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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폴 리쾨르, <후설과 역사의 의미> 요약

Paul Ricoeur, trans. by Edward G. Ballard and Lester E. Embree, Husserl: An Analysis of His Phenomenology,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07 (second edition) 중 Chapter 6 'Husserl and the Sense of History'

"철학의 이념, 이것이 역사의 목적론이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 대한 철학이 궁극적으로는 철학의 역사, 자기인식에 도달하는 철학으로부터 그 자체로 분리불가능한 그것인 이유다."(153, 강조는 필자)

 믿고 읽는 리쾨르

 그 절대성이 무시간적으로 성립하는 에고 코기토를 중심으로 성립하는 초중기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과 '역사철학'은 한눈에도 서로 일관되기가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의 후설은 특히 ⟪위기⟫를 중심으로 역사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간다. <역사의 의미>는 "어떻게 역사적 관점들이 현상학 안으로 도입될 수 있[었]는지"(144-5)에 대한 폴 리쾨르의 철학사적 탐구이자, 후설의 역사철학에 대한 그의 비판을 담고 있다.

 리쾨르는 초월론적 현상학(또는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칸트 등의 철학과 같은 '코기토' 중심의 철학 일반)과 역사철학이 어떤 이유로 또는 어떤 양상에서 대립을 빚는지를 네 가지 지점을 들어 지적한다. 첫째, 논리적 구조의 의미나 이념적 대상의 참됨은 역사와 무관하게 성립한다는 ⟪논리연구⟫의 논리주의와 역사 속의 사실적인 사례들이 아닌 그것들의 의미 또는 본질만을 취하는 ⟪이념들⟫ 1권의 형상적 환원이 곧 "역사에 의한 특정한 종류의 철학으로의 침입에 대한 승리를 지시한다."(146) 둘째, 절대적 자아를 발견하는 초월론적 환원의 의미 역시 역사철학의 걸림돌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역사적 인간은 절대적 의식 속에서 구성된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 역사가 전개시키는 의미는 이 의식을 작동시키는 현상학적 인간을 포함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달리 말해 초월론적 환원은 모든 세속적인 것을 구성하는 근원을 소급지시하는 반면, "역사적 인간은 [...] 구성된 세계의 하나의 "층위""에 불과하다(148, 강조는 필자). 셋째, 비록 후설이 절대적 의식이 담지하는 시간적 구조를 탐구하기는 하지만, 자아가 구성하는 초월론적 시간성과 초월적 역사는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 넷째, 초월론적 자아들의 다수성 역시 문제를 초래하는데, "의식들의 다수성과 역사의 단일성이 공통된 과제의 매개적 기능을 통해 상관적이 된다는 것을 엄밀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 어떤 의식 '속에서" 의식들의 다수성이 정립되는가?"라는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다. "통일화하는 의미, 역사적 과제가 어떤 방식으로든 관통하는 다수성은 나와 당신, 우리, 타자들이 [하나의] 총체로 결합 가능한 방식으로 상위에서 보아질 수 없다; 그와 같은 작용은 이 총체를 자아를 전복할 하나의 절대자로 만들 것이다."(150) 달리 말해--필자가 이해하기에는--역사는 다수의 것인 반면 반성은 1인의 것이고 현상학적 견지에서 전자는 후자에 의해서만 접근 가능하기에 후설에게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역사철학'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어려움들을 인지하면서, 리쾨르는 후설의 텍스트에 드러난 역사의 목적론과 이성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후설에게 위기의 인지는 이념과 의미의 문제로 나아간다. "위기에 대한 의식은 하나의, 그러나 그 구조상 모두를 위한 것인, 역사를 전개시키는 것인 과제의 재승인을 요구한다. 그에 응하는(In return) 역사는 그것의 목적론의 매개를 통해서만 그 자신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허락한다 [...] 사건들(events)의 흐름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직접적 반성은 없지만, 의미의 도래(advent)로서의 그것[역사]에 대한 간접적 반성은 있다. 이런 식으로 역사는 이성의 기능, 그것의 고유한 실현의 양상이 된다."(151, 강조는 필자) [본질적으로 이성적인 어떤 목적론이 역사를 통해 실현된다는 후설의 입장은 헤겔의 역사철학에 근접한다.] 역사 속의 인류는 심지어 하나의 목적론 하에 정신적으로 통합된다.

 여기서 리쾨르는 잠시, 중국이나 인도 등이 아닌 "오직 유럽만이 이념을 가진다"는 후설의 악명높은 선언을 두 가지 방식으로 옹호한다(152). 첫째, 비록 유럽, 특히 그리스인들이 최초로 무한한 과제로서의 철학의 이념 즉 인류의 의미를 발견하기는 했지만 결국 그 의미는 유럽인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인류에게도 모두 유효한 것이다. 둘째, "모두를 위한 이념일 수 있는 유일한 이념은 철학"인 와중에 유럽인이 최초로 철학을 수행했을 뿐이다(153).

 "무한한 과제로서의 이성이 역사, 진보적 실현을 함축하기 때문에 역사는 초역사적 의미의 특권적인 계시자(revealer)이다. 나는 미래 지평, 최종적 설립을 향한 기획이기도 한 근원, 근원설립을 밝혀냄으로써 [역사를 통해]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성적] 자기-이해의 역사적 성격은 그것을 편견에 맞선 싸움과 연관시킬 때 분명해진다."(155, 강조는 필자) 

 ⟪위기⟫에 대한 분석을 통해 리쾨르는 후설의 이성 개념에 다섯 가지 성격을 부여한다. 첫째, "이성은 인식에 대한 비평 그 이상이다. 그것은 모든 표의적(significational) 활동들, 사변적, 윤리적, 심미적인 것 등등을 통일하는 과제이다."(157) 이성은 특히 인류의 실존적 위기와 관련된 문제를 취급하는 기제로서, 인간의 의미와 세계의 의미를 서로 결합시키는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다. 둘째, "이성은 "합리적이-됨"으로서 동적으로 이해된다. [...] 이성은 의미없음으로부터 의미를 도출하는 것과 동등할 진화가 아니며, 의미없음들의 부조리한 연속에 해당할 순전한 모험도 아니다. 그것은 움직임 속에서의 항구성, 의미의 영원하고 무한한 동일성의 시간적 자기-실현 [운동]이다."(157-8, 강조는 필자) 셋째, 이성은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윤리적 책임이다. 넷째, 이성의 과제는 역사적 시간 속에서 망각되거나 배반될 수 있는 위험을 품는다. 달리 말해 이성이 인간의 목적이거나 실존의 의미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달성되는 것은 아니다. 다섯째, 이성의 과제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으로 종결된다." 인간은 이제 "그의 무한한 이념들의 상관자"이다(158). 이념을 실현해야 한다는 무한한 과제들의 모습을 가진 이성만이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학문의 위기가 곧 인간 실존의 위기인 이유다.

*불현듯 드는 생각인데, '인간을 그의 실존적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것은 이성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니체와 후설은 서로 상반된 대답을 내놓는 것 같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비이성적 근원에 기대고, 후설은 이성이 부여하는 과제의 수행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철학자가 곧 '문화의 질병을 치유해줄 수 있는 의사'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같다. '철학이 인간을 구원하는가?'에는 둘 다 예스, '이성이 인간을 구원하는가?'에는 답이 갈렸다는 점이 이상스럽다. 철학은 대체 무엇인가?

 

 ★이성에 대한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리쾨르는 후설의 본래는 사변적이었던 '필증성' 개념을 역사철학적으로 재개념화한다. 그에 따르면 ⟪위기⟫ 관련 텍스트에서 "필증성은 이성이 요구하는 성취와 동의어이다. 이것은 완벽해진(perfected) 이성으로서의 인간의 진리가 될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이성은 역사의 무한한 극이자 인간의 소명이다." 다른 후설 연구자들과 달리 리쾨르는 '필증성'의 개념이 ⟪위기⟫의 역사철학적 탐구에서 도외시된다고 보지 않은 것이다. 리쾨르는 "필증성의 표지 하의 삶으로의 소명"에 대해 언급하는 후설의 매뉴스크립트를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필증성은 여전히 제약을 표현하지만, 총체적 과제의 제약이다. 결과적으로, 후설의 역사적 고려사항들은 내면성의 수준에서 이미 완료된 반성적 철학을 집합적 생성의 수준으로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이 틀리지 않다."(160, 강조는 필자) 171쪽에서는 필증성이 '이념의 힘'과 동일시된다.

 이어서 리쾨르는 후설의 ⟪위기⟫를 차근차근 요약 및 분석해나간다. ⟪위기⟫의 2부에 대한 분석을 끝맺으면서 리쾨르가 후설의 "초월론적 모티프"를 정식화하는 대목은 매우 인상적이다. 첫째, "초월론주의는 질문의 형식 속에서의 철학이다. 그것은 존재와 가치에 대한 모든 정립의 궁극적 원천으로서의 자아로 이끄는 되돌아가 탐문함이다." 둘째, ""성취"란 의미와 존재의 부여함이다. [...] 세계-수수께끼[Welträtsel]는 우리에게 의식의 성취[Leistung]를 계시해준다." 셋째, "근원적 자아는 삶이라 불린다. 사실상 그것의 최초의 작업은 전학문적이고 지각적이다. 자연의 모든 수학화는 [...] 생활세계의 근원적 부여에 비하면 이차적이다."(167, 강조는 필자)

 마지막으로 리쾨르는 후설의 역사철학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내린다. 첫 번째 비판은 후설의 역사가 역사학자들의 역사와 조화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사의 의미와 내면성의 의미의 동일성이 후설에게 역사철학을 정초해준다. 그리고 이 동일성이 그것에 역사학자들의 역사에 비하여 아프리오리한 성격을 부여한다. 그러나 [...] 어떤 조건들 속에서 동일한 이념이 역사와 내면성 모두에 내적 일관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둘째, "역사가 철학의 이념을 자신의 의미이자 실현할 과제로서 가질 수 있는지" 또한 의문이다(169). 역사가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때, 역사는 자신에게 고유한 역사성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여러 철학들을 하나의 철학으로 총괄하는 작업은 해당 작업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철학을 기준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 그리고 여러 철학들을 하나의 과제 속으로 흡수시키는 것이 독단적이라는 점 또한 지적해야 한다. 이와 같이, 의미의 단일성과 사유의 다수성은 서로 충돌한다. 셋째, 후설이 과제로 제시한 것이 과제여야 할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개별 자아로부터 출발해 타인과 역사를 포함한 모든 것을 구성해내고자 하는 초월론적 철학과 각 자아의 "사적인 과제들을 하나의 공통된 기획 속에 정초하고 자아 자체를 역사적 이념 속에 정초"하는 "합리주의적 역사철학"은 양립할 수 있는가?(172, 강조는 필자)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상호주관성의 정초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리쾨르의 결론적 질문은 다음과 같다.

"문화의 역사적 성격과 인간을 형성하는 그것의 명백한 힘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위해, 흄을 통해 꿰뚫어진 데카르트의 유아론으로부터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 동시에 데카르트의 처음 두 성찰들의 불편한 발견에 충실하게 머무르기 위해, [인간에게] 외부적인 신과 동급으로 고양되는 절대적 역사라는 헤겔적 덫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