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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갈산 치낙, <푸른 하늘>

갈산 치낙, 서경홍 옮김, ⟪푸른 하늘⟫, 수다, 2011.

작가 갈산 치낙은 광활한 알타이 산맥의 유목민으로 태어나 베를린에서 유학했다. ⟪푸른 하늘⟫ 또한 독일어로 쓰인 작품이다.

 사람이 성취가 아닌 상실을 통해서 비로소 비약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아이러니다. 무겁게 침묵하는 푸른 하늘과, 부산스럽게 새 제도를 쏟아내며 전통문화에 러시아식 정치사상을 혼입하는 사회 사이에 어느 투바 족 유목민 아이가 끼어있다. 아직 초등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나이지만 형제와의 이별, 할머니의 죽음, 개 아르지랑의 죽음을 거치며 처음으로 실존의 의미를 묻게 된다.

 첫째, 누나 토르라아와 형 갈카안이 새로운 공화국의 설립과 함께 의무가 된 초등교육에 참여하기 위해 유르테(게르)를 떠난 일은 아이에게 자신 또한 언젠가는 가족과 유목사회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리라는 불안감을 심는다. 오랜 시간 동안 화폐 문화조차 제대로 정립된 적 없이 오직 양을 치고 우유를 짜며, 가축을 도살하고 그 가죽을 벗겨내며, 그리고 계절에 따라 이동하면서 유르테를 헐고 다시 지으며 의식주를 해결하던 유목민들도 세간적인 풍파는 피해갈 수 없었다. 그들은 새 정부에 의해, 가축을 기르는 대신 봉급을 받아 먹고 사는 공무원들에 의해 이제는 관리의 대상이 되었다. 천 마리의 양을 가지게 된다 해도 아이는 전설적인 '바이'가 될 수 없고 단지 '뛰어난 유목민'으로 남을 뿐이다(127). 무한히 뻗어나갈 것 같았던 산맥이 더 넓은 세계의 작은 일부로 전락한다.

 "형과 누이가 돌아올 거라는 좋은 소식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항상 나를 슬프게 했다. 내 마음속에도 이 모든 것들, 가축들과 아르지랑과 고향과 부모님과 검은 산을 떠나야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 내 가축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할머니와 내가 함께 살 유르테는 어떻게 마련하지? 어쩌면 나도 언젠가 선생님이나 다르가가 되어 가축 대신 봉급을 타서 살게 되지 않을까? [...] 그렇게 된다면 나는 지금까지 내 것이었던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167-168)

 둘째, 할머니의 죽음은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의 토대의 상실을 의미한다. 아이의 부모 역시 아이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들의 양육 방식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매정하고 거칠기만 하다. 투바 족의 유아는 그나마 맑은 정신을 가지게 될 때까지 유르테 안의 가구에 동동 묶여있으며, 그 신세를 벗어나자마자 노동의 짐을 떠안게 된다. 주인공 아이 역시 자유롭게 유르테 안팎을 드나들게 된 동시에 개 아르지랑과 함께 양을 치고 나중 가서는 아버지의 도살 작업까지 거든다. 이것은 부모인 힐방과 쉬니크가 유난히 매몰차서가 아니라 초원에서의 삶이 그만큼 험난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휴식과 위안을 주는 것은 부모보다도 (타지에서 온) '동구르 호오춘' 할머니다.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아이를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미소로써 평안을 선물한다. 진실된 내리사랑의 의미를 아이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런 할머니의 죽음은 아이에게 유년기의 종말이나 다름 없다. 이제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용서 받고 되돌아갈 수 있는 품은 사라졌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의 품이자 토대가 되어 발전해가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유르테 안을 빙 둘러보았다. 할머니가 항상 앉아 있던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할머니는 사윌(대나무로 만든 찻잔)로 차를 먹여주었다. 나를 깨우는 할머니의 목소리와 토닥거림을 느끼면서 잠에 못 이겨 겨우 눈을 뜨곤 했었다. 할머니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할머니의 자리도 치워져 있었다. 할머니가 앉아 있던 겹쳐놓은 세 장의 양털도 없어졌다. [...]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을 신고 겉옷을 걸친 다음 허리띠를 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160-161)

 셋째, 개 아르지랑의 죽음은 아이에게 생존의 무게를 각인시킨다. 아르지랑은 소설의 초반부터 명랑한 벗이자 늠름한 동료로서 주인공 아이를 졸졸 따라다닌다. 그는 늑대가 나타나면 울부짖음으로써 양을 지키고, 꽁꽁 얼은 가죽을 벗겨내야 할 때 그것이 잘 벗겨지도록 힘으로 가축 시체를 내리치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부에서 아르지랑은 양을 치는 대신 늑대나 여우를 잡을 요량으로 아버지가 쳤던 덫에 걸리고 만다. 혹독한 추위를 겪고 많은 양을 잃은 뒤였으므로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도리어 그 선택이 가족의 소중한 일원을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아이는 부모에게 그들이 아르지랑을 죽였다면서 저주의 말을 퍼붓고, 푸른 하늘 너머의 절대자를 향해서는 더 이상 당신의 종이 되지 않겠다고 외치며 불경을 저지른다.

 "정신이 맑아졌다. 할머니도 없고, 아르지랑도 없고, 그리고 내 것이었던 가축들도 없고, 형제들과도 떨어져 있고, 하늘과도 사이가 나빠졌다. 이제는 아버지 어머니와도 갈라서려는 지경에 있었다. [...] 난 모든 힘을 다해 울부짖었고, 나 자신을 때렸고, 쓰러지고, 바닥에 뒹굴고, 펄펄 뛰고, 다시 넘어지고, 다시 바닥에 뒹굴고, 다시 금방 일어났다. 내 출생과 내 생존은 아무 의미도 없었어! 나의 꿈도 나의 기도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해주었던 축복의 말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찬양의 말과 약속들과 내가 쌓은 노력들도 전부 다 의미가 없어. 사람들이 '삶'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나는 사기를 당한 거야!"(233)

 소설은 아이가 무력감 속에서 차라리 죽기를 염원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끝맺어진다. 그러나 독자는 이것이 결코 새드엔딩이 아님을 직감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 아이를 다소간 멀찍이, 그러나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는 힐방과 쉬니크가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아들을 데리고 유르테로 돌아갈 것이며, 그에게 고기와 우유를 먹일 것이고, 잠자리가 따뜻하도록 불을 더 세게 피워줄 것이다. 그 온기 속에서 아이는 봄이 와도 가시지 않는 삶의 냉기를 딛을 계기를 얻고, 끝내 마음을 다잡아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양을 칠 것임을, 그것도 아르지랑 없이 그렇게 할 것임을 나는 알 수 있다.


 비록 어린이의 시선과 언어로 그려졌지만 실존적 고뇌의 깊이는 어른의 그것 못지않게 깊었다. 결국은 갈산 치낙 자신인 주인공 아이가 어떻게 지금의 노인이 된 것일지 궁금한 마음이 남았다. 그는 매년 독일인들을 알타이 산맥으로 초대해 유목민의 삶을 체험시켜주는 프로젝트를 담당하는데, 내가 존경하는 작가 배수아가 그에 참여한 바 있다.


 요즈음 기도하고 있는 일이 있다. 나에게도 푸른 하늘은 묵묵부답이지만, 부디 나의 기도가 이루어지고, 나의 세계, 우리 모두의 세계에 평화가 내려앉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