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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알베르 카뮈, <최초의 인간>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최초의 인간(Le premier homme)⟫, 열린 책들, 1995. 번역이 무척 매끄럽다.

"난 너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아니,] 바로 그러니까. 타락했다 하더라도 사랑의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왕이며 이 세상을 정당화해 주는 사람들이다."(313, '노트와 구상' 중)

카페 무네이

 카뮈는 자신의 삶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었던 이 자전적 소설을 쓰던 도중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운명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완결된 의의라는 사탑에 봉인하는 영광을 가로막은 것이다. 그는 불시의 사고사로써 부조리의 철학을 증명했으며, 설령 운명의 일격을 피하는 데 성공해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마 같은 증명에 성공했을 것이다. 이 위대한 문학이 헌정될 예정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에.

 카뮈의 분신 자크 코르므리는 역사적 뿌리도, 신앙도, 조국도 없이 오직 가난한 어머니의 품에 내던져진 채로 태어난다. 그는 자신에게 삶의 윤리와 진리를 가르쳐줄 아버지가 전쟁에서 죽고 없으며, 모든 가치를 제 힘과 지성만으로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최초의 인간'이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자크와 달리 설령 온갖 전통에 얽메인 상태에서 태어난 인간이 있을지라도 그녀가 최초의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규범 없이 태어난 인간은 규범을 창조하고, 규범 속에서 태어난 인간은 규범에 반항할 뿐이다. 그리고는 그토록 반항적이었던 스스로가 미래에는 새로운 규범이 되어 자신의 딸과 아들에게 반항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좋은 소설에는 밑줄 칠 곳이 없다는 김영하 작가의 말이 이번에도 들어맞았다. 예쁘고 단편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일보다도 인물이 그 속에서 생동하는 행위의 연쇄를 상상하는 일이 관건이다. 정제된 문장이라든지, 세련된 문체 같은 것은 이제 부차적으로 느껴진다. 단 한 번도 퇴고되지 않아 콤마조차 없이 내달리는 이 미완의 대작을 생각하면 말이다. 멋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 표현이 아니라 내용이 중요하다. 장면이 아니라 영상이 중요하다.


 필사하지 않을 수 없던 구절. “오른쪽에서 헐떡거리며 걷고 있는 늙은 의사와 동행하며 어딘지도 모른 어둠 속을 걸으며, 광장에서 들려오는 한줄기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야외 음악당 주위 아랍인들의 단단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 베이야르의 웃음과 고집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리고 폭발의 소리가 들리자 파랗게 질리던 어머니의 얼굴을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정다움과 슬픔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망각의 당에서는 저마다가 최초의 인간이었다. 땅에서는 역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랐을 , 이야기를 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집안의 비밀을, 혹은 오랜 옛날의 고통을, 혹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순간들, 우스꽝스럽고 가증스러운 폴로니어스조차 레어티스에게 말을 함으로써 돌연 어른이 되는 그런 순간들을 그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었다. 열여섯 살이 되어도 스무 살이 되어도 아무도 그에게 말을 해주지 않았고 그는 혼자서 배우고 혼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잠재적 능력만을 지닌 자라고, 혼자서 자신의 윤리와 진실을 발견해 내고 마침내 인간으로 태어난 다음 이번에는 더욱 어려운 탄생이라고 , 타인들과 여자들에게로 새로이 눈뜨지 않으면 되었다. 고장에서 태어나 뿌리도 신앙도 없이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하나씩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결정적인 익명성으로 변한 나머지 자신들이 위에 왔다가 하나의 거룩한 흔적인, 지금 공동묘지 안에서 어둠에 덮여 가는 명문을 읽을 수도 없는 묘석들마저 없어져 버릴 위험이 있는 오늘, 모두 함께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눈뜨며 새로이 태어나는 법을, 자신들보다 먼저 위를 거쳐 갔고 이제는 종족과 운명의 동지임을 인정해야 마땅할, 지금은 제거되고 없는 정복자들의 엄청난 무리들에 눈뜨며 새로이 태어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되듯이.”(20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