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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장 폴 사르트르, <자아의 초월성> 요약

장 폴 사르트르, 현대유럽사상연구회 옮김, ⟪자아의 초월성(La transcendance de l'Ego)⟫, 민음사, 2017

 

 

"자아[ego]는 의식[conscience]의 소유주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대상이다(121)."

 ⟪자아의 초월성⟫은 사르트르가 최초로 완성한 철학적 저술이라고 알려져있다. 후설의 현상학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아 쓰였다는 사실은 더 유명하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현상학적 환원을 더 철저하게 수행할 경우, 후설이 모든 작용의 '나'-극[Ich-pol]로 설정한 '초월론적 자아(transzendentales Ego)'는 환원 후에 발견되는 현상학적 잔여물이 아니라 오히려 환원으로써 배제의 대상이 되는 초월자라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후설은 순수의식의 영역으로부터 제외시켜야 할 것을 차마 제외시키지 않고 그곳에 너무 많은 것을 남겨두었다는 것이다(사르트르는 의식이 너무 '둔중해졌다'는 익살스러운 표현을 사용한다). 사르트르가 생각하기에 철저한 현상학적 환원 이후 순수의식의 영역에 남는 것은 대상을 지향하기만 할 뿐 그 자체로는 무[néant]인 절대적 자발성으로서의 비반성적 또는 비정립적 의식뿐이다.

 상술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1부에서 자아가 형식으로서든(e.g. 칸트, 후설), 질료(e.g. 라로슈푸코)로서든 의식의 내부에 현존한다는 기존의 견해들을 반박하고, 2부에서 의식들의 초월적 통일체인 상태와 행위, 성질의 또 한 번의 초월적 통일체로서의 자아에 관한 독창적인 자아론을 펼친다. 결론에서 그는 이로써 자신이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이 제5데카르트적 성찰에서 상호주관성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도 탈피하지 못했던 유아론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며--물론 이 확신은 ⟪존재와 무⟫에 가서 수정된다--타자에 대해 자아가 가지는 특권을 소거함으로써 타자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자아에 지울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아래는 이 책의 요약이다.


서문 자아는 의식 안의 거주자가 아니다. "자아는 [의식의] 바깥에, '세계 안에' 있다. 타인의 자아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세계의 한 존재이다."(18, 강조는 필자)

1부 나와 자기

1장 '나'의 형식적 현존에 관한 이론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B판의 16절에서 모든 표상에 '나는 생각한다'가 동반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서 자아는 인식의 초월적 가능조건이자 권리[droit, 당위]상 요구되는 것일 뿐 사실적인 실재로서 증명된 것은 아니다. 동반'될 수 있어야 할' 뿐, 실제로 동반되는지는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칸트의 주장만으로는 사실의 세계에서 "우리가 우리의 의식 내에서 마주치는 나는 우리 표상들의 종합적인 통일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로 표상들 사이에서 그것들을 통일시키는 것인가?"(23)라는 소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이어서 보겠지만 사르트르는 전자의 입장을 취하면서, 칸트와 달리 '나는 생각한다'의 사실성을 확보했지만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는 혐의를 받는 후설을 비판한다.

Q. 사르트르는 후설의 현상학이 인식 비판이 아니며, 현상학이 기술하는 학인 이상 사실에 관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학이며 이는 그것이 본질학이라는 후설의 주장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단정한다(24). 이와 같은 후설 해석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후설 역시 인식의 가능조건을 초월론적 차원에서 연구하며, ⟪현상학의 이념⟫을 통해 현상학이 인식 비판임을 주장하지 않았던가?

 사르트르에 따르면 후설이 고안한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 발견되는 초월론적 장은 심리생리적 자기를 제외한 "비인격적인 것, 혹은 만일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선[pre]인격적인" 것"이다. 반면 인격[personne] 즉 "나는 인간성의 수준에서 나타날 뿐이며, 그것은 자기의 한 측면, 즉 능동적인 측면일 뿐이다."(27) 편집자의 각주에 따르면 '나(je)'는 "활동적 측면의 인격을", '자기(moi)'는 "동일한 인격의 구체적인 심리생리적 총체성을 의미한다."(각주 14번) 그러므로 인격의 어떤 측면을 조명하든 그것은 초월론적 장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그러나 후설은 사르트르와 유사한 자아론을 전개한 ⟪논리연구⟫에서와 달리 ⟪이념들⟫ 1권에 가서는 "전적으로 인격적인" 초월론적 '나'의 개념을 주창한다. 후설의 "초월론적 나는 각각의 의식들의 배후로서, 이 의식들의 필연적 구조이다. 초월론적 나의 광선[지향빛살, Ichstrahl]은 주의의 장 안에서 스스로 드러나는 각각의 현상 위로 내리쬔다."(30, 강조는 필자)* 하지만 후설이 제창한 것과 같은 '초월론적 나'의 개념은 첫째, 결코 필연적이지 않고 둘째, 심지어는 해롭기까지 하다.

*Q. 사르트르는 '인격'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후설의 초월론적 자아가 인격적이라는 그의 확언을 이해하지 못했다.

 첫째, 일반적으로 '초월론적 나'의 개념은 그것이 의식의 중심으로서 모든 의식들을 통일할 수 있고, 한 명의 의식과 다른 한 명의 의식을 구분하는 개별화의 기능을 떠안을 수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 정당화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현상학에서 의식은 오롯이 지향성에 의해 정의되므로, 의식의 통일성과 개별성을 확보하기 위해 "내면성[intériorité]의 생산자"로서의 초월론적 나를 설정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 ①의식들의 통일성은 비유하자면 둔중한 '초월론적 나'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상의 통일성을 통해서 발견되며, 의식 자신의 시간의식적 횡단지향성에 의해 이룩된다. ②의식의 개별성은 의식이 그 자신에 의해서만 한정될 수 있다는 고립을 본성으로 가지기 때문에 '초월론적 나'의 개념 없이도 그 자체로 확보된다.* 

*Q. 스피노자의 실체론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이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의식은 생각되기 위해 다른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개별성이 확보된단 뜻인가? 의식은 생각되기 위해 다른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개별성은 어떤 관계를 맺는가?

 둘째, '초월론적 나'의 개념은 의식을 부적절하게 분할하여 "의식의 죽음"을 낳는다(35). 사르트르에 따르면 의식의 존재유형은 자기의식이기에 대상과 달리 그에 대한 앎이 투명하다.* 의식은 초월적 대상을 정립할 뿐, 스스로는 정립되지 않은 비정립적 의식이며 따라서 "의식은 그 자체로 그 자신의 대상이 아니다."(36) [바꿔 말하면 대상이 된 의식은 더 이상 의식이 아니다.] 그러나 '초월론적 나'는 비정립적, 또는 비반성적 의식의 이와 같은 절대적인 내부성, 자발성, 그리고 투명성을 파괴한다. "순수 의식은 오직 의식 자신에 대한 의식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대성"(37)인 반면 자아는 "세계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 상대적 존재자"이자 "의식을 '위한' 대상"일 뿐이다(38).

*Q. 의식의 존재유형과 투명성에 대한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근거가 무엇인가? 대상적인 것 즉 타자적인 것이 섞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주관이 모를 리가 없다는 식의 주장인가?

2장 반성적 의식으로서의 '코기토' 데카르트와 후설에게서 사실적이고 인격적으로 실재하는 코기토는 사실상 반성된, 두 번째 층위의 의식이다. 반성된 의식은 비정립적[non-positionnelle]인 반성하는 의식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둘은 종합적으로 통일돼있다.* 이 첫 번째 층위의 반성하는 의식마저 "정립하기 위해서는 세 번째 층위의 새로운 행위가 필요하다."(42-43) 편집자에 따르면 "세 번째 층위는 두 번째 층위에 대한 명제적 행위이며, 이 행위에 의해 반성하는 의식은 자기에 대해 정립적이 된다."(각주 43번) 비정립적 의식은 반성된 의식에서의 반성 주체를 명제로 잡아냄으로써만 비로소 정립될 수 있다는 의미 같다.**

*흄이 자기동일적 자아와 관련하여 ⟪논고(Treatise)⟫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게 해주는 실마리 같다.

**이는 후설이 ⟪제일철학⟫ 2권 40강에서 반성하는 자아가 그렇게 반성하고 있는 자신을 [기존의 소박했던 작용의 주체와 함께] 반성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새로운, 보다 높은 단계의, 별도의 반성을 요한다고 말한 것과 일관된다.

 "나의 독서, 나의 태도, 내가 읽었던 구절들에 대한 정황"과 같은 대상은 비반성적 의식에 의해서만 지각될 수 있다(45). 이로부터 이 비반성적 의식이 반성된다면 더 이상 기존과 같은 대상적 의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따라나온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책에 '대한' 의식이 있었고 소설의 주인공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의식에 거주하고 있지 않았다."(46) 따라서 '나'는 반성된 의식에서만 출현할 수 있으며, [구체적 순간들을 통해 파지적 소멸과 산출을 반복하는 의식과 달리] 영속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후설은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의식의 활동으로서의 사유로부터 사유의 원천으로서의 사유하는 실체를 사유활동과 같은 층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도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다른 초월적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불투명하고 비필증적, 비충전적 명증성만을 가진다. 이처럼 불투명한 자아가 투명한 의식의 원천이라는 것은 부조리다. 자아를 의식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 또한 부조리다. 핑크(1933)의 비판에 따르면 둘 사이의 소통이나 일치를 승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나는 현상학적 환원의 적용을 받아야만 한다. [후설의] 코기토는 너무 많은 것을 확언했다. 의사(pseudo) "코기토"의 확실한 내용은 "나는 이 의자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가 아니라 "이 의자에 대한 의식이 '있다.'"이다."(56)

3장 자기의 '질료적 현존'에 관한 이론 자아를 의식의 형식으로서 현존하는 것으로 간주한 칸트나 후설과 달리 심리학자들, 특히 자기애[amour-propre] 이론가들은 자아가 의식의 배후이자 모든 표상의 극으로서 의식 내에 질료적으로 현존한다고 주장한다. 자기애 이론가들에 따르면 모든 감정과 행위 등은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기에 '자기 회귀[retour à moi]'가 곧 모든 의식의 본질적 구조를 이룬다. 사르트르는 이들의 오류가 "반성 행위들의 본질적 구조를 비반성적 행위들의 본질적 구조와 혼동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다(58). 비반성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들이 결국 자기애로부터 비롯했다는 분석은 반성하는 시선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설령 자기애의 영향력을 무의식의 차원에 설정한다고 해도, 무의식적인 "그것이 반성된 형식의 자발성들을 내포한다고" 믿기 어려우며(62) 애초에 반성된 것이 반성되지 않은 것에 앞설 수도 없다. 반성된 것의 층위에 자아의 삶이 있으며, 반성되지 않은 것의 층위에 비인격적, 초월론적 삶이 있다. 마지막으로 사르트르는 "행위들의 통일성으로서의 자아"인 '나'와 "상태들의 그리고 성질들의 통일성으로서의 자아"인 '자기'를 개념적으로 구분하며 1부를 마무리한다(68).

"[...] 비반성된 것은 반성된 것에 대해 존재론적 우위를 가진다. 왜냐하면 비반성된 것은 존재하기 위해서 반성된 것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으며, 또한 반성은 두 번째 층위에서 의식의 개입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 비반성된 의식은 자율적인 것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비반성된 의식은 [욕망의 원천이 되는 의식의 배후에 의해] 전혀 완성될 필요가 없는 하나의 총체성이다."(63, 강조는 필자)

"자기는 [형식적으로] 비반성된 의식의 상태들 '안'에서도 또 [질료적으로] 그 '배후'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 자기는 오직 반성적 지향의 노에마적 상관물로, 반성 행위와 함께 나타날 뿐이다."(67)

 

2부 자아의 구성 "자아는 반성된 의식들의 직접적인 통일"이 아니라 이미 초월적 통일체들인 상태, 행위, 성질들의 또 한 번의 초월적 통일--자아는 이 초월자들의 극이다--을 요구하는 간접적인 통일이며 궁극적으로는 "비반성된 태도의 대상 극(pôle-objet)"이다(68).

Q. '반성적인 의식'은 '반성된 의식'인가, '반성하는 의식'인가? 후자인 것 같기는 한데...

1장 의식의 초월적 통일로서의 '상태' [마음의] 상태는 반성을 통해 직관될 수 있으며, 그 상태를 직관할 수 있게 해주는 순간적인 의식들과 달리 영속적이다. 상태는 저 순간적 의식들 즉 구체적인 의식운동의 초월적 통일체로서 "그 자체로 '존재함'과 '나타남' 사이의 구분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내가 다른 활동들에 몰두해 있고 어떤 의식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을 때조차, [예컨대] 증오[와 같은 상태]는 계속 '존재하는 것'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73) '존재함'과 '나타남' 사이의 이와 같은 구분은 초월적 대상이 아닌 의식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상태에 대한 명증은 그것이 반성의 수동적이고 타성적인 결과이기 때문에도, 초월자이기 때문에도 비필증적이고 비충전적이다.

 이로부터 사르트르는 심리학자들의 흔한 오류를 반박한다. 첫 번째 오류는 상태와 상태를 드러내주는 출현[현출, 현상]을 분리하고 전자를 후자의 원인이자 무의식적 배후로 설정함으로써, 출현에 대한 해석이 실재적 상태와 들어맞지 않을 경우 감정에 대한 내적 성찰이 기만적이라고 믿는 오류다. 두 번째 오류는 순간적 의식들의 명증을 근거로 상태의 명증 또한 필증적이라고 믿으며 "내가 나의 내적 성찰이 정당하다는 것을 안다"고 믿는 오류다(77). 결론적으로 초월적 대상으로서의 상태와 그것을 출현시키는 순간적이고 자발적인 의식은 전자가 후자를 '유출시켰다'는 비논리적, 마술적 관계로 나타난다. [의식이 존재론적으로 더 근원적인 것인데도 그것보다 존재론적으로 덜 근원적인 상태로부터 유출된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태를 사르트르가 마술적이라고 표현한 것 같다.]

2장 '행위들'의 구성 '피아노 연주하기', '가설 세우기' 등의 행위는 "사물의 세계 안에서 '취해진' 것"으로서 초월적인 것이다(81)." 행위는 행위하는 순간적 의식들에 대한 반성을 통해 특정한 시간구간에 걸쳐진 그 의식들의 초월적 통일체로 드러난다. 사르트르는 데카르트에게서 존재의 의심 불가능한 근거가 되는 회의가 순간적 자발적 의식인지 아니면 대상으로서의 기획된 행위인지 애매하다는 것이 "중대한 오류의 근원"이라고 지적한다(82).*

*Q. 어째서 그러하며, 어떤 오류의 근원인가?

3장 상태들의 임의적 통일로서의 성질들 성질(qualité)은 상태와 행위를 매개한다. [유사한] 상태[또는 행위]가 여러 차례 출현하면 그것은 [상태의 기체와도 같은] 심리적 성향으로 굳어 초월적 대상인 성질로서 통일된다. "성질과 상태(혹은 행위)의 관계는 현실화의 관계이다. 성질은 잠재성[potentialité]으로서, 즉 다양한 요소의 영향 아래에 있으며 현실성[actualité]을 통과할 수 있는 잠재력[virtualité]으로서 주어진다. 정확히 말해 성질의 현실성은 상태(혹은 행위)이다. [...] 상태란 자발성의 노에마적 통일이며, 성질이란 대상적 수동성의 통일이다."(83, 강조는 필자)*

*Q. 어째서 상태는 자발성의 통일로, 성질은 수동성의 통일로 이해되는가? 상태는 자발적 의식들의 일차적 통일이고, 성질은 일차적 통일들의 현실화에 빚지는--즉 자신과 다른 것의 현실화에 의해서만 가능하지, 스스로의 능동적 힘으로는 불가능한--이차적 통일이어서 그러한가? 그런 의미라면 상태 역시 자발적으로 통일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4장 행위들, 상태들, 그리고 성질들의 극으로서 자아의 구성 요컨대 행위, 상태, 성질은 "심리적인 것(le psychique)"으로서 의식과 구별되며, "자아는 심리적인 것의 지속적인 종합을 실현하는 하나의 초월적 대상으로 반성에 나타난다."(84) 혹자는 여전히, 후설과 같이 자아를 심리적인 것들의 담지자이자 주체-극(pôle-sujet)으로 설정하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자아와 심리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째서 오해인지 논증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후설의 대상-극 개념을 공격하는 우회로를 택한다. 후설은 ⟪이념들⟫ 1권 131절에서 노에마를 분석하면서 노에마적 대상-극으로서의 공허한 담지자 X와 X의 술어가 될 수 있는 규정들을 서로 구분한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생각하기에 이와 같은 구분은 불필요하[고 심지어는 오류이]다. X와 그 규정들은 하나의 구체적 총체 안에 구분 없이 통일되어있으며, 술어는 단지 "총체에서 추상적으로 분리된 성질이 될 것"(89)일 뿐 아니라 사실 구체적 총체성과 동떨어져서는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아와 자아의 술어적 규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심리적인 것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자아가 X와 같은 주체-극이기 위해서는 상태들(또는 행위들)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어야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자아는 그것이 담지하는 상태들과 행위들의 구체적인 총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90, 강조는 필자) "[...]자아는 언제나 상태들의 지평에서 나타난다. 각각의 상태들과 각각의 행위들은 추상 없이는 자아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주어진다."(91)

 그리하여 사르트르는 "실제로 자아는 우리의 상태들과 행위들의 자발적이며 초월적인 통일"이라고 말한다(93). 그리고 자아와 심리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시적 생산' 또는 '창조'의 관계라고 규정한다(이를 부분과 집합체의 관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부분과 집합체의 경우 부분이 곧 집합체를 존재하게 만드는데, 자아는 성질 등에 의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는 모든 성질들을 모두 제거했을 때에도 자아라는 실체가 남는 것은 아니다). 바꿔 말해 심리적인 것들이 모인 총체로서의 자아는 반성 속에서 "시간을 반대 방향으로 가로지르고" 자신이 통일하는 심리적인 것들의 기원이자 원천으로 구성되어 주어진다(95).

 그렇다면 창조자로서의 자아는 의식만큼이나 자발적인가? 사르트르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로 대상으로서의 자아는 '수동적'이다. [...] 자아의 [의식에 비해 강등된 의사]자발성은 자신으로부터 도주한다. 자아의 증오[상태]는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자아에 대해 어떤 독립성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는 항상 그것이 생산하는 것에 추월당한다. 비록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자아가 생산하는 것'일'지라도[생산하는 것처럼 주어질지라도] 말이다."(98-99, 강조는 필자) 애초에 자아의 의사자발성 또는 '수동적 자발성'은 의식의 진정한 자발성 덕분에만 가능한 것이다. "의식[이] 대상으로서의 자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창조하는 힘을 부여하기 위해 의식의 고유한 자발성을 대상으로서 자아에게 투사"하기 때문이다. 실재적으로는 의식이 가장 앞서고, "그것들을 통해 상태가 구성되며, 상태들을 통해 자아가 구성"되지만 "의식에 의해 이러한 순서가 [비합리적, 마술적으로] 뒤집"혀 "의식들은 상태들의 유출로, 그리고 상태들은 자아에 의한 생산물로 주어지게 된다."(100) "그러므로 자아가 생산하는 모든 것은 자아에 영향을 미친다"(103)는 의미에서의 자아의 수동성은 매우 자연스러울 뿐더러 창조자로서 그것의 지위와 모순을 빚지 않는다.

Q. 99쪽의 경탄에 관련된 예시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Q. 의식은 어째서 자아에게 자신의 창조력을 투사하는가? 이와 같은 투사의 주체로서 "자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세계 안에 틀어박힌 의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의식은 왜 자기로부터 벗어나려 하는가? 이는 현상학이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인가?

 그런데 "자아는 능동성과 수동성의 비합리적 종합인 것과 마찬가지로, 내부성[intériorité]과 초월성의 종합이다."(103) 자아와 의식은 서로 연속하면서도 불연속적이기 때문이다. "의식과의 관계에서 자아는 [강등된 내부적인 것으로서] 내밀한[intime] 것으로 주어진다. 자아는 '의식에 속한(de la)' 것처럼 주어진다. 자아가 의식에 대해 불투명하다는 유일하고 본질적인 차이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투명성은 '구별되지 않음[indistinction]'으로 파악된다."(106)* 이 내밀함이 오히려 자아에 대한 앎을 방해한다. 자아는 상태 등에 대한 인식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주어질 수 없으며, 상태 등에 대한 인식을 경유할 경우에는 오직 인식의 지평에서만 간접적으로 출현한다. "사실상 자아를 그 자체로, 그리고 나의 의식의 직접적 대상으로 파악하고자 할 때 나는 비반성된 층위로 되돌아가며, 자아는 [내밀함을 잃고] 반성적 행위와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다. [...] 자아는 '본성상' 도주하는 것이다."(111) 신체는 이와 같은 자아의 상징이다.

*Q. pp.104-105의 내부성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 '스스로를 정말로 아는 것'은 불가피하게 자신에 대해 타인들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며, 이는 [자신을 대상화하는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거짓된 관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알고자 노력해 온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내성적인 시도들이 처음부터 본래 '단번에' 그리고 일거에 주어지는 분리된 조각들, 격리된 파편들을 쥐고 [자아]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109)

cf. 사르트르는 자아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향까지 가지는 현행적인 무한성으로서 이념적인 통일체인 "동시에 직관에 완전히 주어지는 구체적인 총체성"인 [노에시스가 아니라] 노에마적 통일체라고 지적한다(111).

5장 나와 '코기토' 내부의 의식 데카르트와 후설의 코기토는 순수하지 않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자발적 의식이지만, 여전히 상태들 및 행위들에 관한 의식들에 종합적으로 연결된 채 남아있다."(115, 강조는 필자)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학문의 진보를 위한 방법적 회의의 기획, 후설의 경우에는 그 비존재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찾겠다는 엄밀학의 기획이 코기토를 불순하게 만들었다. 이런 의미에서 현상학적 환원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다. 

 

3부 결론 사르트르는 이상의 논의로부터 다음의 세 가지 결론을 도출한다.

① 이제 "모든 자아론적 구조로부터 정화된 초월론적 장은 최초의 투명성을 되찾는다."(116) 심리적인 것들이 초월론적 장으로부터 제거된 만큼, 심리적인 것에 대한 앎은 그것의 주인에게나 타자에게나 똑같이 불확실하며 앎의 대상 또한 동일하다. 철수와 영희가 같은 탁자를 볼 수 있는 것처럼 철수와 영희가 같은 '철수의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피에르의 자기는 피에르의 직관을 통해 접근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직관을 통해서도 접근 가능하며, 두 경우에 자기는 비충전적 명증성의 대상이다. 만일 그렇다면 피에르의 의식 그 자체를 제외하고는 피에르에 관하여 "침투 불가능한 것"이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피에르의 의식은 [대상화될 수 없는 무이므로] '근본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것이다."(120) 이렇게 하여 관찰과 내성이 동등한 권리를 지니는, 심리학이 접근가능한 영역과 "오로지 현상학만이 접근 가능한, 순수하게 초월론적인 영역"이 나뉘게 된다. 후자가 곧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의식의 영역이다. 현상학이 발견하는 초월론적이고 비인격적인 의식의 "순수한 자발성은 결코 대상들이 아니며 그것 자체의 실존을 스스로 결정한다. [...] 자아는 의식의 소유주가 아니다. 그것은 의식의 대상이다. 물론 우리는 자발적으로 우리의 상태들과 행위들을 자아의 생산물인 것으로 구성한다."(121, 강조는 필자)

Q. "[...] 더 이상 '대상'인 동시에 의식의 내밀함에 속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서술이 이해하기 어렵다(117). 자아가 바로 그와 같은 것이 아닌가?

 "이렇게 우리 의식의 삶의 매순간은 우리에게 무로부터의 창조로 드러난다."(124, 강조는 필자)

 사르트르에 따르면 "자아의 이론적이라기보다 본질적인 기능은 실천적인 것이다. [...] 그러나 자아 그 자신의 본질적인 역할은 의식으로부터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그 고유한 자발성을 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127) 사르트르는 신경증이란 의식의 자발성이 가능케 하는 가공할 만한 자유가 원인이 되어 생기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자아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의식은 "자발성의 숙명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깨닫"고 불안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이 불안은 절대적이고 구제할 수 없으며, 자기에 대한 두려움이자 순수 의식을 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만일 자아가 "의식의 근본적인 구조라면 이러한 불안은 불가능하다."(129) [왜냐하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발성의 수준이 현저히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순수한 자발성으로서의 의식을 발견하게 해주는 "에포케는 우리에게 부과된 피할 수 없는 불안"이다(131, 강조는 필자).

② 사르트르는 자신의 자아론이 "유아론에 대해 가능한 단 하나의 반박"이라 자부한다(131). 왜냐하면 사르트르적 자아는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에포케가 작용하는 가운데 무너져" 내리는 특권 없는 비-절대자이며 세계-내-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만이 절대자로서 존재한다.'라고 정식화하는 대신에, '절대적 의식만이 절대자로서 존재한다.'라는 자명한 진실을 말해야 한다."(133)

③ 유아론적 관념론의 혐의를 벗게 된 이상, 현상학이 사회적인 문제들로부터 도피한다는 좌파적 비판은 더 이상 효과적일 수 없다. '자기'는 이제 세계의 타자들과 나란히 선다. "세계는 자기를 창조하지 않았고, 자기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다. 양자는 비인격적인 절대적 의식에 대한 두 대상이다. 그리고 바로 이 의식에 의해서 양자는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연관된다. [자아]로부터 의식을 순수화할 때, 이 절대적인 의식은 더 이상 '주체'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것은 더 이상 표상들의 집단이 아니다. 절대적 의식은 단지 근본적 조건이며 실존의 절대적 원천일 뿐이다."(135, 강조는 필자)

"절대적으로 실증적인 도덕과 정치학을 철학적으로 정초하기 위해 이 이상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