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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백은선, <도움받는 기분>

백은선, ⟪도움받는 기분⟫, 문학과지성사, 2021

카페 'mwm'에서

  화자는 무인 존재가 되고 싶다. 생명을 저주하는 삶이고 싶다. '0'이라는 기호를 동경하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민한다.

 절망, 하강, 몰락, 우울에 대한 열정과 그로부터 따라나오는 역설적인 생기로 넘치는 이 시들을, 단순히 모순으로 취급해버리지 않기 위해 나는 어떤 독법을 선택해야 할까. 어쩔 줄을 몰라서 그저 읽고 또 읽었다. 잘 와닿지 않은 구절도, 마음을 날카롭게 찌르는 구절도 모두 수용하려 애쓰며 페이지를 끝까지 넘겼다. 그렇게 내내 혼란스러웠던 마음으로, 아픔과 슬픔으로 가득한 이 시집의 끝에 다다랐는데 어째서 나는 '도움받는 기분'을 느낀 것일까? 그 숱한 아픔과 슬픔을 죄다 통과하고도 어째서?

 이전에 최승자 시인의 시집을 박하게 평가했었다. 우울을 반복적으로 토로하기만 하는 일의 비생산성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이 시집을 읽으면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만일 우울에 대한 반복적 토로, 우울의 시적 정제, 우울을 재료로 한 언어구조물의 형성이 작가가 우울을 딛는 데 도움을 준다면? 그리고 우울에 대한 반복적 토로, 우울의 시적 정제, 우울을 재료로 한 언어구조물의 형성이 마찬가지로 우울한 독자에게 '도움받는 기분'이나마 전달할 수 있다면? 이 시집을 통해 나는 이 물음들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게 됐고, 시의 영역에서까지 생산성을 따졌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그러니까 나의 (잠정적) 결론을 의문문의 형식으로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도움이 아닌 도움받는 기분을 주는 데서 멈춘다는 것, 그것을 한계라 말하는 것이 온당한가? 그것도 문학의 영역에서. 하지만 어째서인지 여전히, 어딘가 찝찝하다. 나의 고민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두서 없는 글이 돼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