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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이나 소회 같은 것

20220927 끼적끼적

 별다른 글감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오랜만에 일기를 쓰고 싶은 기분이라 무언가 끼적여 본다. 최승자 시인의 일기들을 읽고 있어서 그 영향을 조금 받은 것 같다. 오늘 하루는 반도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어제를 기록해보겠다. 어제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5시 반이었다. 9시 반에 청강하는 수업이 시작되고, 통학하는 데 넉넉잡아 1시간 반쯤 걸리기 때문에 다시 잠을 청하기가 애매했다. 그대로 영차 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요새는 외출 준비가 즐겁다. 러쉬에서 산 샴푸에서 나는 제비꽃 향기가 무척 상쾌하기 때문이다. 담배를 피우지만 않아도 오후까지 상쾌함이 남을 텐데, 연기 한가운데 오래도록 앉아 있다 보니 2시만 되어도 향은 온 데 간 데 없다. 수업을 듣고 P씨와 컵밥을 먹었다. P씨는 아주 귀여운 낭만주의자다. 세상에서 가장 순진하고 착한 얼굴로 '나는 유미주의자에요'라고 말하는 것이 내 귀에는 '나는 낭만주의자에요'라고 들린다. 그녀가 쓴 시들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달콤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밥을 먹고 나서는 다 읽은 분석인식론 개론서를 요약했다. 뒷자리에 앉은 T씨에게 요약문을 완성하면 인식론 경진대회를 열 테니 출제자가 되어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언제나처럼 떨떠름하면서도--저 말고 S한테 부탁해요--관대한 대답을 받았다(출제자가 되어주시겠단다). T씨의 머리는 아주 꼬불꼬불하다. 자연산이라고 하지만 남 몰래 정기적으로 히피펌을 받는 게 틀림없다. 그리고 자신의 풍성하고 복작복작한 머리칼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중간중간 옆자리 H씨의 공부를 엿보기도 했다. 트롭에 대해 어쩌고 저쩌고 쓰고 계시기에 방해를 단념했다. H씨는 대개 쌀쌀맞지만, 그래도 며칠 전 나와 명랑핫도그를 함께 먹어주었다. 그날 먹은 핫도그가 너무 맛이 있어서, 사흘 연속으로 핫도그를 사먹었다. 치즈와 설탕의 조합이 아주 황홀하다.

 급한 공부는 얼추 끝이 나서, 연구계획서 작성으로 되돌아갔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주제는 후기의 후설이 어떻게 신체, 타인, 세계의 존재의 의심 불가능성을 복원해내는지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후기의 후설은 더 이상 데카르트의 영향권 안에 없다고 단언하지만, 후설은 여전히 (데카르트적) 회의주의자를 논적으로 삼고 있다. 물론 모든 철학자가 어느 정도는 그런 회의주의에 반격을 가하기 때문에, 회의주의자를 논적으로 삼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후기의 후설이 데카르트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후설이 회의주의를 극복하는 양상은 다분히 데카르트적이라는 것이 나의 직관이다. 데카르트가 제 1성찰에서 의심했던 것들을 제 6성찰에서 복구해냈듯, 후설도 유고를 통해 구조적으로 아주 유사한 작업을 하고 있다. 세계의 존재가 우연적이라고 단언했던, 젊은 그가 말년에 와서는 세계의 존재가 필증적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이번 학기 듣고 있는 한 수업의 페이퍼는 신체에 대한 회의주의 극복으로 주제를 좁혀서 써보려고 한다. 문제는 다른 한 수업이다. 조지 버클리의 1차 문헌과 관련된 2차 문헌을 소화하는 수업인데, 자신감이 이렇게 없을 수가 없다. 다른 학생들은 어떻게 그렇게 똑똑할까? 나는 논문이 어렵거나 이상하게 읽히면 내가 잘못 이해했겠거니, 생각하고 마는데, 다른 수강생 분들께서는 논문의 부족한 점을 아주 날카롭게 지적해내고 대안까지 척척 제시한다. 그에 비하면 나의 리스폰스 페이퍼들은 헛소리 삼분지이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데 내가 못한다고 생각하니 의욕이 떨어진다. 오늘까지만 머릿속에서 치워두고, 내일 수업 직전에 복습을 하고 똑똑이 J씨께 이것저것 캐물어서 앎을 충전한 뒤 꼭 토론에 기여할 것이다. 할 수 있어 하영아...

 저녁에는 함께 현상학을 공부하는 D씨와 햄버거를 먹었다. D씨는 내 말을 언제나 경청해주는 감사한 친구이다. 유학과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식을 축적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스킬셋 자체를 늘리는 것은 가끔 불가능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렵다.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그러나 가지고 싶은 스킬은 유창한 독일어와 분석적 사고이다. 분석철학 책을 좀 더 많이 읽고, 이리저리 치여도 이런저런 수업들에 기웃거려 보고, 내년에는 독일 문화원을 다시 다녀야지.

 연구실에 돌아와서는 담배를 두 개비 피우고 존재와 시간 강독 세미나에 들어갔다. 세미나원 분들께 오이겐 핑크의 철학을 조금 소개했는데, 내 배경지식이 미비해 부족함이 많았다. 그래도 후기 후설 철학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드릴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세미나는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지혜롭고 재미있는 분들이 많으시다. 내 블로그의 독자여서 하는 말이 아니라 R오빠의 코멘트는 언제나 핵심을 꿰뚫는다. 좋은 철학사적 작업은 공통점/유사점보다는 차이점을 살려줘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세미나를 마치고 나서는 너무 피곤해져서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한참 논문을 쓰고 계시는 (또 다른) J씨와 함께 택시를 탔다. 가는 길에 내려드린 것뿐인데, 거듭 감사인사를 해주셔서 내가 더 감사했다. 집에 와서는 문복희가 튀김을 먹는 유튜브를 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잠에 들었다. 꿈에서 철학과 사람들과 춤을 추었다. 아직 많이 친해지지 못한 신입생 분께서 내 파트너로 배정되어서 어색하면서도 유쾌했다. 어쨌거나 우리들끼리 댄스파티라니, 개꿈이다.

 참, 오후에 옛날에 내 글쓰기를 봐주셨던 오랜 스승님께 최근에 쓴 소설들을 택배로 보내드렸다. 실컷 비판해달라고 부탁했는데, 막상 쓴소리를 들으면 속상해질까 두렵다. 그래도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위안이 된다. 인정 욕구나 허영심과 무관하게 몰두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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