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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프레더릭 바이저,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초기 독일낭만주의 연구)> 2, 7, 8장 요약

프레더릭 바이저, 김주휘 옮김, ⟪낭만주의의 명령, 세계를 낭만화하라(초기 독일낭만주의 연구)⟫, 그린비, 2011

 이 책에 실린 지성사적 에세이들에서 바이저는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에 대한 오랜 해석적 전통과 선입견들을 뒤집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독일의 초기 낭만주의는 문예비평운동으로 제한돼있지 않았으며, 유미주의 운동은 더더욱 아니었다. 슐레겔, 셸링, 노발리스, 슐라이어마허 등의 낭만주의자들은 (칸트를 위시한 일부 근대 사상들에서 분열됐던) 이성과 감성, 개인과 타인, 개인과 자연, 나아가 개인과 국가 사이의 재통합을 꾀했으며, 아름다움을 진선미 가운데서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것도 이러한 윤리적, 정치적 이상에 미가 봉사하는 한에서였다. 그들은 "개인성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면서도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근본적인 도덕법칙 혹은 자연법칙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결코 멈추지 않"(21)음으로써 플라톤주의와 깊은 친화력을 보인다. 이처럼 바이저는 낭만주의자들이 진리의 절대적인 토대나 제일 원리의 존재를 부정하면서도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고자, 체계의 완결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면서도 '체계적 정신'만큼은 유지하고자 무한히 노력했음을 반복적으로 지적하면서 그들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이해를 거부한다. 표면적인 유사성이 발견될 수는 있으나, 낭만주의자들의 역사적 개별성에 대한 이해와 시대적 맥락에 적합한 '성격규정Charakteristik'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2장 "초기 독일낭만주의의 성격"은 이와 같은 슐레겔적 성격규정에의 시도이다. 바이저에 따르면 "초기낭만주의의 성격은 세 가지 기본 테제로 이루어진다."(59) 첫째는 그들의 꿈이 문학적, 비평적인 것보다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에 놓여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와 같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이상이 개인의 자기통일, 타인과의 통일, 자연과의 통일을 꿈꿨다는 것이며, 셋째는 그들이 "근대 시민사회의 분열적 경향에 맞서 전체성wholeness을 재확인하고자" 하면서도 "자유와 이성 그리고 진보와 같은 근대의 여러 근본 가치들을 보존하려"(61) 했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문화' 또는 '자기실현'으로 번역될 수 있는 'Bildung'을 최고선의 원천으로 정의하면서 감정/욕망/즐거움과 의무의 실행/덕의 계발 사이의 통합적이고 균형적인 도야를 이상화했다. 이들에 따르면 칸트의 윤리학은 "모든 이들이 완전히 유사해져서 결국 한 사람이 되는 것이 도덕적 이상"이 되는 지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65) 그렇다고 해서 낭만주의자들이 질풍노도 운동의 주도자들처럼 "감정의 권리를 옹호하는 전투"에 매진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성과 감성의 대등한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질풍노도의 감성과 계몽의 이성주의를 모두 교정"하고자 했다.(67) 이를 위해 일반적인 문화적 규범과 전통으로부터의 자유, 나아가 사랑을 통한 인간성 실현 및 자기실현을 강조했다.

 낭만주의자들은 욕망의 억압과 노동 분업, 전통적 공동체의 쇠퇴와 경쟁적 시장의 부상, 근대 기술의 성장과 기계론적 물리학으로 인해 발생한 근대의 소외현상들을 처음으로 지적하며 "자아가 지금 자신에게 반대되는 것으로 보이는 어떤 것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곤경을" 탁월하게 기술했다.(70, cf.헤겔의 '불행한 의식')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낭만주의자들은 성향에 따라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아름다운 영혼', 유기체적인 공동체와 국가의 이상, 유기체적인 자연 개념을 제시한다. 바이저는 낭만주의자들이 "개인성과 비판적 합리성, 자유를 전체론적 이상 안에서 보존"하고자 했으며 "소속감과 정체성, 안정의 원천인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와 국가를 형성하면서 개인의 권리도 확보"하고자 했던 한에서, "헤겔은 단지 전형적인 한 명의 낭만주의자였을 뿐이"라고 말한다.(74, 강조는 필자)

 낭만주의자들은 또한 사회계약론이 내세운 "자족적인 개인의 관념이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추상"에 불과하며, "사회적 전체를 떠났을 때 개인은 도덕적 원리나 숙고의 능력은 고사하고 자기-이익조차 갖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들은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만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지만 그 공동체는 시민의 자유와 자율적 참여,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역사적 발전과 전통"을 통해 유지되고 구조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82-3, 강조는 필자) 권위의 다원성을 보장함으로써 전체주의의 위험을 최소화하고자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미학의 영역에서는, "미를 바로 도덕적, 정치적 가치의 시금석, 징표 혹은 기준으로 만들"되 특정한 도덕적, 정치적 내용에 굴복시키지는 않았다.(88) "실러에 따르면 미의 본질은 자유의 외양에 있다. [...] 그렇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은 정확하게 그것이 특정한 도덕적 목적을 위해 이용되지 않을 때에 가장 큰 도덕적 의미를 갖는다."(90)

 7장 "프리드리히 슐레겔: 신비로운 낭만주의자"에서는 슐레겔이 1790년대 후반, 신고전주의자에서 낭만주의자로의 전회를 꾀한 것은--이렇게 말함으로써 바이저는 슐레겔에게 사상적 전환이 없었다는 해석의 조류를 비판한다--괴테나 실러의 영향이 아닌 피히테의 토대주의에 대한 반대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슐레겔은 반토대주의적 인식론을 펼치면서 <진리의 제일 원리가 존재하며, 그로부터 다른 모든 진리들이 연역될 수 있다>는 이성주의를 회의한다. 어떤 명제도 증명을 요구하지 않을 수는 없으며,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무한해 증명이 완결될 수 없고, 어떠한 증명도 언제든 비판에 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모든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하게 주어진 것', 즉 감각자료의 확실성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에 따라 "슐레겔에게서 체계의 이상은 우리가 다가가야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으로서 순수하게 규제적인 지위를 갖는다." 남는 것은 체계를 향한 무한히 "지속적인 노력"이다.(229, 강조는 원저자)

 마지막 절에서 바이저는 슐레겔의 아이러니 개념을 정리하고자 시도한다.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찾기 위해 무한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아이러니의 근간에 놓여있는 인식이다. 진리를 인식하려는 아이러니스트는 두 종류의 곤경에 부딪힌다. 첫째는 무조건적 진리에 대한 규정은 그것을 조건화한다는 곤경이고, 둘째는 관점과 개념의 부분성, 불완전성으로 인해 완전한 소통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접근하려 하는 한 완전한 소통이 필요하다는 곤경이다.(233-4) 이에 아이러니스트는 "자기-창조와 자기-파괴의 상호교환", 즉 철학적 창조와 비판 사이의 끝없이 새로운 동요로 응수한다.(235)

 8장 "낭만주의 형이상학의 역설"은 자아를 절대화했으나, 주객동일성의 원리를 제창해낸 피히테의 관념론과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갔으나, 대상(비-자아)의 초월성을 그 자체로 긍정했던 스피노자의 실재론을 결합하고자 한 낭만주의자들의 시도를 묘사한다. 피히테와 스피노자는 주체에게서 독립적인 외부 실재의 존재, 인간의 자유, 절대자의 규정에 있어서 양립 불가능한 주장들을 전개했다. 하지만 낭만주의자들은 이들 각각의 이론적 강점을 유기체적 자연 개념 하에 통합하고자 했다. 셸링이 주도적으로 개념화한 유기체적 자연 개념에 따르면 "정신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사이에[는] 종의 구별이 아니라 [생명의 조직화 수준에 따른] 정도의 구별만이 존재"하게 된다.(250) 말하자면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이 생명력의 현현 정도에 따라 물질과 정신, 비유기체적인 것과 유기체적인 것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대한 라이프니츠적 해석'으로 이해되는 이러한 생기론적 일원론은 정신의 생명력을 긍정하지만 주체에 의한 객체 인식은 충분히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하는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문제, 나아가 자연법칙의 권위를 보증하지만 원거리작용은 설명하지 못하는 기계론적 물리학의 문제를 보완하게 해준다.

 이때 스피노자를 수용함으로써 다시금 숙명론으로 회귀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 낭만주의자들은 자유의 재정의로써 응수한다. 자유는 본성의 준수로, 전체와의 통일로 재정의됨으로써 필연성과 화해한다. "참된 자유는 나의 모든 행동에서 신적인 것이 나를 통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함으로써 신적 필연성을 공유하거나 그것에 참여하는 데에서 나온다."(270, cf.스토아주의/베르그송) 나아가 인간, 특히 철학자와 예술가의 인식은 자연의 목적의 달성이자 최고의 표현이기 때문에 자아와 자연은 서로의 자기실현의 수단과 목적이 된다. 자연은 더 이상 자아에게 외부적인 것이 아니되, 맹아적이고 잠재적인 것으로서는 자아에게서 독립적으로 실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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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겔의 <법철학>과 관련된 수업을 들으면서 헤겔이 한때 그에 공감했던, 그러나 그로부터 언젠가 단절하고자 한 낭만주의 전통에 대해 알고 싶어져 훑어보게 된 책이었는데, 개인적으로 큰 수확이 두 개나 있었다. 첫째는 낭만주의자들과 헤겔 사이의 거리가 (어쩌면 헤겔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가까울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고, 둘째는 내 연구의 범위를 특정한 시대로 국한시켜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현상학사 일반'을 연구하겠다는, 처참할 정도로 두루뭉술한 다짐은 접고 <존재와 시간>의 출간부터 <지각의 현상학>의 출간 사이로 범위를 좁혀야겠다. 그렇다고 해서 지성사가가 되겠다는 건 아닌데, 음... 대륙철학을 공부하면서 완전한 철학사가와 완전한 철학자 사이에 적절한 포지션을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이분법이 애초에 그릇된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