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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Iso Kern, <Die Drei Wege zur Transzendental-Phänomenologischen Reduktion in der Philosophie Edmund Husserls> 요약 및 비판

Iso Kern, Die Drei Wege zur Transzendental-Phänomenologischen Reduktion in der Philosophie Edmund Husserls, Tijdschrift voor Filosofie, 24ste Jaarg., Nr. 2 (JUNI 1962), pp. 303-349.

 

 자연적인 삶으로부터의 단절[Bruch]로 여겨져온 철학적 인식이란 대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가? 철학자들은 철학적 인식의 획득을 마치 그림자진 동굴을 떠나 진정한 실재[Wirklichkeit]에 들어서는 작업인 것처럼 여겼다. 이러한 허구로부터의 탈출, 최초의 발디딤이란 비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에드문트 후설은 비철학적 삶으로부터 철학적 인식의 획득으로 나아가는 문제를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표제 하에 탐구한 철학자이다. 본 논문은 참된 실재의 영역에로의 접근로로서 후설이 남긴 '현상학적 환원'의 "지리학적 지도"를 그리고자 한다(303). 또한 환원의 각 길에 직접 들어서고자 시도할 뿐 아니라, 그 길들이 약속한 목적이 과연 그 길들로써 달성되는지도 검토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 개괄 및 검토의 대상이 되는 환원의 길 또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는 데카르트적 길, 둘째는 지향적 심리학을 거친[über] 길, 셋째는 실증과학에 대한 비판을 거친 길이자 존재론을 거친 길이다. 후설이 이 세 길들을 종종 깔끔하게 구별하지 않는다는 점을 [애석하지만] 유념하자.

a) 데카르트적 길

 여러 변양태로 기술되는 데카르트적 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유의 단계가 고정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첫째, 절대적으로 정초된 학문으로서의 철학의 이념이 데카르트적 길의 시작을 형성한다. 모든 후행하는 정초가 그로부터 쌓일 수 있는 철학의 시작점은 절대적이고 의심할 수 없으며 명석한 명증으로서 성립해야 한다. 둘째, 그와 같은 철학의 이념을 따라 철학 나아가 학문 일반의 시작점이 될 수 있는 절대적 시작점을 확보해야 한다. 세계인식에 대한 보편적인 비판은 모든 세계인식이 세계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지만 그 믿음이 절대적 명증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시작하는 철학자"는 세계에 대한 모든 믿음과 그것을 전제하는 모든 세계인식에 대해 에포케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그것[모든 세계인식]을 타당성 밖에 두어야 한다." 셋째, 모든 초월적 세계인식이 에포케의 대상이 된 후에도 "도대체 아직도 타당한 인식이 남아있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해야 한다. 이에 대한 후설의 답은 바로 "내재적 인식의 대상"으로서 철학자의 코기토다. 넷째, 이 코기토는 전체 세계를 지향적으로, 즉 자신의 코기타툼으로서 제 안에 담지한다[in sich trägt]. 타당성 밖에 놓인 세계와 그 내용물은 순전히 '코기타툼으로서의 코기타툼'으로, 즉 순전한 '현상'으로만 성립한다. "이로써 [인간성과는 구분되어야 할] 순수한 주관성이 그것의 완전한 범위[Umfang] 속에서 포착된다." (305, 강조는 필자)

 여러 문헌에서 변양되어 소개되는 데카르트적 길의 공통된 구조를 설명한 후 케른은 실제로 후설이 데카르트적 길을 언급한 문헌들을 하나하나 검토한다. ⟪논리연구(1901)⟫는 전제 없이 절대적으로 명증적인 시작점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데카르트적 길을 특징짓는 요구를 표현하지만, 코기타툼의 명증을 그 시작점에 포함시키지 않으며 초월론적 현상학이 아닌 기술적 심리학의 수준에서 논의를 진행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코기타툼을 "현상학의 절대적 영역에 포함시키는 사유"는 1904년의 마누스크립트에서 처음 나타나는데, 이념(1907)의 제2강의에서 비로소 체계화된다. 인식이론은 의심할 수 없는 시작점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표현한 뒤 후설은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와 자신의 논의를 연결지어 코기타치오네스를 "최초의 절대적 소여들"로서 확정한다. 이 코기타치오는 "의식에 내실적으로 내재적인 것으로서의 체험"에 한정되기 때문에 여기까지는 ⟪논리연구(1901)⟫와 논의의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306). 그러나 제3강의에 이르면 이 절대적 코기토가 심리학적 코기토로 이해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과 함께 "내실적으로 초월적인 것" 즉 지향적 대상 역시 "절대적 소여 또는 순수한 내재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307, 강조는 필자). 그런데 여기서 케른은 ⟪이념(1907)⟫에서의 주관성이 유아론적 주관성으로 머무르며 추후에 상술할, 데카르트적 길과는 다른 새로운 사유의 길이 해당 원고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케른은 추후 존재론을 거친 길이 ⟪이념(1907)⟫의 제1강의에서 드러난다고 규정한다.] 1910-11년의 겨울학기에 이루어진 ⟪현상학의 근본문제⟫ 강의에서 후설은 "최초로 현상학적 환원을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적 길은 이 강의들에서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않는다!"(308)

 ⟪이념들 1권(1913)⟫은 다시금 데카르트적 길의 동기[Motive]를 강하게 추진시킨다. 그러나 여기서의 고찰은 절대적 시작에 대한 요구로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다만 세계에 대한 믿음을 배제 또는 괄호침으로써 어떤 존재가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남는지 따진다는 구조 자체는 유지된다. 케른은 후설이 "현상학적 잔여물[phänomenologischen Residuum]"에 대한 탐구를 탐구의 주도적인 관점[leitende Gesichtspunkt]으로 삼고 있다면서, 이 관점은 그 자체로는 세계에 대한 믿음을 괄호치지 않은 채 의식에 대해 순전히 심리학적 반성만을 수행하게 해준다고 지적한다(308).* 후설은 ⟪이념들 1권(1913)⟫의 2장을 통해 초월적 세계와 의식 사이의 차이--309쪽에서 이 대조의 세 양상이 상술된다--즉 의식의 폐쇄성[Geschlossenheit] 그리고 자체적 통일성에 대한 인식에 도달한다. 이렇게 "의식과 현실[Realität] 사이의 차이[Unterschiedenheit]이 형성되면서[herausgearbeitet] 3장에서는 사물세계가 무화되고 순전히 지향적 존재로만 제시되어도 절대적 의식의 본래적 존재는 영향받지 않는다는 테제가 정립된다. 이로써 후설은 자신이 발견한 현상학적 잔여물의 정체--절대적 의식과 지향적 대상으로서의 세계--를 밝히는 데 성공한다.

*Q. 정말 그러한가?

 케른에 따르면 데카르트적 길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제시되는 것은 ⟪제일철학(1923-4)⟫에서이다(309). 먼저 후설은 "필증적 또는 충전적 명증이라는 주도원칙" 하에 철학의 절대적 시작점을 찾고자 하며, 그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경험은 원칙적으로 비충전적이라는 점이 밝혀진다. 이로써 세계 전체가 현상학적 환원의 대상에 포함되는데, 이로부터 "세계 전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영향받지 않고[unbetroffen] 아마 필증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남느냐는 구체적으로[spezifisch] 데카르트적인 질문"이 대두된다. 이에 후설은 세계의 가능한 비존재에 대한 숙고는 세계를 경험하는 '나'를 전제한다고 답한다. 이 자아의 영역이 곧 환원에 의해 그 존재를 위협받지 않는 영역이다. 그런데 케른은 ⟪제일철학(1923-4)⟫에서 후설이 ⟪이념(1907)⟫이나 ⟪이념들 1권(1913)⟫에서와 달리 이 자아의 영역을 곧바로 충전적이고 필증적인 명증을 가지는 것으로서 아직은 주장하지 않고, 이 자아에 대해서 필증적 비판을 가해야 한다는 요구를 제시한다는 데 유의한다. 그러므로 "철학의 아르키메데스적 시작점"은 아직 엄밀한 의미에서 도달된 것이 아니다(310, 강조는 필자). 그러나 케른은 후설이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해당 비판을 결코 수행하지 않았으며 그저 전대미문의 것이라 수식하며 밀어낸다고[verschoben] 지적한다. 필증적 비판에 대한 요구가 제기된 이후에는 데카르트적 길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völlig unabhängig] 심리학을 거친 길로서의 현상학적 환원의 길이 개척된다[angebahnt].

 유사한 상황이 ⟪데카르트적 성찰(1929)⟫에서 반복된다. 필증적 명증에 의해 철학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요구가 똑같이 관철되고, 세계의 명증은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으므로 "데카르트적 전복"에 포함되며, 전복의 이후 잔존하는[verbleibend] 초월론적 자아는 세계를 자신 안에 현상으로서 숨겨놓고 있다[in sich birgt]. 이에 더해 해당 자아에 대한 필증적 비판이 요구되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고차원적인 문제라는 이유로 그 실제적 수행이 미뤄진다. 이로써 ⟪데카르트적 성찰(1929)⟫에서 또한 철학의 절대적인 시작점을 찾는다는 데카르트적 길의 목적은 달성되지 못한다. 심지어 ⟪위기(1936)⟫에서의 후설은 명시적으로 데카르트적 길로부터 거리를 두며 그 결함들을 지적한다. 케른에 따르면 늦어도 1920년대부터는 후설에게 데카르트적 길이 의문스러운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케른은 후설이 어째서 데카르트적 길을 의문스럽게 생각했는지 분석한다.

"Auch in den "Cartesianischen Meditationen" erreicht also der Cartesianische Weg sein Ziel, den absoluten Anfangspunkt der Philosophie, nicht."(311)

① 첫째로, 데카르트적 길의 대단히 중요한 결함[ausserordentlich schwerwiegender Mangel]은 "그 길 위에서 초월론적 환원이 오직[ausschließlich] 상실의 성격[Charakter eines Verlustes]만을 가지며 의식은 남아있는 것("잔여물")으로서 현출한다는 것이다."(311, 강조는 원저자)* 세계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코기토의 지향적 상관자로서 현상학의 연구의 장에 놓인다는 주장은 적어도 데카르트적 길의 관점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적 환원 이후에 남는 세계는 순전한 현상, 즉 "주관적 재현자[subjektiver Repräsentant]" 이상의 의미를 결코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후설의 추종자들[Nachfolgende]은 데카르트적 길이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되돌아가기를, 즉 그것에 대한 타당한 정초를 새로이 마련하는 작업을 추가적으로 수행하기를 기대했지만, 즉 세계믿음을 배제하는 데카르트적 길이 임시적 절차[Provisorium]로서의 성격만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고, 후설 또한 세계믿음과 학문 일반에 대한 이러한 "다시-타당성-속에-두기"에 대해 언급했으나, 실제로 그러한 귀환을 수행하지는 않았다. 이로써 후설이 세계의 존재로 되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의는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러한 이의는 후설에 대한 오해, 즉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이 오직 데카르트적 길의 동기만을 가진다고 생각한 점에 근거한 것이었다.) 케른에 따르면 데카르트적 길은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의 진정한 의미를 구현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케른은 남아있는 것 또는 잔여물로서의 의식의 개념 또한 그릇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의식의 개념은 의식을 세계의 가장자리 부분[Endchen]으로 만들며, 후설의 초월론적 의식이 심리학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오해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1924년에는 후설 자신도 '세계의 배제'나 '잔여물로서의 의식'과 같은 표현에 의문을 품었다. "세계 자체가 그것의 참된 존재에서 초월론적 현상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으며 에고 코기토는 오직 세계로부터 추상된 심리적인 것의 층위라는 이해[오해]로 쉽게 이끈다"는 것이었다(Hua VIII, Beilage XX, S.423/33). ⟪위기⟫의 43절에서도 같은 비판이 수행된다. 데카르트적 길을 걷는 현상학자는 그 길을 통해서 획득되는 초월론적 자아로 대체 무엇을 [추가로] 얻을 수 있는지와 관련해 수수께끼에 빠지게 되며, 자연적 태도로 되돌아가고 만다는 것이다.

*Q. 여기서 'lässt'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Q. 정말 그러한가?

"Der eigentliche Sinn von Husserls transzendental-phänomenologischer Reduktion enthält nichts von einem Zurücktreten hinter den Weltglauben, so dass dessen Wieder-in-Geltung-Setzung als ein vorgesetztes, noch zu erstrebendes Ziel des Philosophierens erscheinen muss ; dieser eigentliche Sinn der phänomenologischen Reduktion wird aber durch den Cartesianischen Weg nicht erreicht."(313, 강조는 원저자)

② 두 번째 결함은 바로 데카르트적 길이 (그것이 심리학적인 주관성이든 초월론적인 주관성이든) 전체[voll] 주관성에 정당하게[rechtmässig]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후설에 따르면 전체 주관성은 상호주관성으로 이루어진다[ausmacht]. 그러나 데카르트적 길 위에서 다른 주체 또는 공동주체[Mitsubjekte]는 신체로서 경험되는 실제적 사물을 통한 파생현전을 통해서만 주어진다.* 데카르트적 길이 주장하는 바에 따라 세계를 무화시키고 나면 여타[fremd] 주관성은 [그 자체로는] 도대체가 지속적으로 타당한 잔여물로서 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타 주관성은 세계와 마찬가지로 순전한 현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후설이 여타 주관성의 본래적 존재를 현상학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후설 자신의 [그리고 후대의] 비판은 "오로지 초월론적-현상학적 환원의 본래적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 데카르트적 길의 관점으로부터 옳은 것이다."(314, 강조는 필자) ⟪제일철학(1923-4)⟫에서에서 후설은 데카르트적 길이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을 해명하지 못한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하며, 같은 책의 부록 XX에서는 ⟪이념(1907)⟫에서 추진한 데카르트적 길의 관점에서 순수하게 '나'의 주관성으로 주관성을 한정지은 것이 오류였다고 자인한다. 반면 ⟪현상학의 근본문제(1910)⟫는 데카르트적 길로부터 특징적으로[bezeichnenderweise] 눈을 돌렸다는 것이 후설의 자가진단이다.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의 구별을 도입하면 저 사실이 비판으로 더 이상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생활세계에서의 상호주관성 역시 정적인 정초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후설 자신조차 해당 작업의 의의를 충분히 깨닫지 못했거나 지나치게 겸손한 모습을 보인 듯하다.

 

②-2 케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데카르트적 길이 비단 상호주관성뿐 아니라 나만의 본래적 주관성에 관해서조차 그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적 길을 통해 발견되는 주관성은 오직 현재의 주관성이며 과거나 미래를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데카르트의 관념론을 반박했던 내용--즉 "주관적인 시간규정은 오직 객관적인 것을 근거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는 표상은 직관이 아닌 공허한 사고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후설의 데카르트적 길이 "시간적으로 규정 가능한 과거와 미래를 소유하는 의식의 흐름으로서의 주관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316).

 물론 후설은 ⟪이념⟫과 ⟪이념들 1권⟫에서 자신이 데카르트적 길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의식의 흐름 전체를 조명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선 후설은 자신의 주장이 소박했다고 비판한다(Hua III, Beilage XIII (1929) s. 399, s.467). ⟪제일철학(1923-4)⟫에서 후설은 "그것의 전체적 시간범위[vollen Zeitumfang] 속에서 초월론적 삶의 흐름에 도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자세하게 해명하는데, 이에 따르면 "주관성의 지나간 그리고 앞으로 올 삶은 오직 이중의 환원을 통해서 포착된다. 첫 번째의 철저한 환원 그리고 초월론적인 환원을 통해 나는--그리고 나는 오직--현재의 나의 현행적인 의식삶을 획득한다. 이 현행적 의식삶은 그것의 지평으로서 그것의 과거, 현재, 미래 속에서의 세계를 소유한다. 초월론적 자아는 그러므로 자신의 현재 속에서 지평에 맞게[horizontmässig] 모든 대상들의 우주[das Universum]를 소유한다. [...] 이 세계지평은 이제 후설에 따르면 내가 과거와 미래의 초월론적으로 순수한 것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의 조건이다."(316-7, 강조는 원저자) 달리 말해 과거세계와 미래세계라는 지평은 결코 단적으로[, 곧바로] 타당성 밖에 두어져선 안 된다. 왜냐하면 지평에 속하는 것으로서 포착되는 과거 또는 미래의 '나'는 초월론적 자아가 아니라 인간적 자아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과거의 산책을 기억한다고 가정하면, 이 현행적인 기억함은 첫 번째 환원을 통해 초월론적 성격을 띠지만 그 기억함 속의 나 또는 나의 지각은 추가적 환원 없이는 여전히 세속적 성격을 띤다. 그것마저 초월론적 성격을 띠게 만들려면 "재생산적 내용물 속에서 나의 기억을 붙잡는[hineingreifen] 두 번째 환원을 수행해야 한다."(317, 강조는 원저자) 과거와 미래의 초월론적 삶을 가지려면 과거와 미래의 세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곧 의식의 철저한 지향성이 말해주는 바이다.

"Um mein Vergangenes und zukünftiges transzendentales Leben als geltendes zu gewinnen, muss auch die vergangene und zukünftige Welt noch für mich Geltung haben."(318)

 이 연장선에서 데카르트적 길에 대해 또 한 가지 의문스러운 지점은 바로 그 길이 내세우는 "세계무화[Weltvernichtung]"의 주장이다. 세계의 [가정적] 무화 이후 잔존하는 자아는 지속성을 가지지 못한다. [과거세계와 미래세계를 상실했으므로] 현재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현재마저 "그 자체로 파지와 예지를 통해 언제나 이미 과거와 미래를 자신 안에 담지하므로, 이 현재 자체가 점적인 것 그리고 그로써 비시간적인 것으로 축소된다[reduziert]."(318)

케른은 "철학의 절대적 시작에 대한 요구"가 데카르트적 길에 고유하다고 생각한다(319). 그런데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주장된 필증적 비판이 미뤄졌다는 사실은 "저 데카르트적 이념이 헛된[illusorisch] 것임을 증명한다: 철학은 절대적 점에서 시작할 수 없다[Die Philosophie kann nicht an einem absoluten Punkt anfangen]."(320) 1920년대 이후 확실히 후설은 "회상과 예상은 원칙적으로 속일 수 있기 때문에" 따라서 "내 체험류의 과거와 미래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필증적 명증에 대한 말이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오직 과거와 미래의 형식, 그러므로 체험류의 시간형식만이 후기 후설의 상론[Ausführungen]에 따라 필증성을 가진다." 형식이 아닌 내용에 있어서는 오직 "생생하게-흐르는 자체현재"만이 필증성의 후보로 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생한 현재에서의 '나'는 구체적 주관성이 아니며 고유한 과거를 지니는 '나'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에 국한되는 내용이 그나마 학적으로 유의미한 명증, 존재자에 대한 그 어떤 명증이라도 가져다줄 수 있는가 하면, 후기 후설은 이에 대해서조차 부정적 대답을 내놓는다. 왜냐하면 존재에 대한 체험은 회상을 통한 동일화 가능성을 요구하는데, 회상은 원칙적으로 기만의 가능성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생생하게 흐르는 현재는 파지와 예지 속에서 비로소 흐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매개된[vermittelt] 구조를 가지며, 따라서 그 필증성이 의심스럽다. 이에 케른은 코기토의 필증적 계기는 오직 내용과 관련된 종[inhaltlicher Art]이 아닌 두 가지뿐이라고 결론 짓는다. 첫째는 시간적 형식이고, 둘째는 나 자신의 존재다[die Zeitliche Form und die Existenz meines Selbst]. 여기서 케른은 "그 어떤 시간적 존재도 필증성 속에서 인식 가능하지 않다: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것[시간적 존재에 대한 필증적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 자체로 필증적으로 인식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후설의 충격적인 선언을 인용한다(321, Hua VIII, Beilage XIII, s.398 (1925) 에서 재인용). 주관성의 시간성이 그에 대한 필증적 사실인식[Tatschenerkenntnis]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케른은 이 불가능성이 본질인식의 가능성을 어디까지 제한하느냐에 대해서는 해명할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왜냐하면 현상학적 환원의 의미는 단순히 본질인식만 가능케 하는 데서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증적 본질인식의 예로는 수학적 인식 같은 것이 있지만, 데카르트적 길을 통해서는 수학적 인식을 동기부여할 수 없을 뿐더러*, 후설이 데카르트적 길을 필증적 본질인식과 함께 시작하는 것도 아니다.

*Q. 정말 그러한가?

★케른의 단언과 달리, 필증성 비판이 명시적으로 수행되지 않았다고 해서 데카르트적 길의 이념이 헛된 것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 케른은 데카르트적 길에 대해 부조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념'이란 실질적으로 도달되지 않아도 견지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인데, 케른은 어째서 데카르트적 길이 자신의 이념에 실질적으로 도달하지 못했냐고 채찍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적 길 또한 존재론의 길과 마찬가지로 필증성을 자신의 '성공조건'이 아닌 '이념'으로, 단지 주도이념[Leitidee]으로 가지고 있을 뿐이기에, 데카르트적 길이 현상학적 환원의 본래적 의미를 구현하지 못한다고 몰아세우는 것은 '이념'의 의미를 데카르트적 길과 존재론의 길에 각각 다르게--데카르트적 길에서는 반드시 도달되어야 하는 것으로, 존재론의 길에서는 꼭 도달되지 않아도 괜찮은 것으로--적용하는 꼴이다. 설령 필증적 비판이 실제로 수행된 후 데카르트적 길의 수확물이 두 형식적 계기를 제외하면 모두 절대적인 필증성을 결여하는 것으로서 판명나더라도, 필증적 비판을 수행했다는 노력 자체(또는 그와 같은 수행의 가능성)만으로도 데카르트적 길의 의의는 보존된다. 나아가 후설이 정말 데카르트적 길의 수확물에 대해 아무런 필증적 비판도 실제로 수행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후설은 원초적 환원을 통해 암묵적으로나마 데카르트적 길의 수확물에 대해 필증적 비판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초적 환원을 필증적 비판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N. I. Lee (2002) 참고.

b) 지향적 심리학을 거치는 길[Der Weg über die intentionale Psychologie]

 심리학의 길을 통한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의 근본구조는 세 가지로 나뉘어 서술될 수 있다. 첫째, 심리학의 길은 모든 정신적인 것[allem Seelischen]을 추상시키고 오직 순수하게 물리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학과 그 학을 보충하는, 모든 물리적인 것을 추상시키고 오직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학 사이의 [역사적인] 구분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둘째, 심리학의 추상과 자연과학의 추상은 동일한 구조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denn] 자연적 경험에서 나는 물론[wohl] 순전한 신체를 가지는 한편, 그것[신체] 속에 그 어떤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da] 자연적 경험은 대상들과 체험들 사이의 지향적 관계를 실제적 관계들로, 즉 신체들 사이의 관계들을 본보기[Leitbild]로 파악하기 때문이다."(322, 강조는 원저자) 케른에 따르면 순수한 체험을 학적으로 획득하기 위해서는 체험의 지향적 대상의 현실성에 대한 관심을 끄고 그에 타당성을 부여하기를 그만둬야 하며[mich des Vollzugs seiner Geltung enthalte], 나 자신을 무관심한 관찰자로서[als uninteressierter Zuschauer] 확립해야 한다. 셋째, 그러나 개별적인 체험연관들에 대해 하나씩[einzelweise] 그 타당성에 대한 에포케를 수행하는 것으로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에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평의식에 대한 분석은 모든 체험이 세계 [전체]를 지향적 함축의 방식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정립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322-3) 결국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에포케 속에서 세계에 대한 관심을 "일격에[in einem Schlage]" 억제해야 한다[inhibieren]. 케른에 따르면 이러한 보편적 에포케를 통해 "공동적 "현상"인 세계를 지향적으로 자신 안에 공유화하는[vergemeinschaftet] 모든 순수한 정신들의 총체적 연관" 즉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에 도달할 수 있다(323).*

"Die reine Auswirkung der Idee einer reinen Psychologie führt also zur Transzendentalphilosophie."(323)

*Q. 세계의 타당성에 대한 일격의 판단중지를 수행했는데 어떻게 타인의 존재타당성이 판단중지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을 수 있는가?

 심리학의 길은 ⟪제일철학(1923-4)⟫에서 처음으로 체계화되는데, 데카르트적 길보다 "더 깊고 풍부한" 것으로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것으로" 설명된다. 이 길의 시작을 주도하는 사유는 바로 "주관적인 것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다.(323, 강조는 원저자) 그런데 앞서 말했듯 모든 개별적 체험은 숨겨진 타당성 연관들을 함축하기 때문에, 각 체험의 지향적 대상의 존재에 대해서만 판단을 중지하는 것으로는 철저한 순수성에 가닿을 수 없다. 이에 따라 세계지평 전체에 대한 관심을 일격에 억제하는 초월론적 환원이 요구된다. (개별적인 판단중지는 더 후기의 후설에 따르면 심지어 심리학을 위해서도 부적합하다.) 심리학의 길은 ⟪위기(1936)⟫에서 또한 체계적으로 추구된다[beschritten]. 이때의 출발점은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을 붙잡고자 하는 보편적 추상의 이념이다. 이 추상은 자연과학을 위한 추상을 보충하기[ergänzen]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심리학자에게 필요한 보충하는 추상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환원을 넘어 세계보편적 에포케[weltuniversalen Epoché]가 요구된다. 이로써 심리학자는 무관심한 관찰자의 "추상적[abstraktive]" 태도를 취하게 되며, 태도 변경의 결과로 "모두를 위한 하나의 세계"가 공동적인[allgemeinschaftlichen] 현상으로 화한다.**

**Q. 다시금, 어째서 여기서는 '나만의 세계'가 아닌 '상호주관적 세계'가 남는가? 단지 물리적인 것의 존재만을 추상하므로 타인의 심리적 존재는 추상되지 않기 때문인가?

 그런데 케른에 따르면 심리학의 길 또한 데카르트적 길처럼 어떤 "근본적인 불만족"을 야기한다. 심리학의 길은 데카르트적 길이 가진 두 번째와 세 번째 결함은 품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초월론적 환원의 의미를 "관심의 억제로서 그리고 추상으로서[als Interesseinhibition und als Abstraktion]" 규정한다는 결함을 가진다(325, 강조는 원저자). 케른은 추상이 총체적 현실성의 일부에 대한 일면적인 관심만을 불러일으키며, 그로써 추상의 결과물은 완전한 구체성을 가지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마치 자연과학의 주장들이 정초되지 못한 것과 유사하게, 심리학 또한 (설령 초월론적 환원을 경유했다고 해도) 추상의 결과물인 한 부분적 학문[Partialwissenschaft]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anmuten]. 다행히 후설은 머지않아 심리학을 경유한 초월론적 환원 또한 현상학자로 하여금 초월론적 영역에 완전히 도달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점을 인지했다(Hua VIII, Beil. II, S. 319). 한편 ⟪위기(1936)⟫에서에서 후설은 다시금 순수 심리학과 초월론적 현상학을 완전히 동일시하지만, 어떻게 초월론적 현상학을 추상을 통해서 탐구되는, 따라서 필연적으로 부분학문으로서의 성격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순수 심리학과 동일시할 수 있는지 여전히 의심스럽다. 케른은 ⟪위기(1936)⟫의 서술을 불신하고, 초월론적 현상학과 환원에도 불구하고 세계라는 배경의 타당성을 소박하게 믿는 순수 심리학을 구분하는 이전의 서술들에 기댄다.

"Die transzendentale Charakter des Subjektivität kann [...] nur gefasst werden durch die Erkenntnis ihrer Absolutheit, ihrer Priorität und ihres Ursprungscharakters gegenüber der Welt. Diese Eigenschaften der Subjektivität werden aber nicht über eine vom Sein der Welt abstrahierende Psychologie erfasst."(327, 강조는 필자, Hua VIII, Beil. XXIII S. 446-9 참고)


c) 존재론을 거치는 길[Der Weg über die Ontologie]

 존재론의 길을 통한 초월론적 현상학적 환원 역시 세 단계의 근본구조를 가진다. 첫째, 존재론의 길은 형식적 존재론, 또는 영역적 존재론, 또는 모든 논리학과 학문적 존재론의 기초[das Fundament]인 생활세계의 존재론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중에서 어떤 존재론을 출발점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환원의 근본종류가 셋으로 나뉠 수 있다. (후기의 후설은 생활세계의 존재론이 가장 근본적인, 다른 모든 존재론이 그리로 소급지시되는 존재론임을 깨닫고 생활세계의 존재론을 환원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러나 전기의 후설은 그러지 않는다.) 케른에 따르면 모든 실증적, 객관적 존재론은 그것을 이루는 존재론적 인식의 추상적 성격으로 인해 궁극적인 불명석성[letzte Unklarheit]을 가진다. [이처럼 궁극적으로 정초되지 못했다는 성격으로 인해] 존재론적 원칙들은 예컨대 주관주의적 회의주의의 형태로 주체와의 연관성[Subjektbezogenheit]을 가지는 것 [또는 가져야 하는 것]으로 거듭[immer wieder] 재이해되었다.

 둘째, 이때 존재론적 아프리오리를 해명 및 비판하기 위해 "실증적-존재론적 인식의 일면성(추상성)을 극복하고 존재론적 아프리오리를 그것과 주관성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고찰하는 철저한 반성[radikalen Reflexion]에 대한 요구가 나타난다. 이 철저한 반성은 진정으로 혁명적인 태도변경[Einstellungsänderung]의 성격을 가진다: 시선은 이제 더 이상 소박하게-일면적으로 아니면 "곧장[geradehin]" 실증적으로 존재론적인 것(실증성 또는 객관성의 원칙으로서) 또는 세계(실증성 또는 객관성의 총체[Inbegriff]로서)에 향해지지 않고, 그것의 다겹의 삶 속에서 실증적인 것이 "현시"되는("구성"되는) 주관성으로 향해진다. 이 태도변경은 어떤 실증성의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것은 하나의 획득[Gewinn], "확장[Ausweitung]"이다. 왜냐하면 이제 실증성은 그것과 주관성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즉 주관적인 삶 속에서 객관적으로 현시되는 것 또는 구성되는 것으로서 보이기 때문이다."(328, 강조는 원저자) 객관적 태도에서 주제화되는 객관적 주제는 이제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보다 총괄적인] 주관적인 주제 속에 지향적으로 함축된다. 마치 3차원의 공간이 2차원의 평면을 자신 안에 포함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의 주관성은 [자신만의 세계 속에 고립된 유아가 아닌,] 공동의 객관적 세계를 함께 구성하는 상호주관성이다.

"Die Subjektivität, in der sich alle Objektivität konstituiert, ist die transzendentale. Sie erweist sich als eine durch die gemeinsame Objektivität vergemeinschaftete Intersubjektivität ; sie erweist sich als eine zeitliche (geschichtliche), da die in ihr sich konstituierende Objektivität eine Geschichte hat."(328-9, 강조는 원저자)

 보편적 초월론적 삶에 대한 연구는 오랫동안 자연적 태도를 견지하며 익숙해진 평면화[객관화]의 경향성으로 인해 무척 어렵다. "그[현상학자]는 언제나 초월론적 삶을 객관적-학문적 법칙을 통해 "설명"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그러나] 이는 당연히 모순인데, 왜냐하면 그는 이 객관적 법칙들을 주관적 삶으로 되돌아감으로써 해명해야 한다는 과제 앞에 서있기 때문이다." 초월론적인 것을 실증적인 것을 통해 설명하려는 메타바시스[eine Metabasis von der Transzendentalität in die Positivität]는 반드시 피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현상학자는 셋째, "모든 실증적 타당성과 관련한 초월론적 에포케"를 수행해야만 한다. "그 어떤 실증적 명제, 실증적 타당성도 초월론적 연구에서 전제[Prämisse]의 역할을 수행해서는 안 된다."(329, 강조는 원저자) 케른은 존재론의 길이 데카르트적 길이나 심리학의 길과 전혀 다른 의미의* 초월론적 에포케를 요구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Die Epoché hinsichtlich der positiven Geltung erfolgt also nicht deshalb, weil dieser Geltung die Apodiktizität mangelt (cf. den Cartesianischen Weg), auch nicht deshalb, weil ich mich nur für das Subjektive interessiere und mich am Sein der Welt desinteressiere (cf. den Weg über die Psychologie), sondern weil ich sehe, dass es ein Widersinn ist, das transzendentale Leben durch positive Setzungen zu erklären. Durch diesen Grund allein ist hier der Sinn der transzendentalen Epoché bestimmt."(329-330, 강조는 필자)

*과연 그러할까? 메타바시스의 결론 또한 그것이 비필증적이라는 이유로, 또는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배척되는 것은 아닌지 재고해보아야 한다. 세 환원들은 케른의 생각보다 훨씬 긴밀하게 상호연관되어있다.

 

 이번에도 케른은 후설 사상의 변천사를 따라 존재론의 길의 역사를 추적한다. 그에 따르면 후설은 ⟪논리연구(1901)⟫ 2권에서 인식이론을 형식논리학 및 형식적 존재론과의 밀접한 연관 하에서 다룸으로써 "객관적 아프리오리와 주관적 아프리오리 사이의 엄밀한[strengen] 상관관계의 이미 살아있는 이념"을 제시하고, 처음으로 존재론의 길을 암시한다. ⟪이념(1907)⟫에서는 자연적 학문과 철학적 학문을 구분하는 제1강의에서 철학이 자연적 인식과 철저히 상이한 차원에 놓여있기 때문에 철학 또는 인식비판을 수행함에 있어 그 어떤 자연적 인식도 활용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 제시된다. "객관적 지식의 이러한 "배제"는 그러므로 여기서 새로운(철학적인) 인식차원에서 자연적인-객관적인 인식차원으로의 메타바시스로부터의 보호라는 의미를 가진다." 케른은 데카르트적 길과 존재론의 길이 대립의 구도를 가짐에도 불구하고[in einem gewissen Gegensatz steht] 후설이 [제2강의에서] 데카르트적 길을 수립한 직후에도 현상학적 환원의 의미를 존재론의 길로써 직접 규정하는 것이 놀랍다고 덧붙인다.(330)* 케른은 "현상학적 환원의 본래적 의미는 [존재론의 길이 목적으로서 표방하는] 메타바시스로부터의 보호에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펼치며 Ms. orig., Β II 1, S. 5b, 14b (1907)에 제시된 인용문을 덧붙인다(332, 강조는 필자 ➔ 마누스크립트 확인할 것).

*내 생각은 다르다. 객관적 학문의 성과를 현상학적 탐구에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데카르트적 환원에서도 수행하는 바이다. 이는 ⟪제일철학⟫ 2권에서 데카르트적 환원이 배제하는 세계인식을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대목을 통해 뒷받침된다. 케른은 데카르트적 환원의 의미의 범위는 너무 좁게 잡고, 존재론적 환원의 범위는 너무 넓게 잡고 있는 것 같다.

나아가 애초에 에포케의 진정한 의미는 메타바시스의 방지이며, 따라서 에포케는 '메타바시스'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에포케의 결론을 선취하는 것이다. 에포케 이후에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존재범주가 나타날 것을 아는 사람만이 에포케가 메타바시스를 막는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포케를 최초로 수행하는 사람의 입장에 선다면 메타바시스로부터의 보호는 에포케의 목적이 아닌 효과에 불과하며, 그 누구도 존재론의 길로써는 최초의 에포케를 수행할 수 없다. 최초의 에포케는 필시 데카르트적 길 또는 적어도 심리학의 길을 통해 수행되어야 하고, 이 당위의 무게는 결코 간과될 수 없다.

 

 이어서 케른은 무려 열 다섯 쪽 남짓에 걸쳐 존재론의 길이 쓰였거나 해명되었던 후설의 강의들을 상세히 인용 및 해설한다. 특히 환원으로써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이 처음으로 해명되는 ⟪현상학의 근본문제들(1910/11)⟫이 존재론의 길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현상학의 근본문제들(1910/11)⟫에 따르면 세계는 "[나에게] 고유한 체험체계를 지시할[indiziert] 뿐만 아니라 여타의[fremde] 체험들까지 지시한다."(334, 강조는 원저자) [이와 달리 상호주관성을 적절하게 포착하지 못한 데카르트적 길에 대한 비판을 배경으로] 케른은 경험의 삶을 고찰할 수 있게 해주는 태도변경으로서의 현상학적 환원의 진정한 의미는 존재론의 길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고 못박는다.

 ⟪이념들 1권(1913)⟫에서도 ⟪이념(1907)⟫에서와 마찬가지로 텍스트의 2번째 부분[Abschnitt]에서야 비로소 환원의 데카르트적 길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며, 그 배경을 이루는 존재론의 길의 이념이 더 먼저 제시된다(e.g. 26절). 이후에도 예컨대 61절이나 '현상학적 근본고찰'은 상당한 길이로 현상학적 환원의 의미를 "주관성의 초월론적-현상학적 차원을 객관적-자연적 앎을 통해 오염시키는 것[Kontaminierung]으로부터의" 보호로 규정한다(335). 케른은 이와 같은 규정이 "진행된 데카르트적 길로부터는 밝혀질 수 없고, 오히려 존재론을 거치는 길에 속한다"고 주장한다(336).*

*둘 사이의 중첩을 너무나 간단히 부정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필증성의 동기와 메타바시스의 방지가 어떻게 조금도 연결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데카르트적 길과 존재론의 길을 이토록 엄밀하게 구분할 수 있단 말인가? 필증적 앎을 찾고자 하기 때문에 메타바시스 또한 피해야 하는 것이 되는 게 아닌가? 케른의 구도 설정은 과도하게 분석적이며 이것은 오히려 후설의 사유들 사이의 상호연관성 및 연속성을 파괴한다. 케른의 구도를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후설은 ⟪이념(1907)⟫에서든 ⟪이념들 1권(1913)⟫에서든 아무런 명시적인 표현 없이 방법론을 바꿔가며 비일관적으로 초월론적 장을 해명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두 책은 누가 읽기에도 상당히 일관된 책임에 틀림없다.

 

 ⟪철학 입문[Einleitung in die Philosophie](1919/20)⟫ 그리고 ⟪칸트와 초월론적 철학의 이념(1924)⟫ 강의에서 역시 존재론의 길을 통한 환원이 수행된다. 후자의 강의에서 후설은 "자연적 세계삶 속에 놓여있는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전제"에 대해 서술하면서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확신이 어떻게 우리의 의식삶 속에서 구성되는지" 묻는다. 후설에 따르면 이와 같은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한 학자는 초월론적 태도에로 진입한 것이지만(Hua VII, S. 254/55), [진정한] 초월론적 환원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한 그는 "소박한 초월론적 태도"로 남는다(336).

 이어 케른은 Hua XVII에 해당하는 ⟪형식논리학과 초월론적 논리학[Formale und Transzendentale Logik](1929)⟫ 속 존재론의 길의 수행 양상을 설명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형식논리학과 초월론적 논리학(1929)⟫의 2권은 "객관적 논리학과 존재론으로부터 초월론적 현상학으로의 전환을 수행"한다(336). 후설은 먼저 "주관적으로 방향지어진[subjektiv gerichtete] 연구들을 통한 논리학의 정초에 대한 요구"를 제시한 뒤 "논리학의 은폐된 (함축된) 전제들"이 무엇인지 들추어낸다. 후설에 따르면 이 숨겨진 전제는 곧 세계이며, "세계의 의미에 대한 해명은 논리적 근본개념들의 해명에 속하는 것으로 증명된다."(337, 강조는 필자) 이제 세계는 더 이상 지평으로서 전제돼선 안 되고 성취하는 주관성을 통해 문제시되고 주제화되어야 한다. 한편 주관성은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즉 초월론적인 것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다." 케른은 ⟪형식논리학과 초월론적 논리학(1929)⟫이 초월론적 주관에 접근하는 방식이 그 어떤 데카르트적 또는 현상학적 심리학적 동기에 의해 동기부여되지 않으며*, 성취하는 주관성이 지시하는 "존재론적 아프리오리와 현상학적 아프리오리 사이의 상관관계"에 배타적으로 집중한다고 강조한다(338).

*과연 그런지 직접 읽어보면서 확인해야겠다. 또 85절에 "발생적 구성"에 대한 논의가 제시된다니 참고할 것(337).

"Nirgends wird auf die Apodiktizität des Subjekts bzw. auf die Forderung eines absoluten Anfangs der Philosophie rekurriert ; ebensowenig spielt das "exklusive Interesse für das rein Seelische" eine Rolle. Auch vom vieldeutigen und für den Cartesianischen Weg typischen Gegensatz "Immanenz-Transzendenz" ist nicht die Rede ; er ist durch denjenigen von "mundan" (oder "objektiv")-"transzendental" ersetzt."(338, 강조는 원저자)

Q. 내재-초재 대립쌍과 초월론-세속 대립쌍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케른은 마지막으로 ⟪위기(1936)⟫ 속 존재론의 길이 가지는 위상과 그 내용을 논한다. 케른에 따르면 3부의 섹션 A에 해당하는 "미리 주어진 생활세계로부터 되돌아가 물음 속에서 현상학적 초월론적 철학으로 [진입하는] 길"은 존재론의 길의 "특수한 형태에 다름아니다."(338) 케른은 ⟪위기(1936)⟫에 나타난 초월론적 주관성에 맞닥뜨리는 "돌격[Verstoß]"(339) 또는 "기획[Entwurf]"(341)이 세 대목에 걸쳐 수행된다고 분석한다. 첫째는 칸트의 도움을 빌어 성취하는 주관성의 세계 구성 기능을 개시하는[erschliessen] 28절에서 32절까지다. 둘째는 생활세계의 구체적인 존재방식이 객관적 학문의 관점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철학적 보편문제"로서 탐구되고, 그렇기 때문에 "낯선 것의 혼합[fremde Einmengung]으로부터 생활세계의 존재의 문제를 정화시키기 위해[freizuhalten]"(340) 즉 메타바시스를 막고 생활세계에 고유한 존재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①객관적 학문에 대한 에포케가 요구되고 이에 더해 "세계를 구성하는 의식의 의미와 타당성은 세계의 의미와 타당성을 언제나 의문시하지 않은 채 전제하는 자연적 태도에서 탐구될 수 없다"는 이유로 ②"소박한 세계믿음의 타당성 수행과 관련된 보편적 에포케[einer universalen Epoché hinsichtlich des naiven Geltungsvollzuges des Weltglaubens]"를 요구하는 데로 나아가는 33절에서 42절까지다(341). 셋째는 [그처럼] "생활세계적 사물들의 현실성과 관련한 에포케"(341)까지 요구한 뒤 "[생활세계의] 존재론적 아프리오리와 현상학적 아프리오리 사이의 상관관계"가 작동하는 "의식의 다양한 근본현상들에 대한 분석"을 수행하는 43절부터 55절까지다. 섹션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후설은 "구성된 세계의 일부[Teilbestand]로서의 객관적 주관성과 초월론적, 세계를 구성하는 주관성 사이의 구분을 통해" 어떻게 "소위 세계의 주체부분[Subjektbestand]이 전체 세계를 그리고 그와 함께 자기 자신을 먹어삼키냐는[verschlingen]" 역설을 해소한다(342, 강조는 원저자). 또한 현상학자는 "그의 인식의 목표를 세계 속에서 종결되도록 두지 않고 세계를 구성하는 주관성으로 되돌아갈" 뿐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자연적인 세계정립적 삶을 "당연히 관통해 살"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데카르트적 길이 가지고 있던 "상실과 제한[Einschränkung]의 인상"을 지워낸다(342-3).*

"Die objektiv-psychologische Auffassung der konstituirenden Subjektivität als einer menschlichen wird ausdrücklich als sinnwidrige Einmengung der natürlich-objektiven Einstellung, also als Metabasis verworfen."(342)

현상학자가 잃는 (세속적인) 것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은 데카르트적 길 위에서도 이루어진다. 케른에 대항할 근거를 모아야 한다. 또한 ②의 에포케가 데카르트적 길에서의 에포케와 무엇이 다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케른에 따르면 존재론의 길은 데카르트적 길과 심리학의 길이 가지는 그 어떤 결함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존재론의 길] 위에서는 전체 주관성이 획득될 뿐 아니라, 초월론적 환원은 여기서 무엇보다도 더 이상 특수한 존재영역의 상실 또는 제한으로서 현출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초월론적 환원은 여기서 바로 한계들의 돌파[Durchbrechen von Schranke], 즉 "일면적", "추상적", "외면적[äusserlich]", "평면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자연적-객관적 인식의 한계들[의 돌파]로 현출한다."* 세계는 더 이상 낯선 대상들의 총체가 아니라 "다겹의 형태들을 통해 변화하면서 관통해 움직이는[werdend hindurchbewegende] 의식의 고유한 성취[eigene Leistung]"로서 인식된다. 이로써 "현상학적 환원은 그러므로 여기서 "포괄적인 것", "구체적인 것", "내면적인 것[Innerliche]", "깊이의 차원[Tiefendimension](자신 안에 "평면의 차원"을 포함하는)"으로의 내디딤으로서의 타당성에 이른다[kommt zur Geltung]."(343)

*이러한 차이가 단순히 표현상의 차이라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후설이 데카르트적 길의 진정한 의미를 적절한 표현을 찾아 내세우는 데 실패했을 뿐이다.

 

★"Ihr[Reduktion oder Geltung] Grundcharakter besteht auf diesem Weg in der Umstellung einer das natürlich-objektive Weltleben radikal durchbrechenden konsequenten Reflexion. Die Epoché tritt dann als unselbstständiges** Moment auf : Sie ergibt sich als logische Forschung der Umstellung, die sich selbst treu bleiben und nicht die neu eröffnete Dimension mit Auffassungen ("Kategorien") des natürlich-objektiven Weltlebens beeinträchtigen[침해하다] will. [...] Nur jener ontologische Weg erfasst also auch die Subjektivität wirklich als transzendentale."(343-4, 강조는 원저자)

cf. 심리학주의에 의한 의식의 '실재화[Realisierung]'에 대한 반발(344) ➔ Ms. ong.,A I 36,S. 193a (S.S. 1920)

**Q. (데카르트적 길에서의 에포케는 자립적인 반면) 존재론의 길에서의 에포케는 비자립적이라는 케른의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아가 케른은 후설이 환원을 "중립성의식의 미결정인-채-존재하게-둠[das "Dahingestellt-sein-lassen" des Neutralitätsbewusstsseins]"으로 이해하는 견해에 대해서도 그것이 자연적 태도에 속한다는 이유로 추후 거부했다고 주장한다(Hua III, S. 479).* 그러나 데카르트적 길을 통한다면 환원은 의심이나 중립성의식으로밖에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데카르트적 길을 걷는다고 해도 그 끝에는 자연적-객관적 태도[에서 보이는 바]에 도달할 뿐이며, 환원과 중립성의식을 동일시하지 않기로 한 후설의 입장 변화는 "그가 에포케를 결코 데카르트적 길을 통해서 규정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후설의 철학은 그것의 본질에서 거의 데카르트적이지 않다."(345, 강조는 필자)

*Q. 어째서 중립성의식은 자연적 태도에 속하는가?

 이어 케른은 후설이 데카르트적 길로부터 거리를 둔다는 사실이 "엄밀학으로서 철학의 이념의 단념[das Fallenlassen]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철학은 당장[nun] 절대적 명증을 시작점으로 가지고 있지 않고, 그것[철학]의 진행은 절대적 명증을 점점 더 철저해지는 반성[immer radikalere Besinnung]과 자기비판을 통해 찾는다는 데 존립한다. 절대적 명증은 후설이 "형식논리학과 초월논리학"에서 명석하게 인식하듯이 주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포기되는 무언가, 즉 하나의 이념이다. 이 이념의 철저하고 일관적인 추구 속에서 철학은 엄밀하게 학문적인 것으로서 증명된다."(346, 강조는 필자)*

*데카르트적 길 또한 이차적 비판을 요구하기 때문에 자신이 절대적 명증을 발견했다고 확신하지 않으며, 절대적 명증을 다만 하나의 이념으로 추구하지 않는가? 케른이 '필증성'을 지나치게 무겁게, 즉 346쪽에서 자인하듯이 즉자적인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아닌가? 데카르트적 길 역시 대자적 필증성만으로도 현상학적 탐구가 성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가? cf. Hua XVII, s.239, 253-5 읽어볼 것

 

 결론부에는 케른은 최초의 물음으로 돌아와, "철학적 인식의 구성은 무엇을 통해 수행되느냐"고 다시 묻는다. 철학적 인식은 추상을 근거로 하는 실증학문을 통해서도, "다른 것으로부터 분리된 개별적 인식[Eine vom Uebrigen abgeschiedene Einzelerkenntnis]"을 추구하는 데카르트의 방식을 통해서도 얻어질 수 없다(347). 왜냐하면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는 구체적이고 총체적이며 전체 자체[das Ganze]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자는 그가 전체와 맺는 관계 속에서만 규정되므로, "[개별자에 의해 수행되는] 철학은 [데카르트적 공리와 같은] 절대적 시작을 가지지 않고, 도리어 그저 (끝없는 것 속에 놓여있는) 절대적 끝만을 가진다."(348) 케른은 철학이 자연적 삶과 가지는 이중적 관계에 대해 평하며 논문을 마친다.

"Philosophie ist daher aktuell, aber sie geht in der Aktualität nicht auf wie die Ideologie*, sondern sie hat das Ewige zu ihrem Horizont und die unendliche Aufgabe, die Gegenwart zu ihrem Telos, die beschränkte Vernunft zur vollen Vernunft und damit aber auch den Antagonismus zwischen naivem Weltleben und Philosophie zur Aufhebung zu bringen."(349)

*케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오직 자연적 세계관심으로부터 발생하며 특정한 역사적 상황과 구분되지 않고 따라서 그 상황이 사라지면 함께 소멸한다.


★★★ 논문에서 활용할 땐 원문과 대조해 직접인용 여부 다시 한 번 제대로 체크할 것. 번거롭더라도 거듭 꼼꼼해지는 것이 살 길이고 학자의 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