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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임마누엘 칸트, <윤리형이상학 정초> ~IV421 요약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윤리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아카넷, 2014

 꽤 오랫동안 칸트의 윤리학이 지나치게 강박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떠들어왔던 것 같은데, 다시 살펴보니 그 수다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아니면 적어도 깊은 성찰을 결여하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이성적 존재자로서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경향성이나 주변 상황의 영역이 아닌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자유의 영역에 도덕이 놓여있으며, 오직 그 경우에만 도덕법칙에 요구되는 필연성이 충족될 수 있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을 뿐만 아니라 실존적인 위안을 내어준다. 나의 의지가 윤리적 명령에 따르는 한, 그 의지로부터 나온 행위의 결과와 독립적으로 내 의지와 행위의 선함이 확보되고 보장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이것이 자기위로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나 오늘에야 비로소 같은 것이 긍지의 가능성으로 읽힌다. 내가 현명해진 건지, 아니면 자기위로의 유혹에 굴복하게 된 건지는 더 생각해봐야 알 것 같다.

머리말 윤리학은 [그에 실천적 인간학이 포함되는 한] 경험적인 부분을 가지는 질료적 철학으로서, 인간의 의지(라는 질료)에 부과될 자유의 당위법칙을 다룬다. 그런데 만일 윤리학이 "오로지 선험적인 원리들에서 개진"되며 "지성의 특정한 대상들"을 다룰 경우 순수한 윤리 형이상학이 된다.(IV388 BV) 순수한 윤리 형이상학은 경험적인 부분을 배제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윤리법칙이 가져야 할 도덕적 타당성은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 적용되는 "절대적 필연성을 동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IV389 BVIII). 경험적인 근거들에 의지한다면 윤리법칙이 가져야 할 절대적 필연성이 훼손된다. 

 "무릇,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라면, 그것이 윤리 법칙에 알맞은[따른]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은 또한 윤리 법칙을 위하여[때문에] 일어난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저 알맞음[따름]은 단지 매우 우연적이고 불안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비윤리적 근거는 때로는 합법칙적인 행위들을 불러일으키지만, 더 자주는 법칙 위배적인 행위들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IV390 BX, 강조는 원저자)" 윤리적 법칙이 이와 같은 순수성과 진정성을 확보하려면 그에 따르는 의지가 "일체의 경험적 동인 없이 온전히 선험적 원리들로부터 규정"되어야 한다(IV390 BXI).

 칸트는 평범한 지성조차 도덕적인 것과 관련해서는 "매우 정확하고 세밀하게" 이성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순수 실천이성 비판은 아직 불필요하다고 본다. 이에 따라 그는 단지 이 정초를 씀으로써 "도덕성의 최상 원리의 탐색과 확립"을 도모한다.(IV392 BXV, 강조는 원저자)

제1절 평범한 윤리적 이성인식에서 철학적 이성인식으로의 이행 선의지는 다른 정신의 재능들, 기질 등과 달리--이것들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의지가 선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선하지 않게 된다--아무런 외적 조건을 필요로 함이 없이 내재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선한 유일한 것이다. 선의지는 그 의욕함이 어떤 다른 목적을 달성하는데 쓸모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선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는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있으며, 독립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무엇인가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우리의 의지의 통치자 중 하나로 자연은 이성을 부가했는데(beilegen, 덧붙이다), 어째서 자신의 모든 운행에 있어 합목적적인 자연이 이런 선택을 했는지 칸트는 알고자 한다. 만일 "이성과 의지를 가진 한 존재자에게 있어 그것의 보존번영이, 한마디로 말해 그것의 행복이 자연의 본래 목적이라고 한다면, 자연은 이러한 자기의 의도의 실행자로 그 피조물의 이성을 선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연은 "생명을 위해 합목적적으로 조직된 [...] 존재자에게 있어서는 그 목적에 가장 적합하고, 그것에게 가장 알맞은 것 외에는, 어떤 목적을 위한 도구도(IV395 B4, 강조는 원저자)" 제공하지 않는데, 행복을 위해서는 이성보다 본능이 더욱 알맞은 도구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심지어는 때때로 불행을 불러오기까지 한다. 따라서 행복은 자연에 의해 이성과 의지를 가진 한 존재자에게 주어진 목적이 아니다. 

 의지의 대상과 필요를 충족함에 있어 이성보다 자연 본능이 훨씬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이성이 실천 능력으로서, 다시 말해 의지에게 영향을 미쳐야 할 그런 것으로 품수되어 있으므로(zugeteilt, 배정된), 이성의 참다운 사명은 가령 다른 의도에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선한 의지를 낳는 것이어야만 한다.(IV396 B7, 강조는 원저자)"* 이성은 "경향성의 목적들에 대한 수많은 손실(IV396 B8)"을 입는다 할지라도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데서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자연은 정말 반드시 합목적적인가?

 칸트는 선의지의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해 의무 개념을 취한다. "이 의무 개념은 비록 어떤 주관적인 제한들과 방해들 중에서이기는 하지만, 선의지의 개념을 함유(IV397 B8)"하며 그것을 부각시켜준다. 행위는 (1)의무에 어긋나는 행위와, (2)의무에 맞는 것이지만 주관이 그 행위에 대한 "아무런 경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다른 경향성으로 인해 그렇게 하도록 몰아세워져 그렇게 한 행위(IV397 B8-9, 강조는 원저자)", (3)의무에 맞는 것인 데다 주관이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경향성(e.g.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 행위, (4)아무런 경향성 없이 오로지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로 나뉜다. 칸트에 따르면 마지막 (4)의 경우에 오직 그 경우에만 주관의 준칙은 도덕적 가치를 가진다. 왜냐하면 다른 경우들에서는 그 선함, 즉 의무와 맞아떨어짐이 단지 우연적일 뿐이기에 가치의 확보가 불완전하게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3)의 경우들에서는 만일 경향성을 비롯한 우연적인 조건들이 변할 경우 더 이상 해당 행위가 의무와 맞아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생기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도덕적인 행위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칸트는 선행, 행복의 확보, 이웃과 원수에 대한 사랑을 예로 들며 경향성이 아닌 의무, 즉 지시명령gebieten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나온 행위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짐을 강조한다.

*어째서 도덕적 가치에는 0 아니면 1처럼 가지지 못하거나 가지는 두 경우만 있는가? 우연적으로 도덕적인 행위에도 도덕적 가치를 주는 일은 왜 부당한가? 칸트라면, 우연적으로 도덕적인 행위의 경우 행위의 동일한 근거가 다른 조건 하에서는 비도덕적 행위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칸트에게는 행위의 (i)근거가 도덕성을 (ii)필연적으로 낳는지가 늘 관건이다. 이후 이 근거는 '준칙Maxim'이란 말로 구체화된다.

 의무의 도덕적 가치는 의무로부터의 행위가 달성해야 할 의도 또는 목적이 아닌, "그에 따라 그 행위가 결의되는 준칙" 즉 "행위를 일어나게 한 의욕의 [형식적인] 원리"에만 의존한다.(IV399-400 B13, 강조는 원저자) 또한 의무는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비롯한 필연적 행위이다.(IV400 B14)" 결과로서의 객관에 대해서는 경향성을 가질 수 있을 뿐 존경을 가질 수는 없다. "법칙 그 자체만이 동경의 대상일 수 있(IV400 B15)"다.

 행위의 도덕적 가치가 그 결과에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 결과란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 외의 다른 원인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으로도 증거된다. "그럼에도 최고의 무조건적인 선은 오로지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에서만 마주칠 수 있는 것이다.(IV401 B15)"* 의지가 이처럼 무제한적으로 선하다고 일컬어질 수 있기 위해서는 "행위 일반의 보편적 합법칙성", 즉 "나는 또한 나의 준칙이 보편적인 법칙이 되어야만 할 것을 내가 의욕할 수 있게끔 오로지 그렇게만 처신해야 한다"는 법칙 그리고 의무의 개념이 동인으로서 의지를 규정해야 한다(IV402 B17, 강조는 원저자). 칸트는 평범한 인간이성 역시 이러한 의지의 원리들을 추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항상 눈앞에 두(IV402 B17)"는 채 판단의 척도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괜한 고려사항이 많은 철학자보다도 평범한 인간지성이 더 좋은 실천적 판정을 내릴 수 있다.

*이행남 선생님: 이성적 존재자만이 법칙의 표상, 즉 법칙에 대한 사유에 따라 행위할 수 있다. 이때의 객관적 법칙이란 질료적인 내용이나 조건을 함유하고 있지 않은 형식적 조건, 행위 일반의 합법칙성, 또는 무모순성 그 자체로서 질료는 준칙에 의해 마련된다.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윤리형이상학이 철학으로서 요구되는 것인가? 그것은 학문을 통해 경향성과 행복의 유혹을 물리치고 지속적으로 의무로부터 행위하게 하기 위해서, 나아가 법칙들의 타당성, 순수성, 엄격성을 의심하며 그것들을 경향성에 맞게 변질시키려는 자연적 변증학의 발생을 막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평범한 인간이성은 사변의 어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천적 근거들에 채근당해, [...] 자기 원리의 원천과 그 원리의 올바른 규정에 대해, 필요와 경향성에 기반하고 있는 준칙들을 견주어, 정확한 지식과 명료한 지침을 얻기 위해" 실천철학을 시작한다.(IV405 B24)

제2절 대중적 윤리 세계지혜에서 윤리 형이상학으로의 이행 의무로부터만 나오는 행위의 실례를 "경험을 통해서 완전히 확실하게 결정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불가능하다.(IV407 B26)" 자기 사랑의 충동이 행위의 동인일(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이제까지 한 번도 그와 같은 실례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이성이 의무로부터만 나오는 행위를 지시명령하고 있다는 확신이 의무의 이념과 법칙성에 대한 존경을 보존해준다. "이 의무는 의무 일반으로서 모든 경험에 앞서 의지를 선험적인 근거들에 의해 규정하는 이성의 이념 중에 들어 있(IV408 B28)"다.

 의무는 단순히 인간뿐 아니라 이성적 존재자들 일반(이들만이 "법칙의 표상에 따라, 다시 말해 원리들에 따라 행위하는 능력 내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IV412 B36, 강조는 원저자)")에게 필연적으로 타당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경험은 인간성의 우연적인 조건들 아래에서만 타당하기 때문에, 이성적 존재자로서 우리의 의지를 규정하는 법칙을 이룰 수 없다. 경험적 실례들은 "단지 격려를 위해서 쓰일 뿐 [...] 참된 원본을 제쳐놓고" 도덕의 표준이 될 수는 없다(IV409 B30).

*칸트의 윤리학을 믿는 사람들에게 인공지능에게도 윤리가 있느냐에 관한 문제는 '과연 인공지능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로 환원될 것이다. 만일 인공지능이 인간과 같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인간과 동일한 도덕 법칙들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물론 인공지능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와 마찬가지로 악한 쪽으로 빠져들 수 있어 법칙이 강요될지, 아니면 인공지능의 이성만이 인공지능의 의지를 규정해 그와 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을지는 인공지능의 설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대중적인 실천 철학은 윤리학에 경험적인 요소를 도입하기 때문에 무엇이 실천의 동인이 되어야 하는지와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혼란을 안겨준다. 따라서 순수한 윤리 형이상학은 의무들을 이론적으로 확실하게 규정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실천을 위해서도 요구된다. "윤리 법칙의 표상은 [다른 동인이 아닌] 이성의 길을 통해서만 [...]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IV410-411 B33). 모든 윤리적인 개념들은 이성 자체로부터 선험적으로 연역되어야 하지, 경험적이거나 우연적인 인식들로부터 추상되어선 안 된다. 이 연장선에서 인간이성의 특수한 자연 본성에도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 경우 "의무의 도덕적 요소를 사변적 평가를 위해 정확하게 규정(IV412 B35)"할 수 없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선을 실천하게 하는 데도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이성이 의지를 반드시 규정한다면 의지는 이성이 선하다고 인식하는 것만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의지는 이성 외의 주관적인 조건들에도 종속하기에, 이성에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객관적으로 필연적이라고 인식된 행위들이 주관적으로는 필연적이 아니라 우연적인 것,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된다. 이 경우의 "의지를 객관적인 법칙들에 맞게 규정하는 것은 강요이다.(IV413 B37, 강조는 원저자)" 이때 "객관적 원리의 표상은, 그것이 의지에 대해 강요적인 한에서, (이성의) 지시명령Gebot이라 일컬으며, 이 지시명령의 정식Formel을 일컬어 명령Imperativ이라 한다.(IV413 B37)" 완전한 선의지에게는 명령의 당위가 적용되지 않는다. 당위란 그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는, 그에 따르는 것이 필연적이지만은 않은 의지에 대해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령은 객관적 법칙과 이런저런 이성적 존재자의 의지의, 예컨대 인간 의지의, 주관적 불완정성과의 관계를 표현하는 정식"이다(IV414 B39).

 명령에는 두 종류가 있다. 가언적인 명령은 행위를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이유가(즉 행위의 실천적 필연성이) 가능하거나 현실적인 다른 어떤 의도에 도달하기 위함에 있다. 즉 가언명령의 경우 명령되는 행위는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한 것으로 표상된다. 어떤 목적을 의욕한다면, 그러한 조건 하에서라면 이렇게 또는 저렇게 행위하라는 명령인 셈이다. 반면 정언적인 명령은 행위를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이유가 다른 목적과 관계없이 행위의 자체적이고 객관적인 필연성에 있다. 정언명령의 경우 명령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선한 것으로 표상된다. 어떤 목적을 의욕하는지와 무관하게 무조건적으로 이렇게 또는 저렇게 행위하라는 명령이 곧 정언명령이다.

 가언명령은 그것이 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그저 가능한지, 아니면 현실적인지에 따라 (1)미정적 실천 원리와 (2)확정적 실천원리로 나뉜다. 반면 정언명령은 행위를 어떤 의도와도 관계없이 필연적이라고 단언하기 때문에 (3)명증적 실천 원리로 간주된다(IV415 B40).

 (1)숙련의 명령(="기술적(기술에 속하는) 명령")은 어떤 이성적 존재자에게 가능한 목적을 위해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지 명령한다. 이때 한 이성적 존재자는 해당 목적을 가질 수도 있고, 가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숙련의 명령은 미정적 실천 원리에 상응한다. 아이가 장차 어떻게 커 나갈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부모가 이것 저것을 가르치는 일은 숙련에 마음을 쓰는 예시이다. 한편 (2)영리[현명]함의 명령(="실용적(복지를 위한) 명령")은 어떤 이성적 존재자에게뿐만 아니라 모든 이성적 존재자에게서 현실적인 목적을 위해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지 명령한다. 이 목적은 곧 행복하고자 하는 의도다. 행복이라는 의도는 모든 이성적 존재자가 자연 필연성 또는 자연 본성, 본질에 따라 확실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이며, 그에 따라 영리함의 명령은 확정적 실천 원리에 상응한다. 숙련과의 관계에 있어서 영리함은 행복이라는 의도를 위한 수단을 선택하는 일에서의 숙련됨이라고 말할 수 있다. (3)윤리성의 명령(="도덕적(자유로운 처신 일반에, 다시 말해 윤리에 속하는) 명령(IV416-417 B44)")은 다른 목적이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행위의 "형식 및 그로부터 행위 자신이 나오는 원리"로 인해 행위를 명령한다(IV416 B43). 세 경우에서 행위의 원리는 각각 숙련의 규칙, 영리함의 충고, 윤리성의 지시명령들(법칙들)이 된다. 이때 법칙만이 무조건적이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으로 타당한 필연성을 가지며, "지시명령이란 [...] 경향성에 반하여서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다.(IV416 B43-44)"*

*가언명령은 칸트에게 법칙이 아닌가?

 칸트는 이제 각각의 명령들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는 명령의 수행 가능성, 명령의 의도된 결과나 목적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 아니라 무엇에 근거해 이 명령의 강압/강요Nötigung가 성립하는지 그 근거를 묻는 것이다. 숙련의 명령의 가능성은 "목적을 의욕하는 자는 (이성이 그의 행위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한) 그것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그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수단 또한 의욕한다(IV417 B44)"는 분석명제에서 온다. 칸트에 따르면 결과에 대한 완벽한 의욕은 그 결과를 낳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수단적 행위에 대한 의욕을 제 안에 분석적으로 포함한다.쉽게 말해 목적을 원하는 데서 이미 그것을 위해 필요한 수단을 원함이 포함돼있다.* 그러므로 목적이 명료하게 규정되는 한 숙련의 명령은 관련된 수단을 명령하는 방식으로 구체화될 것이다.

*과연 그런가? 나는 논문자격시험에 합격하기를 바라면서도 공부하고자 하는 의욕은 상실할 수 있을 것이다...

 영리함Klugheit의 명령의 경우, 그것의 목적인 행복에 대해 명확하게 개념화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이 숙련의 명령과 같은 방식으로 확보될 것이다. 그러나 "행복의 개념에 속하는 모든 요소들은 경험적이"기 때문에 "무엇이 진실로 그를[어떤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를 어떤 원칙에 의거하여 해 온전히 확실하게 규정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흔히 건강이 행복 자체이거나 행복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라고 말하지만, 무제한적인 건강은 무절제한 삶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에 과연 건강이 필연적으로 행복으로 귀결되는지는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따라서 주관은 행복을 의도하기는 하지만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의욕하는지 모른다. 그는 "경험적인 충고에 따라서만 행위할 수 있을 뿐" 법칙적인 지시명령에 따라, 즉 어떤 행위들을 행복을 위해서 어떤 경우에서도 반드시 실천해야만 하는 객관적 필연성을 지닌 것들로 표상하면서 실천할 수는 없다. 행복에 대한 명령이 불가능한 이유는 "행복은 이성의 이상이 아니라, 상상력의 이상"이기 때문이다.(IV418 B46-47)

 정언명령의 가능성은 경험적으로가 아니라 선험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의지가 아무런 가언적인 영향 없이 오직 정언명령에 따라 행동했는지 아닌지는 경험적으로 판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언명령은 선험적 종합적 실천명제(Maxim als gesetzmässiger Inhalt + Gesetz als Formel)이기 때문에 그 명령의 가능성을 분석적으로 도출할 수 없다. 다만 칸트는 "정언명령의 순전한 개념이, 그것만이 정언명령일 수 있는 그런 명제를 함유하는, 그 명령의 정식도 제공"하리라 예상한다.(IV420 B51) 다시 말해 정언명령이 정언명령이려면 반드시 만족해야 할 정식을 정식화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보자는 것이다. 명령이란 객관적인 법칙과, 저마다의 정황 하에서 행위하는 주관적 원리인 준칙이 그 법칙에 적합해야 한다는 필연성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정언명령의 경우 객관적인 법칙을 제한하는 조건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남는 것은 주관적인 준칙이 어떤 무조건적인 법칙에 합치해야 한다는 점뿐이다. 이러한 합치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주관적인 준칙이 곧 그 무조건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정언명령의 정식이란 "그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해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오직 그런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handle nur nach derjenigen Maxime, durch die du zugleich wollen kannst, daß sie ein allgemeines Gesetz werde.)"는 것이 된다.* 칸트에 따르면 법칙의 보편성이 사물들의 현존인 자연을 형성하므로 이 정식은 "마치 너의 행위의 준칙이 너의 의지에 의해 보편적 자연법칙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행위하라(handle so, als ob die Maxime deiner Handlung durch deinen Willen zum allgemeinen Naturgesetze werden sollte.)"는 정식과 동일하다.(IV421 B52, 강조는 원저자)**

*의욕의 계기는 어디서 도출되는가? 이 논증은 빈틈이 없는게 맞는가? 이행남 선생님: 준칙이 보편화 테스트를 통과해야 할 필요성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그 준칙이 법칙이 되도록 바랄 수 있는 그런 준칙만 허용된다는 새로운 step이 추가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의욕의 계기가 들어감으로써 철저한 형식주의적 기획은 무너진다.

**두 정식은 정말 같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