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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정명희 옮김, ⟪댈러웨이 부인⟫, 솔, 2019.

"런던은 스미스라 불리는 수백만의 젊은 청년들을 삼켜버렸다. 부모가 그들을 특색 있게 하려고 생각해냈던 셉티머스 같은 별난 그리스도 교도다운 이름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유스톤 거리에서 떨어진 곳에서 하숙하면서 핑크색의 순진한 타원형 얼굴이 마르고 찌푸린 적개심에 가득 찬 얼굴로 변하는 것 같은 경험들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서 가장 빈틈없는 친구라도 정원사가 아침에 온실 문을 열고 화초에 새로 핀 꽃을 발견하고는 하는 말 외에 할 수 있는 말이 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꽃이 피었어. 허영, 야심, 이상주의, 열정, 외로움, 용기, 게으름 따위의 평범한 씨앗들에서 꽃이 피었단 말이야.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유스톤 거리에서 좀 떨어진 방 안에서) 그를 수줍게 만들었고, 말을 더듬으며 자신을 향상시키느라 열심이게 만들었고, 워터루 거리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해 강의하는 이사벨 포울과 사랑에 빠지게 하였다."(116-117, 강조는 필자)

사기는 1월 초에 샀는데 공부하기 전에 십 분, 이십 분씩 야금야금 읽느라 오래 걸렸다.

 

 빅벤이 치는 소리와 함께 겨우 생각이라는 감옥에서 풀려나는 의식의 죄수들. 내면을 가졌다는 원죄를 견디게 해주는 것은 사랑도, 종교도 아닌 삶에 대한 명징한 인식과 애착임을, 다채로운 인물 군상으로써 세련되게 피력한다.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 극적인 서사가 있을 필요는 없다. 인물이 매력적이기만 하다면 사건의 범속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녀들이 거리의 소란을 신경 쓰면서 꽃을 사든, 단순히 버스를 타고 동네를 빠져나가든, 케이크를 살 돈이 없어 질투 섞인 눈빛으로 차를 마시는 데 만족해야 하든. 그들이 공원을 배회하든, 나뭇잎과 대화하며 벤치에 멍하니 앉아있든, 의욕도 없이 편지를 대필하든. 누구나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해도 우리는 인내심과 심지어는 기꺼움을 가지고 페이지를 넘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물을 매력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일까? 사건과 사상으로 인물을 곧잘 억압하는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은 이론적인 것에 불과하겠지만, (1) 인물의 역사와 인격 사이의 상관관계, (2) 자신과 다른 인격에 대한 개성적인 견해 표출, (3) 고유한 희망과 절망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1)을 가장 슬프고도 진실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은 워렌 스미스 부부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돌아왔지만 전우의 죽음을 심리적으로 소화하지 못한 셉티머스는 쾌활한 루크레지아가 바느질을 하는 모습에서 안식을 느낀다. 하지만 결국에는 악몽 같은 기억이 셉티머스를 집어삼키고, 그는 루크레지아에게 애정을 쏟는 대신 범인에게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한 신비주의에 빠져든다. 오직 셉티머스만을 바라보고 고향과 가족을 떠난 루크레지아는 마음을 다친 남자를 사랑하는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느낀다. 그녀는 우스꽝스러운 모자에 대해 남편과 수다를 떠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줄 아는 강한 사람이지만, 셉티머스를 사로잡은 전쟁의 비극에 함께 휘말리고 말았다.

 그러나 루크레지아가 아무리 불쌍하다 한들, 참전해 에반스를 잃은 것이 셉티머스의 역사였고, 그런 역사를 가진 그가 멀쩡한 영혼을 가지는 편이 오히려 이상스럽다. 시대가 가했던 최초의 충격에 단층과 같이 엇갈린 두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두 사람이 다른 시공간에서 만났더라면 행복했을까 상상하게 되지만, 일회적이고 유일무이한 세계에서 그런 가정만큼 터무니없는 것은 없다. 몽상적 도피조차 불허하는 잔인한 세계에 대해 애착을 가질 것을 권유하는 이 소설이 경이롭다고 생각할 뿐이다.

 (2)라고 내가 쓰게 된 계기는 도리스 킬먼이다. 내게 도리스 킬먼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가난과 신분, 외양을 비관하며 살아왔지만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과거의 열등감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신실함은 그녀가 소위 육적인 것, 호화로운 파티를 열거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는 일 따위에 몰두하는--정확히 말하면 몰두할 여유가 있는--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복수의 기제다. 그녀는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심으로써 증오한다.

 "클러리서 댈러웨이는 자신을 모욕했다. [...] 못생기고 어설프다고 클러리서 댈러웨이는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었고, 육체적인 욕망을 되살아나게 하였다. 클러리서 곁에서는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왜 그녀를 닮기를 소망할까? 왜? 그녀는 댈러웨이 부인을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경멸하였다. 그녀는 진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쓸모 없는 존재였다. 그녀의 삶은 허영과 자만투성이였다."(173)

 하지만 그렇다고 도리스 킬먼을 미워하기에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구석도 지나칠 수 없다. 엘리자베스에게 "파티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초콜릿 에클레어의 마지막 남은 조각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인간적인 여자를 어떻게 용서하지 않을 수 있을까(178). 모든 인물에게, 그녀의 어둠이 어떤 형체의 것이든지 간에 존엄성을 부여해주었다는 데서 작가의 역량을 느낄 수 있었다.

 (3)을 적으면서는 피터 월쉬를 생각했다. 그는 속된 말로 금사빠의 전형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는 희망도, 절망도 사랑에서 온다. 인도에서 돌아오자마자 클러리서를 만나러 가지만, 그녀가 자신보다 파티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자마자 풀이 죽는 식이다. 그러나 피터 월쉬의 사랑은 젊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것과 같은 소유욕이 아니라 순정에 가깝다. 클러리서와 자신이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테면 자신이 그녀의 파티를 견딜 수 없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조건적으로 호의를 바치는 늙은 피터의 모습으로부터는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돌이켜보면 정말 좋다고 생각했던 소설들 중에 서사가 빈약한 소설은 많았어도, 인물이 빈약한 소설은 없었던 것 같다. 이야기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 나도 자폐적인 고민들을 관두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 필요를 느낀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공감하고, 질료를 변경하겠지만, 형상만은 기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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