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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단편소설

신종원, <전자시대의 아리아>

신종원, ⟪전자시대의 아리아⟫, 문학과지성사, 2021.

나도 죽기 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책을 한 권 내볼 수만 있다면, 소망하게 만들 정도로 디자인이 아름답다.

https://www.youtube.com/watch?v=k32dMyHTnUE 

 음악은 특정한 규칙을 가지거나 가지지 않는 파동이다. 파동에 불과하다. 따라서 음악은 반드시 아름다울 필요도 없고, 비음악적 소음, 이를테면 이명 같은 것과 질적으로 구분될 이유가 없다. 심지어는 인간의 존재함 자체가 필연적으로 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음악의 일종이다. 비음악인 줄 알았던 우리가 음악일 수밖에 없다. 음악으로 살고 음악으로 파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음악인 한에서, 우리는 모두 녹음기이거나 스피커인 기계-인간이며 단조이거나 장조이거나 무조일 뿐 인격도 성별도 사실 무차별하다.

 보르헤스를 연상시키는 섬세하고 무시무시한 개성의 탄생. 세련된 문체가 매혹적이었지만, 조금 더 흡입력 있을 중장편을 기대해본다. 인상 깊었던 대목들을 발췌하고, 소설을 읽으며 자주 들었던 야나체크의 피아노 소나타를 첨부한다.


 "중얼거리는 인간의 음성신호와 닮았다든지. 그렇다면 어떤 말들은 언젠가 음악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손을 떠는 여자 하나가 어둠 속에서 내 인생은 망했고 앞으로도 망할 거야라고 수없이 반복해서 말할 때, 단 한 순간, 그녀의 음성 파형이 수백 곡의 교회 아리아 가운데 한 소절과 정확하게 맞물린다면, 과연 누가 이것을 음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53, <전자 시대의 아리아>, 강조는 저자)

 "그리하여 주어지는 실마리 하나. 너는 세계에 남겨진 음악적 표상이다. 보표 위에 웅크린 4박자 리듬의 음표이다. 거뭇거뭇한 털로 뒤덮인 너의 몸체를 좀 보기. 둥글고 볼록한 배를. 영락없는 온음표의 모습이다. 모든 흐름이 바로 이곳에서 4박자 쉬어가야 한다. 그게 약속이다."(94, <멜로디 웹 텍스처>)

 "실제로 지난 몇 주간 네가[음악-거미가] 만든 집들은 모두 엄격한 조형 질서를 따르지 않았던가. 악보 종이를 가로지르는 다섯 개의 가로줄눈. 그 위에 버찌 과실처럼 맺힌 2박자 음표와 이따금 레가토. 이따금 슬러. 너의 집은 이른바 음악의 머리말, 살아 있는 주석, 입체 부록이 아니었던가. [...] 너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물을 바로 지금, 너 자신이 빚어내고 있다는 성취감으로."(97, <멜로디 웹 텍스처>)

 "[00:00] [...] 그런데 지금 여기. 도시에서 가장 높은 노지에서 바라보니. 실은 수천 킬로미터 길이의 비디오테이프 여러 개가 하늘 위에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이지 않은가. 그것들이 지구라고 이름 붙인 모의 지표면을 빠짐없이 휘감고 있고, 얇고 반듯하게 인쇄된 임의의 타임라인을 따라 끊임없이 재생되며, 모든 생장 징후가 결국은 이처럼 미리 녹화된 영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눈앞에 남는 것은 거대한 루프-이미지의 정지된 일부분들뿐이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결국은 하나의 쇼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23]"(120-121, <옵티컬 볼레로>, 강조는 저자)

 "모든 것을 바라보는, 부동 상태의, 전지적인 시점 하나. 오늘날 불교에서는 관세음보살, 기독교에서는 야훼로 착각되는 그 지고한 존재가, 먼 옛날, 스스로의 모습을 본떠 만든 피조물, 약칭: 옵츄라는, 창조자의 권능을 대리 행사하며, 용량이 무한한 기록 장치로서, 다음 창조 작업에 참고하기 위한 대용량 레퍼런스를 하늘 위로 전송하고 있는데. [...] 녹화를 멈추지 마세요. 미리 복제된 당신의 이미지가 새로운 창조 주기에서 당신의 영혼을 대체할 수 있도록. 롤링. 롤링. 롤링!"(142-143, <옵티컬 볼레로>)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제가 아는 최고의 음악가입니다. 음악의 실체가 무엇인지와는 상관없이. 다만 음악과 끝장을 보겠다는 끈질기고 부지런한 태도. 누가 됐든 악보 종이가 수기 흔적으로 새까맣게 칠해질 때까지 연필 머리를 놓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악보에 한해 그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달인이 아니겠습니까?"(185, <비밀 사보 노트>)

 "두드러기? 두, 두, 두드러기? 마, 막, 부풀어 오르는? 폐, 폡, 폐부 안에서? 수, 수. 숨을 고를 때? 기, 기, 기도가 막히는? 부, 붑, 부종의 크기? 으, 응, 응급처치가 필요해? 수, 숨, 숨이 막혀서? 자, 자, 자리에서 벗어나? 누, 누, 눈앞이 뿌예짐? 그, 그, 그런데 아무도 모, 모, 못 알아채고? 저, 저, 전문가라는 양반들이? 우, 우, 우리를 너, 너, 너를 자, 잘 이, 이해, 모, 못 해? 그, 그, 그래서 어떻게 돼? 어떻게 되다니. 엄살은 그만 떨어라."(201, <비밀 사보 노트>, 강조는 저자)

 "나중에, 이 불운한 어부들은 그물에 걸린 게 멸치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물론 때는 늦었다. 노래는 후두음으로 만들어진 올가미. 형식은 카논. 입에서 입으로 무한히 반복되는 대위법 합창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이렌의 저주다. 토머스 앨바 에디슨을 찬양하라! 이 괴짜 미국인 발명가가 최초의 축음기 모델을 제시한 이후, 수많은 세이렌이 죽거나 목소리를 잃었다. 그라모폰에서, 전화기에서, 라디오 장치에서 되돌아오는 자기 노래를 듣고 쇼크 상태에 빠진 세이렌들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276, <작은 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