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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31005 진자운동

"그와 별개로, 우리는 눈을 감으면 언제나 사랑과 암흑을 본다."(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문학동네, 2023, p. 36)

 오랜만에 모국어로 된 책을 펼쳐 읽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작가의 수필집이다. S가 슈투트가르트에서 보부아르 입문서, 울프의 ⟪올랜도⟫와 함께 가져다주었다. 정제된 한글의 미로 속, 그것도 문학의 권역에 다시 발 디디는 기분은 황홀한 동시에 끔찍했다. 내가 떠나온 곳의 아름다움을 조금의 완충 작용도 없이 상기 당했기 때문이다. 한동안 나는 소설을 읽지도, 쓰지도 않았다. 용기에 대한 논문을 진척시켰지만, 소설의 세계로 회귀할 용기는 없다. 가장 진솔하게 쓴 소설의 초고를 탈고했지만, 퇴고할 기분은 들지 않는다. 스무 살에나 지금이나 나는 매일 기분과 싸워 이겨야만 무언가를 해낼 수 있고, 지금은 지는 중이다.
 소설에 대해 내가 품고 있는 두려움은 과거에 사뭇 구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구체적인 이유의 인상이 흐릿해지고 대신 어떤 사변적인 공포만이 남게 되었다. 공포의 핵심에 자리하는 생각은 내가 노동을 우선시하느라 선택하지 못한 존재의 방식을 누군가는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 선택하는 데 성공했으며, 나는 이미 다른 세계 속에 육화되어있기에 그 사람처럼은--이를테면 S처럼은--결코 살지 못할 것인데, 이것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실존의 보편적인 굴레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행위들의 궤적은 되돌아보면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 선험적인 것이든, 경험적인 것이든 어떤 굴레에 의하여 속박되어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다고 해서 내가 행위의 순간에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느꼈던, 이 행위가 이루어지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나에 의한 내 심신의 조작에 달려있다는 절대적 감각에 대한 기억이 마냥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나만의 것이 아닌 그러한 기억들 앞에서 결정론은 제 아무리 치밀한 논증으로 무장되어도 우리네 살결에 끝내 와닿지 못한다. 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세계의 아주 사소한 행방을 포함해 모든 것이 그저 결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사실은 내가 인간인 한에서 내 경험의 견고한 구조를 바꾸지 못한다. 단지 나를 바보로 만들 뿐이고, 나는 그토록 어쩔 수 없는 무지에 대해서만큼은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경험의 바깥에 대해 말하는 일은 무의미하며, 솔직히 말해 오만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선험이라는 것도 사실은 선험에 대한 경험인 셈이다. 
 하지만 경험이 매 순간 사람의 자유를 드러내주는 게 맞다면, 내가 내 등 뒤에 두고 온 지난 삶의 방식에로 내일이라도 돌아가지 못할 이유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S가 내 곁을 떠나기 전까지 퇴고를 시작하리라 스스로에게 맹세한다. 흐린 날에도 새들은 날갯짓을 하기 때문에, 라고 썼지만, 끝까지 자신은 없다.


 우정에 서투른 내게 S와의 시간은 감사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어제만 해도 S가 점심에는 미역국을, 저녁에는 버터가 들어간 홍합탕을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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