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장에 최승자식으로 써둔 일기를 한 주의 말미에 게시한다.
월요일. 월경 전 무지막지한 불안에 시달릴 때면 종말을 준비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후설을 번역하는 것도, 프루스트를 읽고 소설 공모전을 준비하는 것도 모두 종말을 향해 오르는 일련의 계단들 같다. 보상까지는 바라지 않아도 종말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데. 이렇게 의욕이 떨어지고 나면 무력감과 우울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머리 꼭대기를 가득 메우고 두통을 일으킨다. 한 달에 열흘은 이런 상태니,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도 맥이 끊길 수밖에 없다.
화요일. 카페에서 후설의 본능 관련 텍스트를 좀 번역한 다음 엄마와 음악회에 다녀왔다. 모차르트와 클룩하르트, 브람스의 곡들로 이루어진 실내악 콘서트였는데 모차르트의 음악은 발걸음이 너무 재고 발랄해서 오히려 지루했다. 브람스의 현악 6중주, 그 중에서도 ‘브람스의 눈물’이라는 별칭을 가진 2악장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그 외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긴 트릴 끝에 참았던 숨을 토해내던 오보이스트의 붉은 얼굴. 휴식이라 하기엔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았고, 그는 오래 쉴 새 없이 다시 입술을 오므려야 했다.
연주자들이 연주 중에 악기를 감각하고 있다는 명제가 참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 문제에 있어서 나는 전적으로 후설이 아닌 하이데거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악기들은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손안의-존재자들이며, 연주되고 있는 것이지 지각되고 있지 않다. 악기의 질료를 이루는 요소들 사이 유사성과 이질성이 선촉발적으로 종합되고, 그 종합이 자아를 비로소 촉발하고, 촉발로 주어진 자료에 자아가 해석을 가할 시간이 도대체 어디있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이 발생하기에, 모차르트의 멜로디는 너무 빠르다.
수요일. 전형적인 대학원생의 하루였다. 하루종일 학교에 있었고, 후설 번역에 매달렸다. 오후 4시에 크림진짬뽕을 먹고 9시에 까르보나라 불닭볶음면을 먹었다. 불닭볶음면을 입안으로 미친듯이 집어넣으면서 세계의 존재가 직관을 통해 확실하든, 해석을 통해 확실하든 구축을 통해 확실하든 내 실존과 무슨 상관인가 싶어 허탈해졌다.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실망했다가, 아무 상관이 없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괜히 설렜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인 지금에 와서는 피로에 절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다. 어제 음악회에서 처음 만났던 브람스의 눈물을 다시 듣고 있다.
퇴근하기 직전에 옆 연구실의 J씨와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J씨는 문학이 특수를 통해 보편을 말한다고 주장하셨고, 나는 문학이 특수를 통해 특수를 말한다고 주장했다. 공감은 문학 감상에서 우연적이고 부차적일 뿐이라고. 인물의 개별적인 진리, 그녀만의 진리를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하면 그만이라고. J씨는 내가 오랫동안 사랑한 친구 하나를 떠올리게 만드는 취향과 말투를 가지고 계시다.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내가 (일방적으로) 그를 친숙하게 느끼는 이유다. 비가 오든 해가 쨍하든 양복을 멋지게 빼입고 다니시는 게 마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다. 하기야 소설 속 인물 같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목요일. 나는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가? 나는 세계 내 대상을 경험하지, 세계 자체를 경험하지는 않는다. 세계 내의 모든 대상을 남김없이 경험한다고 해도 세계 자체를 경험할 수는 없다. 대신 내가 세계를 경험의 지평으로서 경험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세계를 단지 대상경험의 가능조건으로서 경험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직관의 대상이 아닌 요청의 대상이다, 라고 수업시간에 주장했다가 많은 분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이를테면 하이데거 식으로 말했을 때 우리는 가방을 열 때 가방과 관련된 다른 도구들의 연관을 암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것이 세계이다, 아니면 우리는 외국에 나갔을 때 무엇이라고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달라진다는 것을 느낀다, 그 달라진 것이 세계이다…… 같은 반응들이 돌아왔다. 수업 바깥에서는 가능조건으로서 경험한다고 해서 무조건 요청되는 것은 아니므로, 증명의 부담은 나에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마다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소중한 답변들이었다. 다만 특수세계(Sonderwelt)와 달리 모든 특수세계들에 대한 경험의 기반에 있는 보편세계는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경험되지 않는 것 같다는 의문이 남았다. 또 후설이 세계를 여타 확실성이 확실해질 수 있는 토대로서 ‘전제한다’고 말할 때, 그리고 현상학이 직관되는 것을 넘어 ‘구축’에 이른다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여전히 불분명하다. (선생님께서는 ‘전제한다’의 가능한 의미로 ‘시간적으로 선행한다’와 ‘논리적인 가능조건이다’를 제시해주셨지만, 그에 접근하기 위해 구축이 불필요한 가능조건과 구축이 필요한 가능조건 사이의 차이는 여전히 미지이다.) 아무튼 세계에 대한 우리의 현상적 경험이 일반 대상에 대한 경험과 물 자체에 대한 요청 사이에 자리한다는 것은 분명하므로, 그것에 대해 더 생각해보아야겠다. 후기의 후설은 분명 직관과 요청 사이에서 작업하고 있다.
금요일. J를 짧게 만나고 국제갤러리에서 이승조 작가의 전시를 보았다. 곡선에 대한 경계심, 심지어는 공포가 느껴질 정도로 직선적인 추상이었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윤곽을 이루는 선이나 입체감을 이루는 면은 사물의 용도에 의해 규정되는데, 이승조의 작업물에서는 선과 면을 용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줌으로써 세속을 초월하고자 하는 욕구가 느껴졌다. 그런 동시에 그가 만들어낸 파이프 모양의 형태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아파트의 도면이나 배수관, 담배와 같이 가장 세속적인 것들을 연상시켰다. 전시를 보고 나서는 카페에서 존재와 시간을 읽다가,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바에서 논알콜 모히또를 홀짝거리며 함께 스티븐슨의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을 읽었다.
토요일. 아침 일찍 일산으로 넘어가 과외를 하고, 경희대로 이동해 한국현상학회에 나가보았다. 인간을 주체가 아닌 네트워크로 이해하는 포스트휴머니즘과 오이겐 핑크의 놀이 존재론, 상상에 근거한 판단중지의 재개념화를 통해 보편적 자아를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에 대해 발표가 이루어졌다. 첫 번째 발표에서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주장이 실현 가능한지, 풀어 말해 주체-객체 모델의 탈피가 근본적으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질문했다. 객체가 주관의 현상이라는 것은 개념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우연적인 테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불가피한 조건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숙고도 해당 모델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지였다. 발표해주신 선생님께서는 주체-객체 모델이 인식의 조건임은 인정하지만, 그러한 인식이 전능하지 않다는 점을 함께 인정함으로써 인간적 겸허와 사물적 신비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는 요지의 답변을 돌려주셨다. 마지막 발표에서는 상상 역시 특수한 지평에 입각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상에 근거한 판단중지라 할지라도 순수한 보편성에는 이를 수는 없지 않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발표해주신 선생님께서는 지평의 구속력은 인정하지만, 보편적인 시선은 우리의 이념으로서 타자와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끝까지 추구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답변을 해주셨다. 학회를 마치고 나서는 대학원 사람들을 만나 프루스트를 읽었다. 성스러워야 할 발베크 성당이 선거 포스터와 같은 세속적인 ‘개체’들에 의해 그 신성성을 오염당했다는 서술이 흥미로웠다. ⟪구토⟫를 연상시키는 세 나무 일화도 재미있었다.
일요일. 새벽에 이태원 참사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아팠다. 사상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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