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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울산

Tag 1

 비 탓에 기차가 지연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서울역에서 편의점 커피를 마셨다. 다행히 열차는 정시에 도착했고, 중간중간 속도를 늦추긴 했지만 마침내 우리를 무사히 울산에 데려다주었다. 애인은 바다를 보고 싶어했고, 나는 그의 고향이 궁금해 선택한 여행지였다. 당황스럽게도 ktx 역과 울산 시내는 서로 무척이나 떨어져있어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려야 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어느 소곱창 집이었다. 모든 메뉴가 2인분 이상으로밖에 주문이 안 돼서 폭식할 것을 각오하고 구이 2인분, 전골 2인분을 주문했다. 구이는 부드러우면서도 질겅질겅 씹혔는데, 알알이 바삭하게 튀겨진 감자 맛이 났다. 곱창 안에 곱이 잔뜩 차있어 정말 고소했다. 전골은 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국물 맛이 중독적이었다. 서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저렴한 가격은 덤. 둘이서 4인분을 해치운 후, 똥똥하게 부푼 배를 부여잡고 태화강 국가정원을 걸었다. 새 소리와 벌레 소리를 원없이 들으며 대나무 숲길을 산책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적당히 맞으니 여름 날씨가 그다지 덥지 않게 느껴졌고, 모기를 왕창 물린 것조차 추억이 됐다. 애인은 좀 더 걷고 싶어했지만, 내 체력이 받쳐주질 않아 산책은 한 시간어치로 중단해야 했다. 저녁 늦게 도착한 숙소에서는 창밖으로 대관람차의 불빛이 보였다. 배수아의 환상소설 한 편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오랜 시간 이동한 탓인지 피곤해서 매우 일찍 잠에 들었다. 그 사이 애인은 혼자 밤 산책을 또 다녀왔고, 돌아와서 잠결에 깬 내게 보고 들은 것을 얘기해주었다.


Tag 2

 게으르게 늦잠을 자고, 좋아하는 풀잎 모양 원피스를 입고 문수산을 (택시로) 올랐다. 애인이 가족들과 왕왕 사먹었다는 국수를 한 번 맛보러. 건더기가 실하고 육수가 진한 잔치국수도 좋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부추전이었다. 밀가루를 거의 묻히지 않은 채 요리해서 서울에서 먹어온 전과는 느낌부터 달랐고, 경상도에서는 '찌짐'이라 부른다고 배웠다. 한편 부추는 '정구지'라고 부르니 나중에 경상도 사람을 만나면 아는 척을 해보라는 귀여운 애인. 그의 주도로 두부도 한 접시 시켰는데, 콩을 싫어하는 나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전날 곱창을 애인이 샀기 때문에 잔치국수는 내가 샀지만, 비용의 균형이 영 맞지를 않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유학지에 나가면 공부를 정말 열심히 해서 부디 장학금을 타고, 언젠가는 잡도 구해서 애인에게 앰배서더 호텔의 저녁 뷔페 같은 것을 대접해야지. 그리고 나서 테일러드 수트 같은 것을 취급하는 의상실에 가서 멋진 양복도 맞춰줘야지. 지금으로서는 미안하고 고맙다는 공짜 말밖에는 해줄 수가 없다.

 밥을 먹고 나서는 사정상 카페에 가서 각자 할 일을 했다. 나는 후설이 고안한 의지 개념의 유형과 그중에서도 행위의지(Handlungswille)가 행위에 대해 수행하는 구성적인 역할을 소개한 다음, 그러한 개념화가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는 행위가 매우 적다는 지적이 담긴 뷔르츠부르크 대학 메르텐스 교수의 아티클을 읽었다. 셸러의 윤리학과 행위 개념에 대해서도 잠깐 뒤적였다. 단순화하면 선호와 불호의 위계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질서(ordo amoris)가 인격의 핵심을 이룬다는 내용이 흥미로웠다. 개인적으로 모든 주체는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제나 과거보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를 욕망한다고 생각하는데—그러한 욕망을 나는 실존적 본능이라고 부르고 싶다—그때의 '더 나은 자신'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를 규정해주는 게 저 사랑의 질서가 아닐까 싶었다. 책을 덮고 나서는 내 사랑의 질서는 무엇일까 스스로 묻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기질 검사를 해봤을 때 자극 추구 성향과 위험 회피 성향이 동시에 높게 나와서 허탈했던 적이 있으니, 저 물음의 답을 찾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기 때문에 실존적 고민은 뒤로 하고 저녁식사를 했다. 삼십 분 정도 시장과 밤거리를 구경하고, 멀린이라는 바에 들어가 칵테일을 마셨다. 바텐더 분들과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애인의 쾌활한 모습을 지켜보고 나도 슬쩍슬쩍 끼어들다 보니 조금씩 술에 취해갔다. 술기운이 오르니 흡연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애인과 나는 결국 금연하자던 약속을 깨고 시가 맛이 유독 강하게 나는 담배를 사서 하나씩 피웠다. 그리고 나서는 충동적으로 인생네컷 비슷한 것을 찍었는데, 나중에 유학지에서 살 방의 벽에 붙여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비내리는 삼산을 주점들이 밝히고 있었다. 외관을 멋스럽게 꾸민 가게들이 많아, 나중에 다시 같은 거리를 오래오래 누비고 싶어졌다. 나는 서울에 계속 살고 싶은 욕심이 없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애인의 고향에 내려와 함께 살아보고 싶다.

 


Tag 3

 게으르게 늦잠을 자고… 싶었으나 체크아웃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부랴부랴 씻고 짐을 챙겨 나왔다. 애인이 울산에 오면 꼭 먹어봐야 하는 아구 집이 있다면서 (어떤 재벌이 엄선한 맛집 리스트에도 올랐다고 한다) 고속버스터미널 근처로 나를 인도했다. 들어가보니 엠지 세대가 우리밖에 없어 멋쩍었으면서도, 진짜배기 맛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구지리라는 음식을 먹었는데, 시원하면서도 푸근한 맛이 나는 하얀 국물이 인상적이었다. 귤처럼 탱글탱글한 아구의 살도 간장을 찍어 먹으니 너무 너무 맛있었다. 앞으로 애인이 먹자고 하는 것은 다 그냥 따라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아무 생각도 없이 허겁지겁 한 그릇을 비우고 식당을 나왔다. 잘 먹었습니다.

 습관처럼 근처의 옷 가게를 구경하고, 숙소의 창밖으로 보았던 대관람차를 탔다. 기구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높이 올라갔고 차체가 흔들려서 엄청 무서웠다. 게다가 일반 차량이 아니라 바닥이 유리로 된 크리스탈 어쩌고 차량을 타서 더더욱 겁이 났다. 내 나이 만 스물일곱, 애도 잘 타는 관람차 안에서 벌벌 떨었지만 애인이 사진을 찍어줄 때만큼은 태연한 척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관람차를 탄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울산 시내와 공업지대를 한눈에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얗고 빨간 스트라이프 무늬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공장을 바라보며,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역시 이과생인 것 같다는 생각에 경탄스러웠고 풀도 조금 죽었다. 농담 반 진담 반.

 택시를 타고 강동의 몽돌해변 근처로 이동했다. 통유리 창밖으로 바다가 시원하게 드러나보이는 카페에서 소금빵을 앙 물고 커피를 마셨다. 잠시 여유를 즐기는데 느닷없이 비관적인 생각들이 침투해왔다. 가슴이 답답해져서 신경안정제를 한 알 삼켰다. 나를 괴롭히는 부정적인 사고들은 대개 미래의 불확실성을 재료로 삼는데, 우리네 현존 자체가 본질적으로 연약한 것이기 때문에 저 사고에는 끝이 있을 수가 없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고 슬픈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걱정이 들면 반대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쁜 일이 일어나는 상상을 해본다. 백발이 된 애인과 내가 소파에 앉아 함께 책을 읽는 모습, 국제 학술대회에 나가 내가 영어로 멋진 발표를 해내는 하루, 내가 쓴 소설을 누군가가 감명 깊게 읽고 의견을 전달해주는 장면, 조금은 어처구니없지만 로또에 당첨돼서 노동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일과 등을 상상한다.

 얼리 체크인에 실패해서 새 숙소에는 짐만 맡겨두고 해변으로 나왔다. 모래가 없고 돌만 있는 해변이었다. 덕분에 발이 더러워질 걱정은 없었지만, 젤리 슈즈 안으로 자꾸 자갈이 들어와 아팠다. 그림자가 진 곳에 돗자리를 펼쳐놓고 바닷물에 발을 담궜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가위바위보를 해 진 사람이 허리까지 물에 담그기로 내기를 하게 됐을 정도였다. 그래도 비가 억수로 쏟아졌던 어제와 달리 해가 쨍쨍했다. 따뜻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햇살에 불안감을 씻어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불안과 자책감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스스로가 정말이지 자랑스럽다고, 그리고 위태로운 일상을 살아나가는 나의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하다고 계속 되뇌이다 보니 기분이 정말 좋아졌다. 돗자리에 편안하게 누워 낮잠을 자는 애인의 얼굴에 드리워진 평화가 내게도 찾아왔다.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얼마 뒤 짐을 챙겨 숙소로 들어왔다. 저녁으로는 근처에서 햄버거를 사먹었는데, 직원 분의 사투리를 애인은 단박에 알아들은 반면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에피소드가 생겨 또 즐거워졌다.

 밤에는 해무가 짙게 깔렸다. 누군가는 불꽃놀이를 했고, 모닥불을 피운 사람들도 있었다. 마시멜로우를 구워 먹으려나? 파도가 철썩거리는 소리 가운데서 잠에 들 생각을 하니 설레였다. 나는 방에서 바다의 음악을 듣고 시트 향기를 킁킁대면서 쉬기로 했고, 애인은 해무 속에서 반짝거리는 신호등 사진을 찍기 위해 밤 산책을 나갔다. 뚜렷한 색감과 텍스처, 선명한 대비, 무엇보다 광원의 존재감과 그로 인해 두드러지는 그림자가 애인이 찍은 사진들을 특징 짓는다. 아무래도 카페의 내부나 도로의 차들, 도심의 네온사인처럼 인공적인 빛이 미치는 영향이 큰 피사체를 찍고 싶어하기 때문 같다(자연경관도 종종 찍지만). 사진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게 내 애인의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도 동경할 만하다. 그의 사진 속에는 허영심이 없다. 다만 촬영하고 보정하는 행위 자체와 피사체의 표면에 떨어지는 빛과 어둠에 대한 순수한 애정이 가득할 뿐이다. 좋은 사진을 찍겠다는 욕심은 있다. 하지만 좋은 사진으로써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은 부재한다. 그것이 오히려 그의 사진들이 내보일 수 있는 인상의 층을 더욱 두텁게 만들어주고 감상자를 자유롭게, 그리하여 즐겁게 해준다.


Tag 4

 몸 상태가 갑자기 좋지 않아서 시내의 병원에 들렀다가 공항으로 이동했다. 면세점 구경을 할 수 있느냐는 나의 질문에 애인의 웃음이 터졌다. 울산 공항엔 면세점 같은 거 없어요, 하고 말이다. 면세점을 구경하는 대신 할리스 커피에 잠시 체류했다. 수속을 밟고 보안검색대를 통과하기 직전, 공항에서 헤어지는 롱디 커플을 두 쌍이나 만났다. 나 역시 머지않아 애인과 비슷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겠지. 한국에 있을 날이 한 달보다도 덜 남았다. 그 전까지 애인과 친구들, 그리고 가족에게 사랑을 듬뿍듬뿍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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