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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Sebastian Luft, <Husserl's Theory of the Phenomenological Reduction: Between Life-world and Cartesianism> 요약 및 비판

Luft, S. (2004). Husserl's Theory of the Phenomenological Reduction: Between Life-world and Cartesianism. Research in Phenomenology, 34, 198-234. 저서에만 추가된 내용들이 있어 인용은 Subjectivity and Lifeworld in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2011의 2장으로 수록된 판본을 따른다.

나에게 '생활세계'의 이미지는 사실 이런 것이다.

 본 글에서 Luft는 후설이 초월론적 환원을 크게 세 갈래로 체계화하면서, 그로써 달성하고자 시도했던 목적 두 가지--데카르트주의의 관철과 생활세계 존재론의 수행--를 끝내 조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보이고자 한다.

 초월론적 환원을 수행할 동기가 되는 인식론적 문제는 무엇일까? Luft에 따르면 그것은 "단순히 말해, 참된 지식(true knowledge) 그리고 그것을 획득하는 수단"이다(54, 강조는 필자). 지식의 참됨은 이성이 통하는 학문에서도, 상식이 통하는 전학문적인 경우에서도--Luft는 교통사고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진술의 진위를 판가름해야 하는 판사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중요하다. 전자에서는 학문적 지식이, 후자에서는 상황적 지식이 추구된다. 그런데 상황적 지식의 경우, 설령 같은 대상에 대한 진술이 엇갈린다고 할지라도 해당 진술을 지배하는 관심이 상이하다면 서로 모순을 빚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관심은 서로 다른 특수한 상황들, 궁극적으로 서로 다른 지평들을 그 무한성에도 불구하고 폐쇄된(self-enclosed) 영역으로서 형성한다. 의식은 언제나 특정한 관심에 몰두하면서, 말하자면 불순하게 대상을 보며, 상황 및 지평은 다른 상황 및 지평을 배척한다. 이때 세계, 특히 "삶의 총체성"을 드러내주는 생활세계는 "모든 상황들의 상황, 모든 지평들의 지평"이며, 이러한 생활세계의 노에시스적 상관자는 자연적 태도이다(56). 그런데 "모든 세속적인 것의 본질적 주체-연관성에 대한 깨달음"이 요구하는 "초월론적 전회는 자연적 태도를 떠나는 것과 동일하다. 왜냐하면 자연적 태도는 그 정의상 이 상관관계적 아프리오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57) Luft는 자연적 태도가 자연과 세계를 구분하지 않으며 세계를 자연으로, 즉 주체에게 독립적으로 자존하는 것으로 취급하는 데서 그 소박성--필자가 생각하기에 참되지 못함--이 드러난다고 묘사한다. "자연적 태도의 한계에 대해 알게 되는 것", 그것이 곧 "현상학으로의 길을 동기 부여짓는 인식론적 문제의 틀이다."(58, 강조는 필자)

"Thus, the epistemological problem that started this discussion consists, in other words, in being blind to the correlativity of world and experience. The distinction of dóxa and epistéme “translated” into this conception means: philosophy that believes it can operate on a “realistic” level is bound to the natural attitude, and it cannot be critical in the sense of transcendental philosophy."(58, 강조는 원저자)

 이제 Luft는 본격적으로 세 가지 환원의 갈래들을 각기 기술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후설의 환원들은 하나의 분류학을 이루고 있으며, "이 분류학(systematics) 안에서는 이 길들 중 무엇도 다른 길에 대해 평가절하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설명하고 보완한다."(58, 강조는 필자) 첫 번째 환원은, 후설 스스로도 나중에 가서 비판을 가했으나 Hua XXIV 425-6에 따르면 여전히 그 권리와 타당성을 유지하는 데카르트적 길이다. 데카르트적 길은 자연적 태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판단중지, 즉 에포케에서 그 원형(proto-form)을 가져온다. 그 수행이 자유에 달려있는--다만 어떻게? 어느 정도로?--에포케는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괄호쳐지지 않은 것으로 남는 것에 주의하기 위해 임시적으로(momentarily) 작동 밖에 둔다."(59) 그러나 모든 관심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상 또는 세계의 존재를 정립하기 때문에,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은 문자 그대로 일반적, 즉 보편적이고 만연해있다. 그러므로 그것에 대한 판단중지는 단계적으로나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일격에 이루어져야 한다. 문제는 그토록 보편적이고 만연해있는 것에 대한 판단중지를 어떻게 일격에(with one single stroke) 수행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Luft에 따르면 에포케의 자유에 대한 "이 단계에 대한 동기는 정확히 상황적 진리들의 상대성들에 놓여있다."(60, 강조는 필자) 철학자는 상황적 진리에 반해 절대적인 진리를 찾고자 한다. 다시 말해 상황적 진리를 상황에 구애된 한갓 상대적인 것으로서 깨닫는다. 그런데 "모든 상황은 자아의 그것"이므로, 에포케의 주된 기능은 "일반 정립의 무효화 또는 부정"이 아니라, "그로부터 필증적 명증을 정초할 토대를 자아의 자명성 속에서 찾"기 위해 "[상대적 상황이 아닌] 세계에 향해져있는 작용들의 기원인 [절대적] 주체에게로의 전회를 동기부여하는 것"이다. 세계의 일부가 아니라 세계에 맞서 그것의 자신의 상관자로 가지는, "지향성의 장의 총체성"인 초월론적 의식 또는 자아가 바로 에포케 이후 괄호쳐지지 않고 남는 주체이며, "이 주체는 세계 속의 심리적 존재자일 수 없고, 의식 "그 자체"이다."(61, 강조는 필자).

★"Thus, the Cartesian way is the most direct path to the transcendental Ego, but its problem lies in its possible misunderstanding as "reducing away" all worldly things until one reaches the "last man standing" (the Ego), rather than seeing the Cartesian Ego as already transcendental subjectivity, though Descartes could not know this."(저서에만 삽입, 61, 강조는 필자)

 

★"This search for an ultimate and final apodictic foundation, which, following the Cartesian paradigm, can only lie in the Ego (cogito, ergo sum), is never given up by Husserl, no matter how much his actual emphasis might be directed at other “phenomena.”"(61, 강조는 필자)

★그러나 Luft에 따르면 데카르트적 길을 개시했다고 해도 그렇게 괄호쳐진 세계의 밖에서 어떻게 새로운 학문--현상학--의 장을 전개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후설은 계속해서 주관성에 대한 데카르트적 이해가 주관성을 "현상학적 직관의 "장""으로 이해하는 데 난점을 초래한다는 자기비판을 수행했다(61, 강조는 필자). 필자의 이해에 따르면, 데카르트적 길은 자아를 그 존재가 의심 불가능한 그러나 순전히 점적이고 형식적인 개체로서 발견하게 해줄 뿐 어떤 내용을 영역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못한다. "초월론적 의식의 성격에 대한 그[후설]의 통찰들은 환원으로의 그의 길을 수정하는 일을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수정은 결코 폐기가 아니며 도리어 이 첫 번째 길의 확장이다."(62, 강조는 필자)

cf. Luft (2004)는 데카르트적 길이 환원의 본래적 의미를 구현하지 못한다고 주장했던 Kern (1962)과 입장이 다른 것 같다. Kern (1962)는 오히려 데카르트주의와의 이별을 고한 Landgrebe (1961)와 입장이 유사하다.

 데카르트적 길은 "필증적 명증의 장을 확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필증적 지식이 그 위에 세워질 수 있는 토대를 창조하려는 의도로 도입되었다." 이에 따라 '데카르트주의(Cartesianism)'는 ""자아적(Egoic)" 체험의 명증만이 자에에게 필증적 명증을 줄 수 있는 반면, 세속적 존재자들의 체험은 잠재적으로 의심스럽고, 기만적이고, 등등[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외부적 대상의 경우, 직접적으로 보이는 면은 그 자신을 자아에게 원본적으로 부여하지만 "다른 보지 못한 면들은 언제나 기대한 것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다시 말해 외부 지각은 본질적으로 비충전적이며 "그와 관련된 명증은 언제나 가정적(presumptive)"이다. 따라서 초월적 대상들에 대한 체험은 후설이 찾고 있는 "절대적, 필증적 토대"가 될 수 없다(62, 강조는 원저자). 반면 초월적 대상들에 대한 체험과 달리 내재적 체험은 공간적 연장을 가지지 않으므로 음영지어져서, 즉 비충전적으로 주어지지 않고, 도리어 확실성을 담지하는 채로 주어지기 때문에 "오직 내적 체험만이 필증적 지식의 기초가 될 수 있다."(63)

 그러나 Luft에 따르면 내재적 또는 내적 체험 또한 그 필증성이 의심스럽다. 비록 내재적 또는 내적 체험이 공간적 연장을 가지지는 않지만, 그것의 시간성이 공간성의 유비로서 성립하면서 체험의 충전적 총체를 투명하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장의 현재로부터 멀어진 체험에 대해서는 필증적 인식이 불가능하며, 도리어 망각이 빈번하다. "내 의식의 모든 장들에 대한 완전하고 총체적인(total) 접근을 가지는 것은 자아가 신적 의식보다 위에 있음(dispose over)을 의미할 것이다."(63) 그러므로 Luft는 시간의식에 대한 후설의 분석이 "내적 체험의 필증적 명증에 대한 그[후설] 자신의 주장의 뒤통수를 때리며 [...] 에고 코기토에 기초한 필증적 명증이라는 데카르트적 모티프로부터 후설을 미묘하게 밀어낸다"고 위트 있게 평한다. 그는 Kern (1962)과 나란히, 필증적 명증만으로 탐구영역을 제한한다면 [현재에 얽힌 모든 지평이 탐구영역으로부터 제거될 것이므로] "주관적 삶의 매우 작은 부분"만을 취급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64, 강조는 필자).

 Luft는 심지어 후설이 현상에 대한 기술적인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의 아젠다와 비전을 창조적으로 망각했으며, 오히려 그 편이 더 철저한 철학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까지 선언한다. 이처럼 데카르트주의적인 '필증적 토대 찾기'의 기획을 제쳐두고 나면* "주관적 삶의 전체 세계가 개시"되면서, 빈곤해 보였던 에고는 (점적인 개체가 아닌) 무수한 코기토와 코기타툼들이 포괄되는 드넓은 장이 된다(64). 이 새로운 체험의 권역은 '현상학적 심리학'의 탐구 주제로서, 비필증적인 지평을 자신의 구조로서 포함하는--사실상 그것이 거의 전부인--의식을 탐구하고자 한다.**

*Q. 정말 데카르트주의가 제쳐졌냐는 것이 나의 의문이다. 내적 체험의 필증성이 반박되었다고 해서 데카르트적 길의 힘이 약화된다는 식의 서술은 데카르트적 길의 목표 및 성격에 대한 지나치게 편협한 해석이다. 한편, 그렇다면 심리학의 길은 데카르트적 길과 달리 '필증성'을 포기하는가? 심리학의 길이 목표하는 것이 필증적 인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총체성' 즉 의식의 전체에 대한 접근에 불과하다면, 그 철학적 의의가 지나치게 사소해보인다. 심리학의 길이든, 생활세계를 통한 길이든 모두 적어도 이념으로서는 필증성을 목표로 삼아야 하며, 이 점에서는 데카르트적 길과 동일하다.
**Q. 마치 데카르트적 길이 포기된 뒤 심리학의 길이 시작되는 것처럼 서술되어있는데, 이와 같은 서술은 후설의 의도와 어긋난다. 두 길은 서로 독립적인 시작의 동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적 길이 선행되지 않고서도 심리학의 길이 개시될 수 있다.

 

 의식의 본질은 '코기토-코기타툼'의 상관적 구조로서 성립하는 지향성이다. 현상학적 심리학은 이러한 지향성의 원리를 따라서 "의식적 현상들에 대한 형상적 기술"을 기초로 하여 작동한다(65). 그러나 자연적 태도를 탈피하지 않는 한, 현상학적 심리학은 그것이 아무리 의식을 연구하고, 심지어는 상호주관적이고 공동적인 의식을 연구한다고 해도 여전히 실증적 학문의 일부일 뿐이다. Luft에 따르면 후설은 현상학적 심리학의 방법론적 결함들이 여전히 실증적인 현상학적 심리학으로 하여금 초월론적 현상학으로 필연적으로 이행하게 만든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몹시 노력했다. 문제는 해당 이행이 어떻게 동기 부여되며, 어떻게 가능한지 규명하는 것이다. Luft는 그 답이 "자아의 분열이라는 교설"에 있다고 말한다. 자아가 단순한 코기토 이상으로서 "의식적 삶의 전체 영역"이라면, 그 영역에 의해 용해되지(dissolve) 않고도 심리학적 탐구를 진행할 수 있는 '참여하지 않는 관찰자(unparticipating observer)'가 요구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참여하지 않는, 또는 무관심한 관찰자 역시 1인칭의 시점을 견지하며 "관찰의 대상[인 의식적 삶의 영역]과 하나의 동일한 본질을 가진다"는 것이다(66). 다만 자아는 자연적 태도에서 체험하는 자아와 그것을 즉각 반성하는 자아로 분열되며, 후자가 전자를 반성하는 동안 후자는 잠재적인(latent) 반면 전자는 명백해진다(patent). 이러한 분열 또는 반성은 위험하지 않은 방식으로 무한하게 반복될 수 있는데--반성하는 자아를 또 다시 반성하는 식으로--이 같은 반복의 가능성은 "의식의 반성적 능력의 실현 가능성(feasibility)을 증명하고 자아의 "불용해성(insolubility)"과 중심에 있는 것으로서의(centered) "안정성"을 계속해서 새로워지는(ever-new) 반성적 작용들 속에서 확고히 한다."(67, 강조는 필자) 이어 Luft는 자연적 태도 속에서 사는 자아와 철학하는 자아 사이의 분열 자체가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에 대한 관심의 억제를 매개로) 자연적 태도의 소박성으로부터의 철저한 탈피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Luft는 '분열'을, Kern (1962)는 '순수하게 심리적인 것에 대한 배타적 관심'을 심리학의 길의 주된 동기로 상정하는 셈이다.

★"The epoché is hence a radical splitting of the Ego. [...] the term "uninterested observer" becomes understandable as not being interested in the general thesis of naively positing the world as existing in different ways."(67, 강조는 원저자)

 달리 말해 "구성된 세계의 전체성의 오직 하나의 층위"인 정신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의식 그 자체에 대한 총체적 조망"을 얻고자 하는 한, 즉 자아의 분열을 실행하는 한 현상학적 심리학은 자연적 태도와의 단절하고* 초월론적 전회에 도달하게 된다. "오직 자아의 분열만이 관찰자로 하여금 세속적 자아로 머무르면서도 "초월론적 체험"을 가지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68, 강조는 필자) 또한 분열된 자아의 철저한 자기반성은 철학자가 준수해야 마땅한 자기책임의 윤리를 충족시킨다.

*Luft 역시 Kern (1962)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abstraction from the natural attitud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68, 강조는 필자). 두 철학자 모두 심리학의 길이 추상의 방법을 운용한다는 데 동의한다. 흥미로운 것은 Kern (1962)은 그 이유로 심리학의 길이 현상학적 환원의 본래적 의미를 구현하지 못한다고 비판한 반면, Luft는 그에 아랑곳 않고 심리학의 길을 생활세계를 통한 길의 노에시스적 버전으로 취급한다는 점이다. Luft는 생활세계 존재론을 통한 길 외의 다른 존재론을 통한 길은 지향적 심리학을 통한 길과 동일한 군에 속하는 것으로 취급한다는 입장을 표명한다는 점(cf. 각주 48번)에서도 차별화된다.

"Contrasted with the Cartesian approach, the establishing of this agent “saves” the philosophizing Ego from being “lost” or “drowning” within the vast transcendental field. Moreover, only this way of access to the transcendental as a sphere of experience opens the view towards transcendental intersubjectivity–as a community of subjects constituting a communal world. Yet, establishing this observer in a conscious methodological move retains the radicality of the Cartesian approach because it insists on a philosophizing agent practicing this introspection; it can be seen as a Cartesian remnant in a wholly different agenda. Only with the clear carving out of such an agent can the philosopher claim to take over responsibility for his or her own actions as a scientist and human being."(69, 강조는 원저자)

 Luft는 데카르트적 길에서 심리학의 길로 나아감으로써 후설은 엄밀학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여기서는 심리학이라는) 학적 분과의 정초라는 과제이고, 다른 하나는 (에포케를 통해 의식의 총체를 개시함으로써) 철학자로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과제이다.* "[...] 심리학과 초월론적 철학의 근대적 분리는 근대 철학의 운명적인 전개, [즉] 심리학주의로 이어졌다."(70) 그러므로 심리학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해당 분리를 극복하고 심리학을 초월론적 학문분과로 재탄생시켜야 한다.

*Q. 의식의 극히 작은 일부가 아닌 총체가 개시되는 것과 철학자의 윤리가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철학자의 윤리는 오히려 데카르트적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필증적 비판을 통해 지켜지지 않는가?

cf. 데카르트적 길은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을 정적으로 정초하는 데는 유능하지만, 그것을 최초로 '직관하게' 해주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는 것 같다.

 

 그러나 후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말년에 새로운 환원의 길을 도입한다. Luft에 따르면 세 번째 길인 생활세계를 통한 길은 이전의 시도들을 평가 절하하지 않으며, "더 일찍 이루어진 그의 반성들로부터 순전히 그 결과를 끌어올"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대체 무엇이 후설에게 새로운 길을 개시해야 한다는 동기를 부여했느냐고 물을 수 있겠다. 초월론적 차원에 대한 심층적 분석은 그것이 "본질적으로 상호주관적이고 발생적인 차원들"을 가진다는 점을 밝혀준다. 수동성의 영역으로 접어들면 주관성은 "더 이상 '주관적인 것'이라고 불릴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의식의 장에 대한] 기술은 정적인 사용역(register) 속에서만 분석된다면 불완전하다. 정적인 기술은 발생적 전개의 우주 내에 순전히 가장 상위의 층위만을 붙잡는 것으로 밝혀진다."(70, 강조는 필자)* 의식이 세계를 발생적으로 형성하는 과정에 대한 분석--즉 생활세계를 통한 길--만이 세계를 (초월론적 구성의 결과물인) '생활세계'로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이때 심리학의 길이야말로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초월론적 의식이므로, 두 환원의 길은 서로를 [직접적으로] 보완한다.

★"Since transcendental consciousness as world-constituting and the lifeworld as the product of constitution are correlates, thematizing either of them yields a way into phenomenology. Hence, the way via psychology and that via the lifeworld complement each other. Whether I take my point of departure from mundane consciousness and reduce to its transcendental “counterpart,” or if I inquire back from the pre-given lifeworld to its constituting achievements, I arrive at the transcendental (inter)subjectivity as the “absolute being” that constitutes the world."(70-71, 강조는 원저자)
*Luft는 Hua IX 336-45를 근거로 든다고 하니 확인하자. 정적 현상학이 발생적 현상학에 의해 집어먹힌다는 것은 그릇된 해석이다. 정적 현상학은 발생적 현상학과는 다른 제 나름의 기능을 수행하며 제 나름의 의의를 담지하기 때문이다.

**Luft가 생활세계를 통한 길이 발생적 현상학의 방법론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는 생활세계를 통한 길에 대한 일면적, 단편적 해석에 불과하다. 생활세계를 통한 길은 정적인 타당성 정초의 기능 또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눈금'의 발생적 타당성뿐 아니라 자체적인 존재 타당성 역시 정립되어야만 물리학적으로 타당한 테제가 그 위에 정립될 수 있는 법이다.

 

 초월론적 현상학만이, 그것도 심리학이나 생활세계를 통한 환원을 이용했을 경우에 "세계를 생활세계로서 주제화"할 수 있다. 세계가 생활의 권역이라는 점은 다른 실증학문들이 망각한 세계의 근본성격이다. 실증학문은 (비필증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생활세계를 추상해내고 망각했다는 의미에서도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이다.* 그러므로 1922년에 발표된 Kaizo 기사들과 1936년에 발표된 ⟪위기⟫에서 드러나듯이 학문적 위기를 맞은--수학화된 세계에 의해 일상생활의 권역이 대체된--"세계는 엄밀학을 통해 구해져야 하고, 이 학은 궁극적으로 현상학이다."(71, 강조는 필자) 그렇다고 해서 실증학문의 성과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것이 근원을 망각하지 않고 근원과의 관계를 보존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될 뿐이다.

*이 '전제 망각'이 '무전제성 달성 실패'로 이해될 경우, 새로운 의미의 비필증성으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생활세계는 "전학문적(pre-scientific) 태도의 세계"로, 즉 "자연적 태도가 자신의 상관자로 가지는 세계"이자 "에피스테메의 세계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독사의 주관적-상대적 세계"로 정의된다. 실증학문은 이 상대성을 객관적 진리로 가는 출발점(terminus a quo) [즉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상대성이 지배하는 생활세계를 주제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학문적 생활세계는 그것이 자연적이든 학문적이든 모든 인간 행위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반성의 과제는 가장 먼저 이 생활세계를 주제화하는 것, 즉 그 위에 덮이게 된 추상의 산물인(abstractive) 층위들을 걷어냄으로써 그것을 다시 덮는(re-cover) 것이다."(72, 강조는 원저자) 이와 같이 생활세계 존재론을 통한 보편적 에포케를 수행하면 자연적 태도에서 경험되는 생활세계 또한 초월론적 자아의 '구성'의 산물이라는 점이 밝혀지는데, 이 초월론적 자아는 '세계화(enworlding)'를 통해 다시 자연적 태도로 돌아갈 수 있다.

"Husserl calls for a "reduction to the lifeworld" in the specific sense of an initial "opening up," because the lifeworld has been "forgotten" by modern man in striving for a scientific world domination. Strictly speaking, one cannot call this forgetfulness since it never was thematized in the first place."(72, 강조는 필자)

 Luft는 Kern (1962)에 동의하면서 "생활세계로부터의 보편적 에포케를 통해서만 세계와 초월론적 주관성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완전한 가치인식(appreciation)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서 생활세계의 주제화만이 그것의 보편적 차원들 속 세계에 대한 시선을 획득한다. [...] 마찬가지로, 그것의 가장 넓은 차원들 속에서 초월론적 주관성에 대한 완전한 분석을 통해서만 우리는 세계를 구성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고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그것이 그것인 바로서 이해할 수 있다: 발생, 역사 그리고 그 위에서 역사적 "주관성들"이 발전해왔고 언제든 발전할 수 있는(can ever develop) 토양을 가지는 삶의 역사적 세계. [생활세계와 초월론적 주관성 사이의] 이러한 상호적으로 포용하는 관점을 통해서만 현상학은 궁극적으로 역사의 초월론적 문제를 주제화할 수 있다."(73, 강조는 필자) 나아가 세계 구성의 발생적 측면의 발견 또는 생활세계의 역사에 대한 추적은 철학의 역사를 초월론적 현상학을 향해 달려가는 목적론적 역사로서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Luft는 자신이 데카르트적 길보다 역사적 길을 더 중요하고 체계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후설 자신의 메모를 인용하면서(Hua XXIX, 425-6), 세 환원들은 모두 생활세계를 통한 환원으로 귀결된다고 주장한다.*

"To sum up, I have attempted to systematically present the three principal ways into phenomenology. There is ultimately but one way, which may have its different procedures or emphases: the way through the lifeworld."(74, 강조는 필자)

*Q. 이러한 Luft의 단언은 이후 데카르트주의와 생활세계 존재론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서술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이상의 분석은 어떤 결론으로 이어지는가? Luft에 따르면 후설은 환원의 방법을 통해 현상학의 두 가지 초점(focal points)에 이르렀다. 하나는 "완전한 범위에서의 초월론적인 것의 구성적 산물로서의 생활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위에 학문의 조직(edifice)을 세울 모든 필증적 명증의 기초인 [...] 초월론적 자아"이다(75). 우선 철학자로서의 자아는, 후설의 표현을 빌리면 인류에 봉사하는 자로서, 자연적 태도를 떠나 [인간의 본질이자 존엄성을 이루는] 합리성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이 그에 속해있는 상호주관적인 생활세계에 대한 책임 있는 진술을 나아가 진리를 표명하고 "인류를 그 자신의 미리 고안된, 목적론적 길로 다시 불러내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는다(76).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철학하는 자아가 "상호모나드적 총체성" 속으로 용해되는 것은 아니다. 후설의 현상학은 "모든 반성의 토대이자 시작점으로서의 절대적 자아"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데카르트적 접근법을 통해서만 후설은 "철학자의 역할을 인류의 문화적 활동의 틀 안에서 해석할 수 있다."(77, 강조는 필자) 이는 일부 학자들(e.g. Landgrebe (1961))이 후설이 데카르트주의와 이별(Abschied)했다는 선언과 상반되는 Luft의 관점이다. 관건은 전학문적 생활세계에 대한 존재론에 대한 후설의 새로운 관심과, 그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데카르트주의가 과연 화해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Luft에 따르면 후설의 유고들은 그가 생활세계의 존재론에 대해 1920년대부터 철학적 사유를 진행해왔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데카르트주의와의 '이별'의 문제는 더더욱 문제적인 것이 되었다.

*Q. 철학자의 소명, 자기책임 또는 그에 따른 자연적 태도의 탈피는 왜 화해의 계기로 고려되지 못하는가? 세 환원 모두 자연적 태도의 특정한 '망각'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닌가?(자신의 상대성/토대 없음을 망각하든, 발생적 기원을 망각하든.)

 

 물론 "후설에게 초월론적인 것과 생활세계적, "존재론적" 분석은 서로를 보완한다." 생활세계를 주제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연적 태도에 대한, 말하자면 메타적인 인식을 가능케 하는 초월론적 환원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자연적 태도는 이미 초월론적이다, 다만 이를 알지 못하는 채로. 자연적 태도는 초월론적 관점 속에 "함축"되어있다."(78) Luft에 따르면 생활세계의 존재론은 비록 자연적 태도에서의 자아를 탐구하기는 하지만, 초월론적 환원의 효과를 무효화하고 소박성을 되찾는 작업이 아니다. "도리어, 이 단계는 준-상상적 움직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낡은" 태도로 돌아가는 을 하며, 생활세계에 대한 기술은 그로부터 내가 그것에 대해 알아차리기 전에 자연적 태도에서의 삶이 어땠는지를 분석함 속에서 전개될 수 있다. [...] 이것이 바로 환원을 수행하는 것이 [...] 생활세계 존재론의 과제와 모순되지 않는 이유다."(79, 강조는 필자)

 요컨대 생활세계 존재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생활세계로서 주제화할 수 있게 해주는 초월론적 환원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과는 곧바로 자신만의 성격을 띠게 된다." Luft에 따르면 생활세계의 존재론은 발생적 현상학적 도구들을 이용하여 "공동적 삶의 최초의 형성들을 거쳐 고차원적인 인격들에 이르고 마침내 문화들, 고향세계들, 타자세계들 등등으로 끝마쳐지는 [...] 거대한 탐구의 장"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고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기술"을 수행하는 해석학이다(79, 강조는 필자).

"The very “mundaneity” of the problem of the world of life suggests its remoteness from transcendental questions."(79, 강조는 원저자)

 결론적으로 Luft는 데카르트주의와 생활세계 존재론이 후설이 작업한 상호독립적인 두 의제들이었으며, 둘 모두 현상학의 성공을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지만 둘을 모두 포괄하는 원칙은 도출할 수 없다고, 즉 둘의 상호보완성을 넘어 원칙적인 화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In Husserl’s eyes, both agendas are correlates. At the same time, I would like to insist that Husserl’s Cartesian account of the subject and his lifeworld ontology present two distinct and in this sense, separate programs. They are projects Husserl pursues with different aims: Whereas the “Cartesian Husserl” pursues a path of scientific grounding and foundationalism, the “lifeworld Husserl” is interested in what can been called a hermeneutics of the world of everyday life. Both projects are set squarely against each other, not in the sense that they contradict or cancel each other out, but in that they pursue two different agendas. They are located on two different “maps.” One can pursue one while completely neglecting the other. It is possible to pursue a “theory” of the lifeworld without being at all interested in transcendental (“constitutional”) problems.* Likewise, one can immerse oneself in transcendental matters in the tradition of Kant and German Idealism, and fruitfully utilize Husserl’s contributions to transcendental theories. 
[...] Husserl failed to combine these two major aspects of his philosophical endeavor. There is neither just the “Cartesian” nor the “lifeworld Husserl.” There is of systematic necessity both. However, there cannot be a systematic principle uniting both, since formulating such a principle would make the problematic step of considering one of the two projects as absolute and the other derivative. Favoring one would result in devaluing the other.** It is inconceivable how foundationalist questions following the Cartesian paradigm would fit into a lifeworld ontology, precisely because this ontology is based on “the transcendental” as necessarily an inter-subjectivity.*** Likewise, it is not clear why such a lifeworld ontology would “need” foundationalist clarifications other than clarifying the role of the philosophizing agent, who is but a minimal focal point of experience of the life-world. [...] This is the consequence of the Janus head of the phenomenological reduction."(79-80, 강조는 원저자)
"Performing the phenomenological reduction, to Husserl, is nothing but the constant attempt to “come to reason,” although there might be factual hindrances on the way to this ideal—a way which necessarily leads through the lifeworld. [...] There might be no way to unify the issues of lifeworld and Cartesianism, but there might also be no other way to go than into these two, opposite directions."(81, 강조는 필자)

 

★*생활세계가 구성의 산물임을 모르고도 생활세계의 존재론을 펼칠 수 있다는 견해에 동의할 수 없다. 애초에 생활세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초월론적 환원이 요구되고, 초월론적 환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초월론적 자아의 구성기능 즉 '성취하는 주관성'을 밝히는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필자는 데카르트적 초월론적 현상학이 생활세계의 존재론의 타당성을 정초해준다고 생각한다. 만일 전자의 수행이 후자의 수행에 시간적으로 선행한다면--후설의 현상학의 변천사에서 볼 수 있듯이--발생적인 타당성의 정초 기능까지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둘을 통일하는 체계적 원칙을 세우는 작업이 어째서 필연적으로 둘 중 하나의 원칙만을 내세우고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는지 모르겠다. 제3의 길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배제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데카르트주의와 상호주관성 사이의 부조화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필자는 데카르트주의가 상호주관성의 정적인 해명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다음의 표는 Luft (2011)의 서술을 필자가 분석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데카르트주의 생활세계 존재론
학문적 지위 초월론적 현상학 존재론
탐구 대상 상호주관성마저 그로부터 비로소 정초되는 절대적, 초월론적 자아 상호주관적 생활세계의 세속적 형성물들(사회적 자아, 다양한 차원의 공동체 등), "상대적인 삶의 목표"(81, 강조는 원저자) 등
탐구 목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될 수 있는 필증적 토대 찾기, 여타 학문 정초 상호주관적 생활세계에 대한 해석학,인류의 실존적 위기 극복
탐구 방법 비필증적 인식 일반에 대한 일격의 판단중지를 통해 잔존하는 필증적 인식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데카르트적 환원  자연적 태도에 대한 주제화를 가능케 하는 생활세계를 통한 환원(생활세계에 대한 노에마적 측면에서의 접근) 또는 현상학적 심리학을 통한 환원(생활세계에 대한 노에시스적 측면에서의 접근) + 발생적 현상학적 방법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