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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단편소설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문학동네, 2021(고려원, 1995의 재출간).

"대신에 "난 외로워서 상처를 입었거든" 이렇게 언젠가 말하였다.
"나는 애정 속에서 질식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49)

충무로의 공중도시

 배수아의 문학세계가 어떤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잉태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단편집이다. 등단작인 '1988년의 어두운 방'이 실려있다. 작가의 시선은 일관적으로 도시의 여자들에게 향하며, 그들에 대해 일종의 유형학을 수행한다.

 도시의 여자들은 결혼을 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로 나뉜다. 결혼을 한 여자들은 백이면 백, 생명력을 잃는다. "여전히 이태리제 청바지 광고 모델처럼 생기발랄하고 만족하는 듯한 미소를 하고 있어도 옛날의 오래된 사진관에서 빛나는 한여름의 거리로 뛰쳐나오던 불타는 뺨을 가진 소녀는 어느 순간엔가 죽어버린 것이다."('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58) 그러다가는 다양한 이유로 이혼을 하고, 자신의 처량함을 알면서도 다시금 결혼의 덫으로 되돌아간다. "엄마는 아버지 없이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어린 준이에게 말하고 또 말하였다. "나는 너를 지켜주지 못한다. [...] 난 너에게 힘이 되지를 못해. 이 세상은 힘들고 또 힘들다. 다른 여자들은 힘이 있고 용감하지만 난 그렇지 못해. 널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냐. 나는 바람에 거칠어지면서 선인장처럼 널 안고 우뚝 서고 싶지가 않아. [...] 새로운 아버지가 생겨도 너는 이해해야 돼."('인디언 레드의 지붕', 308) 이혼을 하지 않으면, 아이를 너무 많이 낳거나 병으로 죽는다.

 반면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들은 삶의 허망함에 몸서리친다. 그들은 "섹스의 기쁨도 모르고 사랑의 감동도 없"으면서 쓸쓸함을 견디다 못해 남자들을 만나야 하고('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83), 여행을 갈 때 꼭 콘돔을 챙겨 자신과 달리 결혼을 한 정숙한 자매를 놀래키며('아멜리의 파스텔 그림'), 그나마도 생각하지 못했을 때는 임신을 해버리고 만다('여섯 번째 여자아이의 슬픔'). 안정적인 직업을 찾는 데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잠들기 직전에 다섯 잔째의 블루마운틴 커피를 마실 수만 있다면, 줄담배를 피울 수만 있다면, 주말마다 정말이지 공연한 이유로 바다를 찾아갈 수 있기만 하다면 삶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애초에 삶은 그에 대해 집착할 만큼 웅장한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석이가 너를 좋아할는지도 모른다. 그애 말대로 네가 예쁘고 하얗기 때문에. 네가 어두운 시장 거리를 달려 밤마다 경혜의 집에서 돌아오는 것을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면서 몰래 따라왔을 것이다. 그 나이의 소년은 누구나 고독하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이 어린 네 명의 동생들 때문에. 그러나 너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불행한 소년이 너를 좋아한다고 해서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시간이 되면 돌아와야 하는 집과 마찬가지로 현실은 거기에 그냥 있을 뿐이다. 너는 언제까지나 그렇게 앉아 있게 될 것이다."('엘리제를 위하여', 195-6, 강조는 필자)

 국어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새침한 대화가 좋았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마구 흘러가는 이야기도 좋았다. 그 모든 활자들에 배수아의 개성이 보이지 않는 세리프처럼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많은 쓸쓸함의 조각들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쓸쓸한 사람들이, 쓸쓸한 도시에서, 쓸쓸한 사고와 행위에 몸담다 죽어버리거나 적어도 무대 위에서 사라지는 것이 전부다.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간 소설은 조각나있던 이미지들을 마지막에 가서 하나로 수렴시키는 데 성공한 '검은 늑대의 무리' 하나뿐이었던 것 같다. 문학적 서사는 요소들의 단순한 병렬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한다. 독자는 상이한 요소들이 서로 부딪히거나 스며들면서 생겨나는 우연한 (또는 너무 치밀하게 계획돼서 우연처럼 보이는) 효과를 기대한다. 그런 돌발적인 상호작용이 없다면, 전체가 하나의 신비로 묶여주는 데서 오는 흥분의 느낌이 없다면 소설은 장면들의 슬라이드쇼에 불과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