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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하조대


 동해안으로 가는 버스에 타서 나는 띄엄띄엄 잠을 잤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푹 잤다. 잠깐씩 깰 때마다 눈 감은 그의 옆얼굴, 곧은 코와 살짝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바라보다 영원을 꿈꿔버리고 말았다. 서로 나눠 끼운 이어폰을 통해서는 환상약국이란 요상한 이름의 밴드가 노래하고 있었고.

 양양여객터미널의 흡연실은 서울 것에 비해 매우 깔끔했고 냄새도 별로 안 났다. 그는 터미널에서 사온 말보로 어쩌고를 피웠고 나는 보다 얇고 긴 멘솔을 피웠다.

 하조대의 해변가에 나오니 구름이 많이 걷혀있었다. 해가 없어서 하늘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오히려 좋았다. 바닷가를 걷다 잠깐 쪼그려 앉았고 그대로 파도가 땅을 만나 잦아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꽤 거칠어보이는 파도도 막상 우리의 발 밑에 가까이 와서는 힘없이 부서지는 것이 묘한 안정감을 줬다.

 '배부른 고양이'라는 음식점에서 생선구이를 먹었다. 사실 나는 생선을 잘 바를 줄 몰라서 긴장했는데 그가 고등어와 가자미, 열기 모두 솜씨 좋게 갈라서(경상도 남자의 자부심이라고 한다) 내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똥파리가 자꾸 앵앵거렸는데 그것도 재미있었고. 식사를 마치고 식당 앞에서 그의 담배를 빌려 피웠는데 정말 맛이 없었다. 그래도 녹차 맛이 난다기에 그렇게 생각해보려고 했더니 그런 대로 맛이 괜찮아지는 것 같았다.

 등대 근처의 카페에서 사람들이 벽에 마커로 남긴 메모들을 읽었다. 이어 최근에 쓴 소설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누다 두 인물의 성별을 바꿔보면 어떻겠냐는 조언을 듣고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선택지였던지라 살짝 당황했는데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괜찮은 것 같았다. 다만 글을 총체적으로 엎을 생각을 하니 막막하긴 했다. 식혜를 마실까 했는데 결국은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둘레길을 걸으면서 그가 군대에서 사격을 얼마나 못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눈이 좋지 않아서 과녁조차 보이지 않았다고. 방파제를 지나면서는 낚시꾼들이 방파제와 방파제 사이에 떨어져 골절된 채로 죽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는 굉장히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인터넷 밈도 무지막지하게 많이 알고 있는데, 하영 씨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좀 가지세요, 하고 가볍게 꾸짖어주는 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저녁에는 손님이 우리뿐인 횟집에서 숭어와 광어, 우럭을 먹었다. 태어나서 먹어본 회 중 가장 맛있는 회라는 그의 말이 따뜻했다. 그가 술을 마시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돌연 이소라의 '청혼'을 틀었을 때는 정말이지 어쩔 줄 몰랐다. 그는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까? 가슴을 펴면서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던 순간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무척 섭섭할 것 같다, 동시에 기억하지 못한대도 아무 상관 없을 것 같다.

 다음날 오전에는 뷰가 탁 트인 카페에서 함께 체호프를 읽고 서로의 옛날 사진들을 구경했다. 서울로 돌아오기가 정말 싫었지만 그도 나도 뒷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단호하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다녀온 지 벌써 한 주가 흐른 여행이지만 여운이 길다. 바다가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잘 살아야지, 아무것도 무서워하지 말아야지, 내가 나를 지키면서 내 애인도 꼭 지켜줘야지 속으로 중얼거렸던 것, 그가 너무나 예쁜 눈매로 씩 웃던 모습, 어디로 튈지 몰랐던 그의 플레이리스트 속 음악들과(정형근의 '40억년 후' 같은),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그가 혹시 싫어할까 봐 아주 조금 불안해했던 기억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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