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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Rudolf Bernet, Iso Kern, and Eduard Marbach, <An Introduction to Husserlian Phenomenology> 일부 정리

Rudolf Bernet, Iso Kern, and Eduard Marbach, An Introduction to Husserlian Phenomenology,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93

 

 출간된 지 30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자주 추천되는 후설 입문서로, 내가 읽은 것은 1989년에 독일어로 쓰인 책이 영어로 번역된 판본이다. 세 저자 모두 노령임에도--또는 그 연륜의 덕으로--아직까지도 현상학 학계 내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벨기에의 루뱅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쳤으며, 후설리아나 전집 편집에 참여했다. R. Bernet은 하이데거의 철학과 정신분석학까지 넘나들면서 넓은 관심 분야를 소화하고 있고, I. Kern은 후설과 칸트의 비교연구로 유명하다. 한편 E. Marbach는 현재 루뱅 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자아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알려져있고, 최근에는 허구적 존재자에 대한 현상학접 접근을 취급한 논문을 냈다.

 책의 내용물에 대해서 말하자면, 요즘 들어 출간된 책들 중 수준 높은 입문서로 인정받고 있는 단 자하비의 ⟪후설의 현상학⟫에 비해 박진감은 떨어졌지만 잦은 인용이 신뢰감을 줬고, 이남인 선생님의 ⟪현상학과 해석학⟫에 비해 서술의 명료함이 부족했지만 후설의 철학 전체를 테마별로, 그러나 물 흐르듯 조감할 수 있어 좋았다. 석사논문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부분들만 모아 정리한다. 모든 밑줄은 필자인 내가 처리한 것이다.


초월론적 환원 1905년에 고안된 현상학적 환원의 주된 성취는 "방법론적으로 그리고 판명하게 현상학적 분석의 탐구 영역을 그것의 특징적인 고유함 속에서 경계지우는 것"이었다(59, 강조는 원저자). 이와 같은 고유함의 유지는 "의식에 대한 자연적 경험적 통각과의 연결을 계속해서 차단함으로서" 가능했다(61, 강조는 원저자). 달리 말해, 현상학적 환원은 자연적 태도로부터 탈피함으로써 의식을 물화하거나 자연화하는 경향성에 맞서 의식에 고유한 본질[Eigenwesentlichkeit]을, 순수한 소여의 영역을 방법론적으로 확보하고자 한다.

 책에 따르면 현상학적 환원의 동기는 철학함의 동기, 즉 철학의 이념 자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후설이 환원을 통해 추구한 순수 주관성, 즉 초월론적 주관성으로의 귀환은 "철학이 무엇에 대한 것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성취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62). 후설은 철학사를 돌아보면서, 고대의 그리고 근대의 회의주의에 초월론적인 주관성으로의 전회에 대한 동기가 숨겨져있음을 깨닫는다. "객관으로 향해진 모든 인식의 기반으로서 세계의 소박한 주어짐"을 문제 삼은 회의주의는 세계의 즉자존재 및 그것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의심에 부쳤고, "인식의 가능성이라는 에니그마"를 모든 인식의 타당한 전제로서 "궁극적인 또는 그 자체로 일차적인 기반"을 찾음으로써 해소해야 한다는 과제를 산출하게 되었다(63). 후설의 현상학은 이러한 과제를 자신의 것으로 이어받은 셈인데, ⟪제일철학⟫ 강의들에서 드러나듯이 "철학에 대한 후설의 이념은 회의주의의 문제의식과 인식의 비판에서 처음으로 출발해 초월론적 환원의 발견과 함께 자신에게 적절한 기반을 찾았고, 초월론적 구성이라는 보편적 지위를 가진 문제 속으로 스스로를 전개하기 시작했다."(65) 그리하여 후설에게 있어서 초월론적 차원에 대한 간과는 철학의 이념에 대한 간과를 뜻하게 되었다(IP, 24ff).

 후설은 초월론적 환원의 다양한 길들을 개발했는데, ⟪이념들⟫ 3권에 수록된 결어(Nachwort)에 따르면 이 길들은 모두 "동등하게 가능한 길들"로서 "자연적 태도로부터 철학적 태도로" 이끌어주고, "초월론적인 기반이 [...] 곧 구체적으로 철학적인 경험의 양상의 기반"임을 보여준다(65, 강조는 원저자).* 또한 초월론적 주관주의를 향한 근대철학의 비밀스러운 열망이 분출된 중대한 철학사적 계기들과 세 가지 환원의 방법들은 상통한다. 첫째는 데카르트의 성찰과 데카르트적 길, 둘째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존재론적 길, 셋째는 영국 경험주의에서 브렌타노로 이어져온 '내적 경험'에 대한 탐구와 관련된 지향적 심리학을 통한 길이다.

*Kern (1962)나 Landgrebe (1961)와 달리 세 환원들의 우선순위에 대해 큰 의견이 없는 것 같다. 또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존재론의 길을 연결하는 것이 새로운데, 사실 어떤 양상으로 연결된다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71쪽 인용문 참고).

① 데카르트적 길: 회의주의와 데카르트의 성찰과의 연결 속에서 "후설은 자신의 방법을 현상학적 또는 초월론적 에포케라고 명명한다. 이 관점에서 지배적인 생각은 몰입하는(straightforward) 또는 "실증적인" 인식과 학문에서 알려진 바대로의 초월적 경험의 전체 세계로부터의 방법론적 이탈(disengagement), [그것의] 괄호치기, 또는 유보(suspension)이다. 여기서 목표는 설령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세계-전멸"의 아이디어) "남아있을" ("잔여물"의 아이디어), 그리고 새로운, 초월론적 학문을 고로 시작시킬 수도 있는 관점으로부터 순수한, 내재적인, 구성적인 주관성을 시야 안으로 끌어오는 것이다."(66-67, 강조는 필자) 비록 데카르트로부터 영감을 받기는 했지만, 후설은 데카르트와 달리 '나'를 넘어서 내 외부에 존재할 즉자존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의 가능성을 탐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내재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의식의 인식 가능성을 탐구한다. 또한 후설은 연역이나 증명을 동원하지 않고 "인식의 본질적 가능성들에 대한 설명(clarification)"을 추구했을 뿐이다. "다양한 방식들로 객관성을 구성하는[,] 지향적으로 성취하는 의식의 삶에 대한 순수한 주제화에 기반한 설명"을 말이다(68, 강조는 원저자). 많은 비판을 받아온 '세계 무화-잔여의 도식'은 세계가 정말로 무화되어도 의식이 잔존한다는 고집스러운 주장이 아니라, 코기타치오네스로 이루어지는 의식의 삶과 세계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으며 기존의 말하자면 친숙한 상관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다는 데 대한 통찰이다.

"It does not regard world and consciousness somehow speculatively “from the outside” in order then, for example on the basis of a methodical doubt, to establish that, in spite of the annihilation of the world, consciousness remains as a “residue”--a thought which surely could not be carried to fulfillment. Rather, “world-annihilation” is the title for an insight gained solely from reflecting on the life of consciousness and its possible course, an insight into the “style of correlation[Korrelationstil] characteristic of the discordance in the universe of my possible cogitationes,” and hence an insight into the “essential possibility of modifying” the style of concordance (EP I, 337f.; Id I, 634)."

 그러나 데카르트적 길에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그것이 "회의주의적 문제의식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에, 반성의 범위가 "현행적으로 현전하는 의식의 흐름"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지향적 대상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승인[Daseinsgeltung]을 만들어줄 수단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순전히 일시적인 내재적 경험들을 기반으로 [한] 초월론적으로 이해 가능한 "세계" 전체(코기타툼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승인의 수단은 더더욱 가지지 못했다."(69) ❶쉽게 말해 초월적 대상과 세계의 현존타당성[Daseinsgeltung]을 복원시키는 데 무능했다는 뜻이다.* ❷나아가 세계를 상호주관적인 통일체로 설명하는 데 대해서도 무능했으며, 그로 인해 초월론적 유아론이라는 운명에 갇혔다. 이는 ⟪위기⟫에서 후설이 데카르트적 길을 스스로 비판한 것과 연관된다.

*Q. 현상으로서의 대상과 세계만으로는 왜 부족한가? 이 복원이 왜 요구되는지 모르겠다.

A. 현상을 초월하는 객체라는 것의 의미가 주제화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반면 다른 길에서는 (현상이 아닌) 객체의 객관성이 주관적 성취라는 점이 드러난다.

② 존재론적 길: ⟪위기⟫에 따르면 존재론의 길은 데카르트적 길과 정반대의 순서로 이루어진다(Hua VI, 158). "여기서 그는[후설은] 에고 코기토로부터 "직접적으로" 출발하지 않고 도리어 객관적인, 존재론적인 면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우리에게 객관성의 의미를 이해 가능하게 만들어줄 상관적인 초월론적-주관적 고려에 대한 필요를 일깨워주고 싶어 한다."(69, 강조는 필자) 존재론의 길은 소박하게 "몰입하는 의식을 그 자체로 그리고 지향적으로 성취하는 주관성의 완전한 구체적 맥락 속에서 보편적으로" 고찰함으로써 모든 대상 인식에 숨겨져 있는 "불가해성"에 주의하고자 한다(70). 후설이 여기서 파고들고자 하는 것은 초월론적 태도에서만 드러나는 자연적 태도의 일면성주관과 세계 사이의 상호관계성(correlation)이다. 이 길은 데카르트적 길과 달리 세계의 존재에 대한 "회의주의적 에포케"나 "절대적으로 주어진 토대로의 철회"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장점을 가진다. 

"Rather, the things of experience and finally the whole world come to be grasped in their basic structures or in their ontological structures as an “index” or “guide” to the subjective a priori of constitution. The orientation toward natural experience precedes the transcendental turn, and it is through this orientation that the transcendental thematic itself receives from the very beginning a fullness of content and a stable guidance. The path then consists in making the ontological or objective structuring all of the naturally experienced world intelligible as complexes of phenomena, and doing so purely from the subjective sources of the intentional achievement of consciousness."(70-71, 강조는 원저자)

 이로써 현상학적 환원은 상호주관성을 포착할 수 있는 방법, 그리하여 객체의 진정한 면모--그것이 상호주관적 통일체라는 것--를 포착할 수 있는 방법을 손에 넣게 된다. 현상학적 환원이 '태도 변경'의 언어로 서술됨으로써 후설의 환원은 칸트가 수행한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후설은 칸트가 직관의 결과가 아닌 사변적 구조물을 산출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후설은 칸트가 "신화적으로 구축적인 절차"에 기댄 이유로 (흄이 그에게 심은) 경험주의적 심리학 일반(의 견고하지 못한 타당성)에 대한 두려움을 든다(72). 그러나 결국 칸트는 진정한 초월론적 자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자연화된 영혼으로부터 사변적 자아--'초월적 통각'을 가리키는 것 같다--를 연역하는 데 그침으로써 자신이 피하고자 한 경험주의에 도리어 갇히고 만다.

③ 지향적 심리학을 통한 길: 칸트와 달리 후설은 심리학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의식의 삶을 연구해야 하는 심리학의 과제를 본래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내적 경험'을 심리학의 방법론으로 내세운 영국의 경험주의는 흄의 회의주의로 치달았지만, 초월론적 환원으로 무장한 후설은 같은 방법을 순수 의식의 지향적이고 초월론적인 경험을 반성하는 데 적용한다. 순수 의식의 삶은 자연적 시공간이나 자연적 인과성이 아닌 지향성과 동기부여관계를 통해 규정된다. 한편 그것은 물리적 신체에 갇혀있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의식 또는 영혼과 완전히 차단된 것이 아니라, 다른 의식 또는 영혼과 지향적으로 연결됨으로써 모두를 위한 세계라는 현상을 공동의 지평으로 함께 취한다.

 심리학은 "심리적 존재자에 대한 보편학으로서의 자신의 과제"(아래 인용문)를 보다 철저하게 탐구할 경우 초월론적 현상학에 이를 수밖에 없다. [이는 지향성이 심리의 본질임을 깨닫는 순간, 지향성의 객관적 상관자인 세계의 문제를 심리학이 도외시할 수 없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이해된다.] 이러한 전환 속에서 "세계와 모든 종류의 객관성들은 미리 주어진 것으로 자연적이고 곧장 전제되기보다 의식의 다양체의 지향적 상관자들로서만 배타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74) 순수, 지향적 심리학을 통해 초월론적 현상학에 이르는 길은--지향적 심리학 또한 자연적 태도에 사로잡혀있음에도 불구하고--자연적 태도에서 일반적으로 정립되는 세계의 존재를 판단 중지의 대상으로 삼는 과정을 경유하지 않는다. 다만 의식의 삶의 본질에 대한 보다 철저한 반성을 통해 초월론적 현상학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뿐이다.

"Modern psychology, as it developed in historical consequence of British empiricism, had failed, in Husserl’s eyes, because it neglected “to inquire about what in essence was the only genuine sense of its task as a universal science of psychical being.”[Hua VI, 207] [...] The particular interest of the path from pure psychology to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lies, perhaps, in the rather impressive success that Husserl had on this path in making intelligible, not merely “constructively” but rather concretely and intuitively, the clarification and execution of the transcendental problematic inaugurated by Kant."(75, 강조는 필자)

★“Objectivity, our world in its entirety, has in the transcendental-phenomenological contemplation of consciousness only the sense of an intentional correlate of subjects reciprocally and intentionally implied in one another. Another world, unrelated to our subjectivity and intersubjectivity, has no sense whatsoever [...]. Objectivity is itself a correlative achievement[Korrelatleistung] of the communalized transcendental consciousness. Again and again Husserl sets forth as an achievement of the reduction the emancipation from the absolutization of the world, an absolutization which ultimately, though covertly, underlies even skeptical argument. [...] “My calling” as a phenomenologist “is the study of pure subjectivity” (EP II, 431); the phenomenological reduction provides the way of access to this thematic.”(75, 강조는 원저자)

 현상학적 환원은 에피스테메, 즉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철학적 지식'을 추구하며 그런 의미에서 회의주의와 결별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인간의 사실성을 망각하지 않는다. 결국 후설에게 철학은 자기인식의 문제로 귀결되며, 역사와 만나야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학으로서의 철학은 개인별로 상이할 수 있는 '세계관의 철학'에 맞서 모두에게 타당하고 모두가 함께 참여해야 할 공동의 과제라는 의미에서 '엄밀학'이다(77 참고).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 정적 현상학은 시공간 속의 실재적인 것이든, 이념적인 것이든 [이미 그 구성이 가능한 한 최종의 단계에 이르러 완료되었다는 의미에서] "안정된(stable) 대상들"에 대해 그것이 주어지는 "내재적 경험들의 복합체들을 노에시스적으로 그리고 노에마적으로 탐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이 대상들은 환원을 거쳐 의식의 대상적 상관자로서만 배타적으로 고려되는데, 그 의도는 "그것들[이미 안정된 대상들]이 그를 통해 원초적으로 주어지는 의식 내의 현현[Bekundung]과 입증[Beurkundung]의 체계로 회귀함으로써 이 대상들의 의미와 타당성을 설명하는 것"이다(196, 강조는 필자).

"The analysis distinctive of static constitution has a twofold character. In the first place, it has stable objects, a stable “ontology” for its guide. In the second place, it inquires into immanent experiences."(196, 강조는 필자)
 

 반면 발생적 현상학은 이미 "완성된 상관관계의 체계들"이 아니라 "그것들의 [시간적] 발생(genesis)"을 탐구한다(197). 초기 후설의 시간의식의 현상학은 비록 발생적 현상학을 개진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예비적 작업이긴 하지만, 시간의 불변하는 형식만을 다루기 때문에 그 자체로 발생적인 탐구는 아니다. 발생적 현상학의 핵심은 시간의식보다도 나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의식으로서의 능력[Vermögen]과 태도, 신념으로 이루어진/드러나는 습성을 가진 자아이다. 능력과 태도, 신념은 과거의 경험들을 소급지시하며, 세계를 자신들의 발현을 가능케 하는 지평으로 가진다.

"For example, even in the fact that I am able to apperceive something as a spatial thing that is able to be brought to givenness in an array of appearances, there lies an acquired capability, an habituality that has a genetic origin and a history."(200, 강조는 필자)

 그런데 후설이 탐구하고자 하는 발생이란 의식의 사실적 역사가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역사가 가질 수밖에 없는 보편적 형식, 유형, 아프리오리, 또는 본질이다. "그것은 동시적 발생 가능성(compossibility)과 연속의 형상적 법칙들의 문제다. 연속이 동기부여적 연합체(nexus)라는 기본적 성격을 가지는 한에서."(201) 달리 말해 발생적 현상학 역시 형상에 대한 탐구다.

 ★한편, 발생적 현상학이 취급하는 발생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수동적 발생능동적 발생으로 나뉜다. 예를 들어 삼단논법의 실제적 수행은 능동적 발생에 속하는 반면, 그와 같은 수행은 그것을 정초하는 선술어적이고 수동적인 경험에 의해 시간적으로 선행된다.* 모든 능동성은 수동성에 의해 정초되어있다. 그러나 수동적인 미리 주어짐 역시 연상보편적 원칙으로 가지는 수동적 발생을 통해 비로소 성립하는 사태다. 연상은 첫째, 당장의 의식에서 공존 또는 연속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계기들을 상호적 촉발을 수단 삼아(by means of) "인접성, 유사성, 대조" 등을 기준으로 합일시키고(integrate) 적절히 배치해(configure) 동일성을 형성하는 성취의 원칙으로서의 연상과 둘째, "선행된 경험의 연상적 일깨움 그리고 그로부터 전개되는 의미의 유비적 전이를 기반으로" 대상을 "규정된 의미를 가진 대상들로서" 통각하는 성취의 원칙으로서의 연상이다(202).

"This transference of sense [from the past] is an associative "induction" or an inductive association in that it anticipates something that corresponds with the type of experience that has hithherto prevailed. On the basis of similarities, what is present is passively apprehended within a sense that was "primordially instituted" in earlier experience and that has since become habitual. [...] (APS, 118)"(202, 강조는 필자)

*⟪형식논리학과 초월론적 논리학⟫ 85, 86절 읽을 것.

 그러나 발생적 현상학의 진면모는 대상 인식을 가능케 하는 수동적, 능동적 발생 자체보다는 그 대상들이 습성을 가진 자아의 대상이라는 점에 자리한다. 이 습성들을 통해 자아는 고유한 그리고 규정된 인격, 남들과 차별화되는 개인성을 획득하며 구체적 주관성 즉 모나드가 된다. ⟪상호주관성⟫ 2권에 따르면 모나드는 '끊임없는 발생의 통일체'이며, 이 발생의 형상적 법칙들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가 따라서 요구된다. "그러나 단일한 모나드는 다른 모나드들과 그것의 작용들 그리고 세계 소유의 측면에서 엮여있기 때문에, 그 어떤 모나드의 발생도 다른 모나드들과의 공동화의 발생을 함축한다."(203, 강조는 필자) [여기서 인용된 Ms. B I 14는 타당성 구조의 정적 분석이 그 타당성의 담지자로서의 자아에 대한 발생적 분석을 요구하며, 이것은 나아가 나와 함께 동일한 타당성을 담지하는 그러나 그를 통해 비로소 나에 의해 존재의미를 부여받는 다른 자아들의 발생에 대한 탐구를 요구한다는 주장으로 보인다. 정적 현상학은 발생적 현상학을 통해 보완되어야 하며, 타인경험 역시 근원설립과 침전을 요구하는 현상으로서 발생적 현상학의 주제인 것이다.]

"Husserl’s static phenomenology is guided by the thought that the question of what, and in what sense, any object whatsoever ultimately is, can only be decided by an analysis of its mode of givenness or manifestation within consciousness. [...] However, since it analyzes the givenness only of “finished” objects within their corresponding systems of manifestation, static phenomenology cannot speak about a “producing” or “bringing forth” of objects."(204, 강조는 원저자)


★자아와 인격 후설은 ⟪이념들⟫ 1권에서 일찍이 "순수한 "나"에 대한 현상학적 명증"을 획득하고, 2권에서는 "인격적 "나"의 본질적 특성들 몇 개"를 분석한다(205,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1916년 이후(프라이부르크 대학 재직 시기)부터 비로소 그는 자아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순수 자아와 인격적 자아 사이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기 시작한다. 다만 ⟪이념들⟫ 이전에도 후설은 순수 자아에 대해서만큼은 정적 현상학적 관심이 있었다. 이 관심은 두 갈래로 나뉘었는데 첫째는 "다른 의식의 흐름에 반해 하나의 의식의 흐름을 경계 지우는 [개별적] 통일성의 원칙"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관심이었고, 둘째는 코기토의 작용주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관심이었다. 전자의 자아는 타인경험에 대한 분석과 함께 그에 대한 탐구를 요구받고, 후자의 자아는 '나'와 '너' 사이의 상호주관적 구분 이전에도 성립하는, 의식의 형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순수 자아의 이러한 애매성은 후설의 자아관을 해석하는 데 큰 어려움을 초래해왔다.

 먼저 첫 번째 순수자아의 개념에 대해, 후설은 회상을 통해 자아를 동일화하고 그 신원을 확인함(identification)으로써 어느 의식의 흐름을 단일한 주체에 귀속시키는 방법으로 자아들 사이 경계를 획정해야 한다는 과제를 수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자아는 ⟪이념들⟫ 1권 57절에서 드러나듯 코기타치오네스들과 달리 결코 내재적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왔다 갔다 하는 코기타치오네스와 대조되어 수적 동일성을 보존한다."(206, 강조는 필자) 한편 두 번째 순수자아의 개념에 대해서는 주의(attention)의 현상과 관련 지어 설명된다. 코기토의 형식에 말하자면 내포되어있는 이 순수자아는 주의(그리고 사실상 모든 지향성 일반)가 그로부터 뻗어나가는 중심점이다. 구성에 대한 후설의 분석이 심화되면 이 자아는 "방출의 중심[Ausstrahlungszentrum]" 또는 코기토의 모든 경험의 극일 뿐 아니라 "촉발의 극, 수용의 중심[Einstrahlungszentrum]"으로도 이해된다. 1930년대에 이르면 자아는 가장 낮은 수준의 구성인 본능의 방출 극으로서까지 개념화된다.* 어떻게 개념화되든, 이 자아는 코기토에서 기능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211 인용문 참고).**

"Affection is defined as a "form of performance of inentional, immanent experiences, or as a mode of the I's participation in intentionality" (Ms. M III 3 III 1 II, 165 [1921-23]). Over against the active "I", stands the passive "I." "Whenever it is active, [the 'I' is] at the same time passive, both in the sense of [being] affective and in the sence of [being] receptive" (Id II, 213 [ca. 1916])"(210, 강조는 필자, 모든 괄호는 원저자)***

*⟪상호주관성⟫ 3권 595쪽(1933년 9월).

**Q. 자아가 코기토를 위해 논리적으로 요구된다는 것인가, 코기토에 내실적으로 내재한다는 것인가?

***Q. 'affective'와 'receptive'가 서로 다른 뜻이란 말인가? 

 그러나 정적인 분석에서의 자아는 형식적이기에 공허하다. ⟪이념들⟫ 1권 이후 후설은 인격적 자아 및 모나드의 개념을 도입한다. 이러한 개념의 발달은 "구성의 문제에 대한 발생적 이해로의 후설의 전회와 매우 가깝게 일관되는(cohere) 것처럼 보인다. 프라이부르크에 재직하는 시기 동안 후설은 계속해서 인격적 "나"와 주변세계[Umwelt] 사이의 발전하는 상관관계를 새로이 주제화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는 [...] "계속적이고 지속되는 인격적 '나'" 또는 인격적 나들의 공동체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것으로서 그리고 경험의 객관적 세계와 상관되어있는 것으로서 초월론적 주관성과 상호주관성의 이론의 원칙들에 도달했다. 통각들의 발생에서 "나"의 "자기-구성"을 참고하면서, 후설은 주체는 통각들*의 주체로서 "스스로 구체적으로 규정되어"있다고 진술한다."(211, 강조는 원저자) 요컨대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단순히 추상적인 형식이 아니라 능력과 같은 습성적 소유물[Habe]/습득물[Erwerbe]을 통해 주변세계와 구체적인 관계를 맺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동기들을 가지는 자아이며 심지어는 이성의 원칙이기도 하다(212 인용문들 참고).

*Q. 이 특정한 맥락에서 '통각'은 어떻게 정의되는가? 정적 현상학에서 분석될 만한 지각 등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물론 변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기존에 고수했던 신념을 폐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하나의 동일한 주변세계의 상관자라는 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한다.** 후설은 "인격적 자아와 주변세계 사이의 상관성"을 다양한 "가능성들"을 통해 분석한다(213). 첫째, 후설에게 칸트의 초월적 통각과 같은 자아의 관념은 지나치게 형식적이므로--후설은 자아-극은 '나'가 아니라고 말한다(Ms. A VI 30, 54b)--그는 구체적인 경험 또는 세계의 구성과 유리되지 않는 자아관을 관철하고자 하는데, 이에 따라 만일 세계가 특정한 구조와 통일성을 가진다면 세계가 그를 위한 것인 자아 역시 '안정적인 습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둘째, 세계가 카오스로 용해될 수 있다면, 자아 역시 분열되고 정체성을 상실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셋째, 주변세계가 다양성의 가능성을 품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인격적 주체 또한 다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양성의 주제와 관련하여 후설은 특히 인간의 주변세계와 동물의 주변세계를 구분하는 문제에 집중한다. 그에 따르면 동물은 현재의 자아만을 가지는 반면 인간은 과거의 작용을 의식적으로 반복할 수 있으며 보편적 삶 일반 그리고 사회적 역사와 스스로를 연결 지을 수 있다(215 인용문들 참고).***

*회개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이 가능할 것 같다.

**Q. 변화의 정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면 인격적 자아는 결국 순수자아와 동일해지는 것이 아닌가?

***낡은 휴머니즘으로 비판 받을 여지가 크다고 생각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결론적으로 순수 자아와 인격적 자아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한편으로 둘은 "현상학적 주어짐의 양상"에서 다르지만--순수 자아는 내용적으로는 주어지지 않는 형식적 초월자이며, 인격적 자아는 삶의 변동 가운데서 동일하게 남는 것이되 반성을 통해 오직 비충전적으로 그러나 비충전적으로나마 주어지는 것이다--다른 한편으로 둘은 동일하고 동일해야만 한다.* "인격적 "나"를 구성하는 변동 가운데서의 동일성은 궁극적으로 순수한 "나" 속에 정초되는 것으로 남는다."(216)

*⟪이념들⟫ 2권, 311쪽 참고.


★생활세계 1927년의 후설은 '자연과 정신'이라는 강의를 통해 문자 그대로 자연과 정신 그리고 각각을 연구하는 학문들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그의 결론은 "원초적 경험의 세계만이 적절한 학문적 관심들의 가이드라인들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219). 이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후설은 학문 일반의 토대 그리고 선행적인 전제가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한다. ⟪위기⟫에서 그는 "학문적 개념과 선개념적 직관 사이의 정초관계(foundational relationship)"의 [좁은] 문제에서 나아가 "객관적 이론의 추상적 세계와 그 속에서 "이론적 프락시스"는 인간적 프락시스의 다른 양상들 가운데서 하나의 양상인 주관적 삶의 구체적, 역사적 세계 사이의 근본적 관계"의 문제를 탐구하기에 이른다(222).

 후설은 1920년대부터 일찍이 "학문이 구체적, 역사적 삶을 위해 가질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했다(222). 그에 따르면 당대의 학문은 위기를 맞았는데, 그 위기란 바로 학문이 구체적, 역사적 즉 주관적 삶과 유리되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객관적 학문은 언제나 미리주어지는 생활세계를 전제"한다(224). 그것은 "생활세계의 명증으로의 지시와 더불어서만 진리를 가질 수 있다. 과학자들의 이론적 프락시스와 기구들, 둘 다 생활세계에서 경험되는 그것들은 [객관적 진리의] 승인의 항상적 기반으로 남는다."(225, 강조는 필자) 이때,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 생활세계란 "직관적으로 경험되고, 경험하는 주체에게 상대적인 세계"이며, "정상적 감수성과 정상적 상호적 이해가 부여된 인간존재들의 공동체"와 관련된 세계이다(224, 강조는 필자). 이러한 일련의 사고에 따르면 초월적 즉자존재라는 것은 모든 상대적 경험을 초월하는 이념적인 가정에 불과하다(224-5쪽 인용문 참고).

 "주관적-상대적 생활세계"는 심지어 "그 자체로, 새로운 종류의 학문[생활세계 존재론]의 주체"가 될 수 있다(226). 생활세계 존재론은 객관적 학문의 타당성의 수행을 삼가는 에포케를 요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상학자에게 객관적 학문과 그것의 타당성, 그것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최초의 에포케에 더해, 생활세계 내 특정한 지평에 자아를 묶어놓는 모든 특수한 목표와 관심에 대한 두 번째 에포케가 요구된다. 후설에 따르면 "세계와의 이 목표로부터 자유로운(aim-free) 관계주관성에 대한 배타적인 관심을 통해 가능"하다(227, 강조는 필자).* 이번에도, 이러한 에포케를 수행한다고 해서 이 목표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다만 아무런 목표도 겨냥되지 않음으로써 도리어 "모든 목표들을 보편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Kern (1962)와 달리 심리학의 길과 존재론의 길이 그다지 구분되지 않는다.

**후설은 생활세계 존재론을 위해 요구되는 태도를 '인격주의적 태도'라고 부른다. ⟪이념들⟫ 2권, 183쪽 참고.

 ★상술한 존재론이 가능한 이유는, 문화마다 생활세계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를 뛰어넘는 생활세계의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아프리오리한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활세계의 [고유한] 시간성, 공간성, 인과성이 존재하며, 이것들 중 그 무엇도 [그에] 상응하는 객관적 학문의 이념화[의 산물]들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생활세계 존재론은 (초월론적 현상학과 구분되는 만큼) 소박한 태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관성에 의해 부여되는 생활세계 내의 존재(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최종적 설명은 오직 초월론적 주관성에 대한 반성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228). 


 두 번째 백신을 맞은 뒤로 두통이 가시지 않는다. 열감이 지속되고 언제라도 토할 것 같다. 꾸역꾸역 공부를 하지만 이런저런 사정들이 겹쳐 괴롭고 또 외롭다. 하늘에서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천사가 내려와, 내 손을 꼭 잡아주면서 신체와 정신 모두의 긴장이 완화된 부드러운 미래를 약속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