실이겠지만) 요령이 있다. 니엘이 노래를 부르고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모습 등등을 종합해보면 아, 저런 사람이 천상 연예인이구나 싶다. 한편 천지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도 (이제는 정말 귀한 일인데) 넘나리 상큼하고... 창조는 매섭게 생긴 듯 순둥순둥한 듯 매섭게 생긴 듯 종국에는 순둥순둥한 것이 참 좋다. 투유 무대에서 창조가 거의 하늘을 날라다니는 구간이 있는데... 무형문화재 지정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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