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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구병모, ⟪바늘과 가죽의 시⟫, 현대문학, 2021

 

 경장편소설이 현실적인 목표로서 삼을 수 있는 모든 최선들의 육화. 신화와 역사가 교차하고, 무한자와 유한자가 마주치며, 철학과 서사가 조화되어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한국어 표현들에 길을 잃을 뻔도 하지만, 고요하면서도 흥미진진한 플롯이 나른해진 독자를 다시 일으켜세운다. 구두를 짓는 구체적인 일상에 대한 치밀한--소설가적 양심에 따라 상당한 연구와 취재가 이루어졌음에 분명한--묘사가 자극하는 이미지적 상상력이 고갈될 즈음에는, 이해하기 전혀 어렵지 않은 말로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론적 성찰이 전개된다.

 쑥스러운 고백이지만 내가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면서 쓰고 싶었던 소설이 이런 소설이었던 것 같다. 줄거리를 줄줄 읊는 식의 독후감은 이 책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인상적이었던 삽입된 설화에 대한 나의 실존철학적 해석을 짧게 개진해보고자 한다.

 지금은 '안'과 '미아'라는 현대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등장인물들은 한때 그저 '존재'에 불과했다. 세간의 말로는 정령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존재들은, 서사에 따르면 두 번의 각성의 계기를 거쳐 인간적 자아를 계발하게 된다. 첫 번째 계기는 머나먼 과거에, 주인의 신발을 지키지 못해 벌을 받을 위기에 처한 노예를 돕기 위해 처음으로 구두를 만든 일이다. 타자에 대한 연민과 그의 평화를 기원하겠다는 따뜻한 마음이 최초로 그들에게 구두장이로서의 공통된 자의식과 능력을 부여하며, 그들은 그렇게 아마 신으로부터 선물 받은 힘을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존재들은 이어서 어느 가난한 구두장이 부부가 잠든 틈을 타 낮에 이미 마름질되어있던 가죽을 밤 사이 멋진 구두로 제작해내는 일에 종사한다. 구두장이로서의 자의식과 능력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지만, 존재들은 그것들을 자신의 '자연' 또는 '본성', '필연'으로 받아들일 뿐 조금도 의문시하지 않는다.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면 자신들의 실존에 대해 묻지 않는 채로,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알 수 있는 것을 알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구두장이 부부가 정령들의 존재를 어렴풋하게나마 간파하고, 그간의 노동에 대한 보답으로 각 존재에게 옷과 신발을 선물하는 것이 두 번째 계기가 되어 그들 모두에게 실존에 대한 물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자신이 일삼던 작업이 물 흐르듯 이루어지는 자연적 행위가 아니라 인위적인 보상을 창출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행위임을 깨닫는 순간, 즉 타자에 대한 일방적이고 집단적인 연민이 아니라 타자와의 상호적인 교통이 일대일로 성립한 순간 존재들은 자신들이 통일된 '형제'가 아니라 개별자들임을 인지하게 된다. '개별자됨'의 발견은 '개별적 의지'의 발견으로 이어지고, 구두 만들기는 더 이상 존재들의 숙명이 아닌 선택의 대상으로 그 지위를 탈바꿈한다. 죽지 않는 삶을 영위해오는 동안 오직 안만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구두를 만들며, 다른 형제들은 제 각기 다른 살 길을 찾아나섰다.

 나는 상술한 첫 번째 계기를 '정체성의 획득'으로, 두 번째 계기를 '개성의 획득'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 존재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무지하다. 정체성을 손에 넣은 이후에야 비로소 존재는 의식과 활동의 영역을 당당하게 점유할 수 있다. 그러나 정체성만으로 인간성이 확립되지는 않는다. 정체성은 무수히 많은 다른 존재들과 공유될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은 본질적으로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넘어 개성이 확립될 때, 의식과 활동을 수행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반성하여 변경하거나 더욱 굳건히 만들 때--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고자 할 때--존재는 존재자로 갈라져 나오며 진정한 의미에서 실존하게 된다.

 요컨대 존재는 자연을 따라 물살이 이끄는 대로 휩쓸리지만, 존재자는, 정확히 말해 인간적 현존재는 자신의 행로를 스스로 선택할 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한때는 저마다의 고유한 이름도 가지지 않았던, 거의 하나나 다름없이 결합되어있었던 안과 미아가 상충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안이 자신과 상이한 미아의 지향에 대해 걱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결말이 안이 미아의 선택을 존중하는 것으로 끝마쳐지는 것은 안이 자신과 미아와의 동일성보다도 미아와의 차이를, 미아의 개별성을 더 무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징표다. 둘은 비록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비한 존재지만, 끊임없이 성찰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단순히 흘러가듯 사는 인간들보다도 훨씬 인간적이다.

 물론 하이데거의 개념틀을 차용해 안과 미아의 존재를 인간적인 것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는 부적절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게는 인간의 유한성이 무척 중요한 테마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죽음으로의 선구를 통해서야 비로소 개별적 현존재는 자신의 무한한 자유를 깨닫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택을 통해 본래적인 개별성을 확립할 수 있다. 그러나 안과 미아의 서사는 실존이 반드시 죽음과 연계되어서 분석되어야 한다는 상식적 당위를 파괴한다. 죽음 없이도 실존은 똑같이 무의미의 공포에 빠지고 똑같이 의미의 구원을 받는다. 중요한 것은 유한자냐, 무한자냐가 아니라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이다.

 그러므로 나는 ⟪바늘과 가죽의 시⟫를 반성을 통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모든 존재자에게 바치는 헌사로 읽었다. 나 또한 이 헌사를 위해 소환될 수 있는 존재자가 되기 위해 천천히, 묵묵히, 꿋꿋이 노력하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