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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법철학> §131-156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법철학> §131-156을 '양심(Gewissen)' 개념을 중심으로 갈무리한 글. 표지 사진은 임석진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법철학(한길사, 2008)>이다.)

 

인륜성 하에서 참된 양심이 수행하는 역할

-위선의 방지를 중심으로-

1. 서론

 주관이 양심에 따라 도덕적 결정을 내리며 내려야 한다는 것은 헤겔의 체계 내에서 ‘도덕성’에 해당하는 윤리적 패러다임의 핵심 주장 중 하나다. 헤겔은 도덕성 일반에 비판을 가하면서 도덕성이 그 한계들로 인해 새로운 윤리적 패러다임인 ‘인륜성’으로 이행한다고 설명하는데, 이 이행은 양심의 개념에도 물론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이 변화를 어떻게 독해할 것인가의 문제는 비단 양심이라는 하나의 주제뿐 아니라 헤겔의 윤리학적 기획 전체에 대한 해석적 딜레마를 건드리게 된다. 인륜성 하에서 양심 일반이 소실된다고 독해할 경우, 헤겔은 지독한 보수주의자로 전락한다. 그러나 인륜성 하에서 양심이 특정한 형태로 살아있다고 독해할 경우, 근본적으로 주관의 자유로운 자기규정과 결부되는 양심이 어떻게 주관적 선호에 휘둘리지 않는 보편적이고 객관적 규범의 막강한 권위와 조화될 수 있는지 묻게 된다. 어느 뿔을 취하든지 간에 적지 않은 해석적 부담이 있으며, 그래서인지 Moyar는 “헤겔 윤리학의 많은 핵심 문제들은 양심의 권위가 인륜성 하에서 어떻게 보존되며 양심이 인륜성의 내용을 구조화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느냐로 돌려진다”고 말한다.(Moyar (2011), p.13.)

 필자는 헤겔이 양심을 형식적 양심과 참된 양심으로 나눈다는 점에 주목해 인륜성 하에서도 양심이 특정한 형태로 살아있다는 뿔을 취한다. 도덕성 일반에 대한 비판과 함께 비판되는 것은 형식적 양심일 뿐, 양심은 참된 양심으로서 인륜성 하에서 역시 보존된다. 남는 과제는 상술한 문제 설정을 따라 이 보존의 양상과 그렇게 보존된 참된 양심이 인륜성 하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해명이다. 본 글은 이 해명의 가능한 한 가지 방식을 참된 양심이 위선을 방지하는 데 기여함을 중심으로 주장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론에서는 첫째, 형식적 양심과 참된 양심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양심 일반을 정의하고 그 특징을 기술할 것이다(2절). 둘째, 헤겔이 도덕성 하에서의 형식적 양심을 어떻게 정의하며, 그것이 어떤 문제를 안는다고 비판하는지 정리할 것이다(3절). 셋째, 헤겔이 인륜성 하에서의 참된 양심을 어떻게 정의하며, 그것이 어떤 양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하는지를 Moyar와 Jennings의 해석을 중심으로 정리할 것이다(4절). 넷째, 그와 같이 작동하는 참된 양심은 인륜성 하에서 위선을 방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할 것이다(5절). 이를 위해 위선이 인륜성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Brownlee의 주장을 정리한 뒤, 어째서 참된 양심이 위선이라는 치명적인 위험의 방지에 특히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필자의 논증을 제공할 것이다. 논의는 <법철학>에서의 서술로 한정하며, 인용 시 ‘PR’이라는 문구와 인용된 절을 명기할 것이다.

 

2. 양심 일반의 정의

 인륜성 하에서 참된 양심이 어떤 양상으로 작동하며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탐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양심 일반의 정의이다. 이 절에서는 형식적 양심과 참된 양심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양심 일반을 정의하고 그 특징을 기술하고자 한다. 헤겔은 <법철학>의 ‘도덕성’ 장에서 131절과 136절 두 차례에 걸쳐 양심 일반에 대해 서술하는데, 양심 일반에 대한 첫 번째 정의는 131절에서 선이 주관적 의지를 통해 실현되는 과정을 설명함과 더불어 제시된다.

 “다른 한편으로 선(das Gute)은 주관적 의지 자체가 없으면 단지 현실성 없는 추상일 뿐이다. 선은 주관적 의지를 통해서 비로소 현실성을 가지게 된다. 그에 따라 선의 발전은 세 단계를 포함한다. 첫째, 선이 의지하는 자로서의 나에 대해서(für mich) 특수한 의지가 되어야 하며 내가 그 선을 알아야 한다. 둘째, 혹자는[그는](man) 무엇이 선한지를 언명해야 하며, 선의 특수한 규정을 발전시켜야 한다. 셋째, 마침내 선이 그에 대해서(für sich) 규정되어야 하며, 무한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주관성[의 선]으로서 특수성을 가져야 한다. 이 내면적인 규정이 바로 양심이다.”(PR, §131z)

 현실성을 갖추기 위해 선은 먼저 아직은 추상적인 것으로서 주관의 의지와 앎의 대상이 된 뒤, 구체적인 마음가짐이나 행위 등으로 규정되어야 하는데, 이 규정은 그 어떤 내용도 의식할 수 있는 무한한 형식이자, 자기의식 또한 가지는 주관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양심은 주관이 보편적인 선을 상황에 맞게, 그리고 자기 자신의 특수한 선으로 구체화시킬 수 있게 해주는 무언가다. 이는 헤겔에게 있어 양심이 ①주관적 의지가 가지는 선에 대한 ‘규정력’, 즉 규정의 능력이나 역량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헤겔은 양심의 선에 대한 규정력이 ②주관의 내면에서 발휘되는 것이라고 명시한다. 이 내면성의 의미는 다음 절에서 제시되는 외면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선명해진다. 132절에서 헤겔은 행위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행위를 “주관적 의지의 목적(Zweck)이 외면적 객관성[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PR, §132)으로 정의한다. 따라서 양심은 ③행위에 시간적으로든 논리적으로든 선행하는 계기다. 주관의 양심이 내면적으로 선행해서 규정한 바가 사후에 외면으로 표현된 것이 곧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같은 절에서 헤겔이 선은 오직 사유(Denken) 속에서 그리고 사유를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양심의 규정함은 ④일종의 사유하는 작용이다. 이 사유 또는 통찰(Einsehen)은 참될 수도 있지만, 즉 진실과 부합할 수도 있지만 단지 의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선에 대한 양심의 규정은 상술했듯이, 어디까지나 어느 특수한 주관의 내면적 규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식론의 언어를 사용하면 양심은 엄밀히 말해 ⑤오류 불가능한 앎(episteme)이 아니라 오류 가능한 믿음(doxa)으로서의 지위를 가진다.

 ①에서 ⑤까지 제시된 양심의 정의와 특징들은 이어지는 절들, 특히 136절의 보다 상세한 정의에서 유지된다. 133절에서 헤겔은 도덕성의 관점에서 선과 주관적 의지가 맺는 관계를 상술하기 위해 의무의 개념을 도입한다. 도덕성의 관점에서 선은 주관적 의지에게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의무로서만 규정된다. 주관적 의지는 자신이 선을 의무로서, 그것이 의무이기 때문에 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 뿐,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의무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행위가 의무인지, 무엇이 의무인지에 대한 규정은 ‘의무임’이라는 규정 자체로부터는 알려지지 않는다. 의무 자체는 “내용 없는 동일성”, “추상적으로 긍정적인 것, 즉 무규정적인 것”으로 규정돼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 무규정성은 “자기 자신과의 형식적 상응으로서 모순의 부재”를 의무로 정의한 칸트의 의무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헤겔은 칸트의 의무 개념이 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제시하지 못하는 채 공허한 형식주의에 빠지고, 선한 내용과 악한 내용을 구별할 기준을 상실했으며, 심지어는 악한 내용을 의무로 정당화해줄 수 있다고까지 비판한다.(PR, §135)

 양심 일반에 대한 두 번째 정의는 도덕성의 관점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 가운데서 제시된다. 첫 번째 정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양심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선 그리고 의무의 특수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해주는 주관성의 한 모습으로 제시된다.

 “[…]자신 안으로 반성된 자신의 보편성 속에서 주관성은 자신 안의[내면적인],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이고, 특수성을 정립하는 것이며, 규정하고 결정하는 것—[즉] 양심이다.”(PR, §136)

 헤겔은 이렇게 재정의된 양심이 ⑥근대 이전의 관점들보다 “더 상위의 관점”을 대변한다고 덧붙인다. 근대 이전에는 선과 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이 예컨대 종교나 법에 의해 외부로부터 규정되어 주어진 반면, 근대에 와서 주관은 비로소 “자신의 내면으로의 침잠(Untergang)”을 통해 같은 것을 스스로 규정하는 데 이르렀기 때문이다. 근대적 주체의 침잠은 “그 속에서 모든 외부적인 것들과 한계가 사라진, 자기 자신과[만 상대하는] 가장 깊은 내면적 고독(Einsamkeit)” 또는 “자기 자신에게로의 전면적 퇴각(Zurückgezogenheit)”으로도 표현된다. 양심이 이와 같은 ⑦침잠, 고독, 퇴각 속에서만 작동한다는 서술은 양심이 단순히 ②내면에서 발휘된다는 것보다 풍부해지고 강화된 서술이다. 그로써 양심이 그 정의상 타인에 의해 침해되거나 말하자면 도청당할 수 없는 내밀한 목소리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PR, §136) 이 서술은 양심이 주관성이 절대적인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영역임을 시사하기도 한다.

 저 내밀하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목소리는 게다가 ⑧자기 자신에 대해 절대적이고 내면적인 확실성을 가진다.(PR, §136) 객관적으로는 오류 불가능한 믿음을 생산할지언정, 주관적으로는 결코 스스로의 결정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에게 양심은 “그것을 침해하면 신성모독이 되는 어느 성역”이 된다.(PR, §137) 주관 자신이 ‘양심에 따라’ 행위했다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혹시 악을 범하지는 않았을까 스스로를 의심하는 일은 양심의 정의와 모순되므로, 헤겔의 이와 같은 통찰은 매우 직관적이다. 저 의심은 사실상 양심이 선을 규정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일인데, 양심은 정의상 선을 규정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비록 헤겔이 136절을 “양심은 스스로를 사유로 알고, 이 나의 사유만이 나에게 의무를 지우는 것임을 안다”고 말하며 끝맺지만, 양심의 규정력이 단순히 지적인 인식의 능력만 포함하지는 않는다.(PR, §136z) “참된 양심은 즉자대자적으로(an und für sich) 선한 것을 의지하는 심정(Gesinnung)”이라는 이어지는 서술이 보여주듯 양심의 규정은 선의 내용에 대한 지적인 인식뿐만 아니라 ⑨자신이 선이라고 인식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심정적인 이끌림까지 포함한다.(PR, §137) 양심적 규정의 일부로서의 심정은 선하다고 인식된 내용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과 습관화를 가능케 하는데, 헤겔의 윤리학에서 습관은 제2의 자연으로서 내적 자연과 자유 사이의 화해를, 나아가 자유와 의무 사이의 화해를 주도한다. 게다가 심정성은 일반적으로 (만일 그것이 수반된 행위가 윤리적인 행위일 경우) 행위의 윤리적 가치를 더해준다.(원준호 (2002), pp.249-252 참조.) 화룡점정으로 양심이 주관적 의지에게 귀속되는 능력임을 상기하면, 양심은 지, 정, 의의 고전적인 구분을 뛰어넘어 셋 모두의 작용을 요하는 포괄적인 규정력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양심을 서로 분리 가능한 작용들로서 지적인 인식, 심정적인 이끌림, 의지의 발동 중 하나와만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컨대 양심 일반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선과 의무의 특수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해주는 주관성의 능력으로 정의되며, ②에서 ⑨까지의 특징을 가진다. 양심 일반에 대한 이상의 정의에서 본 글의 논지 전개를 위해 다시금 특별히 강조해야 하는 특징은 양심의 ⑦내밀성과 ⑨심정성이다. 양심은 정의상 내밀한 것이기 때문에, 거짓 없이 표현되지 않는 이상 양심의 주체가 아닌 다른 주체는 알 수 없는 종류의 믿음을 생산한다. 나아가 양심은 사유하는 작용이기는 하지만, 선에 대한 인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선에 대한 심정까지 수반한다.

 

3. 도덕성 하에서의 형식적 양심 

 양심 일반의 개념을 도입한 뒤 헤겔은 양심을 그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고, 내용의 출처에 따라서 인륜성 하에서의 참된 양심과 도덕성 하에서의 형식적 양심을 나눈다. 이때 인륜성 하에서의 참된 양심은 도덕성 하에서의 형식적 양심을 비판하고 극복한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3절에서는 형식적 양심이 무엇이고,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형식적 양심에 대해 무엇이 비판되고 극복되는지 알고자 한다.

 137절에서 헤겔은 양심의 내용과 형식 사이의 구분을 도입한다. 양심의 내용이란 문자 그대로 양심이 선이라고 규정한 무언가를 가리키고, 양심의 형식이란 해당 내용에 대해 주관적 의지가 가지는 확실한 믿음을 가리킨다. 이 절에서 헤겔은 “단지 [형식적 양심과] 그것의 차이를 지시하고, 마치 여기, 형식적 양심만이 고찰되고 있는 곳에서 참된 양심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가능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만 잠시 참된 양심을 언급한다. 헤겔에 따르면 참된 양심은 내용으로서 “참[진실](Wahrheit)”을, 즉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고정된 원리와 의무들의 체계로서 “즉자대자적으로 선한 것”을 취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참은 인륜성 하에서만 비로소 제도와 관습을 통해 알려지는 것이다. 이로부터 헤겔은 도덕성 하에서의 형식적 양심은 참된 것을 알지 못하거나, 참된 것보다 우월한 것이 있다고 잘못 믿기 때문에 내용으로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을 취하지 못한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형식적 양심이란 참된 양심과 대비되어 자신의 내용으로서 상술한 진실을 취하지 못하고, 자신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체계로부터가 아니라 순전히 주관적인 반성을 거쳐) 취한 내용의 타당성을 오직 자신의 확실성의 형식에 의존해 주장하는 양심으로 정의된다.

 형식적 양심에 대한 정의로부터 그것이 안고 있는 두 가지 문제점이 드러난다. 첫 번째 문제점은 형식적 양심이 순전히 주관적인 반성을 거쳐 선이라고 믿고 있는 특수한 내용은 그 참됨이 무엇으로도 보장될 수 없다는 점이다. 형식적 양심의 주체가 가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한 형식적 확실성”만으로는 그가 선이라고 믿고 있는 내용이 실제로, 즉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선한지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PR, §137) 사정이 이러하다면, 형식적 양심이 선의 내용이라고 내놓는 규정은 그 참됨이 순전히 우연하다는 의미에서 연약하며, 자의적이고, 따라서 구제할 길 없이 오류 가능한 의견에 불과하다. 물론 인륜성 하에서의 참된 양심 역시 양심 일반의 특징 ⑤에 따라 오류 가능한 의견이고, 주관적인 반성을 통해 타당한 내용에 이르고자 한다. 하지만 참된 양심의 주체는 그 반성의 전제가 되어줄 뿐 아니라 반성 결과의 참됨을 보장해줄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토대와 기준 그리고 규정들을 자신이 속한 인륜적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인륜적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개념이 육화된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양심이 선의 내용이라고 내놓는 규정의 오류 가능성은 현저히 제한된다. 반면 도덕성 하에서 형식적 양심의 주체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정들에 대한 신뢰도 참조도 없이 저 홀로 고립되어 선의 내용을 규정하고자 한다.

 “추상적인 자기규정이자 오직 자기 자신에 대한 순수한 확실성으로서의 이 주관성은 옳음, 의무, 그리고 현존에 대한 모든 규정성을 똑같이 자신 속으로 휘발시킨다. 이 주관성은 그[렇게 휘발시키는] 만큼 어느 내용에 대해서 무엇이 선한지를 오직 자신으로부터 규정하는, 판단하는 힘이자 동시에, 우선은 그저 표상되고 그의 당위인 선(sollende Gute)이 그 덕분에 현실성[을 갖게 되는] 힘이다.”(PR, §138, 강조는 필자)

 이 고립이 곧 형식적 양심이 안고 있는 두 번째 문제점이다. 두 번째 문제점은 첫 번째 문제점보다 포괄적이고 심각하다. 첫 번째 문제점만을 고려한다면, 만일 형식적 양심이 순전히 주관적인 반성을 거쳐 선이라고 규정한 내용이 우연히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내용과 일치할 경우엔 형식적 양심이 그의 한계로부터 해방되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 어딘가에 도덕의 천재가 있어서, 그는 혼자서도 모든 윤리적 문제의 소위 정답을 맞출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적어도 그에게는 형식적 양심에 따라 사는 것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을 따라 사는 것과 결과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이 같은 사례는 그 가능성만으로도 형식적 양심에 대한 헤겔의 비판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헤겔이 도덕성 하에서의 형식적 양심에 대해 궁극적으로 비판하는 점은 형식적 양심이 결과적으로 취한 내용의 높은 오류 가능성이 아니라 그가 내용을 취하는 ‘과정상의’ 고립이다.

 두 번째 문제점이 어째서 첫 번째 문제점보다 심각한지 설명하는 데는 저 고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따지는 일이 도움이 된다. 고립을 이루는 첫 번째 단계는 앞서 인용한, 저 압도적으로 자유로운 ‘휘발(Verflüchtigen)’이다. 헤겔은 138절의 추록에서 휘발의 의미를 구체화한다. 주체의 휘발이란 오직 생각(Gedanken)만으로 (절대적이어야 할) 선과 의무의 가능한 후보들을 전면적으로 상대화시키는 작업을 의미한다. 그런데 주체가 기존의 규정들에 대한 전면적인 상대화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행위로 나아가려면 행위의 내용이 되어줄 특정한 규정을 다시금 내려야 할 것이다. 비유적으로 말해, 주어져있던 모든 것을 지워버린 후 남은 백지에 새로운 규정을 적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덕성의 관점에서는 이 새로운 규정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개념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고립된 판단에 따르기 때문에, 규정이 자의(Willkür)에 의해 도출되고 만다.

 “다른 경우에는 효력을 가질 모든 규정들의 공허해짐(Eitelkeit) 속에서 그리고 의지의 순수한 내면성 속에서 자기의식은 즉자대자적으로 보편적인 것[을 원리로 만드는] 만큼이나 자의, 고유한 특수성을 보편적인 것의 우위에 두어 원리로 만들 수 있고 [그] 자의를 행위로 실현할 수 있다—즉 악해질 수 있다.”(PR, §139)

 이처럼 자의 또는 자신의 고유한 특수성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보다 우위에 두고 선의 출처로서 전자를 택하는 형식적 양심은 악이다. 악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헤겔은 욕구와 욕망, 경향성과 같은 자연적 의지가 그 자체로 나쁜 것도 아니고, 내면적인 반성 역시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지만 내면적인 반성을 거쳐서도 자연적 의지를 행위의 내용으로 삼는 것은 악이라고 지적한다. 헤겔은 이 때문에 도덕성의 관점이 “악의 필연성이라는 면모(Seite der Notwendigkeit des Bösen)”를 가진다고 일갈하는데, 이 결론은 일견 비약으로 보임에도 설득력이 있다.(PR, §139) 앞서, 형식적 양심의 주체는 인륜적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의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선의 규정들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인정하지 않고, 외부의 토대로부터 부유해 오직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선의 규정을 찾고자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경우에 가능한 규정의 출처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가장 초월하고자 했을) 개인적인 욕구와 욕망, 경향성과 같은 자연적 의지다. 따라서 형식적 양심의 주체는 모든 행위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스스로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간에 “의지의 보편성에 대립해” 자신의 특수한 자연적 의지를 충족하고 있을 뿐이다.(PR, §139z) 그러므로 위 지적에 따라 도덕성의 주체는 필연적으로 악을 행하게 된다.

 이제 ‘도덕성’ 장의 마지막 절인 140절에서는 이처럼 형식적 양심의 주체가 행할 수밖에 없는 악이 여러 형태들로 나뉘어 분석된다. 악은 선의 참된 보편성과 객관성을 무시하고 망각할수록, 형식적 양심의 주체가 가지는 특수할 뿐인 규정력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기준으로 (잘못) 절대화시킬수록 그 심각성을 더한다. ‘내가 그렇게 규정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선한 것’이라는 선언이야말로 극단적인 자의일 뿐 아니라 선악을 흡사 주관의 사적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오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오만은 타자와 공동체에 대한 존중의 부재 그리고 도덕적 우월의식을 함의한다. 헤겔의 철학 체계에서 자기의식으로서의 주관성이 오직 타자와의 평등한 상호인정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음을 상기하면, 그가 이 오만을 얼마나 큰 문제로 받아들였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성창기의 다음 서술은 이와 같은 문제를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이러한[형식적] 양심이 잘못된 양심인 이유는 주체가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오직 자신의 확신과 통찰에만 의존하면서 자신을 선에 대한 최종적 결정권자로 간주한다는 사실에 있다. 헤겔은 여기서 과도하게 개인주의적인 형태의 과장된 자립성과 도덕적 오만을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참된 양심을 제시한다. 참된 양심은 선에 대한 판단에 있어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다른 도덕적 주체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형태의 양심이다.”(성창기 (2014), p.93.)

 요컨대 도덕성 하에서의 형식적 양심은 그 고립된 성격으로 인해 악을 낳는다. 이것이 형식적 양심에 대한 헤겔의 비판의 요체이자, 인륜성 하에서의 참된 양심이 극복해야 하는 문제다.

 

4. 인륜성 하에서의 참된 양심 

 4절에서는 도덕성 하에서의 형식적 양심을 극복한 인륜성 하에서의 참된 양심을 헤겔이 어떻게 정의하며, 그것이 어떤 양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하는지를 Moyar(2011)와 Jennings(2014)의 해석을 중심으로 정리할 것이다. 두 사람의 해석이 기존의 논의들을 충분히 소화해낸 가장 최근의 연구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형식적 양심의 주체는 오직 내면으로부터 규정해낸 특수한 선의 내용에 대해서 무한한 확실성을 보임으로써 자의와 오만에 빠진다고 비판했다. 참된 양심의 주체는 형식적 양심의 주체와 마찬가지로 내면적 반성을 거쳐 선의 내용을 규정하며, 자신이 규정한 내용에 대해 무한한 확실성을 보인다. 참된 양심 역시 양심의 일종으로서 양심의 형식성과 주관성, 특수성의 계기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형식적 양심은 전면적으로 비판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가 참된 양심 안에 보존된다. 그러나 참된 양심이 형식적 양심과 같은 악의 수렁에 빠지지 않는 이유는 저 자유로운 규정의 과정에서 양심의 주체가 인륜적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을 규정의 토대와 기준으로서 신뢰하며, 그것들을 내면화하고, 그것들에 육화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을 양심의 내용으로 취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이 “참된 양심은 즉자대자적으로 선한 것을 의지하는 심정”으로 정의하며, 특수한 주관의 자의에 휘둘리기보다 모두에게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고정된 원리들을” 가진다고 소개한 것이다.(PR, §137)

 이 정의에 따라 참된 양심은 인륜성의 관점에서만 현존할 수 있는 “이 [고정된] 원리들과 의무들의 객관적 체계와 주관적 앎 사이의 통일”(PR, §137)이다. 형식적 양심의 주체는 자신의 도덕적 권위만을 절대화함으로 인해 전자에 대한 인정이, 따라서 이 통일이 결여되어있다. 헤겔에게 있어 이 통일은 단순히 참된 양심의 개념을 부연해주는 서술이 아니라 인륜성 일반을 특징짓는다. “[…] 선과 주관적 의지 사이의 구체적인 동일성, 둘 모두의 참[진실], [이것]이 인륜성이다.”(PR, §141) 인용된 구체성을 양심의 개념과 관련해 풀이하면, 형식적 양심의 주체는 (내용이 텅 비어있어 자의에 의해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있는) 추상적인 선을 추구하는 반면 참된 양심의 주체는 (제도와 관습을 따르는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생동하는 선”을 추구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PR, §142) <법철학>의 ‘인륜성’ 장에서 참된 양심에 대한 설명이 거의 부재함에도 불구하고 참된 양심은 결코 사소하거나 부차적인 개념이 아니다.

 인륜성 하에서 참된 양심의 개념이 차지하는 중요한 지위는 인륜성의 객관성의 계기가 참된 양심의 내용에, 주관성의 계기가 참된 양심의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상응한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한편으로 인륜성을 객체로 바라보면 그것은 인륜적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이다. “추상적 선의 자리에 [대신] 들어서는 객관적인 인륜적인 것은 […] 주관적인 의견과 선호보다 고양되어 존립하는 것, 즉자대자적으로 존재하는 법들과 제도들이다.”(PR, §144) 이 법과 제도가 개인들의 “보편적인 행위 양식”이 된 것이 관습(Sitte)이다.(PR, §151) 그리고 앞서 참된 양심은 이러한 제도와 관습을 자신의 내용으로 삼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른 한편으로 인륜성을 주체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제도와 관습들은 “주관들의 고유한 본질”로서 “그 안에서 주관은 자기다움(Selbstgefühl)을 느끼고” 그와 같은 내면화를 통해 제도 및 관습들과 “믿음과 신뢰보다도 직접적인 동일성의 관계”를 맺는다.(PR, §147) 이때 양심이 인식과 의지뿐 아니라 심정을 동반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인륜성 하에서 참된 양심의 주체는 인륜성의 현실을 위반할 때 자기다움을 상실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상술한 참된 양심의 정의와, 그것이 형식적 양심을 어떻게 보존하면서도 극복하는지에 대한 서술은 어딘지 불충분하다는 인상과 함께 다음의 두 가지 의문을 남긴다. 첫째, 사정이 저러하다면 일부 연구자들은 어째서 인륜성 하에서 양심 일반이 소실된다고 독해한 것일까? 둘째, 필자의 입장에 따라 인륜성 하에서 양심 일반이 소실되는 것이 아니라면, 저 참된 양심이 인륜적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에 대한 단순한 순응 이상이 될 수 있는가? 양심의 주체가 아무리 주관적인 반성을 거치고 자기규정의 권리를 누린다 한들, 인륜적 공동체의 제도와 관습의 규정을 자신의 내용으로 취하는 오직 그 경우에만 참된 양심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면, 저 반성과 자기규정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것인가? ‘참된 양심의 주체’란 당장 실재하는 공동체의 위력에 굴복한 개인들에게 마치 보상인 양 주어지는 기만적인 칭호가 아닌가?

 먼저 첫 번째 의문에 답하자면, 인륜성 하에서 양심 일반이 소실된다고 독해할 만한 근거가 전무하지는 않다. 다음의 인용문은 필자의 입장에 가히 위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륜적 실체성은 이 방식으로[개별자들의 습관이자 제2의 자연이 됨으로써] 자신의 권리에 이르고 권리는 자신의 효력에 이른다. 실체성 속에서 말하자면, 자신에 대해서만 존재하고(für sich wäre) 인륜적 실체성과 대립할 개별자들의 고유의지와 저마다의 양심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인륜적인 성격[을 가진 개별자]는 부동의 것, 허나 제 규정들 속에서 현실적인 이성으로 전개되는 보편적인 것을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동기화하는] 목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존엄성 그리고 특수한 목적들의 모든 존립이 저 부동의 것 속에 근거를 가진다고 인식하고 실제로 그 부동의 것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PR, §152, 강조는 필자)

 그러나 필자는 위 인용문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양심이 도덕성 하에서의 형식적 양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에 대해서만 존재하고 인륜적 실체성과 대립”한다는 서술은 자신의 사유만을 선의 출처로 알고, 자신 바깥의 타인과 공동체로부터 스스로를 구분 짓고 고립시킨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륜성 하에서는 양심 일반이 아닌 형식적 양심만이 사라지며 개별적인 참된 양심의 주체들은 인륜성을 비로소 실현시키는, 사회의 질서와 진보에 이바지하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인륜성이 자유의 이념”(PR, §142)일 때, 개별적 주관성은 저 자유의 개념이 현존할 수 있게 해주는 “기초(Boden)” 그 자체다.(PR, §152)

 두 번째 의문은 다음의 의문으로 보다 건설적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순응’의 자유는 결코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고 할 때, 참된 양심은 인륜성 하에서 대체 어떤 종류의 자유를 누린다는 것인가? 나아가 참된 양심은 어떤 양상으로 작동하기에 자유로운가?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서 필자가 동의하는 해석은 Moyar(2011)와 Jennings(2014)의 해석이다. 두 해석을 정리하고 공통점을 도출해내는 작업은 인륜성 하에서 참된 양심이 수행하는 역할을 탐구하고자 하는 본 글의 목표에 더없이 부합한다.

 (i) 먼저 Moyar(2011)는 윤리적 행위(ethical action), 즉 헤겔에게 있어 선의 구체적인 실천이 ‘이유들의 동일성 조건의 복잡한 버전(Complex Reasons Identity Condition, CRIC)’을 만족시킨다고 개념화한다.(Moyar가 처음으로 제시한 선한 행위의 조건은 단순한 ‘이유들의 동일성 조건(Reasons Identity Condition, RIC)’이었다. 이 조건은 행위자를 동기화하는 주관적 이유들이 행위를 정당화하는 객관적 이유들과 완벽하게 일치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Moyar는 <정신현상학>의 ‘양심의 경험’에 대한 논의를 주해하며 RIC의 두 가지 결함을 지적한다. RIC는 첫째, 1인칭의 관점에서 선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주관들의 인식론적 한계에 의해 원천적으로 만족될 수 없다. 자신의 특수한 동기들이 반영된 행위가 완벽하게 선의 보편적인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선이다. 둘째, RIC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객관적 이유를 지나치게 강조할 수 있으며, 이는 주관이 자신의 특수한 동기에 따라 행위하는 것을 (행위자를 동기화하는 주관적 이유로 인정해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선에 대한 위반으로 잘못 간주한다. 이에 따라 Moyar는 주관이 수행할 수 없는 인식론적 과제를 부과하지 않고, 행위자를 동기화하는 주관적 이유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해줄 수 있는 방식으로 조건을 수정한다. 이 수정의 결과가 바로 CRIC이다. Moyar (2011) p.45 및 pp.69-74.) CRIC를 만족시키는 선한 행위는 “행위자를 동기화하는 이유들(motivating reasons)이,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유들(justifying reasons)을 제공할 수 있는 보다 광범위한 목적들(purposes) 속에 품어질 수 있는 목적들로부터 기원”하는 행위이다.(Ibid., p.74.) 여기서 ‘행위자를 동기화하는 이유들’은 개인의 믿음과 같은 주관성과 특수성의 계기를,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유들’은 인륜적 제도 또는 관습과 같은 객관성과 보편성의 계기를 가리킨다.(이에 따라 헤겔의 도덕성 비판은 의무를 규정함에 있어 개인의 신념이 무엇인지, 그가 무엇을 선하다고 믿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비판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과 같은 주관성과 특수성의 계기가 객관성과 보편성의 계기로부터 단절되는 데 대한 비판이다. 형식적 양심은 무엇이 의무인지 규정함에 있어 개인의 믿음에 배타적으로 모든 권한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확립된 관습이나 타인들이 가지는 목적들은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객관성과 보편성의 계기로부터 유리된다. 헤겔의 도덕성 비판에 대한 Moyar의 해석이 지니는 이점은 주관성과 특수성의 계기에 의해 매개되지 않은, 제도와 관습에 대한 단적인 순응 역시 ‘단절’로 개념화해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순응은 전체로부터 주관성과 특수성의 계기를 유리시키기 때문이다. Moyar는 개인의 믿음이 가지는 권한 역시 충분히 인정해야만 개인이 행위에 책임을 질 수 있고, 타인이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에 대해 물어올 때 그에게 적절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제 인륜성 하에서 양심 일반이 소실된다는 주장과, 개인의 자유는 단적으로 순응할 (부)자유밖에 남지 않는다는 주장은 동시에 반박된다. Ibid., p.87 및 p.106.) 이때 참된 양심은 주관성과 특수성의 계기뿐 아니라 객관성과 보편성의 계기까지 전체론적으로(holistically) 고려하며 작동한다.

 필자는 Moyar가 주장하는 참된 양심의 작동 양상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참된 양심은 인륜적인 제도와 관습의 목적을 제 목적의 기원으로 삼으면서,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의무인지를 스스로 규정하는 실천이성의 능력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이 의무인지를 규정해야 하는 모든 경우에 반드시 별도의 숙고(deliberation)가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경우를 숙고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야말로 사사건건 불필요한 윤리적 딜레마를 발명해낼 수 있는 도덕성의 관점이 지닌 해악이며, 많은 경우 상황 자체가 무엇이 의무인지를 지시해주곤 한다. 이때 참된 양심은 지시된 의무에 대한 단적인 승인 또는 동의의 역할만을 안지 않는다. 참된 양심은 인륜적인 제도와 관습이 지시하는 의무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특정한 행위로 구체화시켜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Moyar는 이 구체적인 실천들이 “수행적 자유(performative freedom)”를 함유한다고 말한다.(Ibid., p.110.)

 한편 인륜적인 제도와 관습 하에서도 윤리적 딜레마가 생길 수 있으며, 그에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도덕적 숙고를 요하는 예외적인 상황들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상황들에서 참된 양심은 무엇이 의무인지를 전체론적으로, 칸트 식의 추상적 원리가 아닌 구체적 맥락들에 근거해 판단한다. 참된 양심은 이 판단을 위해 첫째, 서로 상충하는 의무와 선들을 비교하고 평가하며, 둘째, 자신의 이익과 선의 보편적 요구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고 전자보다 후자를 우선시할 준비가 되어있다.(Ibid., p.134.)

 그러므로 필자는 Moyar의 독법을 따를 경우, 참된 양심의 주체는 주관성과 객관성을 모두 고려하라는 전체론의 정당한 제약 하에서 무한한 구체화의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헤겔의 참된 양심은 (윤리적 딜레마가 있든 없든) 주관의 특수한 이익과 가치관을 결코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선의 보편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을 찾아 실천하고자 하는 자유로운 실천이성의 능력이다. “보편적 규범들은 직접적으로 행위를 규정하지 않으며, 행위자들 자신이 특수한 권리들을 실천함과 더불어서만 그렇게 할 수 있다.”(Ibid., p.173.)

(ii) Jennings(2014)는 참된 양심이 선을 육화한 목적들을 가지는 인륜적 제도와 관습 하에서 ‘(수단적) 실천의 구체화’라는 역할을 떠맡는다는 Moyar의 해석적 테제에 전반적으로 동조한다. 그러나 Jennings는 실재하는 인륜적 제도와 관습이 지니는 불완전성에 주목하면서, 참된 양심의 실천이 인륜성의 불완전한 실재를 인륜성의 완전한 이념—또는, 오해를 사기 쉽지만 헤겔의 언어로는 ‘현실’—에 부합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구체화의 기준으로 삼는다.

 필자는 Jennings가 주장하는 참된 양심의 작동 양상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참된 양심의 주체는 형식적 양심의 주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따라야 할 의무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관적으로 반성할 권리와 자유로운 규정력을 소유한다. 하지만 그는 인륜적 공동체, 특히 국가에 육화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규정들이 자신의 주관적이고 특수한 이익들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본다. 국가가 그 합리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자유와 복지(well-being)를 보장해주리라고 신뢰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참된 양심의 주체는 국가에 육화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규정을 자발적으로 따르리라는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인륜적 의지는 의무들을 창조해내기보다 그것들이 이미 인륜적 삶의 제도들, 즉 가족과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 속에 내재해있음을 인지한다. 그러므로 무엇이 선한지 알기 위해서 인륜적 의지는 단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합리적인 실천들(practices)을 이해하고 준수하기만 하면 된다.”(Jennings (2014), p.105.)

 그러나 이처럼 개별적 주관의 특수성과 충돌하지 않고, 그것을 보호해주기까지 하는 인륜성은 일종의 이념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국가 역시 국가로서 자유와 합리성을 원리로 가지지만, 즉 그 안에 인륜성의 개념이 내재해있지만 우연성(contingency)이 지배하는 세계에 거주하기 때문에 합리성이 잘 드러나지 못하고 그 개념 그대로 현존하지 못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우연한 조건들 하에서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가 실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진단 하에 Jennings는 실재하는 국가에 “내재되어있는 합리적 원리들을 인지하고 현존하는 세계가 그 원리에 부합하도록 변화시키는 것이 참된 양심의 기능”이라고 주장한다.(Ibid., p.114.)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참된 양심의 주체가 가지는 자유로운 규정력이 가감 없이 발휘되는 것이다. 저 변화의 구체적인 수단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규정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참된 양심은 인륜적 국가의 합리성을 보존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헤겔에 대해 만연해있는 편견과 달리) 그 과정에서 실재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social criticism) 또한 반드시 수행하게 된다는 것이 Jennings의 독창적인 결론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Jennings의 독법을 따를 경우 참된 양심의 주체는 두 종류의 자유를 누린다고 생각한다. 첫째, 참된 양심의 주체는 무엇을 선으로 알고 의지할지를 스스로 규정한다. 다만 자신이 규정하고자 목표하는 선이 자유의 개념과 합리성을 원리로 삼는 인륜적 국가에 이미 육화되어있음을 발견하고, 그에 따라 행위하기를 자유롭게 선택할 뿐이다. “[…]어느 시점에도 참된 양심은 자신의 주관적인 신념들을 자기가 그 안에 거주하는 객관적인 합리적 구조들보다 격상시키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정확히 바로 이 합리성이야말로 참된 양심이 자신의 윤리적(ethical) 기준으로 채택한 것이기 때문이다.”(Ibid., p.117.) 둘째, 참된 양심의 주체는 자신이 구성원으로 있는 실재하는 국가가 자유의 개념과 합리성의 원리, 즉 국가의 개념대로 현존하고 있지 않을 경우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개혁해야(reform) 계속해서 선의 이념에 충실한 국가로 남을 수 있을지 그 개혁의 수단을 스스로 규정한다. “이 측면에서, 참된 양심은 현존하는 제도들에 육화된 선을 승인하지만(affirm) 이 선을 사회 속에서 어떻게 현실화시킬 것이냐에 대해 자기 자신만의 결정을 내린다.”(Ibid., p.118. 단, Jennings는 참된 양심의 주체가 실천하는 개혁을 그가 거주하는 “[그 안에 합리적 원리들이 내재되어있는] 사회적 구조들에 대한 내부(immanent) 비판”으로 제한한다. 그 밖의 시도는 “급진적 비판(radical criticism)”이라 불리는데, 급진적 비판은 “(1)국가가 그에 기반해있는 합리적 원리들을 거부하거나, (2)이 합리적 원리들을 인정하면서도 현존하는 제도들은 그 원리들을 실현하는 데 무능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Ibid., pp.104-106)

 Moyar와 Jennings가 각각 인륜성 하에서 참된 양심이 작동하는 양상에 대해 내린 해석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도덕성 하에서 형식적 양심의 주체가 가지는 반성의 자유와 자기규정 능력은 인륜성 하에서 참된 양심의 주체에게서도 상실되지 않고 보존된다. 본론의 2절에서 이미 정리하였듯이, 양심의 주체가 선과 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자유로운 규정력을 가진다는 것은 당연히 참된 양심을 포함하고 있는 양심 일반의 정의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양심의 주체는 이 자유를 발휘함에 있어 자신만의 고집보다 우선시해야 할, 그리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스스로도 그렇게 우선시할 것을 동의하게 되는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을 가진다. 마지막으로 참된 양심의 주체가 수행하는 자유로운 자기규정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개념을 실현시킬 수 있는 실천적 수단에 대한 구체화의 형태를 띤다.

 그러므로 인륜성 하에서 참된 양심의 주체가 자유롭지 못하다는 이해는 <법철학>에 대한 피상적인 독해에 불과하다. 자기의식으로서의 주관성이 자유의 이념을 (도덕성 하에서의 추상적인 선이 아닌) 생동하는 선으로서 알고, 의지하며, 행위로써 실현한다는 ‘인륜성’ 장의 첫 문장은 참된 양심의 주체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내재해있는 합리성의 원리들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거쳐, 자신의 자유로운 규정력을 저 원리에 부합하는 참된 내용에 행사하는 과정의 묘사다.(PR, §142) 나아가 “특수성은 인륜성이 그 안에서 현존하고 외면적으로 현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특수성에 대한 개인의 권리는 인륜적 실체성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포섭된다(enthalten)”는 154절의 전문은 특수한 주관이 선과 자유의 개념을 실현해줄 수단적 실천을 스스로의 힘으로 구체화시킬 자유와 권리가 인륜성 하에 굳건히 살아있다는 명시적 증거다.(PR, §154)

 

5. 인륜성 하에서의 참된 양심이 수행하는 역할: 위선의 방지

 그러나 필자는 Moyar(2011)와 Jennings(2014)가 놓친,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양심만이 탁월하게 수행할 수 있으며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기능이 한 가지 더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인륜성 하에서도 잔존하는 (악 가운데서도 특히) 위선의 방지이다. 본론의 마지막 절인 이 절에서는 먼저 인륜성 하에서 악 일반의 가능성이 어떻게 잔존하는지 설명한 뒤, Brownlee(2013)의 주장을 검토함으로써 여러 유형의 악들 가운데 특히 위선은 인륜성의 가능조건 자체를 위협한다는 것을 보일 것이다. 이를 토대로 특별히 참된 양심이 인륜성 하에서 위선을 방지할 수 있음을, 그리하여 인륜성의 가능조건을 수호하는 중대한 역할을 수행함을 그 내밀성과 심정성에 대한 재분석을 통해 주장하고자 한다.

 주관성과 객관성,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의 대화해가 이루어지는 인륜성에 대한 헤겔의 서술은 너무 장밋빛이어서 마치 악은 도덕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인륜적 삶으로부터 소멸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인륜성 하에서 도덕성은 무화되어있지 않고 다만 그 한계가 극복된 채로 보존돼있다. 고립과 자의, 오만을 제하고 보존되어있는 것들 가운데서 이 절의 문제의식과 관련되는 요소는 바로 자유다. 인륜성의 주체는 도덕성의 주체와 마찬가지로 근대에 이르러 가능해진 주관적, 반성적 자유를 소유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도덕성의 관점을 보존하고 있는 덕분에 비로소 그 자유를 소유한다. 이 자유가 없다면 참된 양심의 주체는 자신의 특수성과 주관성을 유지하는 채로 보편적, 객관적 선과 통일될 수 없을 것이고, 보편적, 객관적 선 역시 자신의 개념을 실현시켜줄 개별 의지를 찾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의지는 인륜성의 관점에서도 필수불가결하다. 그런데 헤겔에게 있어 인간에게 그런 자유의지가 주어져있는 한 악의 가능성은 뿌리 뽑을 수 없는 필연이다.

 “오직 인간만이 그가 악할 수도 있는 한에서, 선하다. […] 그러므로 악은 선과 마찬가지로 의지 속에 자신의 근원을 가지며 의지는 그것의 개념상(in seinem Begriffe) 선할 뿐 아니라 악하다.”(PR, §139z)

 따라서 주관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인륜성 하에서도 악의 가능성은 굳건히 잔존한다. 이와 관련해서 Brownlee(2013)는 극단적인 주관주의와 특히 위선(Heuchelei)이 헤겔에게 있어 타인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는지 여부와 독립적으로 이미 악인 이유가 바로 “그것들이 인륜성 자체를 부식시키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Brownlee (2013), p.83.) 인륜성 자체는 인륜적 제도와 실천들, 그리고 타인들에 대한 신뢰를 그 가능조건으로 삼는데, 악은 이 윤리적 심정들을 현저히 약화시키기(compromise)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헤겔이 위선을 어떻게 개념화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헤겔에 따르면 위선은 다음의 세 가지 계기로 이루어진다. 첫째, 위선자는 순전한 느낌의 형태로든 강화된 인식의 형태로든 “참된 보편적인 것에 대한 앎”을 소유한다. 그는 무엇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선한지를 어렴풋이나마 또는 선명하게 알고 있다. 둘째, 위선자는 “이러한 보편적인 것과 대립하는 특수한 것에 대한 의지”를 소유한다. 다시 말해 그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과 대립하는 특수한 이익을 의지한다. 셋째, 위선자는 “두 계기들을 비교”할 줄 알아서, 결국에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이 아닌 “악으로서의 그의 특수한 의지가 [행위의 내용으로] 규정된다.”(PR, §140a)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과 자신만의 특수한 의지를 비교한 뒤 후자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 단계를 거쳐 “악한 양심”을 가진다고 해서 곧장 위선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위선의 마지막 필요조건은 “[…] 타인들에게는 악을 선으로서 주장하고, 일반적으로 스스로를 표면상 선하고 양심적이며 경건한 자로 내세우는 비정직(Unwahrheit)에 대한 형식적 규정”이다. 이와 같은 그릇된 주장과 내세움은 “타인들에 대한 기만의 술수”일 뿐이다.(PR, §140b)

 요컨대 위선적 자기의식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과 대립하는 줄 알면서도, 자신만의 특수한 의지에 따라 행위하지만, 겉으로는 즉 타인들에게는 자신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에 따라 행위한다고 포장한다. 그러므로 위선적 자기의식은 “[…] 의무와 도덕성 전체를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목표들[저 특수한 이익]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한다.”(Ibid., p.88.)

 여기서 Brownlee는 어째서 헤겔이 위선을 심각한 도덕적 실패이자 악으로 믿고 있는지를 의문시한다. 필자는 이 의문이 불필요하지 않고 상당히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설령 자신의 진정한 의도를 숨기고 있다고 해도, 위선자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선과 의무를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째서 선과 의무를 실천하기는커녕, 타인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는 범죄보다도 위선이 ‘도덕적 악’의 전형으로 제시되는가? 스스로 제기한 의문에 대해 Brownlee가 내놓는 대답은 다음과 같다. 위선은 인륜적 실천들이 의존하는 신뢰를 약화시킴으로써 인륜성의 가능조건 자체를 위협한다.

 Brownlee의 헤겔 해석에 따르면 인륜성의 주체가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인륜적 제도에 대해 신뢰를 가져야 한다. 가족, 시민사회, 국가와 같은 제도들이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보장해준다는 신뢰가 있어야만 그에 따르는 삶이 습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제도에 대한 신뢰는 나아가 타인들에 대한 신뢰까지 정초해준다. 동일한 제도에 대한 공통의 참여를 통해 서로가 “신실한 마음으로(in good faith)” 같은 법과 원리들을 준수한다는 신뢰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선을 구성하는 기만은 이와 같은 신뢰들을 저버린다. 타인과의 협력이나 제도들의 요구보다도 자신의 특수한 이익에 더 높은 도덕적 권위를 부여하는 탓에 그러하다. 따라서 위선은 타인과 제도의 인륜적 힘 자체를 약화시키므로 인륜성 하에서 “도덕적 행위를 단순히 어렵게 만들지 않[고] 불가능하게 만든다.”(Ibid., pp.94-96.)

 문제는 인륜성의 실현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위선에 대해, 그것을 폭로(unmask)할 수 있는 방법이나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어진 행위가 위선적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들을 내리려면 행위자의 행위 이유에 대해 잘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저 이유들이야말로 위선자가 숨기고자 목표하는 것이다.” 위선자가 행위하는 ‘진짜’ 이유가 숨겨질 수 있고, 잘 알려지지 못하는 이유는 양심의 내밀성 때문이다. 본 글은 앞서 양심은 정의상 내밀한 것이기 때문에, 거짓 없이 표현되지 않는 이상 양심의 주체가 아닌 다른 주체는 알 수 없는 종류의 믿음을 생산한다고 기술한 바 있다. 형식적 양심의 주체는 언제든 이 내밀성을 악용해, 겉으로 어떻게 행위하든지 간에 속으로는 자신의 특수한 이익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보다 중요하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그 때문에 “모든 행위, 심지어 의무에 부합하고 옳은 것처럼 보이는 행위마저 악한 것으로 증명될 가능성이 남아있다.”(Ibid., p.87.)

 이처럼 위선은 사후적으로 폭로될 수 없거나 폭로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에, 사전에 방지하는 것만이 인륜성의 가능조건을 나아가 인륜성 자체를 수호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위선을 방지할 수 있을까? 먼저, 타인의 문책이나 제도의 압력 등 주체 바깥으로부터의 자극을 통해서는 위선을 방지할 수 없다. 위선은 내밀한 양심의 선택이므로, 다른 주체의 앞에서라면 시쳇말로 시치미만 잘 떼도 아무도 위선자의 비밀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도덕 교육 또한 위선을 방지하지 못한다. 도덕 교육은 (위선의 유혹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포함해) 무엇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선한지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는 작업일 텐데, 위선의 첫 번째 계기에 따르면 위선자는 그와 같은 인식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선자는 무엇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선한지 알고도 위선을 수행할 뿐 아니라, 그 앎 덕분에 그것을 변명 삼아 수행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째,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에 대한 지적인 인식을 증진시키는 방향성의 모든 조치들은 위선을 방지할 수 없다. 셋째, 인륜성에 따르는 습관조차 무조건적으로 위선을 방지하지는 못한다. 물론, 인륜성을 지속적이고 신실하게 제2의 자연으로 삼아온 이상적인 주체에게는 위선의 유혹 자체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주체가 이처럼 이상적이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느 주체에게 개연적이고 높은 확률로 위선의 유혹이 발생할 경우에는 습관의 효력이 이미 정지된 것이나 다름 없다고 봐야 한다. 습관은 무의식적으로 작동해야만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데—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151절에서 습관이 정신의 죽음을 낳을 수도 있다고까지 지적하는 것이다—위선이라는 선택지가 주체의 머릿속에 명시적으로 떠오른 순간, 그는 자신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지 의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진단에 따르면 위선의 방지는 첫째로 내면으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둘째로 지적인 인식이 아닌 다른 능력을 통해, 셋째로 명시적인 자기의식을 수반하는 능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필자는 인륜성 하에서의 참된 양심이야말로 비로소 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참된 양심은 인륜성 하에서조차 내밀한 것이다. 참된 양심은 주관의 내면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다른 주체들에게 접근 불가능한 앎들을 활용할 수 있다. 예컨대 겉으로는 순전히 의무에 부합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위에 어떤 특수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지, 그와 같은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더라도 주관은 의무를 실천할 동기를 충분히 가지는지 등을 반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성적이고 내밀한 앎들을 바탕으로 참된 양심은 마치 프로이트의 초자아처럼 내면의 심판관으로서 ‘자기제어’라는, 그 어떤 타인도 기관도 대신 수행해줄 수 없는 기능을 떠맡는다. 여기서 양심의 내밀성이 보이는 이중적인 성격에 주목할 만하다. 양심의 내밀성은 위선을 폭로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그 위험을 극대화하는 동시에, 위선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둘째, 참된 양심은 지적인 인식 이상으로 심정성을 수반한다. 앞서 인륜성 하에서 양심의 주체는 인륜성의 현실 가운데서 자기다움을 느끼며, 악을 범함으로써 그 현실을 위반할 때 자기다움을 상실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위선 역시 이 위반의 일환이기 때문에 참된 양심의 주체는 위선을 수행할 경우 자신의 실존이 (인륜성의 현실과 조화되는) 자신의 본질과 분리되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 앎은 단순히 지적인 인식에 그치지 않고 저 분리에 대한 강력한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참된 양심의 주체는 자신이 선이라고 인식한 내용에 대해 심정적인 이끌림을 가지는 만큼, 악이라고 인식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것을 밀어내고자 하는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된 양심이 수반하는, 스스로의 본질과 자기다움 그리고 자신이 선이라고 알고 있는 규정을 준수하려는 인륜적 심정이 위선을 비롯해 악 일반을 방지해줄 수 있다. 여기서 위선의 문제에만 집중하면, 선에 대한 지적인 인식만을 가지고 있고 심정적 이끌림은 가지고 있지 않는 주관적 의지의 상태야말로 위선이 자라나는 토양이라는 사실까지 알 수 있다.

 셋째, 이와 같은 참된 양심의 내밀한 심정성은 반드시 습관적으로만 발동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선으로 규정된 내용에 대한 심정적 이끌림은 해당 내용을 아주 철저하게 내면화한 결과이자 징표로, 그 내용에 따르는 행위를 습관화하기 위한 근본적인 조건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이행남(2017)은 인륜성에 따르는 습관으로서 제2의 자연을 심정 자체로 간주하기도 한다. “[…] 자신이 속한 사회 세계에서 통용되는 규범적 문법을 학습함으로써 제2의 자연과도 같은 주관적 심정을 얻게 된 주체는, 소기의 윤리적 좋음을 달성하려는 행위 상황에 어떠한 내적 분열도 없이도, 즉 행위를 방해하는 내적 충동 등에서 벗어나기 위한 추상적 반성 작용을 추가적으로 거치지 않고도 기계적으로 임할 수 있다.”(이행남 (2017), pp.16-17.) 그러나 심정성이 습관성을 가능케 하는 것일 뿐, 습관성과 결부되지 않는 심정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수동적으로 불러일으켜진 뒤 부지불식간에 지나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명시적으로 발하는 인륜적 심정 역시 가능하다. 예를 들어 앞서 지적했듯이, 위선의 유혹이 발생한 경우 습관의 효력은 이미 정지된 것이지만, 그 경우에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에 대한 심정적 이끌림이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라 자기의식을 제어하는 상황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요컨대 필자는 참된 양심의 내밀한 목소리와, 그 목소리의 내용물에 대한 지적인 인식 이상의 심정적이고 의식적인 이끌림이 위선을 방지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이 결론에 덧붙여야 할 점은, 인륜성 하에서 위선을 방지함에 있어 참된 양심의 심정성이 떠맡는 역할이 강조되기는 했지만, 참된 양심의 작동 일반에 있어 인륜적 심정이 선의 내용에 대한 지적 인식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식의 성급한 결론으로 미끄러져선 안 된다는 사실이다. 참된 양심이 수반하는 심정은 결국 지적으로 인식된 내용에 대한 심정적 이끌림이기에 둘의 중요도를 비교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저 인식이 사회적 규범에 대한 단적으로 순응적인 학습이 아닌 자유로운 반성으로부터 기원한다는 점, 이 자유로운 반성이야말로 자유와 선의 개념을 구체화함으로써 사회를 진보시키는 능력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Jennings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참된 양심과 정치적 심정 사이의] 이 즉각적인 동일시는 주관적 반성의 과정이라는 양심의 본질을 놓친다. 바로 무엇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이익에 부합하는지를 스스로 고려할 능력 말이다. […] 그러므로 나는 참된 양심이 단순히 사회의 객관적인 제도들을 신뢰하는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이 신뢰가 제도의 합리성에 대한 이해에 기반해 있더라도 말이다. 참된 양심은 자신만의 신념을 생산할 줄 알아야 한다.”(Jennings (2014), p,112.)

 

6. 결론

 양심은 무엇이 선과 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인지를 주관이 내면적인 반성을 거쳐 스스로 규정하는 자유로운 자기규정능력이다. 도덕성 하에서는 이 자유가 남용되어 아무런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기준을 전제하거나 참조함 없이 저 규정의 출처가 오롯이 주관 자신이 된다. 주관의 이와 같은 고립의 결과 그의 특수한 이익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보다 우선시되거나, 심지어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 자체로 잘못 주장되는 악이 발생한다. 이 경우 양심은 양심의 주체가 선이라 규정한 내용에 대해 그 내용이 무엇이든 그에 무한한 확실성을 부여하기만 하는 형식적 양심에 불과하다. 반면 인륜성 하에서는 양심의 주체가 합리성을 원리로 하고, 선과 자유의 개념을 육화하고 있는 인륜적 제도 및 관습을 따라서 선과 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을 규정한다. 이때 주관은 자신의 공동체, 특히 국가 내에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의 기준을 발견하며 그것을 어떻게 실천으로써 구체화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를 누린다. 이 경우 양심은 양심의 주체가 자신이 믿기에만 선한 것이 아니라 즉자대자적으로 선한 것을 의지하는 참된 양심이 된다.

 그러나 참된 양심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을 특수한 주관의 구체적인 행위로 실현하는 역할만을 수행하지 않는다. 참된 양심은 제도와 타인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켜 인륜성의 가능조건 자체를 위협하는 위선을 방지하기도 한다. 위선은 양심의 내밀한 결정이기 때문에 주체 바깥의 위력을 통해서는 폭로될 수도 방지될 수도 없으며, 무엇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선인지에 대한 앎의 계기를 이미 포함하므로 그 앎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또한 막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인륜성의 실천을 제2의 자연으로 삼는 습관성조차 위선의 빈번한 유혹 앞에서는 그 효력을 잃는다. 이에 따라 위선의 방지는 내면으로부터의 자극을 통해, 지적인 인식 이상의 능력을 통해, 명시적인 자기의식을 수반하는 능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참된 양심은 이 세 가지 조건들을 탁월하게 만족시킨다. 이로써 양심은 인륜성의 관점에서 소실되지 않을 뿐 아니라 인륜성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수호하는 중대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 선명해진다. 

 

7.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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