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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ise

District of Columbia 4

20220806 워싱턴 D.C.에서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 안. 지상으로부터 11,277미터나 솟구쳐 있는 데다 언니와도 잠시 헤어진 지금, 눅눅하지만 간이 잘 된 대구 요리를 먹고도 맛에 대해 재잘거릴 사람이 없다. 완벽하게 혼자다. 오직 나의 불안과 나의 기쁨만이 내 곁을 붉고 푸른 정령들처럼 맴돌고 있다. 불현듯 그리운 연구실의 사람들과 그랬던 것처럼 티격태격, 오손도손 하면서.

 우선 지금 타고 있는 비행기의 출발 시간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이스탄불에서 코펜하겐으로 가는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으리라는 꽤 실질적인 불안. 동시에 두 번째 비행기를 그렇게 놓쳐서 설령 섬머스쿨 첫 날을 결석하게 된다 해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며, 어찌어찌 언니가 있는 호텔에 도착해 함께 잠들 수 있으리란 믿음에서 오는 기쁨.

 마음이 유약한 내가 자기확신 빼면 시체인 철학자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 그 불안 가운데서도 내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애정을 연장해 나가며 도전하고 있다는 기쁨. 석사논문을 무사히 제출했고, 방금도 흥미로운 글 한 조각을 읽어냈는걸. 아돌프 라이나흐라는 현상학자를 새로이 알게 되었다.

 근본적으로는 모두에게 이해 받고 사랑 받을 수는 없다는 데서 나는 온갖 불안. 그러나 그런 슈퍼스타로서의 삶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걸 내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는 데서 솟는 기쁨. 데생과도 같이 흐릿한 그 앎 위로 끊임없이 연필선을 그어나가면, 언젠가는 부끄러움도 겁도 몰아내고 내 삶을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만화 한 편으로 변신시킬 수 있을까. 나는 그 연필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남의 펜을 빌리기 위해 애쓰는 일에는 지쳤다. 이제 나는 곧 서른이고, 당장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쭉 혼자서 행복해질 줄을 알아야 한다.

 아직 여행 일정이 며칠 남아있긴 하지만 귀국을 앞둔 지금, 워싱턴 D.C.에서의 마지막 기억들을을 정리해두고 싶다.


 마냥 놀고 싶은 기분이 아니기도 했고, 미국에서는 스스로를 여행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공부할 곳을 찾아다녔다. ⟪존재와 시간⟫을 열심히 읽었는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렇게까지 꼼꼼히 읽을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카페들에도 기웃거렸지만, 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8번가의 공립 도서관에 특히 많이 갔다. 걷는 길에 마주쳤던 풍경들.


 항상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이 먹었다. 입 안으로 계속해서 달거나 짠 것을 집어넣는 일이 마음의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살이 좀 쪘다. 미친 물가를 뚫고 레스토랑에도 몇 번 갔지만, 언니와 토요일 필라테스를 마친 후 정기적으로 먹은 초콜릿 크로와상과 드래프트 라떼의 맛이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하고, 쓰다듬어주는 대화들을 많이 나눴다.


 그 외에 즐거웠거나 감사했던 순간들. 마지막 열흘 가량은 언니의 이사를 돕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는지 건질 사진이 없다... 아쉬워라. 이사 내내 그리고 직후에 언니가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해주었다. 나야말로 함께 있을 수 있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운동을 마치고 14번가에서 샀던 꽃.
비가 억수로 쏟아진 날, 안전하게 집 안에서 피자를 먹으면서 나루토 중급 닌자 시험 편을 보았다.
슬픈 날에는 롤러코스터 타이쿤을 했다. 놀이기구별로 탑승료를 받는 맵이 놀이공원 전체의 입장료를 받는 맵보다 훨씬, 훨씬 클리어하기가 쉬웠다.
어렸을 때 너무나 좋아했던 게임인 파랜드 택틱스 2의 실황 플레이 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몰아보기도 했다. 아무 근심 없이 노는 데 빠져있었던 시절들이 그립다.
'흙' 향 양초를 팔던 어느 노점.
명상과 스트레칭을 자주 하려고 노력했다.


20220813 걱정했던 것과 달리 비행기를 갈아타는 데 성공해서 지난 일요일에 무사히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보스턴에서와 마찬가지로 가방이 이스탄불에서 부쳐지지 않아 공항에서 7시간 정도를 마냥 기다려야 했지만, 같은 처지에 놓인 덴마크 아주머니와 짧고 굵은 유대를 형성해본 것은 재밌는 경험이었다. 지금은 섬머스쿨 일정을 모두 마치고 뮌헨으로 넘어와 중앙역 근처의 작은 호텔 방 안에 앉아있다. 에어컨은 없지만 덥지 않고, 연두색 커튼이 걸린 창 밖으로 간간히 독특한 억양의 독일어가 들려온다. 타이핑을 하는 손에서 비누 냄새가 강하게 난다.

 코펜하겐에서의 5일을 돌이켜보니 대화해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선생님들 모두에게 말을 거는 데 성공한 것 같다. 완벽하지 않은 영어로 끈덕지게 용기를 내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의 주관성을 연구하는 로빈의 파란 머리, 유머코드가 잘 통했던 점심메이트 리사의 미소, 디스커션 그룹에서 친해진 정치학도 나시마의 뿔테 안경, 수치심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던 베아트리스의 번개 모양 아이라인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후설의 유아론에 관해 던진 질문에 에고에 대한 강조는 상호주관성과 충돌하기보다 오히려 진정한 소통을 가능케 하는 요소인 것 같다고 답해주신 자하비 교수님께도 감사했다. 마지막으로 오래 전에 퍼블리쉬된 당신의 글을 언급하면서, 내 석사논문의 문제의식을 소개하니 이제는 더 이상 후설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는 데 관심이 없어졌지만 (이 타이밍에 쿨한 미소) 그래도 너의 연구는 흥미롭다고,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주신 오버가드 교수님이 생각난다. 무엇보다 주해에 얽메이지 않는 현상학함의 사례들을 많이 접해본 것이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다. 철학을 계속 공부할 것인지에 더해, 만일 공부를 이어나갈 것이라면 앞으로도 철학사가로서 이어나갈 것이냐는 고민이 생겼다. 자기의심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일정을 소화한 나 자신에게 박수. 샤워하면서 '우리 하영이 기특해' 쏭을 한 번 더 불러야겠다.

 코펜하겐에서 찍은 사진들은 올리지 않을 생각이지만―일상을 연대기순으로 박제해놓는 일에 슬슬 심리적인 부담을 느낀다―낮은 스카이라인, 자전거를 탄 패션 피플, 밤까지 지지 않는 태양, 마지막 날 밤 카지노의 슬롯머신을 가득 채웠던 과일들의 이미지는 어차피 잊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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