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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엘프리데 옐리네크, <욕망>

엘프리데 옐리네크, 정민영 옮김, ⟪욕망⟫, 문학사상, 2006.

"아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 아이는 백인이지만 햇볕에 구릿빛으로 그을렸다. 저녁 때 엄마는 아이를 씻길 것이고 아이를 위해 기도할 것이며 아이의 시중을 들 것이다. 그러면 아이는 엄마에게 매달려 아버지가 엄마의 굴속으로 들어오도록 허락한 벌로 그녀의 젖꼭지를 깨물 것이다. 듣고 있는가? 이것 자체가 언어고 그 언어는 할 이야기가 있다."(35, 강조는 필자)

옐리네크는 2004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자신보다 한트케가 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2019년에 실현되었다.

 읽기가 정말 힘든 책이다. 그런데 이 어려움은 ⟪욕망⟫의 순전히 부수적인 속성이 아니라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움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성에 대한 묘사가 노골적이며 무엇보다 잔인하다. 마을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자기 휘하에 둔 채 언제든, 누구든 해고할 수 있는 권력의 소유자인 공장장은 집에 돌아온 뒤로도 자신의 힘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매일 같이 집요하게 아내 게르티의 성을 요구한다. 게르티는 남편의 손길이 싫지만 그에게 경제적으로 예속되어있기 때문에, 자신을 향해 빗발치는 모든 지저분하고 고통스러운 요구들에 응해야 한다. 옐리네크는 조금의 과장도 보태지 않고 (총 300쪽 정도 되는 책 전반에 걸쳐) 두세 쪽에 한 번씩 강간에 가까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즉물적으로 묘사한다.

 그 묘사들이 지시하는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게르티가 선택하는 것은 또 다른 남자와의 밀애다. 옐리네크는 게르티의 선택을 건조하기 짝이 없는 문체로 냉소한다. 그로써 옐리네크는 게르티가 사랑의 이름 하에 미하엘이 자신을 구원해주기를 원한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낭만의 기름기를 제거한다. 게르티의 애인 미하엘은 스포츠를 즐기는 잘생긴 대학생으로, 여러 면에서 ⟪피아노 치는 여자⟫의 발터 클레머를 연상시킨다. 젊음과 헤게모니적 남성성 모두를 소유한 그는 사회의 먹이사슬 내 최상위 포식자다. 그런 미하엘은 게르티의 (유일한) 희망에 반해 나이가 많은 그녀에게 호기심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고, 심지어 술에 취해 분별력을 잃은 그녀를 자신의 친구들이 추행하도록 방관한다. 절망한 최약체 게르티는 무력하게 술독에 빠진다.

"순식간에 힘으로 정복할 수 있는 짧은 길, 성기들이 열리고, 그것들이 서로 올라타며 속력을 올린다. 그리고 구원을 갈구하며 끙끙댄다. 더 격렬한 시간을 갖기 위해 그들이 거기에 빳빳하게 꽂아두고 있는 많은 몽둥이들로 인해 여자들의 배 속에서 천둥소리가 난다. [...] 숙녀 여러분, 우리는 남성의 나라에서 채소처럼 즐겁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245)

 가부장제 하의 남편과 아내 사이에 성립하는 수직적 권력관계는 자본주의 하의 공장장과 노동자 사이의 수직적 권력관계와 교차된다. 공장장이 자신의 욕망을 채운 뒤 곤히 잠에 들어있는 시간 동안, 그에게 고용된, 미래가 불안정한 노동자들은 벌써 출근을 준비하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에서 옐리네크는 발달해있는 스포츠 산업, 빛나는 스키복 그리고 운동을 마친 후 긴장을 푼 채 웃고 떠드는 젊은이들을 맹비난한다. 옐리네크에게 스포츠는 빈부격차의 심각성 그리고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망각하게 만드는 시민들의 아편으로 표상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두 번째 어려움이 바로 이 같은 비난의 보편성과 수위와 관련되어있다. 옐리네크는 의도적으로 강약 조절을 하지 않는다. ⟪욕망⟫의 날선 언어는 시종일관 강하게 몰아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하지만 이제 잠시 쉬시게나!"(296)일 수밖에 없다. 조금의 완화도 허락하지 않는 옐리네크의 강세는 읽는 이로 하여금 더 이상 가족에, 사랑에, 부에, 스포츠가 내는 땀에 낭만을 가질 수 없게 만든다. 다른 소설이었더라면 약간은 미화되었을 법도 한 미하엘과 게르티의 모험적인 사랑마저 옐리네크에게는 사회적 위계의 기계적인 징후, 미하엘의 '사냥'에 불과하다. 남성이 여성을 소유하는 사회에서 사랑은 성립할 수 없다, 소유물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자신의 지배자에 대한 욕망 또한 어떻게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것이 옐리네크의 진단이자 물음이며, 무한하게 파괴적인 언어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언어의 지나친 강력함이 비난의 칼날을 도리어 무디게 만든다. 아무리 자극적인 내용이라고 해도 그에 쉼없이 노출되면 더 이상 자극적이지 않게 되듯,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 수록 맹비난의 효과는 줄어들기만 한다. 강약 조절의 실패는 적어도 이 책에서는 문제가 아닐 수 있겠지만, 분량 조절의 실패는 문제다. ⟪욕망⟫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엔 너무 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기를 권유하고 싶은 이유는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면--의 결말 때문이다. 결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