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mund Husserl, trans. by Dorion Cairns, Cartesian Meditations, Martinus Nijhoff Publishers, The Hague, 1960.
서론(§1-2) 철학을 필두로 모든 학문들을 절대적인 기초 위에 정초하고자 했던 데카르트의 성찰은 철학사적으로 주체로의 전회를 추동했다. 기존 학문들의 타당성을 의문시하고, 에고 코기토를 토대로 모든 것을 다시 세우고자 한 그의 시도는 무언가를 새로이 시작하려는 모든 철학자들의 귀감이 된다. 뿐만 아니라 데카르트는 최초로 객관주의가 아닌 초월론적 주관주의(transcendental subjectivism)로서의 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오늘날[후설 당대]에는 수없이 많은 철학적 작업들이 생산되고 있지만, 그들 가운데 객관적으로 타당한 결론들은커녕 일관성조차 찾아보기가 힘들다. 철학자들은 상호적인 비판이나 협업 없이 무책임한 고립 속에서, 말하자면 자신만의 철학에 몰두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은 데카르트가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회의할 수 없는 앎의 보편적인 기초를 닦고자 했던 동기와 유사한 것을 부여하기에 충분하다. 여타 철학의 소박성을 지적하고 "자아로의 필연적 회귀"를 철저주의적으로 그리고 책임감 있게 수행할 때가 온 것이다(6).
제1성찰: 초월론적 자아로의 길
§3 후설은 데카르트를 따라 기존의 모든 신념--심지어는 논리학에 대한 신념까지--을 작동 밖에 놓는(put out of action) 유사-방법적 회의를 수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를 추동하는 신념, 즉 애초에 학문이 절대적으로 정초될 수 있다는 신념 자체는 회의에 포함되는가? [데카르트는 이 물음을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부정했다.] 그는 기하학과 수학적 자연과학에서 따온 학문의 이념을 회의의 선입견으로 견지함으로써 충분히 철저주의적인 정신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all-embracing) 철학이 "자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이라는 공리적 기초로부터 연역되어 절대적으로 정초될 수 있다는 것이 거의 자명했다. 그와 달리 또 한 번 새로이 시작하려는 철학자는 그 어떤 학문의 규범적 이념도 미리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학문을 절대적으로 정초한다는 일반적 목표"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8). 우리는 학문이 따라야 할 일반적인 이념을 일단 순전한 가정으로서 소유하고, 그것이 과연 현실화될 수 있는지,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할 위치에 있다.
§4 후설은 정초와 인식의 핵심에 다다르기 위해 '명증'의 개념을 도입한다. 결국 정초라는 것은 "판단과 판단되는 사태 [...] "자체" 사이의 일치(agreement)"이며, 판단은 사태 또는 사태연관이 어떠어떠할 것이라는 순전한 가정이다(10,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어떤 경우에 우리는 사태 또는 사태연관에 대해 탁월하고 강력한(pre-eminent judicative) 인식을 소유할 수 있다. 후설은 이를 사태 자체의 소유라고 표현하는데 이러한 소유의 체험이 곧 명증이다. 순전한 판단은 "순전히 사념되었던 것의 충족, 그 속에서 사념된 것이 그 자체로 주어진 것과 합치하고(coincide) 일치하는 종합"을 통해 명증이 된다(10-11). 이때 술어적인 판단과 선술어적인 명증은 구분되어야 한다. "술어적인 [명증은] 선술어적인 명증을 포함한다."(11)
cf. 반복 가능성에 기반한 '인식'의 정의 "By virtue of this freedom to reactualize such a truth, with awareness of it as one and the same, it is an abiding acquisition or possession and, as such, is called a cognition."(10, 강조는 원저자)
§5 요컨대 명증은 무언가 자체를 정신적으로 보는 직관의 체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명증은 완전성의 등급을 가지는데, "완벽한 명증과 그 상관자, 순수하고 진정한 진리는 지식과 사념하는 지향을 위한 노력 속에 함유되어있는(lodged) 이념들로서 주어진다."(12) 일상생활을 위해서는 상대적인 명증들만으로도 충분하지만, 학문적 탐구에서는 모두에게 최종적으로(once for all and for everyone) 절대적인 타당성을 지니는 명증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철학적 탐구의 "첫 번째 방법론적 원칙"이 도출된다. 이 원칙은 명증으로부터 도출하지 않은 판단, 즉 사태와 사태연관이 그것들 자신으로 현전하는 경험으로부터 도출하지 않은 판단은 학문적인 판단으로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이런 원칙을 세웠을 뿐 현실적인 시작점(actual beginning)이 되어줄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 '어떻게,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의 물음은 엄밀학으로서의 철학을 수립하려는 후설에게 무척 중요한 물음이다.
§6 후설은 절대적 명증의 이상적인 성격인 '절대적 확실성' 또는 '절대적 의심 불가능성'이라는 표현이 상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명증의 완벽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완벽성은 충전적 명증의 완벽성이다. 비충전적 명증의 경우 일면적인 인식만을 확보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불완전하며(incomplete), [이에 따라] 상대적인 모호함 그리고 선명하지 않음(relative obscurity and indistinctness)을 동반한다. 다시 말해 "충족되지 않은 구성요소들, 기대되고 주의되고 있는(attendant) 의미들을 가진 "체험"이라는 결점(infectedness)"을 가진다. 한편 두 번째 완벽성은 필증적 명증의 완벽성이다. 필증성은 비충전적 명증에서도 발견될 수 있으며, 절대적 의심 불가능성의 특유한 양상으로서 "명증한 것이 이어(subsequently) 의심스러워질 수 있다는 상상 가능성, 또는 존재가 가상으로 입증될 수 있다는 상상 가능성을 배제하는 완전한(full) 확실성"이다(15). 다시 말해 필증성은 어떤 것의 비존재에 대한 의심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비존재의 절대적 상상 불가능성을 뜻한다. [내부 지각에 있어서든, 외부 지각에 있어서든 도달 불가능한 이념으로서만 주어지는 충전적 명증이 아닌] 필증적 명증이 곧 철학의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
★ §7 모든 일상적인 행위 그리고 경험적 학문이 그에 의존하는 세계의 존재는 필증적이지 않다. 세계에 대한 특수한 체험이 가상으로 드러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일반이라는 "통일적으로 조사 가능한 결합체(nexus)* 전체[...]가 가상으로, 일관적인 꿈으로 입증될 수 있다."(17, 강조는 필자)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경험은 그 타당성 및 타당성의 범위가 철저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달리 말해 세계의 존재는 명백한 사실이 아니라 승인된-현상(acceptance-phenomenon)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 세계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의 우주의 이름"이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후설은 세계가 "결코 판단들의 절대적으로 첫 번째인 기반(basis)이 아니고 [세계가 아닌] 세계에 본성적으로(intrinsically) 선행하는 존재가 [오히려] 세계의 존재를 위해 이미 미리 가정된 기반"일 가능성을 제기한다(18, 강조는 필자).
*후설에게 세계란 그 자체로 이미 일종의 결합체이자 질서이다. 따라서 세계의 비존재 가능성은 완벽한 무화, 전멸의 가능성이 아니라 완벽한 비-결합 즉 혼란 또는 무질서의 가능성이라는 점이 여기서 또 한 번 드러난다. 존재라는 것은 구성물이다.
§8 "판단의 궁극적이고 필증적으로 확실한 기반"이자 "모든 철저한 철학이 그에 정초되어야 할 기반"은 곧 에고 코기토이다(18). 세계가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를 주장하는 것으로 전락된 성찰의 이 시점에서는 타인들 또한, 단지 나를 위한 체험의 자료로서 그 자체적 타당성이 의심스럽다. 그러므로 물체적 자연뿐 아니라 사회성과 문화를 포괄하는 구체적인 생활세계 전체가 존재의 현상에 불과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은 나를 위한 의미와 '참된 존재'로서의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 모든 신념을 삼가더라도 그 삼감 자체는 "내 체험하는 삶의 전체 흐름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삶은 계속해서 나를 위해 거기에 있"으며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그 자체로 반성될 수 있다(19). 이 반성 가운데서 세계는 계속해서 나를 위해 현상하지만, 그것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삼가져있을 뿐인데, 다만 반성되는 것들 가운데는 세계의 존재에 대한 신념을 미리 가정하는 입장-취함(position-takings)을 함유하는 자연적, 비반성적 사념의 과정들이 여전히 포함되어있다. 반성하는 자아가 더 이상 입장 취하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기존에 입장이 취해진 것들 그리고 바들이 체험의 장으로부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순전한 현상으로서의 "승인-변양(acceptance-modification)"을 거친 채로 완전히 보유된다(20). 그러므로 소위 현상학적 에포케 또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괄호치기는 "나의 순수한 삶을, 그것을 이루는 모든 순수한 주관적 과정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념된 모든 것을 순수하게 그 속에서 사념된 것으로" 획득할 수 있게 해준다. 다시 말해 ""현상"의 우주"가 환원으로써 획득되는 것이다(20, 강조는 필자). "현상학적 환원은 또한 내가 나 자신을 순수하게 파악하는(apprehend) 철저하고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 자신을] 자아로서, 그리고 그 속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전체 객관적 세계가 나를 위해 존재하고 정확히 나를 위해 존재하는 그대로 존재하는(is precisely as it is for me) 내 고유한 순수한 의식적 삶과 함께 [파악하는 방법인 것이다]." 순수한 자아의 존재와 그의 코기타치오네스는 세계와 세계의 모든 자연적 존재에 선행한다. 자연적 존재의 실존적(existential) 지위는 순수 자아의 코기타치오네스들의 흐름이 지니는 실존적 지위에 비하면 이차적이며, "지속적으로 초월론적 존재의 영역을 미리 가정한다. 초월론적 에포케라는 근본적 현상학적 방법은 그것이 이 영역을 소급 지시(lead back)하기 때문에 초월론적-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불리는 것이다."(21)
§9 그렇다면 이 환원을 통해 얻어지는 초월론적 주관성의 존재는 필증적으로 명증적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긍정적이라는 것은 데카르트가 이미 증명했다. 그에 따르면 '나는 의심한다'는 그 자체로 '나는 존재한다'를 미리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순수자아의 의식흐름에 필연적으로 포함되는 과거 그리고 그에 대한 기억은 비필증적이지 않냐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후설은 여기서 필증성과 충전성의 구분을 상기한다. 자아는 초월론적 자기-경험에서 자기 자신에게 원본적으로(originaliter)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체험되지는 않지만 사념되기는 하는 미규정적인 지평--자아의 과거, 자아의 초월론적 능력들, 습관적 특유성들(peculiarities) 등--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나'의 초월론적 존재에 대한 초월론적 경험은 필증적일지언정 추후의 체험을 통해 충족될 수 있는 열린 지평을 가지고 있다. 이는 "초월론적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기만당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와 같은 [기만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의심 불가능한 구성요소들은 얼마나 [많은가?](how far do those components extend)"의 물음을 야기한다(23, 강조는 필자).
§10 후설은 잠시 어째서 데카르트는 초월론적인 전회에 실패했는지 분석한다. 첫째, 데카르트는 스콜라주의적인 전제들을 버리지 않았으며 철학이 수학과 기하학과 같은 공리로부터의 연역의 체계로 학문화되리라는 편견을 견지했다. 둘째, 그는 필증적으로 존재하는 순수 자아를 세계의 작은 끝토막(a little tag-end of the world)으로, 즉 세계의 일부분으로 여겼다. 이에 따라 순수 자아의 발견 이후에는 자아에게 본유적인 원칙들에 따라서 세계의 남은 부분을 추론하는 문제가 취급되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초월론적 실재론이라는 그 자체로 부조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데카르트와 달리 현상학자는 모든 선입견을 버리고 현상학적 에포케에 의해서 열린 에고 코기토의 장에 직간접적으로 주어지는 것만을 취급해야 한다.
§11 현상학자의 데카르트적 성찰이 요구할 수밖에 없는 초월론적 에포케의 결과, '나'의 실존적 지위는 세계의 존재나 비존재 여부와 무관하게(regardless) 보장된다는 점이 밝혀진다.* 이때의 '나'의 존재는 자연적 인간의 존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심리학이 취급하는 심리적 삶은 결국 "[자연적] 세계 속에서의 심리적 삶"이다. 설령 그 심리적 삶이 "순수하게 내면적인 경험"으로서 취급된다 할지라도 말이다(25). 그러므로 초월론적 에포케를 통해 "나의 심리학적 자기경험의 영역"은 "초월론적-현상학적 자기-경험의 영역"으로 환원된다(26). 객관적 세계는 초월론적 에고로서의 나로부터 그 모든 의미와 실존적 지위를 부여받는다.
*이 대목에서 후설은 에고와 관련해 'unberürt'와 'verbleibend'라는 수식어를 추후 삭제했다고 한다. 환원이 에고에 아무런 변경도 가하지 않는다거나, 에고가 환원의 '잔여물'이라는 관념을 내세우기를 주저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환원된 자아가 세계의 한 조각이 아닌 것처럼, 반대로 세계 또는 그 어떤 세속적 객체 역시 내 의식적 삶의 내실적 부분으로서, 감각자료의 복합체로서 또는 작용들의 복합체로서 그것[내 의식적 삶] 안에서 발견될 수 있는 내 자아의 한 조각이 아니다. 이 "초월성"은 세속적인 모든 것의 본성적 의미의 일부이다[...]"(26). 세속적인 것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의미 그리고 타당성은 나의 명증적인 체험 그리고 정초하는 작용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승인한 의미로서 세계를 자신 안에 담지하고, 이 의미 부여 가운데서 필연적으로 미리 가정되는 자아 자체 또한 현상학적 의미에서는 초월적이라고 후설은 말한다.
제2성찰: 그것의 보편적 구조들의 측면에서 열어밝혀진(laid open) 초월론적 경험의 장
§12 후설에 따르면 "초월론적 자아의 데카르트적 발견과 함께, 지식의 정초에 대한 새로운 이념 또한 밝혀진다 [...] 초월론적 환원은 (나, 성찰하는 철학자에게) 새로운 종류의 체험의 권역(sphere)으로서 새로운 종류의 존재의 무한한 왕국(realm)을 열어밝힌다: 초월론적 경험[의 왕국]."(27, 강조는 원저자) 에고의 존재의 절대적인 명증은 "결국 그 속에서 자아의 초월론적 삶과 습성적 속성들(properties)이 주어지는 저 자기경험의 다양체들로 필연적으로 확장된다. 설령 이 명증들의 범위를 정의하는 한계들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에고의 현존뿐 아니라 예컨대 내재적 시간형식과 같이 "에고의 필증적으로 체험될 수 있는 보편적 구조" 또한 필증적으로 명증적이다(28, 강조는 원저자). 달리 말해 에고의 자기경험의 구조는 미리 획정되어있다(predelineated).
§13 본래 초월론적 현상학은 두 단계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초월론적 자기경험의 조화로운 흐름" 속 명증들을 추적하되 그에 대한 궁극적인 비판은 옆으로 치워둠으로써 "완전한 의미에서는 아직 철학적이지 않은", 초월론적 소박성이 견지되는 단계다. 둘째는 "초월론적 경험에 대한 비판 그리고 나서 모든 초월론적 인식에 대한 비판"을 감행하는 단계다(29). [후설은 이 궁극적 비판을 ⟪제일철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미뤄둔다.*] 최초의 단계에서 초월론적 현상학은 어쩔 수 없이 자아와 타인을 구분하며 순수한 자아학(egology)으로서 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초월론적 유아론은 단지 철학적으로 종속적인 단계일 뿐이다."(30) [단순히 코기토를 발견하고 만] 데카르트와 달리 현상학자는 초월론적 경험의 무한한 장을 체계적으로 열어밝힘으로써 에고가 자기 자신을 무한히 외현(explicate)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이다. 저 무한한 장 안에는 고차원적 문제로서 [그러나 여전히 초월론적 소박성 안에서]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의 문제들이 포함되어있다.
*Q. 이 연기의 의도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다. 엄밀학의 절대적 토대를 찾는 과정을 어째서 의도적으로 중단하는가?
§14 자아는 자신의 의식적 삶 속 그 어떤 코기타치오네스에 대해서도 언제든 반성할 수 있다. 여기서 의식에 대한 순수하게 기술적인 심리학과 초월론적 현상학은, 비록 서로 평행하며--같은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취급할 뿐이며--전자가 후자에 의해 비로소 이해 가능해지기는 하지만,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존재하는 것으로 미리 가정된 세계의 일부인 "인간의 심리적 구성요소들로서 취해진 자료"를 탐구하지만, 후자는 세계를 현실성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현실성-현상으로서만 받아들인다. 나아가 현상학적 에포케 이후에도 코기타치오네스 다양체(manifold cogitationes)는 자신과 세속적 대상 사이의 관계를 여전히 자기 내부에 담지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각 코기토, 각 의식적 과정은 [...] 하나나 다른 무언가를 "사념"하며 사념된 것, 자신의 특수한 코기타툼에 특유한 방식으로 자신 안에 담지한다."(33) 다시 말해 의식적 과정들은 지향적이다.
§15 후설은 '직접적으로(straightforwardly)' 수행되는 작용과 그것을 반성하는 작용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컨대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지각은 자신의 지각 대상을 파악하는 데 몰두하지, 지각함을 파악하지는 않는다. 후자는 반성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하다. 자연적, 심리학적 반성과 달리 초월론적-현상학적 반성은 세계의 존재나 비존재에 대한 판단을 중지한 채로 이루어진다. 초월론적 반성은 반성 대상이 취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고도 그것을 말하자면 있던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반성되는 지각의 존재정립과 그에 따라 지각 대상이 지니는 사실적 존재의 성격은 반성의 과정에서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아는 "소박하게 [그때그때마다의] 관심을 갖는 자아"와 "무관심한 방관자(disinterested onlooker)"로서의 자아로 분열된다(35). 후설은 [반성의 수확물로서] 존재의 양상성과 시간성을 고려해 지향적 대상을 규정하는 노에마적 기술과, 명석판명도를 고려해 예컨대 회상과 파지 등의 상이한 코기토의 양식들(modes)을 규정하는 노에시스적 기술을 나눈다.
cf. 모든 종류의 "반성은 본래적인(original) 주관적 과정을 변경한다."(34) 예컨대 자연적 반성은 주관적 과정을 객관화한다.
이로써 초월론적 보편적 에포케가 세계의 상실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시 한 번 확실해졌다. 세계는 코기타툼으로서 보유되며(retain), 코기토가 특수자를 향해있을 때조차 시공간적 무한정성(endlessness)의 특유한 형식을 갖춘 배경으로서 함께 인식된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환원이 계속해서 수행되면(when [...] consistently executed)" 노에시스의 측면에는 "개방적으로 무한정적인 순수한 의식"이, 노에마의 측면에는 그 상관자로서 "순수하게 사념된 것으로서의 사념된 세계"가 우리를 위해 잔존한다(37).
cf. 자연적 태도에서도 자아는 이미 초월론적 자아이지만, 이 사실은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서만 알려진다(37).
§16 순수 심리학과 초월론적으로 기술적인 자아학 모두 에고 코기토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의식적 삶을 감각자료의 복합체이자 감각자료를 원자적 부분으로 가지는 전체로 취급하는 심리학은 자료가 자료를 결합하는 형식을 정초하며, 전체가 부분보다 선행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시작한다.* 그러나 의식에 대한 기술적 이론은 그 어떤 선입견도 없이 단순한 심리학적 체험, 즉 '나는 생각한다'의 다양한 양식들에 대해 진술할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의 최초의 일반적 원리(the first descriptive generality)는 코기토와 코기타툼으로서의(qua) 코기타툼의 분리이다."(39, 강조는 원저자)
*Q. 이와 같은 서술은 자기모순적이지 않은가? 오역인가?
§17 의식에 대한 탐구는 현상학자를 의식과 의식 사이의 특징적인 결합 양식인 '종합'에 대한 탐구로 이끈다. 종합은 의식의 흐름 가운데서 변화무쌍한 현상들을 [그 의미와 그에 고유한 본질적 법칙에 따라] 하나이자 동일한 지향적 대상으로 통일시켜준다. 종합을 수행하는 코기토는 동일자로서의 코기타툼과 지향적으로 연결되는 다소간 규정적인 구조를 그 자체로 갖추고 있다. 후설의 표현을 빌리면, "종합적 구조에 대한 사실들"은 "단일한 코기타치오네스에 노에시스적-노에마적 통일성을 부여"한다(41). 이와 같은 종합에 대한 탐구만이 코기토의 지향성을 풍부하게 밝혀줄 수 있다.
§18 종합의 근본적인 형식은 동일화(identification)이다. 이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면 모든 의식을 지배하는(all-ruling) "내적 시간의* 연속적인 의식이라는 형식 속에서 수동적으로 흘러가는 종합"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주관적 과정은 자신의 내적 시간성을 가지고 있다."(41, 강조는 원저자) 현상함의 내적 시간성은 현상하는 것의 (만일 그것이 세속적일 경우) 객관적 시간성과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의 자기동일적 대상과 그에 대한 인식은 모두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현상들에 대한 종합적 통일의 결과다. 이 통일성은 "그 속에서 지향적 대상성의 통일성이 현상의 다수의 양식들에 속하는 "똑같은" 대상성으로서 "구성"되는 하나의 의식의 통일체를 만드는 연결의 성격이다."(41-42, 강조는 원저자)
★ *Q. 내적 시간에 대한 vs 내적 시간에 의한
cf. 내적 시간 자체와 내적 시간에 대한 의식 사이의 차이는 내적 시간 속의 주관적 과정 또는 이 과정의 시간적 형식과 그 과정의 시간적 현상의 구체적이고 다수인 양식들 사이의 차이로 표현될 수 있다고 후설은 말한다. 후자는 전자를 구성하며 그 자신들이 지향적 체험들이다. 이 체험들 역시 시간성들(temporalities)로서 반성된다는 사실은 의식의 자기 자신과의 재귀적 지향적 관계를 어렵게 해명함으로써만 해결되는 무한퇴행을 낳는다.*** "The distinction between <internal> time itself and the consciousness of <internal> time can be expressed also as that between the subjective process in internal time, or the temporal form of this process**, and the modes of its temporal appearance, as the corresponding "multiplicities"."(43, 강조는 원저자)
**Q. "subjective process in internal time"과 "the temporal form of this process"가 동일시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cf. 코기토는 세속적인 것을 지향하는 주체일 뿐 아니라 내적 시간의식에 의해 지향되는 대상이기도 하다고 후설은 말한다(44). 노에마뿐 아니라 노에시스 역시 종합적 통일을 통해 하나의 지향적 대상에 상응하는 의식적 통일체가 된다.
***Q. 어떤 무한퇴행인지 맥락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에포케 이후 대상의 존재에는 괄호가 쳐지지만, 현상하는 것으로서의 현상하는 대상은 계속해서 "흐르는 의식 속에 "내재적"이며 기술적으로 그 "속에" 있다. [...] 이러한 의식-내-존재는 [...] [의식의] 내실적 구성부분으로서의 의식-내-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지향적인 무언가, 현상하는 무언가로서 "이념적으로(ideally)"* 그-속에-존재함--또는 [...] 의식의 내재적 "대상적 의미"로서 그-속에-존재함이다." 의식의 자기동일적 대상은 의식의 주관적인 과정 속에 의미로서, 결론적으로는 "종합의 의식에 의해 생산된 "지향적 효과"로서 포함되어있다. 그러나 차이와 모순, 양립 불가능성 역시 종합의--다만 다른 종류의--산물이다. 종합은 의식의 모든 특수한 과정에서 발생하고, 한 의식적 과정을 다른 의식적 과정과 단지 우연적으로 연결할 뿐만 아니라 "의식적 삶 전체가 [내적 시간의식을 형식으로] 종합적으로 통일되어있다."(42, 강조는 원저자) 이 통일성 덕분에 삶 자체가 주의의 대상이자 인식의 주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Q. 여기서의 이념은 무엇을 뜻하는가?
A. '현상학적 심리학'에서 대상-극을 이념적인 것으로 서술하는 대목 살펴볼 것.
§19 "모든 현실성은 자신의 잠재성을 포함하며(involves), 이 잠재성은 텅 빈 가능성들이 아니라 도리어 내용의 측면에서 지향적으로 미리 획정된 가능성들이다." 이 가능성들은 자아에 의해 현실화될 수 있다. 같은 사태를 현상학적으로 풀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모든 주관적 과정은 [...] 그 과정 자체에 속하는 의식의 잠재성들을 지시하는 지향적 지평을 가진다."(44) 예컨대 지각은 언제나 과거의 지평을 지고 있다. 현행적 작용과 지평의식 사이의 연결에는 "나는 [작용]할 수 있고 하지만, 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할 수도 있다"는 자유가 자리한다. 이 자유를 활용해 능동적 코기토는 원래는 함축적으로만 사념되었던 대상적 의미, 즉 잠재적이었던 바를 외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코기타툼으로서의 코기타툼은 결코 최종적인 자료로 주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더 해명되어야 할 지평을 가지고 있고, 해명을 통한 충족이 진전될 수록 새로운 미규정적 지평들이 다만 규정된 구조를 갖춘 채 출현한다. 요컨대 지평이란 "추후의 규정들에 선행해 [인식의 가능성을] 열어두기[내버려두기](leaving open)"이다(45).
의식될 때마다 미규정적 지평을 말하자면 몰고 오는 대상은 동일성[정체성]의 극(a pole of identity)으로서 "언제나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기대되면서 사념되는" 것이다(45-6). "그것[대상]은 의식의 모든 계기에서 그것의 의미에 따라 그것과 관련되는 노에시스적 지향성을 가리키는 지표(index)"다(46, 강조는 필자).
§20 그러므로 지향적 분석이란 결국 "의식의 현실성 속에 "함축된" 잠재성들을 들춰내는 것(uncovering)"이다. "모든 코기토는 [...] 그것에 의해 사념된 것을 사념함[Meinung seines Gemeinten]이지만, 어떤 순간에서도 이 사념된 것은 그 순간 외현적으로 사념된 것 이상[...]이라는 인식"이 지향적 분석을 주도한다(46). 의식의 본질적 계기는 자신을-넘어서-지향함(intending-beyond-itself)이다. 지향적 분석을 통해 의식은 예컨대 처음엔 전체적으로만 사념되었던 것의 특징, 속성, 부분 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존재하는 것으로 규정된 대상을 향한 지향적 사념을 이루는 종합의 규정된 구조들(definite synthetic courses)을 반성할 수 있다.
나아가 현상학적 외현(phenomenological explication)은 지향적 분석의 과정에서 함께-지향되는 바로서의 잠재적 지각들을 상상을 통해서도 현전시킨다. 이렇게 주관적 과정들에 상관적인 지평들을 외현함으로써 코기타툼의 대상적 의미가 구성되는 기능이 해명된다. 달리 말해 현상학자는 "어떻게 [...] 고정되고 지속하는(abiding) 대상적 통일체와 같은 것이 지향될 수 있는지" 그리고 동일적인 대상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알 수 있다(48). 비록 의식이라는 현상의 영역은 "헤라클레이토스적 흐름(flux)"에 비견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향적 분석의 이념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지향적 종합의 흐름에는 "유형(type)에 대한 본질적으로 필연적인 순응성이 우세하며(prevails) [이 흐름은] 엄밀한 개념들로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49, 강조는 원저자)
§21 지향적 종합의 흐름을 관통하는 가장 보편적인 유형은 바로 '에고-코기토-코기타툼'이라는 보편적 도식이다. 이 유형을 특수화함(particularization)에 있어서는 지향적 대상이 곧 "가능한 코기타치오네스의 전형적(typical) 무한한 다양성들에 대한 "초월론적 단서""가 되어준다(50, 강조는 필자). 동일자라는 보편적 형식은 날카롭게 차별화되는 상이한 특수한 의식의 유형들을 통해 의식될 수 있다. 쉽게 말해 같은 대상이 지각될 수도, 기억될 수도, 다른 것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상은 첫째, 형식존재론적 구분에 따라 실제적일(real) 수도 있고, 범주적일 수도 있다. 전자의 대상은 수동적 종합으로부터 기원하며, 후자의 대상은 에고의 발생적-구축적 활동으로서의 "작업수행들(operations)"로부터 기원한다. 둘째, 질료존재론적 구분에 따라 공간적 대상, 혼을 가진 대상 등으로 나뉘며 각 질료는 그에 고유한 형식-논리적 변양을 수반한다.
이 단서들로부터 [의식의] 유형 그리고 인식의 노에시스-노에마적 구조가 매우 상이함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주가 아무 제한 없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대상이 개별성과 의식의 변화 가운데서도 지속하는 동일성을 가진 것으로 지향되는 한, 불변하는 구조적 유형들이 의식의 변주를 제한한다. 대상 구성의 다양한 구조적 유형들을 해명하는 것이 곧 초월론적 이론의 과제이며, 심지어는 "순전히 주관적인 대상들, 예를 들어 모든 내재적인 주관적 과정들 자체도 내적 시간의식의 대상들로서 마찬가지로 단서들이"며 나름의 구성을 거친다(53, 강조는 원저자).*
*Q. 이 구성은 자동적인가, 아니면 반성에 의해 비로소 수행되는가?
§22 특정한 유형의 대상과 그것을 구성하는 의식의 다수성들은 단순히 우연적(accidental)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인 이유로 공속한다. 모든 대상은 그것이 어떤 대상이든 "초월론적 자아 내에서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governed) 구조를 가리킨다."(53, 강조는 원저자) 그러므로 대상의 총체란 결코 혼란이 아니며, 그 대상에 상관적인 의식의 무한한 다수성들도 마찬가지다. "노에시스적으로 그리고 노에마적으로 [대상과 의식의] 저 다수성들은 그들의 가능한 종합의 측면에서 언제나 공속한다. 이는 그 속에서 모든 종합들이 확정적으로(definitely) 질서화된 방식으로 함께 기능하고 또한 그러므로 모든 현실적이고 가능한 대상성들[...], 그리고 그에 상관적으로 그에 대한 모든 현실적이고 가능한 의식의 양식들이 포용되는(embraced) 보편적 구성적 종합*을 미리 나타내준다."(54, 강조는 원저자) 이 체계를 구석구석 탐구하는 것이 곧 초월론적 현상학 전체의 과제다. 그러나 이 엄밀한 탐구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할 가능한 모든 대상과 의식[에 대한 지식]의 체계는 무한히 규제적이고(regulative) 선취적인(anticipative) 이념이다.**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한 구성적 이론들을 이 이념에 따라 각각 형성하고 결합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Q. 이것은 정확히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Q. 무슨 뜻인가?
제3성찰: 구성적 문제들. 진리와 현실성
§23 현상학적 환원을 톨해 현상학자는 대상의 존재나 비존재, 가능성이나 불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중지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차이들이 탐구의 장으로부터 배제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로, 이성과 비이성이라는 넓게 이해된 표제들 하에 그것들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현상학적 주제이다. 에포케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순수한 의미함(코기토)와 순수하게 의미된 것으로서의 의미된 것으로의 환원을 발동시킨다(effect). 존재와 비존재라는 술어들, 그리고 그것들의 양상적 변주물들은 후자[의미된 것]에 관련된다--따라서 단적인 대상들이 아니라 대상적 의미에 [관련된다]. 진리(올바름)와 허위라는 술어들은, 비록 가장 극단적으로 넓은 의미에서이기는 하지만 전자, 특수한 의미함 또는 지향함에 관련된다. 이러한 술어들은 [...] 그 자체로 현상학적 자료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현상학적 기원"을 가진다."(56, 강조는 원저자) 즉 확정하는(verifying) 종합과 무효화하는(nullifying) 종합이 비로소 대상에 '존재하는' 또는 '존재하지 않는'이라는 명증적 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 종합들은 고차원적 성격의 것으로서 "초월론적 주관성의 모든 것을 포용하고 본질적으로 필연적인 구조적 형식"인 이성의 산물이다(57).
§24 명증이란 사태 또는 사태연관이 스스로를 부여하는(self-giving) 의식의 탁월한 양식이다. 명증이라는 체험에서 대상성은 몸소, 직접적으로 직관되어 원본적으로 부여된다. 명증과는 공허한, 기대될 뿐인(expectant), 간접적인, 비-현전적인 의식의 양상들이 대비된다. 명증은 일상적으로 흔한 경험은 아니지만* 인식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의 목표다. 그러므로 명증은 "지향적 삶의 본질적 근본적 특질이다. 모든 의식은, 예외없이 이미 그 자체로 명증으로서 특징지어지거나 [...]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대상을 원본적으로 부여[하는 양식]으로의 전환을 향한 본질적 경향--이에 따라 "나는 할 수 있다"의 영역권(domain)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확정의 종합들을 향한 본질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58, 강조는 원저자) 한편 비존재는 단적인 존재의 양상(modality)이다. 명증은 비존재뿐 아니라 가능한 존재, 개연적 존재, 또는 의심스러운 존재 등 단적 존재의 상이한 양상적 변주물들 모두와 상관한다.** 또한 이 계열과는 다른 [존재의 계열인] 가치있음 또는 도덕적으로 선함(being valuable and being morally good) 등의 권역과도 상관한다.
Q. *와 **은 모순적이지 않은가? **는 우리 일상의 모든 체험이 곧 어느 정도의 명증도를 가진다는 것을 함의하지 않는가?
§25 그런데 가능한 모든 존재의 양상들은 상이한 두 차원에 놓이는 것으로 분류된다. 바로 ①현실성의 차원과 ②상상, 즉 유사 현실성(as-if actuality)의 차원이다. 현실에서 가능한 모든 존재의 양식들은 상상의 차원에서 반복된다. "이에 상관적으로, 의식의 양식들 또한 마찬가지로 "정립성"을 가진 것들과 "유사-정립성"을 가진 것들로 나뉜다"고 말할 수 있다(59, 강조는 원저자). 각 차원의 각 양식에는 저마다 고유한 명증의 양식과 대상을 [더] 명증적으로 만드는--즉 해명하는(clarify)--잠재성의 양식이 속한다. 해명이란 "명석하지 않은 지향함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미리 보여주는(prefigurative)" 직관으로의 종합의 길을 닦는(laying a synthetic course)" 작업이다(59, 강조는 원저자).
★ Q. 후설의 이성이론에서 상상체험도 일종의 명증으로 취급되는가?
A. 그렇다. 상상을 포함한 직관 전체=명증. 정립 영역에는 존재-비존재-개연성 등의 명증 양상이 있고 유사-정립 영역에는 존재 가능성-비존재 가능성-개연성의 가능성 등의 명증 양상이 있다. 상상할 수 있는 대상은 가능한 대상이고, 가능한(=선험적으로 가능한) 대상들의 보편자가 본질이기 때문에 상상에도 넓은 의미에서 명증이 있다. 지각이 대상을 '존재하는 것'으로서 주듯이 상상이 대상을 '가능한 것'으로서 주기 때문에(J씨).
§26 형식논리학적 개념들의 보편성은 "의식적 삶의 편에 [자리하는] 구조의 법칙들에 대한 보편적 순응성"을 가리킨다(59). 이 순응성은 진리와 현실성이 우리에게 의미를 가지고 가질 수 있도록 해주는 유일한 규칙성(regularity)이기도 하다. "모든 옳음은 명증으로부터, 그러므로 우리의 초월론적 주관성 자체로부터 온다. 모든 상상 가능한 충전은 우리의 확정으로서(as our verification) 기원하며, 우리의 종합이고, 우리 안에 자신의 궁극적 초월론적 기반을 가진다."(60)* 달리 말해 명증적 확정의 상관자가 곧 현실성이다.
*이 문장은 옳고 그름의 여부가 초월론적 주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심리학주의적 취지에서가 아니라, 초월론적 주관의 종합을 거쳐서만 비로소 가려질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7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의미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습성적이고 잠재적인 명증의 기능 또한 요구된다. 모든 명증은 인식에 대한 지속적인 소유(abiding possession)를 설립해준다. 이에 따라 주관은 최초의 명증으로 언제든 되돌아갈 수 있다. 이러한 반복 또는 회귀의 가능성이 없다면 그 어떤 고정되고 지속적인 존재도 우리를 위해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 특정한 명증은 아직 우리를 위해 그 어떤 지속적인 존재도 산출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한한 반복의 잠재적 가능성 덕택에] 최대한으로 넓은 의미에서 "그 자체로(in itself)" 존재"한다(60-61, 강조는 원저자).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은 즉자를 [연속적으로 조화로운 경험 및] 무한한 반복 가능성과 그로써 확증되는 지속적 자기동일성을 경유해 포용한다.
§28 외부지각은 비록 종합의 전개에 따라 불완전한 명증에서 상대적으로 완전한 명증으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충전성에 이르지 못한다. 나아가 외부지각에서 몸소 주어지는 것조차 사실은 존재하지 않거나 달리 존재할 가능성, 즉 비필증성을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세계에 대한 "연속적인 경험이 조화로운 종합의 형식을 가지는 한에서" 외부지각은 외부세계에 대한 경험으로서 성립할 수 있다. 이 조화로운 경험을 통해 비로소 의식적 삶은 ""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라는 의미를 담지하며, 오직 의식적 삶 속에서만 세계는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세계 자체란 조화롭게 결합 가능한 경험들의 무한성과 관련된 무한한 이념이다--[또한] 가능한 체험들의 완전한 종합인 완벽한 경험적 명증의 상관자인 이념이다."(62, 강조는 원저자)
§29 "명증의 이념적으로 무한한 종합을 이루는 무한성의 차원들의 본질적 구조"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것은 "존재하는 대상성의 초월론적 구성의 문제"다. 그런데 탐구되는 구성은 형식존재론적 개념으로서 대상 일반의 구성일 수도 있고, 객관적 세계라는 표제 하에 존재하는 여러 다양한 분과영역들(regions)에 속하는 다양한 대상 각각의 구성일 수도 있다. 형식존재론과 영역존재론의 탐구영역은 명증의 초월론적 체계를 가리키는 지표다.
cf. 대상 구성의 가장 낮은 기반은 "내재적 시간성의 연속적 기능"이다(64). 근원적 시간의식은 시간적 자료들을 구성한다.
제4성찰: 초월론적 자아 자신과 연관된 구성적 문제들의 전개
§30 자신의 삶을 이루는 과정들로부터 분리 불가능한 초월론적 자아 '나를 위한 대상(object for me)'의 의미를 추적하는 작업은 구성에 대한 탐구(constitutional investigation)를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이 탐구를 통해서 "초월론적 자아는 (그 심리학적 평행물에서는, 마음[Psyche]이) 지향적 대상성들과의 관계에서만 그것 자신이라는 점이 명석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65). 대상 없이는 자아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자아가 조화로운 지향적 체계들을 계속해서 가진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적 속성이다.
§31 주관적 과정들의 동일한 극으로서의 에고 그러나 동시에 "자아는 연속된(continuous) 명증 속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자신 속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존재하는 것으로서 연속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 자기구성은 자아로 하여금 스스로를 단순히 흘러가는 삶으로서가 아니라 '나'로서, 주관적 과정을 살아내는 동일한 코기토로서 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현상의 종합적 통일체로서 대상의 극이 존재했다면, 다른 한편에는 두 번째 종합이, 즉 "특수한 코기타치오네스들의 다수성들을 집합적으로 포용"해 하나의 동일한 에고에 속하는 것으로 구성하는, 그리고 에고를 의식의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대상-극들과 관련시키는 종합이 이루어진다(66).*
*후설이 이 두 종합을 한 개의 단일한 종합으로 취급한다는 점이 주목돼야 할 것 같다.
§32 습성들의 기체로서의 에고 그러나 이렇게 종합되는 에고의 극은 공허하지 않다. 에고는 초월론적 발생의 법칙을 따라 지속하는 속성들(abiding properties)을 담지함으로써 심리학적 차원에서는 '인격'이 된다. 예컨태 특정한 판단을 내리는 과정이 사라져도 그 판단을 통해 생긴 신념은, 설령 자아가 깊은 잠에 빠지더라도, 계속해서 승인된다. 자아가 [의식적으로] 그 신념을 폐기하기로 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자신의 고유한 능동적인 발생을 통해 에고가 스스로를 에고-속성들의 동일한 기체로 구성하기 때문에, 에고는 스스로를 또한 "고정되고 지속하는" 인격적 에고로도 구성한다[...]"(67, 강조는 원저자).
§33 모나드로서의 에고의 완전한 구체화(full concretion)와 그의 자기구성이라는 문제 후설은 완전한 구체성에서 취해진--지향적 삶의 흘러가는 다형성 그리고 사념된 대상들을 통해--에고를 라이프니츠의 개념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모나드'라고 부른다. 존재자들에 대한 정립과 외현은 내 에고의 습성을 건립하고(set up) 나아가 "그와 같이 지속하는 습득들은 내가 그 순간에 내게 익숙하지 않은 대상들의 지평과 함께 세계에 익숙해져있는(acquainted with) 한 [...] 나를 둘러싸는 세계를 이룬다." 이 지평은 습득되지는 않았지만 대상의 형식적 구조에 대한 [우리의 앎으로 인해] 선취된다(anticipated). 자아가 모나드라는 사실은 자기구성의 현상학이 현상학 전체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모나드적으로 구체적인 자아는 또한 현실적이고 잠재적인 의식적 삶 전체를 포함하기 때문"이다(68).
★ §34 현상학적 방법의 근본적인 발전. 형상학(eidetic)으로서의 초월론적 분석 에고를 작용의 극이자 습성의 기체로 규정함으로써 현상학은 현상학적 발생의 문제를 건드린 셈, 발생적 현상학의 수준을 건드린 셈이 된다. 후설은 발생적 현상학의 의미를 해명하기 이전에 현상학적 방법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현상학은 순전히 경험적인 기술이 아닌 형상적 기술의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데카르트적 성찰자는 그의 초월론적 자아로 소급 지시되고(led back), 이 사실적(de facto) 자아는 구체적인 모나드적 내용을 가진 것으로 고찰됨으로써 하나뿐인, 유일무이하고 개별적인 절대적 에고로 이해된다. 그러나 후설은 자신의 분석이 다음의 방법을 통해 [단순히 개별적인 자아에 머무르지 않고] 초월론적 자아의 경험적 사실성이 어떠하든지 간에 영향 받지 않는 보편성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바로 현실적 존재에 대한 정립 일반을 배제함으로써 작용 그리고 작용의 대상을 순수한 가능성, 비-현실성(non-actuality)의 영역으로 옮겨 사고하고, 그 영역 내에서 자유변경에 굴하지 않는 본질적 필연성을 잡아냄으로써 사실적인 제한들로부터 독립적인 철학을 펼치는 방법이다.
★ [요컨대 현상학적 환원과 형상적 환원은 서로 무관하지 않으며,] 두 방법은 초월론적 방법의 근본 형식들이다. 사실성을 제거함으로써 현상학자는 아무 사실에도 구애받지 않는 에이도스, 이념 그리고 본질에 다다를 수 있다. 이에 따라 "모든 사실은 단지 순수한 가능성을 예화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본질 직관은 "보편적인 무엇인가에 대한 직관적이고 필증적인 의식"이다(71).* 현상학은 형상적 방법을 따라 초월론적 자아 자체(as such), 그것의 에이도스를 밝혀내고자 분투하는 본질학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현실성을 취급하는 다른 학문들을 정초하는 제일철학이 될 수 있다.
*Q. 본질직관의 필증성은 어떻게 보장되는가? 후설이 전반적으로 필증성의 영역을 너무 넓게 잡는다는 의심이 늘 있다.
A. 필증성 = 오류불가능성이 아니라 필증성 = x가 없을 수 없는 것으로서 주체에게 나타남(실제로 없을 수 없는 것은 아닐 수 있음) <-> 충전성 = 칸트적 이념으로서의 오류 불가능성. 그런데 필증성 가운데 오류불가능한 필증성이 있을 수 있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필증성은 오류불가능함. 후설은 현상학이 엄밀학의 출발점일 수 있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음(J씨).
§35 형상적 내면적 심리학에 대한 부록(excursus) 동일한 결론들이 초월론적 의미를 포기하고 자연적 태도에서 개진되는 순수 지향적 심리학에 적용될 수 있다. 구체적 초월론적 자아에는 인간 자아가 마음으로서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학문은 모든 심리학을 필연적으로 정초할지언정, 그리고 순수한 형상학을 추구할지언정 그 실증성(positivity)으로 인해 오직 상대적인 타당성만을 가진다.
§36 주관적 과정의 가능한 형식들의 우주로서의 초월론적 자아. 공존 또는 계기(succession)에 있는 주관적 과정들의 형상적 법칙들에 구애받는 동시적 발생가능성(compossibility). 형상적 현상학은 초월론적 자아의 보편적인 선험적 형태들--삶의 현실성과 잠재성의 선험적이고 유형들--을 한계 없이 무수한 것으로서 탐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유형들이 하나의 통일적으로 가능한 자아 안에서 동시에 발생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과학적 이론을 세우는 나'라는 사실적 자아의 형상적 환원은 그것이 이성적 존재라는 본질을 준수하는 한에서 이루어진다. '과학적 이론을 세우는 나'는 비교적 덜 이성적인 '유아인 나'로의 자유변경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변경상의 제한은 "자아학적 시간 속에서의 공존과 계기의 보편적 형상적 법칙들"에 순응한다(74).
§37 모든 자아학적 발생의 보편적 형식으로서의 시간 상술한 동시적 발생 가능성의 현상적 법칙들은 결국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인과성의 법칙, 만일-그렇다면의 법칙들이다. 물론 이 인과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론적 영역에서의 동기부여로 특징지어진다. 동기 부여는 의식 흐름 속의 모든 주관적 과정들을 지배하며 서로 적절히 연결시켜준다. 후설은 이를 "보편적 발생과 관련된 형식적 규칙성"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반복적으로 통일체로서 구성된다(75, 강조는 원저자). 이로써 자아의 보편적 발생의 통일체가 형성될 때 자아는 스스로를 자기 역사의 습성적 통일체로 구성한다. 이처럼 보편적 발생과 시간적 형식 하에서 자아의 보편적 발생적 구조를 탐구하는 발생적 현상학은 순전히 특수한 [의식의] 유형들을 체계적 질서 하에 배열하기만 하는 정적 현상학보다 고차원적인 것이다.* 발생적 현상학에서 자유변경의 가능성은 최대화되며, 형상적 현상학이 취할 수 있는 보편성 역시 최대화된다.
★ cf. '초월론적 발생 = 연상에 따라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주관적 과정과 주관적 과정 사이 동기 부여 형태의 종합'이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38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종합 그런데 구성적 발생은 수동적 발생과 능동적 발생으로 나뉜다. "능동적 발생에서 자아는 구체적으로 에고의 작용인 주관적 과정들을 통해 생산적으로 구성적인 것으로 기능한다."(77) 이 생산성은 맥락상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실천이성의 활용을 의미하는 것 같다.* 능동적 종합을 통해 구성되는 대상들은 가히 자아의 산물(product)이라 불릴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능동적 발생합은 수동적 발생을 전제한다. 대상들이 (한눈으로 힐끔거리기만 해도) 마치 레디-메이드로인 물질로서 몸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바로 수동적 종합 덕분이다. 수동적 종합 및 그 산물 역시 능동적인 종합과 마찬가지로 자아의 역사 속에 침전되며, 관련된 자아의 습성과 연결되어 자아 속에 지속한다. [수동적 종합의 산물은 비교적 넓은 의미에서만 자아의 산물이다.] 물론 지속은 해당 특정한 내용과의 최초의 만남, 즉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설립(primal instituting) 이후에만 가능하다.
*Q. 후설에게 실천이성이란 무엇인가?
A. 가치타당성 및 윤리적 선을 목표로 하는 이성을 뜻하는 것 같다.
§39 수동적 종합의 원칙으로서의 연상 활동의 산물에 선행해서 주어지는 모든 대상성들의 구성을 담당하는 수동적 종합의 보편적 원칙은 연상이다. 연상은 "내재적 시간 속의 대상들로서의 주관적 과정들의 구성 그리고 시공간적 객관세계에 속하는 모든 실제적, 자연적 사물들의 구성" 모두에 관여하며, 형상적 법칙들에 따르는 지향적 사태다(80). 흄에게서와 달리 연상은 경험적 법칙들이 아니라 "본유적" 아프리오리의 왕국(realm)을 지정하며, 비이성적 사실들을 산출하고, 이 영역에 대한 발생적 현상학을 통해서만 비로소 순수자아가 시간이라는 형식을 준수하는 발생의 결합체로서 적절하게 생각될 수 있다.
§40 초월론적 관념론에 대한 질문으로의 이행 현상학은 정적 분석과 발생적 분석 모두를 포함하게 됨으로써 비로소 앎(knowledge)에 대한 초월론적 이론이 된다. 앎에 대한 기존의 이론들은 앎의 본질을 추적함에도 불구하고 자연적 태도에 머무름으로써 필연적으로 실패했다. 지향성에 대한 브렌타노의 분석마저 자연적 1인칭의 시점을 탈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초월론적 영역에 진입하고 나면 "모든 정초, 진리와 존재에 대한 모든 입증(showing)이 나 자신의 내부*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내 코기토의 코기타툼 속에 있는 특징이다."(82) 이제 중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기만하지 않는 신으로써 해결한 과제, 즉 내 의식적 삶의 내재성에서 발생하는 앎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있는지 해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부는 세계와 구분되는 의식의 내부로 이해돼선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시점에서 후설에게 '나'는 세계를 자신 안에 품은 모나드이기 때문이다.
★ §41 자신의 "에고 코기토"에 대한 진정한 현상학적 외현으로서의 초월론적 관념론 상술한 물음은 결코 외부세계의 선행적 존재를 전제하는 자연적 인간의 관점에서 해명될 수도, 애초에 물어질 수도 없다. 그러나 순수 자아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이--그것이 초월적 대상이든 내재적 대상이든--순수자아의 내부에서 초월론적 주관성의 발동을 통해 그 의미와 존재를 구성받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면, 의식/앎/명증과 (심지어는 다른 타자들까지 포함하는) 세계는 결코 서로에게 외부적으로 대면해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한 필증적 외현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 다른 가능세계들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초월론적 주관성 또는 자아가 이처럼 자신의 자아됨, 타자, 그리고 객관세계까지 스스로의 내부에서 구체적으로 구성함을 천명하는 현상학은 곧 초월론적 관념론이 된다. 초월론적 관념론은 의미없는 감각적 자료로부터 의미를 파생시키는 [말도 안 되는] 심리학주의적 심리학적 관념론도 아니고, 세계의 의식독립적 즉자존재를 옹호하는 칸트의 관념론과도 다르다. 반대로 초월론적 관념론은 "체계적 자아학적 과학의 형식 속에서 수행되는 자기-외현, 모든 가능한 인식의 주체로서 나의 자아에 대한 외현"이며, 실재론과 경쟁하지도 않고, 그것의 증거(proof)는 구성적 지향성을 해명하는 현상학 자체다(86). 초월론적 관념론이 아닌 현상학은 오해된 현상학이다.
그런데 [초월론적 관념론의 제 문제를 윤곽지음에 있어]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나를 위한 타자들의 존재의 구성에 대한 문제, 그로써 그들과 공유하는 객관적 세계의 구성에 대한 문제다. 우리의 데카르트적 성찰이 실천적, 실용적인 것이 되려면--철학 그리고 현상학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이미] 실천적인 관념인데--타자 구성의 문제를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제5성찰: 모나드적 상호주관성으로서의 초월론적 존재의 영역에 대한 드러내밝힘(uncovering)
§42 다른 사람을 경험하는 문제의 해설, 현상학이 유아론을 동반한다는(entails) 반론에 응수하며. 여태까지의 서술에 대해, 에고 속에서 '내재적으로' 구성된 것은 자아의 '관념들'에 불과하며 따라서 그 너머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반론, 자아가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 현실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의식적으로 내 안에서 지향될 뿐인 타자에 대한 경험을 초월론적 현상학이 해명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가능하다. 이에 초월론적 현상학은 "어떤 지향성들, 종합들, 동기 부여들 속에서 "다른 자아"라는 의미가 [...] 만들어질(fashioned)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의미가] 다른 사람에 대한 조화로운 경험이라는 표제 하에 존재하는 것으로 확정되고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 자신으로서(as itself) 거기 있는지"를 발견함으로써 응수해야 한다(90).
★ cf. 현상학은 타인경험을 해명함에 있어 처음부터 타인이 실제로 존재함을 증명하고자 하기보다, 타인이라는 의미가 어떻게 내게/나를 위해 형성되느냐를 보이고자 하는 것 같다. 그 의미의 형성이 충분히 지속적이고 조화로우며 반복 가능하면 타인은 실제적 존재의 성격을 내게/나를 위해 획득하게 된다.
§43 타자의 주어짐의 노에마적-존재적(ontic) 양식, 다른 사람에 대한 경험의 구성적 이론을 위한 초월론적 단서로서. 타인에 대한 자아의 경험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한편으로 자아는 타인을 영혼을 가진 유기체들로서, 즉 세계 내부의 "심리물리적" 대상으로서 경험한다. 다른 한편으로 자아는 타인을 나와 공유하고 있는 이 상호주관적 세계를 위한 주체, 그리하여 나를 인식하는 주체로서 경험한다. 결국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타자를 향한 자아의 지향성의 해명이다. 이는 타인경험에 대한 초월론적 이론을 낳고, 궁극적으로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초월론적 이론을 정초하는 데 기여한다. 객관적 세계에 대한 초월론적 이론으로써 현상학자는 자연과 문화를 모두 포괄하는 객관적 세계의 존재의미[Seinssinn], "모두를-위해-거기-있음(thereness-for-everyone)의 경험적 의미"를 해명할 수 있다(92).
§44 초월론적 경험의 나 자신의 것(ownness)의 영역으로의 환원 타인경험에 대한 적절한 해명은 "보편적 초월론적 권역 내에서 특유한 종류의 에포케"를 요구한다. 이 에포케에서 "우리는 다른 주관성과 무매개적으로 또는 매개적으로 관련돼있는 지향성의 모든 구성적 효과들을 무시하고(disregard) [...] 나의 특유한 나 자신의 것임(ownness)의 초월론적 권역 또는 나의 초월론적이고 구체적인 나-자신에게로" 되돌아가야 한다(93). 즉 초월론적 구성이 나에게 타자적인 것으로 나타내는 모든 것을 추상해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오직 습성을 지닌, 순수한 주관적 과정들의 자아-극으로서의 초월론적 나 자신만이 남을 것이다.*
★ *Q. 흔히 '원초적 환원'이라 불리는 이 환원과 일반적인 데카르트적 초월론적 환원 사이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데카르트적 초월론적 환원 역시 내것이 아닌 것, 타자적인 것은 확보하지 못해야 하지 않는가?
★ Q. 어째서 <제일철학> 2권에서와 달리 현상학적 심리학적 환원에 대한 언급이 없는가? <제일철학> 2권에서는 마치 현상학적 심리학적 환원이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을 해명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로 이야기되지 않았던가?
이 모나드로서의 나의 그러나 나만의 배타적인 이 영역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타인경험에서 자아는 자신의 거울 또는 유비로서 두 번째 자아, 즉 '다른 자아(alter ego)'를 구성해내는데, 이것이 과연 저 영역에서 어떻게 가능할지가 이제 해명돼야만 한다. 이 원초적 영역은 자아에게 낯선 모든 것을, 즉 모든 '다른 정신적 존재' 일반과 '나를 둘러싸는 세계'마저 그것이 남과 공유되는 한 추상시킨다. 그런데 이 추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상 세계의 통일적으로 일관적인 층위(stratum)를 유지"하며, "우리의 경험하는 직관 속에서 연속적으로 [의식 흐름을] 진행"시킬 수 있다(96). 이 층위에 물론 '다른 주관성'의 자리는 없으며 오직 순전한 자연의 의미들만이 남는다. 그런데 여기서 자아는 자연적 유기체들 가운데서 독특한 유기체 하나를 골라낸다. 그것은 바로 그저 육체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나의 유기체(my animate organism)이다. 이 대상을 나는 무매개적으로 지배한다. 나는 나의 손'으로', 나의 눈'으로' 지각한다. 그리고 이 기관들과 관련된 키네스테제는 '내가 무언가를 수행한다'의 양식으로 의식에서 흘러가고, 나에게 고유한 가능성들에 의해 제약된다. 키네스테제를 통해 내가 나의 기관들을 직접 경험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그 속에서 기능하는 기관이 대상이 되고 대상이 기능하는 기관이 되는 과정"이 발생한다(97). 이러한 유기체는 '나'를 인간으로서 환원한 결과다. [이후 나만의 배타적인 영역에서 나는 다른 육체들 또한 만난다는 점이 밝혀진다.] 중요한 것은 원초적 환원 이후에도 일종의 세계가 나에게 남으며, 그곳에 내 심리물리적, 인격적 에고의 자리가 마련돼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세계는 시공간적 형식을 가짐으로써 그 안의 사물들은 서로를 밀어낸다.*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에고와 다른 사물은 서로에게 외면적인(external) 관계를 취할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타자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배제해도 내 에고의 심리적 삶 그리고 세계경험은 조금도 영향 받지 않는다는 역설이 발견된다.
*여기서 타자들은 주체성을 결여한 대상, 사물의 일종으로 취급되는 것 같다.
§45 초월론적 자아, 그리고 나 자신만의 것 속에(in my ownness) 포함된 것으로 환원된 심리물리적 인간으로서의 자기-통각(self-apperception) 후설은 이제 '나'의 초월론적 자아와 인간적 자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탐사한다. 주지하다시피 초월론적 자아는 객관적인 모든 것을 구성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간됨까지도 스스로 구성한다. 이를 후설은 '세속화하는 자기-통각(mundanizing self-apperception)'이라 부른다. 세속화하는 자기-통각을 통해 초월론적 자아에게 속하는 것은 현상으로서의 인간적 에고에게도 속하게 된다. 나아가 타자의 주관성 자체는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의식은 역시 초월론적 자아 자신만의 것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에 현상학자는 타인경험을 해명할 수 있다.*
*Q. 타인경험 일반에서 타인은 인간적 자아로 구성 및 경험되는가, 아니면 초월론적 자아로 구성 및 경험되는가? 먼저 인간적 자아로 구성된 뒤, 간접적인 환원을 거쳐서만 비로소 초월론적 자아로 구성되는가? 아니면 곧장 초월론적 자아로 구성될 수도 있는가?
A. 49절을 보면 곧장 순수한 타자부터 구성되고 그 후 세속화하는 통각을 통해 인간성이 구성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는 <제일철학> 2권에서의 타인경험의 해명과 상충한다. 타인경험에 대한 두 가지 해명 방식의 양립 가능성을 다루는 글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순수 --> 세속[thru 데카르트적 길] vs 세속 --> 순수[thru 심리학적 길]). <-- 검증 요망
§46 주관적 과정들의 흐름의 현실성과 잠재성의 구역으로서의 나 자신만의 것[의 구역] 후설은 원초적 환원이 열어밝히는 영역, 비-타자적인것(non-alien, non-other)만이 남는 영역이 정확히 어떤 영역인지 해명한다. 그에 따르면 초월론적 자아의 자기반성은 자아 자신을 지각적으로(perceptively) 부여받으며, 이때 "아직 발견되지 않은 나 자신만의 내부적 특성들(features)의 무한한 지평"이 열려있다(101, 강조는 원저자). 그러므로 나 자신의 것 역시 외현을 통해서 발견되고 그 근원적인 의미를 얻는 대상, 자기반성을 통해 비로소 원본적인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기외현은 자기지각이기는 해도 지각이 아닌 기억 등을 통해서도 제 목표를 달성하며, "그 안에서 내가 에고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구조적 형태들" 예컨대 시간적 자기구성의 명증은 어쨌거나 필증적이다. 이러한 필증성은 형식적인 법칙의 형태로 나타난다. 존재와 가상은 이 법칙 하에서 비로소 가려질 수 있다. 그리고 설령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이라 할지라도 "완전히 규정된 [충전적] 내용 자체"를 가지는 사태는 이념[일 뿐]이다(103).
§47 지향적 대상 또한 나 자신만의 것의 완전한 모나드적 구체화(concretion)에 속한다. 내재적 초월성과 원초적(primordial) 세계. 나 자신에게 본질적으로 속하는 것의 영역에는 주관적 과정들의 현실성과 가능성뿐 아니라 구성된 통일체로서의 지향적 대상들 역시, "그 구성된 통일체가 근원적인(original) 구성 자체로부터 분리불가능한 한에서" 함께 속한다(103, 강조는 원저자). 내재적 시간성들로서 구성되는 ①감각자료뿐 아니라 설립작용(instituting acts)으로부터 비롯해 지속하는 신념들로 구성되는 ②나의 습성들, 나아가 나의 통각으로부터 분리 불가능하게 원본적으로 구성되는 ③자연적 공간 속 초월적 대상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로부터 ④환원된 세계 전체가 나 자신만의 것의 구체적 영역에 포함된다는 결론이 따라나온다. 타인에 대한 경험의 지향적 효과를 배제하고 나서도 의식의 흐름을 초월하는 "공간적 대상들의 통일체로서의 자연"이 구성된 현상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104).
★ §48 원초적 초월성보다 높은 수준에 속하는 객관적 세계의 초월성 여태까지의 서술에서 중요한 것은 나 자신만의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즉 타자(someone else)의 것의 층위가 서로 구별되고 대조될(contrast)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나에게 속하는 모든 의식의 양식들이 내 자기-의식의 양식들은 아니다(not all my own modes of consciousness are modes of my self-consciousness)." [어떤 층위에 속해있든] 모든 존재는 경험의 조화로운 흘러감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제 문제는 "그를 통해 [자아가] 자기 자신만의 존재를 완전히(wholly) 초월하는 존재-의미(existence-sense)를 가지는 지향성들"을 어떻게 계속해서 형성해나갈 수 있는지 해명하는 것이다. "나의 구성적인 종합에 속하는 교차점"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면 그 무엇도 '나'를 위해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105, 강조는 원저자).
*이 대조는 "철저한 차별화"라는 표현을 통해 50절의 마지막 문단에서 다시금 강조된다(111).
우선 이와 같은 지향성의 형성(e.g. 타인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은 객관적 세계에 대한 경험[의 일부]로서 사실적으로 주어져있다. 그리고 원초적 환원을 통해 현상학자는 객관적 세계에 대한 경험에 속하는 기체(substratum)로서의 [나만의] 환원된 세계를 내재적 초월자로서 확보했다. 이 원초적 초월성을 뛰어넘어 그보다 높은 수준에 정초돼있는 나의 에고에 타자적인 세계(a world alien to my Ego), 즉 2차적 객관적 초월성에 대한 인식을 정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다음 과제다. 후설은 여기서 '나에게 완전히 타자적인 것이자 그 본질 또한 나와 다른 것을, 나의 본질을 전혀 구성하지 않는 것을 내가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라는 고전적인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 §49 타자적인 것(what is other)에 대한 경험의 지향적 해명이 따라가야 할 경로 미리 획정하기(predelineation) 후설에 따르면 [진정한=가장 포괄적인] 객관세계의 존재의미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상이한 수준의 의미들이 말하자면 특정한 높이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쌓여야 한다. 우선 나의 원초적 에고로부터 배제되었던 ①타자의 [순수한] 에고(들)이 해명되어야 하며, 그로써 ③이들과 내가 공유하는 객관적 자연과 객관적 세계라는 새로운 의미로의 길이 처음으로 뚫려야 한다. "나의 원초적 세계에 더한 의미의 보편적 추가(a universal superaddition of sense to my primordial world)"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의미 구성의 기반이 되는 세속화되지 않은, 순수한 타자들은 '나'와 고립되어있지 않을 뿐 아니라 자아-공동체, 궁극적으로는 ②모나드들의 공동체를 함께 이루고 있으며 이 공동체가 곧 "공동화된(communalized) 지향성 속에서" 하나의 동일한 세계를 구성하는 주체다. "이 세계 속에서 모든 에고들은 다시 자신들을, 그러나 객관화하는 통각 속에서 "인간"이라는 의미 또는 "세속적 객체들로서 심리물리적 인간"이라는 의미와 함께 제시한다(107, 강조는 원저자)." [④인류의 공동체라는 의미가 마지막 수준에서 구성되는 셈이다.]
앞서 "언급된 <구성적 지향성의> 공동화"가 곧 초월론적 상호주관성, 초월론적 "우리"가 그 속에서 [진정한] 객관적 세계를 구성하는 자신만의 상호주관적 권역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107). 이때 객관적 세계는 상호주관적 본질의 권역을 초월하지 않고 그 안에 내재적인 초월성으로서 본유적으로 속하게(inhere) 된다. "이념으로서의 객관적 세계--상호주관적인(상호주관적으로 공동화된) 경험의 이념적 상관자[...]의 구성은 본질적으로 모나드들의 "조화"를 요구한다(involves)."(107-8, 강조는 필자) 여기서 모나드들의 조화란 공동체 속 각 특수한 주체들이 "상호적으로 상응하며 조화로운 구성적 체계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08, 강조는 필자). 마치 라이프니츠에게서 모나드들이 함께 조화되어있듯이, 그러나 모든 형이상학적 색채는 걷어낸 채로 말이다.
§50 "파생현전"(유비적 통각)으로서의, 타자(someone else)에 대한 경험의 매개적 지향성 그러므로 먼저 첫 번째 수준의 의미의 소유, 즉 아직 인간이라는 의미를 획득하지 않은 타자에 대한 경험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해명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다른 에고 자신도, 그의 주관적 과정들 또는 그에게 나타나는 현상들 자체도, 그 자신만의 본질에 속하는 그 무엇도, 우리[나]의 경험에 원본적으로(originally)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랬더라면, 타자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접근 가능했더라면, 그것은 나 자신만의 본질의 순전한 계기일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 자신과 나 자신이 동일할 것이다."(109) 그러므로 원초적 세계로부터 타자에게로 나아가는 데는 지향성의 특정한 매개성이 관여한다. 이에 따라 '파생현전(appresentation)'이라 불릴 수 있는 '함께-제시함(making "co-present")'의 작용에 주목할 수 있다.
★ 단순한 파생현전 일반 또는 함께-제시함은 외부지각에서 앞면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뒷면이 미리 정해진(prescribed) 내용을 가지고 주어지는 사태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그 경우에는 충족하는 현전을 통한 확증의 가능성이 있다. 그 뒷면 쪽으로 몸을 움직여 관련된 직관을 획득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에 대한 경험에서의 파생현전에서는 그와 같은 확증이 아프리오리하게 불가능하다. 이와 같이 비-원본적인 현전으로서의 파생현전은 결국 타자의 신체에 대한 지각이 "그곳에 다른 것도 있다는 <데 대한 믿음>을 동기부여"해야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타자의 신체에 대한 지각은 원초적으로 환원된 세계에 대한 지각에서 이미 발생한다. 내재적인 초월자로서 어떤 신체가 "나 자신의 규정적 일부"로서 내 지각의 권역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 자연 속에서는 그리고 이 세계 속에서는 나의 영혼을 가진 유기체만이 영혼을 가진 유기체로서 원본적으로(originally) 구성될 수 있는 또는 구성되는 유일한 신체이기 때문에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가진 유기체로서 [수동적으로 이미?] 파악되는 저기 있는 신체는, 이 의미[영혼을 가진 유기체의 신체라는 의미]를 나의 영혼을 가진 유기체로부터의 통각적 전이(transfer)를 통해 도출했음이 틀림없으며" 물론 이 영혼에 대한 직접적, 원초적 직관 또는 술어화는 불가능하다(110, 강조는 원저자). 그러므로 "나의 원초적인 권역 내에서, 오직 저기 있는 저 신체와 내 신체를 연결하는 유사성만이 저 신체를 다른 영혼을 가진 유기체(another animate organism)로 "유비하는(analogizing)" 통각의 동기부여적 기반으로 기능(serve)할 수 있다는 것이 맨 처음부터 명석하다."(111, 강조는 원저자)
그러나 이와 같은 통각이 추론이 아니며, 사유하는 작용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모든 통각은 결국 통각 대상의 의미와 유사한 의미가 처음으로 구성되었던 최초의 설립을 되가리킨다. 그러므로 사유를 동반하지 않는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또한 "근원적으로(originally) 설립된 대상적 의미를 새로운 사례로 유비하는 통각을,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선취적(anticipative) 파악과 함께" 활용한다(111).
§51 타자에 대한 내 경험의 연상적으로 구성적인 구성요로서의 "짝짓기(pairing)" 후설에 따르면 '나'의 원초적 영역에 들어온 신체가 마찬가지로 영혼을 가진 유기체로서 파악되기 위해서는 자아와 다른 자아(alter ego)가 "항상 그리고 필연적으로 원본적인(original) "짝짓기" 속에서 주어져야 한다." 상술한 유비하는 파악은 짝짓기의 대상을 향해 설립되는 것이다. 짝짓기란 "짝으로서 그 다음에는 그룹, 다수성으로서의 배치 속에서의 발생"을, 쉽게 말해 다수성의 형성 일반을 가리킨다. 또한 "짝짓기는 "동일화"의 수동적 종합에 대조돼 "연속"이라고 우리가 지정하는 수동적 종합의 원시적(primal) 형태"다. 짝짓는 연상에서는 둘 이상의 자료가 서로 구별되어 나타나지만 "유사성의 통일체를 현상학적으로 정초하고 그러므로 언제나 정확히 짝으로서 구성"된다(112). 해당 자료들은 항상 함께 일깨워지며, 유사성의 정도에 따라 서로의 대상적 의미가 겹친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의미의 상호적인 전이"가 있다. 타자의 신체가 나의 신체와 현상적 짝을 짓는 규정을 가진 채로 자연의 일부로서 내 원초적 권역 안에 들어서면 '영혼을 가진 유기체'라는 내 신체의 의미를 전유해간다. 이때 이렇게 전유된 의미가 나만의 원초적 구역에서는 원본적으로 현실화될(originally actualized) 수 없기 때문에 나의 두 번째 유기체가 아닌 비로소 타자의 유기체가 경험되는 것이다.
§52 자신만의 확증 양식(style of verification)을 가진 경험의 일종으로서의 파생현전 이제 남은 과제는 상술한 전이된 의미가 어떻게 원본적으로(originally)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고서도 실존적[존재의, existential] 지위를 얻을 수 있는가이다. 타자의 혼이 불어넣어진 신체와 그것을 지배하는 에고의 파생현전은 "종합적으로 조화롭게 전개되는 새로운 파생현전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속에서 이 파생현전들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그것과 관련된 현전들에] 연속적으로 부속하는 나 자신만의 [권역] 내부에서 그것들의 변화하는 현전들 자체(고유한 현전들, 엄밀한 현전들presentations proper)와의 동기부여적 연관 덕분으로 얻는 방식의 덕으로" 비로소 가능하다(114, 강조는 원저자). 쉽게 말해 타자의 영혼을 가진 유기체는 현전에 의해 동기부여되는 파생현전이 계속해서 조화로운 인식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증시킨다. 그러나 이는 원본적(original) 확증이 아니며--그러한 확증은 나 자신만의 것에 대해서만 가능하다--원초적으로 충족이 불가능한 확증이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경험]은 나만의 특유한 것에 포함된 무언가의 유비로서만 상상 가능하다."(115) 후설은 이에 대해 타자의 에고가 내 에고의 지향적 변양물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나의 원초적 세계와 유비적인] 타자의 원초적 세계 그리고 타자의 완전히 구체적인 에고, 궁극적으로 다른 모나드가 같은 방식으로 파생현전된다. 타인경험이라는 파생현전은 비-원본적인(non-originary) 현전인 현전화[Vergegenwärtigung]의 일종이다.
§53 원초적 구역의 잠재성들과 타자에 대한 통각에서 그들의 구성적 기능 사물을 지각함에 있어 나의 영혼을 가진 신체는 '여기'의 양식으로 주어지지만, 나는 언제든 몸을 움직여 타자가 점유할 만한 '저기'로 이동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의 위치에서 현상하는 현출들의 체계뿐 아니라 '저기'로의 위치 변화에 상응하는 잠재적인 체계들 또한 각 사물을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이 사례들은 서로 연상적으로 "나의" 자연을 원초적으로 구성한다. 이 사실은 타자에 대한 경험을 해명함에 있어 실마리가 되어준다. 타자에 대해 "나는 그를 내가 저기로 가서 그가 있는 곳에 있다면 가졌어야 할 것과 같은 현출의 공간적 양식들을 가지는 [존재]로 통각한다."(117) 그의 원초적 세계에서는 그 자신이 절대적인 '여기'를 점하고 있을 것이다.
§54 그 속에서 내가 타자를 경험하는 파생현전의 의미 외현하기 이제 자아는 자신에게 익숙한 유형의 신체적 지배[leibliches Walten]를 가지는 타자의 유기체와 그 기능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더 높은 정신적 권역"에 속하는 규정적 내용들에 대한 "타인경험함(empathizing)"이 더 나아간 결과로서 발발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타인의 화 또는 기쁨을 나는 "유사한 상황들 하에 있는 나 자신의 처신(conduct)을 통해 쉽게 이해한다. [...] 내 삶이 흘러가는 양식과의 경험적 익숙함을 기반으로" 타인의 종합의 경로와 경험의 양식 일반을 전형적인 유형의 예시로서 연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120, 강조는 원저자). 게다가 결국 나의 심리적 삶과 타인의 심리적 삶은 서로 짝지어져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이해는 나 자신의 정신적 삶에 대해서도 드러내주는 바가 있다.
Q. 고차원적 연상으로서의 의미의 융합, 동화, 수용(fusion, assimilation, accomodation)에 대한 두 번째 문단을 이해하지 못했다.
§55 모나드들의 공동체의 확립[establishment]. 객관성의 첫 번째 형태: 상호주관적 자연. "상호주관적으로 공통적인 다른 모든 사물들에 대한 기초인 것은 나만의 심리물리적 에고와 짝지어진 것으로서의 타자의 유기체와 그의 심리물리적 자아와 더불어 자연의 공동성(commonness)"이다(120, 강조는 원저자). [나의 자연과 그의 자연은 단지 그 현출만이 다른 동일한 자연이다.] 그런데 여기서 후설은 내 원초적 구역에 나타나는 신체와 타자의 원초적 구역에 나타날 그의 신체로서 내게 파생현전되는 것 사이의 동일화가 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여기에 수수께끼(enigma)가 있는 것 같다고 자문한다. 그러나 후설은 이러한 의문의 제기가 내 원초적 구역과 타자의 원초적 구역 사이의 구분을 이미 전제하고 있으며 사후적인 동일화 경험의 시간적 발생을 취급하고 있으므로 현재의 분석과 궤를 달리한다고 단언한다. 타인경험의 지향성에 대한 [정적] 분석이 완료되어야만 저 수수께끼는 풀릴 수 있다.
하나의 파생현전 내에 현전과 그로부터의 파생현전은 "하나의 지각이라는 기능적 공동체"를 이룬다. 그러므로 파생현전에 대한 노에마적인 분석에서도 현상학자는 엄밀하게 지각된 현전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해야 한다. 이는 파생현전이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을 넘어서 그보다 더 정립하는, 일종의 초월작용임을 보여준다. 타인경험 역시 파생현전이므로, 나의 원초적 구역 내에서 현전하는 신체와 그로부터 파생현전되는 타자의 영혼을 가진 유기체 자체는 하나의 통일체에 속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신호(sign)나 순전한 유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타인 자체를 지각하는 것이다. 타인의 존재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성된다.
*Q. 순환논증이 아닌가? 수수께끼를 해결해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자연, 인간과 문화의 세계, 객관적 세계 일반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파생현전 내부의 층위 구분은 똑같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자연적 객체를 경험함에 있어 나에게 원초적 근원성(originality)을 가지고 주어지는 층위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파생현전적 층위가 있다. 그리고 이 파생현전적 층위는 곧 "다른 에고에게 같은 자연적 객체가 주어질 수 있는 가능한 양식들"에 해당한다(125). 그러나 이와 같은 세계의 공유는 타인들과 나의 현출-체계가 동일해야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현출-체계는 (본성적으로 선행하는 정상성을 기반으로) "비정상성들"을 가지는 것으로 구성돼있을 수 있다. 이처럼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함으로써, 그리고 그에 따라 비정상성의 영향을 받는 새로운 통일체들의 구성까지 해명함으로써 세계 통각의 전체적 조화를 되찾을 수 있다.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세계를 지각하는 존재의 예로 후설은 짐승을 든다. "짐승에 비하면 인간은, 구성적으로 말했을 때, 정상적인 경우다--나 자신이 다른 모든 인간에게 구성적으로 원시적인 규범인 것처럼 말이다. 짐승들은 본질적으로 나에게 내 인간됨의 비정상적 "변주물들(variants)"로 구성된다"고 후설은 말한다.
Q. 동물을 비정상적 존재로 취급하는 후설의 존재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후설은 나 자신의 주관적 과정들과 전시간적인(omnitemporal) 이념적 대상성들이 반복적으로 현전(presentiate*)될 수 있는 가능성을 통해 자기동일적 대상으로 구성되는 과정을 상기하며, 타인경험 역시 현전에 의해 매개되는 연결 효과를 통해서, 즉 "구체적 에고의 [...] 방해받지 않으며 살아가는 자기-경험--그에 따라, 그의 원초적 권역--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 속에서 현전되는 타자적(alien) 권역 사이의 연결"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재차 말한다. 나의 원초적 권역에 나타나는 신체와 다른 현출의 방식 속에서 파생현전되는 신체 사이의 동일화 종합, 나아가 원초적으로 주어진 자연과 파생현전적으로 주어지는 자연 사이의 동일화 종합을 거쳐 나의 에고-극과 타자의 에고-극은 공존하게 된다. 이로써 그의 지향적 삶, 그의 현실은 나의 그것들과 공동의 시간-형식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 원시적으로 설립된다. "이러한 연결 속에서 우리는 구성적으로 상호관련된 모나드들의 시간적 공동체가 용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다. 왜냐하면 그것[시간적 공동체]은 세계와 세계 시간의 구성과 본질적으로 엮여있기 때문이다."(128, 강조는 원저자)
*Q. 원문을 찾아봐야 'present'와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56 더 높은 수준들의 상호모나드적(intermonadic) 공동체의 구성 타인이 '나'를 위해 의미를 가지려면 내 속에서 타인으로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제 자명해졌다. 내가 구성한 의미와 존재의 지위는 연속적인 승인(confirmation)을 통해 굳혀지고, 이로써 나는 타인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모나드와 타인의 모나드는 서로의 주관적 과정들 사이에 내실적으로 본유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며, 이 분리에 나와 타인의 각 심리물리적 존재 사이의 실제적이고 세속적인, 공간적인 분리가 상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나드와 타인의 모나드는 지향적인 교감(communion) 속에 있다.
이제 후설은 더 높은 수준의 공동체 형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타인을 심리물리적 주체로서 인식할 때 그 인식의 중심은 나이다. 그러나 인류의 공동체라는 의미 속에서는 "서로를 위한 상호적 존재"가 함축적으로 성립하며, "나의 존재와 다른 모든 이들의 존재 사이의 객관화하는 평준화(equalization)"가 발생한다(129). 다시 말해 우리는 모두 같은 인류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내가 타인을 타자로서 경험하듯, 타자 역시 나를 타인으로서 경험한다. 더 많은 타인들이 관여된다면 그들은 서로를 타자로서 경험할 것이다. 그러므로 끝없이 개방된 자연은 언제든 잠재적으로 더 발견될 수 있는 수많은 다수의 인간들을 포함한다. 여기에 자연스럽게 상응하는 것이 바로 "초월론적 구체성 속에서 우리가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이라고 지정하는 유사하게 개방된 모나드들의 공동체다."(130, 강조는 원저자) [그러므로 자연적 태도에서는 인류인 것이 초월론적 태도에서는 모나드들의 공동체다.] 내 안에서 초월론적으로 구성된 세계는 다른 타인들에 의해서도 점령되어야 하며 그 속에서 타자들은 정신적 삶을, 지향성의 현실적이고 잠재적인 체계들을 가지고 존재하는 이들로 일찍이 구성돼있어야 한다. "각자에게 모든 타인은 그의 지평 속에 함축돼있"는 것이다(131).
§57 마음에 내부적인 것에 대한 외현과 자아학적 초월론적 외현 사이의 평행에 대한 해명 "순수한 마음은 모나드의 자기-객관화"기 때문에 "아프리오리하게, 초월론적 현상학의 모든 분석 또는 이론은 [...] 우리가 초월론적 태도를 포기하면 자연적 왕국에서 [역시] 생산될 수 있다." 이로써 소박한 내면 심리학과 관련된 이론 즉 순수한 심리학이 초월론적 현상학에 상응하는 것으로서 형성된다(131).
§58 더 고차원적 상호주관적 공동체들에 대한 지향적 분석 속 문제들의 차별화(Differentiation). 나와 나를 둘러싸는 세계. 타인경험을 기반으로 타인에게 향해진 나의 작용들은 '사회적 작용'이라는 성격을 획득한다. 사회적 작용들로써 이루어지는 사회적 공동체들의 유형 등 역시 현상학의 탐구 영역이다. 특히 "각 인간과 인간 공동체를 위한 [그들을] 둘러싸는 문화의 세계 및 문화적 대상성의 구성"이 대표적인 예시다(132). 같은 인간이라 해도 서로 다른 문화에 속해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문화적 지평 그리고 역사 위에서 생활한다.
어떤 종류의 세계 구성이든 그것은 원초적 구성과 이차적 구성[정초된 구성]을 동반한다. 이차적으로 구성된 것은 원초적으로 구성된 것의 지평적 존재로서 원초적 구성을 거쳐야만 비로소 접근 가능해진다. 문화세계의 구성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두에게 공통적인 자연, 그 자연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공간적 형식이 우선 기능해야 문화세계의 구성이 가능하다. 그런데 문화 세계 내부에서도, '나'에겐 나의 문화세계가 원초적이고 타 문화세계는 일종의 확장된 타인경험, 내 문화를 타자의 문화적 공동체에 투사함을 통해서만 이차적으로 경험 가능하다.
[문화가 융성해있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인간의 실존은 시간적 발생을 거쳐 일찍이 인간에게 유의미한 술어들로 점철된 주변의 실천적 세계와 의식을 통해(consciously) 관련되어있다. "인간의 공동체와 각 특수한 인간은 필수적으로 주변의 구체적인 [생활]세계에 몰두해있으며(vitally immersed), 겪음과 수행함 속에서 그것과 관련되고 -- 이 모든 것이 이미 구성돼있다."(135, 강조는 필자) 시간적 발생은 인격의 변화, 습성적 속성들의 변화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자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통일적 인격의 정적 구성뿐 아니라 사람의 본유적인 성격에 대한 수수께끼들을 불러들이는 발생적 문제의 해명 또한 요구된다. 중요한 것은 "필증적 에고에 대한 초월론적-현상학적 외현의 체계적 전개와 함께 세계의 초월론적 의미 또한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완전한 구체성 속에서 탈은폐되어야(disclose) 한다"는 것이다(136, 강조는 원저자). 이 구체적 세계가 곧 우리 모두를 위한 생활세계이다.
§59 존재론적 외현과 구성적 초월론적 현상학 전체 내에서 그것의 자리 후설에 따르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구성은 그 자체로 아프리오리하다.* "주어진 객관적 세계의 보편적 사실적(de facto) 구조--순전한 자연으로서, 심리물리적 존재자(being)로서, 인간성, 여러 수준들의 사회성, 그리고 문화로서--는 굉장히 넓은 범위까지(to a very great extent) [...] 본질적 필연성이다." 그러므로 이로부터 "실제적 세계에 대한 아프리오리한 존재론이라는 과제"가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137, 강조는 원저자). 물론 이 존재론은 철학의 수준의 명료성(intelligibility)은 가지지 못할 것이며 오직 상대적 명료성만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 존재론은 직관으로부터 유리돼 논리적 개념들로써만 작동했던 기존의 존재론들과 달리 구체적인 직관 즉 "이해의 궁극적인 원천들로 되돌아 관계하는 아프리오리"를 탐구할 것이다(138).
*Q. 이것이 정말 입증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인간성이 어째서 필연적이란 말인가? 아니면 인간이 있다면--이것 자체는 <사물과 공간>의 결론에서 말했듯 비합리적 사실이고--그것의 구조는 필연적으로 이러저러할 것이라는 약한 주장인가?
★ cf. "[...] we exercised transcendental reduction -- that is: we went back to the transcendental ego, who constitutes within himself givenness-beforehand and all modes of subsequent givenness; or (with eidetic self-variation) we went back to any transcendental ego whatever. The transcendental ego was conceived accordingly as an ego who experiences within himself a world, who proves a world harmoniously. Tracing the essence of such constitution and its egological levels, we made visible an [...] Apriori of constitution."(136-7, 강조는 필자) ➔ 형상적 환원을 거치기 때문에 초월론적 현상학적 탐구는 엄밀히 말해 '1인칭'으로 진행되지 않으며, 세계는 조화로운 것일 때만 세계로서 입증된다.
§60 타자의 경험에 대한 우리의 해명이 지니는 형이상학적 결과 만일 '형이상학'이 존재자에 대한 궁극적 인식을 뜻하는 것이라면, 후설은 자신의 모나돌로기[Monadologie]로서의 초월론적 관념론의 결과들이 형이상학적인 것이 맞다고 말한다. '나'의 자아가 [진정한] 세계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신과 같은 다른 자들과의 교감" 속에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그리고 방향성을 가지고(orientedly) 주어지는* 모나드들의 공동체의 일원"이어야 한다(139).** 후설에 따르면 이 객관적 세계 속에서 다른 모나드들은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자아는 그 모나드들의 다수성을 명시적으로 또는 함축적으로 저 교감 속에 있지 않은 한 상상할 수 없다. 이 모나드들은 전부 스스로를 시공간화하고, 실제화(realize)하며 심리물리적 인간으로서 구성한다. 이 모나드들의 함께함(togetherness)이 시간적인 공존이라는 것, "실제적" 시간성의 형식을 공통적으로 준수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필연적[필수적, necessary]이다. [요컨대 '나'와 다른 모든 모나드들은 함께 연결되어있고, 모두가 저마다 동일한 세계를 자신 안에 품고 있다. 이것이 후설이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개념을 차용한 이유 같다.]
*Q. 여기서 'orientation'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Q. 왜냐하면 세계가 상호주관적 세계이므로?
이때 지금, 여기의 세계와 다른 시공간을 가지는 새로운 세계가 가능하냐는 물음은 부조리하다. 새로운 세계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공유된 세계를 서로 다른 상호주관적 공동체들이 다르게 본 것에 불과할 것이다. 오직 하나의 모나드들의 공동체만이, 오직 하나의 객관적 세계, 하나의 객관적 시공간 그리고 자연만이 가능하다. "나아가 만일 내 안에 다른 모나드들의 공존을 필요로 하는(involves) 구조가 [하나라도] 있다면 이 하나의 자연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140, 강조는 원저자) 다만 우리와 그 어떤 현실적 연결도 가지지 않는 동물--예를 들어 우주에 거주한다든지--의 세계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그들에게 발견 불가능할 것이며 오직 사실적이고 우연하게만 속할 것이다.
이에 더해 내가 오직 나이고, 동시에 다른 타자이거나 심지어는 나의 상상물일 수도 없다는 것은 동시적 발생불가능성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 또한 나는 타자를 발견할 수만 있지, 창조할 수는 없다.
§61 "심리학적 기원들"에 대한 전통적 문제들과 그것들의 현상학적 해명 심리적 발생의 문제, 즉 아이가 어떻게 심리적 삶을 시작하고 세계를 이미 주어진 것으로 말하자면 표상하는 통각적 체계가 어떻게 구성되는가의 문제는 아직 건드려지지 않았다. "탄생과 죽음 그리고 심리물리적 존재의 세대적(generative) 결합체의 발생적(genetic) 문제들"은 훨씬 고차원적인 현상학적 탐구를 요한다(142). 그런데 이 탐구는 우리로 하여금 철학의 다소간 전통적인 문제들로 이끈다. 바로 원초적 자연의 기원, 영혼을 가진 유기체와 마음 사이 원초적 통일성의 해명, 나아가 시공간 그리고 물리적 사물에 대한 관념의 심리학적 기원의 해명이라는 문제다. 근대 심리학은 지향적 분석이라는 열쇠를 놓침으로써 관련된 제 문제들을 올바르게 해결하지 못했다. 이제 같은 문제들은 "최초로 지향적 방법에 따라서 그리고 심리적 구성의 보편적 복합체들 내에서 심문되어야 한다."(144, 강조는 원저자)
현상학은 또한 모든 심리물리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 심리학을 정초함으로써 심리학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순수 심리학의 탐구 과제들은 초월론적 현상학의 탐구 과제들과 평행적이다. 순수 심리학은 "그것이 어떤 마음이든지 모든 마음의 구체적인 자신만의 본질성에 포함된 것을 지향적으로 외현"하고 이로써 ""세계라는 관념"에 대한 지향적 외현"을 가능케 하며, "타자성과 관련된 지향성"을 외현한다(144, 강조는 원저자). 경험된(experiential) 세계의 심리학적 기원을 해명함에 있어서 최초의 문제는 물상(thing-phantom)*의 기원을 해명하는 것이다. 물상은 처음에는 그저 감각적 현상의 종합이지만, 이후 실제적 사물이라는 의미가 그에 대해 구성되고, 더 고차원적인 수준에서는 인과성과 실체성이라는 의미까지 구성적으로 담지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오직 일면적인 분석이며, 이렇게 물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영혼을 가진 유기체의 자기구성 및 현상 구성 역시 연구되어야 한다. 결국 원초적 세계에 대한 연구는 칸트에게서와 마찬가지로 "감각적 직관의 노에마적 아프리오리"를 연구하는 [시공간에 대한] '초월론적 감성학(transcendental aesthetics)'을 요구하게 된다(146). 그러나 칸트의 [범주를 정초하는] '초월론적 분석학'은 객관적 세계 자체와 그것을 구성하는 다수성들을 연구하려는 현상학도에게 전유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타인경험은 초월론적 감성학에서 취급하는 경험보다 한 차원 위에 놓인 경험이지만 초월론적으로 분석적인 경험은 아니다.
Q. 근대철학을 마비시켰다는 "초월론적 심리학주의"가 무엇인가?(144)
*Q. 물상의 정의는 무엇인가? (⟪사물과 공간⟫을 참고해볼 것.)
초월론적 현상학과 순수심리학을 분리해서 취급할 수는 없다. "마음 그리고 전체 객관적 세계가 초월론적으로 고려됐을 때 자신의 존재와 실존적 의미를 잃지 않듯이(왜냐하면 그것들은 그것들의 구체적 전면성(all-sidedness)을 드러내밝힘으로써 순전히 근원적으로(originally) 이해 가능하도록 만들어질 뿐이므로) 실증적 심리학 역시 자신의 올바른 내용을 잃지 않고 오히려 소박한 실증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채 보편적 초월론적 철학 자체 내부의 분과가 된다."(147) 순수 심리학은 소박한 실증성을 가진 학문들 가운데서는 제일의 학문이며, 자신 안에 초월론적인 영역으로의 길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실증 학문들이 시달리는 일면성의 문제를 겪지 않는다.* 마음(psyche)의 개념을 제외하면 순수 심리학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근본적인 개념들을 구비하고 있다.
*Q. 실증 학문은 어떤 의미에서 일면적인가?
A. 세계가 그 속에서 주어지는 주관적 측면을 도외시하고, 세계의 객관적 측면만을 부각시키므로.
§62 타자경험에 대한 우리의 지향적 외현에 대한 조사(survey) 초월론적 현상학은 초월론적 유아론이므로, 다른 주관성과 진정한 객관성에 대한 경험의 해명은 오직 "라이프니츠적 전통을 몰래 취함으로써, 인정받지 못한 형이상학의 덕분으로만" 가능하다는 비판이 서두에 제시되었었다. 이제 이러한 반론은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타인경험의 해명에서 현상학도가 겨냥한 것은 존재가 아니라 의미의 외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타자(someone else)로서" 조화롭게 증명하는 것은 그리고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그리고 선택해서가 아니라, 인정받아야 할 현실성으로서 부여한 것은 그 자체로(eo ipso) 초월론적 태도에서 나를 위해 존재하는 타자였다: 정확히 나의 자아의 경험하는 지향성 내에서 증명된 다른 자아."(148, 강조는 원저자) '내'가 타인경험의 형태로 다른 타인을 경험한다는 것은 의심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외부 지각을 통해 타인 또한 초월론적 자아라는 점이 원본적이거나 무조건적으로 필증적인 명증으로서는 아니지만 어쨌든 밝혀진다. 방법론적으로 유아론을 채택하는 원초적인 환원에 머물렀으면 몰라도, 이 타인들은 나 자신만의 본질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초월론적 현상학은 유아론이 아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의 실존적 의미(existential sense)를 배타적으로 나 자신에게서만, 내 의식의 권역으로부터만 도출해야 한다는 명제가 그 타당성과 근본적 중요성을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그렇다(150, 강조는 원저자). 이러한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에 대한 경험을 포함해, 초월론적 경험 일반에 대한 현상학적 외현으로서의 초월론적 관념론은 전통 형이상학과 거리가 멀며, 오직 그 어떤 철학함 이전에도 주어지는 순수한 직관의 경계, 또는 의미에 대한 외현의 한계 내에서만 움직인다. 초월론적 자아에게 주어지는 경험의 의미는 철학이 발견할 수는 있지만 결코 변경할 수 없는 것이다.
결론
§63 초월론적 경험과 지식을 비판하는 과제 여태까지의 탐구는 필증성의 이념을 포기하지는 않았으나 "현상학의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있었으며 "여전히 특정한 소박성(필증성의 소박성)에 의해 감염되어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언젠가 현상학은 "현상학의 더 나아간 그리고 궁극적인 문제들: 그것의 자기-비판에 관련있는 [문제]들"을 건드림으로써 필증성의 범위와 한계 그리고 양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151, 강조는 원저자).
§64 결론짓는 말 상술한 탐구는 "절대적 기초에 의해 정초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과학으로서의 철학에 대한 데카르트적 이념의 구체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나아가 이 철학에 "필연적이며 의심 불가능한 시작"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필수적인 방법론을 정비함으로써 "모든 유의미한(senseful) 문제들이 미리 획정되는 체계적 질서"를 윤곽짓는 목적을 달성했다(152). 남은 과제는 초월론적 현상학의 파생물(ramification) 즉 소박한 실증성을 가진 학문들에 대해, 그리고 그것과 초월론적 현상학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후설에 따르면 "매일매일의 실천적 삶은 소박하다. 그것은 이미-주어진 세계 속으로의 몰두(immersion)이며 [...] 그 모든 생산적인 경험의 지향적 기능들은, 그로써 물리적 사물들이 단적으로 거기에 있는 그 기능들은 익명적으로 진행된다."(152-3, 강조는 필자) 실증적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실증 학문을 가능케 하는 지향적 수행들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에 학자의 철저주의적 자기-탐구 즉 초월론적 현상학을 필요로 한다. "세계, 자연, 공간, 시간, 심리물리적 존재자, 인간, 마음, 영혼을 가진 유기체, 사회적 공동체, 문화 등등의 개념의 의미와 기원 (또는 기원의 결과로 [나타나는] 의미)에 대한 철저한 해명의 시작"이 곧 이 성찰들이었다. 이 개념들은 "모든 실증학문들의 근본 개념들로서 기능한다."(154, 강조는 원저자)
경험적인 실증학문을 정초하는 모든 아프리오리한 학문들--형식적 존재론, 영역적 존재론--은 결국 아프리오리한 현상학의 체계적으로 차별화된 분기들이다. 현상학은 "모든 상상 가능한 존재의 보편적 로고스의 체계적 전개"이다. 그러므로 "초월론적 현상학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ipso facto) 참되고 진정한 보편적 존재론"이 될 것이다. 이렇게 초월론적 현상학은 데카르트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학문이 된다. "사실의 모든 합리성은, 결국, 아프리오리 속에 놓여있다."(155, 강조는 원저자)
마지막으로 후설은 현상학이 형이상학 자체, 최고의 궁극적 존재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는 동기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세속적 객관성에 앞서고 그것을 담지하는 존재, 본성적으로 첫 번째인 존재는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이다: 자신의 교감을 여러 형태들로 내보이는(effects) 모나드들의 공동체."(156) 이때 이로부터 기원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철학은 에고 코기토라는 공리로부터 도출되는 계산적 이론이 아니라 자기-탐구, 보편적인 자기-지식(곧 철학)에 의해 궁극적으로 정초된다. 후설의 결어는 '자기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신전의 모토와 '진리는 인간의 내면에 거주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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