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물

마론은 이따금 스스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낀다(2024.7)


 마론은 어제 함께 일하고 있는 동료 햇님에게서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마론 네가 무해해서 참 좋아. 그렇게 말하고서 햇님은 수줍게 웃어보였다. 칭찬이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깊은 선의로부터 우러나온. 물론 햇님이 그 이상의 말을 아꼈기에 어떤 의도가 더 숨어있는지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아는 마론으로서는 햇님의 말이 순수한 호의의 표현, 심지어는 꽤나 까다로운 인정의 발부임을 알았다. 다만 정확히 무엇의 인정이었는지가 아리송했을 뿐이다. 마론의 모국어는 한국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국어의 '무해하다'에 의미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대응되는 단어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마론의 고향 사람들은 그 단어를 사람에게 쓰지 않았다. 보통 그 단어가 붙는 것은 질병이나 약품, 야생동물 같은 것이었다.

 마론은 기분이 씁쓸해졌다. 햇님의 말은 마치 인간됨의 기본값은 해로움인데, 마론은 특별히 그렇지 않은 예외적 존재라는 뜻을 담은 듯했다. 언제부터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손해의 있음과 없음, 끼침과 끼치지 않음이 된 걸까? '친절한 사람', '같이 있으면 재밌는 사람', '성실한 사람' 정도로도 날 인정해줄 수 있었을 텐데. 마론은 햇님의 의도와 정반대로 오히려 그녀에게서 자신이 멀어진 것처럼 느꼈다. 그녀와 자기 사이에 거리가 생겨서가 아니라, 햇님이 스스로를 세계의 온갖 유해한 덩어리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종의 방호복과 같은 것을 영혼에 두르고 있는 듯해서였다. 거리를 아무리 좁혀도 햇님의 맨손은 잡을 수 없을 것이다. 햇님과의 우애가 불가능하리라고 설핏 예감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유해하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이란 말인가. 마론이 혹시라도 유해함에 상응하는 조건들 가운데 하나--반드시 사람마다 다를 테고, 그 규정이 조금은 우연적일 수밖에 없을--를 체화해버리기라도 한다면, 햇님은 어떻게 반응할까? 다른 한국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마론을 '손절'해버릴까? 마찬가지로 '손절'이란 표현도 사람에게 쓰라고 만들어진 말이 아니었다. [...]


 [...] 햇님은 하리가 '갓생'을 산다고 말했다. '갓생'이 뭐냐고 물으니 새벽 5시에 일어나 필사를 하고, 헬스장에 간 뒤 30분 일찍 출근해 하루의 생산성을 위하여 명상을 하는 것이란다. 점심은 건강식을 먹고, 커피는 까다로운 취향에 따라 직접 고른 원두로 손수 내리며, 부모님께는 용돈을 드리고, 언제일지는 몰라도 확실히 결혼이 예정된 오래된 애인이 있는 것. 일을 잘하는 것은 기본이고, 취미생활도 진지하게 해서 주말에는 애인과 아웃도어 스포츠를 즐기는 것. 그렇다고 해서 '인도어'에 해당하는 활동에도 소홀하지 않는 것, 이를테면 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을 1권부터 독파하고 있다든지. 그리고 애인과 무척 충실한 사이이긴 하지만, 분기별로 만나 끈끈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 그룹도 따로 있는 것. 그냥 쉬지 않는다는 뜻이잖아요? 하고 생각나는 대로 뱉으니 마론, 하리가 쉬기도 얼마나 잘 쉬는데. 요가 강사 자격증도 있다니까? 라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햇님은 갓생을 사는 하리가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자신은 천성이 게으른 사람이라 하리처럼 살 수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자신은 '소확행'에 만족한다고. '소확행'이란 말까지 배운 마론은 속으로 생각했다. 햇님은 게으른 것이 아니고, 햇님의 행복도 작은 것이 아니야. [...]

'창작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서진 파르테논은 그녀 자신이다(2025.2.17)  (0) 2025.02.17
음산한 땅(2024.8)  (3) 2024.11.19
미완 - 부쉬 드 노엘(2021.2)  (18) 2024.04.01
사생활(2023.6)  (0) 2023.06.27
인물 스케치: 온마루(2023.5)  (4) 2023.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