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창작물

몽상이 생의 하나뿐인 낙인(2021.9)

20210904 16:12~18:09의 즉흥적인 글.

피카소, 꿈

 누가 보면 내 일상은 휴가 같아 보일 수 있다. 나는 이르면 열두 시, 늦으면 두 시에 하루의 첫 눈을 뜬다. 이른 아침 해가 뜰듯 말듯 하는 모습을 못 본 지는 매우 오래되었다. 언제나 태양이 가장 강렬할 때에, 커튼이 쳐진 방 안으로까지 침투해오는 그 존재감을 온몸으로 애달프게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몸을 일으키는 것이다. 뭉친 어깨를 주무르면서 부엌으로 나가면 전날 밤 썰어둔 계절 과일이 락앤락 속에 담겨있다. 나는 체리나 사과를 집어먹거나 복숭아 따위가 썰린 것을 한 입 베어물고 씹을 때마다 한 꺼풀씩 옷을 벗는다. 과일을 삼킬 때즈음 나는 샤워 부스 안에 서 있다. 샴푸에서는 제비꽃 냄새가, 바디워시에서는 라벤더 냄새가 난다. 아닌가, 라벤더가 아니라 라일락인가? 라벤더인가 라일락인가? 내게는 늘 이런 식이다. 대체로 세계는 경험이 아닌 언어로 기억된다. 나는 라벤더나 라일락이나 똑같이 ‘라’로 시작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친연성이 있다고 여긴다. 단순히 그렇게 생각할 뿐 아니라 실제로도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내 코는 무용지물이며, 냄새는 보통 이성이 맡는다. 사실은 제비꽃 냄새도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거품이 진한 보라색이기 때문에 제비꽃이겠거니, 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집에 가면 책장에 꽂혀있었던 백과사전에 제비꽃은 진한 보라색이라고 소개돼있었기 때문이다.

 샤워가운을 두르고 나오면 잠에서 조금 깬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하루를 시작하려면 커피를 마셔야 한다. 이것은 열일곱 살 때부터 시작된 관성 같은 습관이라, 고치고 싶어도 고치지 못한다. 나는 고상한 사람들처럼 커피를 내려마실 줄 모른다. 고상한 사람들은 커피주전자를 종류별로, 용도별로, 색깔별로 모은다고 한다. 어떨 땐 종이로 내리고, 어떨 땐 융으로 된 망으로 내린다고 한다. 하지만 내 혀도 마찬가지로 무용지물이고 냄새는 이성이 맡기 때문에, 내게는 어떤 커피든 아무래도 좋다. 이럴 때 쓸 만한 아주 좋은 독일어 표현이 있다. ‘Egal’. 모든 선택지가 평등하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무차별하고, 따라서 뭐든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냥 나는 가장 싼 인스턴트 커피를 마신다. 예전에는 커피믹스 포장지의 끝부분에 모여있는 설탕을 조금 남겼었다.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어 끝자락을 쥐고 있으면 포장지를 수직으로 기울여도 설탕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건강에 대해서조차 에갈하다. 언제 죽으나 언제까지 사나 똑같다. 어쩌면 이미 죽어버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고, 남은 과일을 점심으로 먹는다. 그냥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고 마신다. 그렇다고 해서 연예인들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매일 ‘세계 테마 기행’이나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것을 본다. 이국적인 것을 탐한다. 나를 조금도 닮지 않은 사람들이 나와 전혀 다른 루틴을 가지고 사는 것을 동경한다. 게르에서 저벅저벅 걸어나와 비닐하우스로 들어가는 몽골의 소년을 동경한다. 영어를 할 줄 몰라 관광객을 두려워하는 포르투갈의 웨이트리스를 동경한다. 코와 입에 스카프를 두르고, 열심히 흙을 퍼내다 뭔가 건드려선 안 될 것 같은 것이 나오면 황급히 고고학자를 부르는 이집트의 젊은이를 동경한다. 밤마다 삼삼오오 모여 소리를 지르는 미국의 래퍼들을 동경한다. 그들 중 일부는 24시간 열려있는 코인 런드로맷에서 세탁물이 마르기를 기다릴 때조차 랩을 한다. 몽골 소년은 일을 하고 게르로 되돌아가 당근 카레를 먹을 것이다. 웨이트리스는 말이 통하는 애인과 저녁식사를 하며 취향에 따라 술이나 탄산수를 마실 것이다. 땡볕 아래서 노동한 젊은이는 몸을 씻자마자, 아니면 몸을 씻지도 못한 채 피곤하여 잠에 빠져들 것이다. 래퍼들은 해가 뜨면 슬슬 졸리다고 느끼며 꿈결에 영감을 얻을 것이다.

 어쩌면 선입견이거나 클리셰들이라고 생각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저이들이 행복한지는, 애초에 정말로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는 대로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휴가 같은 일상 속에서조차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행을 순간적으로 잊을 수만 있다면 조용한 동경을 마음 속에 잠시 품는 것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도 무분별한 동경의 원인조차 불행이라고 생각하면, 불행을 망각한다는 것은 내게 영영 있을 수가 없는 일임을 원치 않게 깨닫게 된다.

 점심을 먹고 나면 씻을거리가 몇 개 되지 않지만 그래도 설거지를 하고, 꽃병의 물을 갈아준다. 나는 꽃을 아주 잘 가꾼다. 줄기의 끝이 으스러지지 않도록 아주 요령 있게 잘라줘 물이 흡수되는 표면이 넓어지도록 만들 줄 안다. 결국에는 집안에 가둬놓고 있지만 적당량의 햇빛을 쬐어줄 줄도 안다. 이렇게 하는 건 꽃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이다. 가끔은 줄기를 자를 때 꽃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귀가 아니라 이성이 그것을 듣는다.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꽃을 자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고 논리적으로 있어야 할 것만 같다. 그렇다고 해서 정육점이나 꽃집이 무조건적으로 폭력적인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돈을 벌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세상에 비명 지르는 존재자가 인간만은 아닐 것이라는 무조건적 확신 정도는 가지고 있다. 단지 어떤 비명에 귀 기울일 것인가에 대한 세상의 까다로운 선택이 있을 뿐이다. 일단 내 비명은 인간의 비명이었는데도 세계가 듣기를 거부하였다.

 꽃병이 몇 개 없기 때문에 시간이 잘 가지 않는다. 시계를 보고 초조해진 나는 창가로 향한다. 택배 기사들은 하루종일 분주해 보인다. 형형색색의 조끼를 입고 이 거리, 저 거리를 수많은 패킷과 함께 최대한 효율적으로 주파해야 한다. 그들의 땀방울과 뛰는 심장을 눈 말고 뇌가 본다. 오랫동안 창가에 서있다가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눕는다. 키린지나 라디오헤드, 어쩔 때는 베토벤을 들으며 천장을 응시한다. 손 말고 이성이 천장을 어루만지다 괜히 약할 것 같은 부분을 주먹으로 가격한다. 천장이 생각보다도 더 쉽게 바스라지면서 뚫리면, 구멍 너머로 우주가 있다. 내 마음은 그곳으로 이동한다. 마음은 가뿐히 여행을 한다. 다시 말해 나는 망상한다. 좋게 말하면 몽상한다. 꽃에 물을 주는 일보다 시간이 더 잘 간다.

 나는 몽상이 생의 하나뿐인 낙인 몰락한 가수이다.

 저녁거리는 반드시 바깥에 나가서 사온다. 모자를 눌러쓰고 나가면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알아본대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세상은 생각보다 연예인에게 관심이 없다. 몰락한 연예인에겐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저마다 먹고 사는 일이 너무 급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몰락이 생에 대한 치명타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내가 덮밥을 포장해달라고 말할 때 거부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가게의 구석에 서있다가 덮밥이 나오면 비닐봉지의 따끈한 바닥을 감싸쥐고 일부러 먼 길을 골라서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 키린지나 라디오헤드, 베토벤을 듣거나 가끔은 슈만을 들으면서—‘어린이 정경’ 같은 것—덮밥을 먹는다. 생강의 색깔이 무척 예쁘다고 늘 생각하지만 한 번도 입에 대지 않는다. 치울 것도 별로 없으면서 먹은 것을 열심히 치우고, 특히 재활용에 신경쓴다.

 아직도 해가 지지 않았다. 밤이 될 때까지 영화를 본다. 예술성 같은 것은 따지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것이기만 하면 애니메이션이든 코미디든 공포 영화든 에갈하다. 그저 뇌를 자극할 것이 필요할 뿐이다. 날마다 일정량의 자극을 채우지 못하면 잠에 들기를 진지하게 시도할 수조차 없다. 가끔씩은 영화를 보다 부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꼭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진동이 울린다. 밤 열한 시나 자정 즈음이다. 왜 안 주무시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안 주무시는 게 아니라 못 주무시는 것 같기도 하다. 못 뵌 지 오래됐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입을 열지 않는다. 아니, 손부터 뻗지 않는다. 나는 일식집의 앳된 아르바이트생을 제외하면 하루종일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 혼잣말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뇌가 산출하는 언어로써만 세계가 기억되다니 참 신기하다. 감성의 부재. 정확히 말해 이성의 과잉. 솔직히 이것이 내 몰락의 이유 같다. 이성으로 나는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고, 굴복시킬 수도 있지만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런데 가수는 납득시키거나 굴복시키면 되는 직업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이다.

 어느새 영화 평가 애플리케이션에 내가 봤다고 등록한 영화가 1000개를 넘었다. 애플리케이션은 내가 씨네필이라면서 영화를 향한 내 열정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하지만 나는 모든 영화에 5점을 주는, 사실상 애플리케이션의 원활한 기능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악성 보살이다. 내가 악성 보살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모든 영화는 그것이 얼마나 쓰레기 같든지 간에 감독과 스태프와 배우가 힘을 합쳐 세계에로 나아가는 몸짓의 총체라는 의미에서 에갈하다. 그리고 나로서는 더 이상 가질 수도 가진 체 꾸밀 수도 없는 의미를 가지기에 에갈하게 5점 만점이라고 생각이 된다. 물론 노래 말고 다른 길로써 세계에 나아갈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을 나는 많이 들었다. 나 또한 그 가능성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방법에 대해 끔찍하게 무지하다. 내가 끔찍하게 무지하다는 사실이 끔찍하다. 이런 편협한 성향을 생각하면 나의 몰락은 예정되어있었던 것만 같다. 노래를 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망했을 것 같다는 뜻이다. 의미의 근원을 하나밖에 찾지 못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망하게 되어있다. 망한다는 게 어떤 의미이든지 간에 말이다. 이것은 내 삶을 구겨넣어 겨우 충족시킨 아포리즘이다.

 두 개, 때때로 세 개의 영화가 끝나면 감사하게도 슬슬 졸립다. 항불안제 덕분이기도 하다. 나는 잠에 든 뒤 깨어나지 않을 나 자신을 상상한다. 내가 집세를 내지 않아 흥분한 집주인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문을 따고 들어와, 영원히 잠들어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보다 성실한 새 세입자를 기대할 상황을 상상한다. 그러면서 침대로 돌아가는 길에 부엌을 거쳐 과일을 준비한다.

 내일 아침에 먹을 것들이다.

 

'창작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풀꽃과 장미의 수난(2021.12)  (0) 2021.12.01
커피하우스가 타버리고 남은 재(2021.7)  (4) 2021.09.12
몽상이 생의 하나뿐인 낙인(2021.9)  (2) 2021.09.04
제지기오름(2021.8)  (2) 2021.08.03
소마와 프시케(2018.3)  (0) 2021.06.20
작은 바울(2018.5)  (2) 2021.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