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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에드문트 후설, <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 3부 A 요약

Edmund Husserl, trans. by David Carr, The Crisis of European Sciences and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70(원문은 Walter Biemel이 편집한 Hua VI).

Parthenon Sculptures

3부 초월론적 문제들의 해명과 그와 연관된 심리학의 기능

A. 미리 주어진 생활세계에서 출발해 되돌아가 묻는 가운데서의[in der Rückfrage von der vorgegebenen Lebenswelt aus] 현상학적 초월론적 철학으로의 길

§28 칸트의 말해지지 않은[unausgesprochen] "전제": 자명하게 타당한[geltend] 생활주변세계[Lebensumwelt] 칸트는 자신이 기존에 지배적이었던 합리주의를 그것의 기초공사가 부실함을 증명함으로써 전복했다고 확신한다. 기존의 합리주의는 그것을 위해 반드시 요구됐을 전학문적, 학문적 세계의식의 주관적 구조에 대한 물음 그리고 어떻게 정밀한 자연과학이 가능하며, 모두에게 타당한 도구로서 수학과 다른 아프리오리한 학이 이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중단했다[das Unterlassen von Fragen]. 그러나 칸트는 자신의 철학이 [더] 위대한 발견들의 발원지라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다. 예컨대 그는 지성이 규범적 법칙성을 담지할 뿐 아니라 직관적 주변세계라는 존재형태를 비밀스럽게[verborgen] 구성한다는 점을 예감[vorentdecken]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의 영역에 머무름으로써--⟪순수이성비판⟫ A판에서의 '초월론적 연역'을 참고하자--근원으로부터의 정초와 관련된 진정한 문제에 접근하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는 칸트의 문제의식에 역시 의문시되지 않은 전제가 도사리고 있었음에서 기인한다. 칸트에 의해 자연과 세계의 존재의미 및 그것의 인식에 대한 이해는 혁명적으로 변화했으나, 일상적 생활세계는 존재하는 것으로서 미리 전제되었다. 하지만 주변세계의 존재의미는 자아주체들의 체험, 사고, 가치평가 등을 통해서만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현상적 다양체 가운데서 객체를 잡아내는 "지각은 직관의 근원양상[Urmodus]이며, [그] 직관을 근원원본성[Uroriginalität] 속에서, 즉 자기현전의 양식에서 현시한다."(Hua VI, 107, 강조는 원저자) 그리고 이러한 "그 자체가 거기 있음[Selbst da]"의 변양들을 의식하는 직관양식도 있는데, 이를 후설은 '현전화'라 부른다.

 후설은 감각적 경험에 대한 분석을 심화하면서,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일반 신체[Körper]와 달리 주관적으로 경험되며 결코 지각의 장을 떠나지 않는 '살아있는 신체[Leib]'의 개념을 도입한다. 자아는 이 살아있는 신체에 담지됨으로써 비로소 "촉발과 행동들의 자아로서" 존재할 수 있게 된다(107, 강조는 필자). 에고는 '나는 움직인다', '나는 수행한다'에 해당하는 살아있는 신체의 운동감각인 '키네스테제'를 활용하는데, 이것이 물체의 현상과 체계적이고 긴밀하게 협동함으로써 비로소 지각이 성립한다. 여기서 후설은 두 가지 사항들을 추가적으로 지적한다. 첫째,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신체와 살아있는 신체는 결국 하나의 동일한 신체다. 후자가 어떻게 전자로 객체화되는지 또한 중요한 현상학적 문제다. 둘째, 나의 지각장에서는 나의 자아가 두드러지는 지위를 점할지언정, 결국 "세계는 우리의 세계"로서 다른 자아들과 함께 거주하는 곳이며 모두에게 존재의미를 가지는 채 미리 주어지는 것이다(108).

 이처럼 지각 및 지각의 변양을 통해 미리 주어지는 생활세계는 "학문적인, 그리고 가장 높은 수준에서는 철학적 사고의 항상적 전제들"이다(110, 강조는 원저자). 달리 말해 모든 학문적 사고는 타당하게 존재하는 것으로서의 세계를 자신의 지평으로 가지고 있다. 다만 "그 자체로 고정되고 규정된 세계, 이상적으로[idealiter] 학문적인("그-자체로-진리인-것들") 세계, 그리고 이 세계[생활세계]를 술어적으로 해석하는 세계"에 대한 이념을 가지고 불완전한 생활세계에서의 지식을 특정한 방법론을 경유해 완벽한 지식으로 승화시키고자 할 따름이다(111).

§29 생활세계는 "익명적으로" 남아있었던 주관적 현상들의 왕국[Reich]으로 열려밝혀질 수 있다[erschließbar]. 생활세계에 최초로 이론적 관심을 기울이고, 당연시되었던 것들의 함축된 의미와 타당성을 파고들다 보면 "철두철미 순수하게 주관적인 현상들"의 무한한, 자기폐쇄된, 모든 체험과 서로 분리불가능하게 관계하는 권역이 발견된다. 이 권역은 "정신적 과정들로서, 그 자체로, 본질적 필연성을 가지고 의미의 형식들을 구성하는 기능을 실행"하는 과정들로 이루어진다(112). 이때 '의미의 형식'이란, 의미가 형성되기 위해서 준수되어야 하는 구성하는 정신의 형식을 가리킨다. 후설에 따르면 이 주관성의 권역을 탐구하지 않은 채, 익명적으로[anonym] 남겨놓는 한 철학은 다른 학문을 궁극적으로 정초할 수 있는 보편학이 될 수 없다. "철학의 역사 속에서 시도된 모든 체계들을 관통하는 목적론적 통일적 의미"를 통해서만 철학은 "모든 지식의 총체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112-3). 다른 객관적 학문의 지식들은 결코 자족적이지 않으며, 방금 언급한 주관성이라는 근거에 의한 정초를 필요로 한다. 

 이 주관성은 구체적인 정신적 성취를 가능케 할 뿐 아니라 생활세계를 의미구조물[Sinngebilde]로 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주관성이 스스로를 세계의 요소로서의 인간적 주관성으로 객체화[objektivieren]한다는 것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성취에 본질적으로 속한다."(113) 여기서 후설은 초월론적 주관성이 인간으로 구성됨은 필연적이지만, 이 구성은 세계의 구성을 미리 전제한다고 돌려 말하는 셈인데, 이는 당연한 것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30 칸트의 신화적 구축물들의 이유로서 직관적 제시(intuitive exhibiting[anschaulich-aufweisend]) 방법의 결핍 후설에 따르면 칸트는 사실로써도 유비로써도 알려질 수 없는, 직관될 수 없는 주관성의 양상을 논함으로써 신화적 사고에 빠진다.* 이 양상을 직관화하려고 무리하면 초월론적 주관성이 아닌 "인간의 심리학적 권역, [즉] 영혼"에 대한 논의로 샘으로써 필증성을 잃는다(114). 이에 따라 후설은 칸트가 "경험주의를 공격함에도 불구하고 영혼과 심리학의 과제의 범위에 대한 그의 구상에서 여전히 바로 그 경험주의에 의존적으로 남는다"고 지적한다. 칸트에게 영혼은 여전히 시공간적 자연의 일부로서 심리물리적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그 결과 칸트는 유용하고 심지어는 철학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직관을 제공할 수 있는 내적 지각을 탐구의 방법 가운데서 배제하고--왜냐하면 그에게 내적 지각은 단지 인간적 심리의 경험상에서만 성립하는 것으로서 선험적인 성과는 산출할 수 없는데, 경험적으로만 성립하는 것의 한계는 흄의 회의주의가 일찍이 경고한 바 있으므로--"[자신의] 회귀적 과정의 결과들을 직관적 개념들로 뒤바꾸는 것을 금지"하며, 예시조차 의도적으로 최소화하는 채 추론과 연역에 기댄다(115). 이에 반해 진정한 철학이 요구하는 것은 모든 학문의 인식의 말해지지 않은 근거에 대한 체계적 탐문, 이 근거에 축적돼있는 특유한 절대적이고 정신적인 존재[초월론적 자아]의 지향성에 대한 분석이다. 이 존재는 결코, 정신의 본질에 타자적인, 자연주의적으로 구상된 영혼으로 대체되어선 안 된다.

*Q. 후설은 어떤 의미에서 칸트의 방법론이 회귀적[regressiv]하다고 말하는가?

A. 객관성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주관성으로 되돌아가기는 한다는 것 아닐까?

§31 칸트와 당대 심리학의 불충분성(inadequacy[Unzulänglichkeit]). 초월론적 자아와 영혼 사이 구분의 불투명성(opaqueness[Undurchsichtigkeit]). 이해를 돕기 위해 후설은 칸트의 철학의 철학사적, 혹은 심리학적 배경을 더 자세히 묘사한다. 로크는 갈릴레이에 의해 평가절하되었던 "현상들의 순전히 주관적인 면모들"을 뉴턴의 자연과학적 모델을 따라 탐구하는 심리학을 확립한다(117). 이로써 그는 모든 합리적 지식의 본질 및 타당성, 이에 따라 모든 자연과학적 성과가 결국 인간존재의 능력의 성과이자 심리적 성취임을 지적했다. 문제는 로크의 탐구가 단지 피상적으로만--즉 근원을 파고들지 않고--그리고 방법론 없이, 심지어 추후 흄의 허구주의로 이어질 자연주의 하에서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칸트는 로크의 자연주의적 심리학에 전적으로 순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수학 및 물리학 등의 아프리오리한 학문의 무조건적 타당성을 설명해야 하는 위치에 선 한에서, 과학의 놀라운 성과가 로크가 주장한 대로 인간의 이론적 관심에 따른 정신적 성취였음을 간과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인간의 정신적인 성취가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객관적 학문을 낳느냐의 문제는 심리학적인 증명을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고 잘못 믿]었으므로 칸트는 다른 심리학자들처럼 생활세계를 의문시하지 않고 전제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문제는 생활세계에 대한 전제와 그것을 구축하는, 세계에 대한 경험 일반을 형성하는 초월론적 주관성에 대한 주장이 상호충돌한다는 사실이다. 칸트는 "(스스로 세계에 속하며 그러므로 그것과 함께 전제되는) 인간 영혼의 특정한 성질이 이 전체 세계를 빚어내는 형성[Formung]을 성취해야 하고 이미 성취했어야 한다는 어려움에 부딪힌다."(118) 이를 해결하기 위해 초월론적 주관성과 영혼을 [사전작업 없이] 섣불리 분리하면 불가해한 신화만이 산출된다[Sowie wir diese Subjektivität von der Seele unterschieden, geraten wir in ein unverständlich Mythisches].

Q. 후설이 신화적이라고 묘사하는 것이 칸트의 이론 중 정확히 어떤 부분인지 잘 모르겠다. 나아가 칸트가 초월론적 주관성을 간과하는 동시에, 그것과 영혼을 분리했다는 서술은 모순되지 않는가?

§32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 속 숨겨진 진리의 가능성: "새로운 차원"의 문제. "평면에서의 삶[Flächenleben]"과 "깊이 있는 삶[Tiefenleben]" 사이의 반목[Antagonismus]. 객관적으로 타당한 지식에 의미와 타당성을, 나아가 궁극적으로 정초됐다는 존엄성을 비로소 확보해줄 수 있는[somit erst die Dignität eines Wissens aus letzten Grunde verschaffen könnte] 초월론적 기능은 비록 "자연적으로 정상적인 인간의 세계-삶을 이루는 모든 관심들에 관여된 몰두[Beschäftigungen]"로 인해 [그것의 발견자인 칸트에게조차] 은폐되었지만, 적절한 방법론만 구사하면 충분히 탐구될 수 있다. 후설은 초월론적 기능이 알려지지 않은 삶을 '평면에서의 명백한[patent] 삶'으로, 풍부하게 알려진 삶을 '무한한 깊이를 가지는 잠재적[latent] 삶'으로 비유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순수하게 "평면"에서 발전된 실증 학문들이 어떻게 그토록 오랫동안 무척이나 풍성한 성공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 어째서 초월론적 기능에 대한 직관적 앎에 대한 요구가 이토록 늦게 발생했느냐는 물음이 대두된다(119). 후설은 이를 깊이의 권역으로 들어가는 데 연루되는 본질적으로 어마무시한 어려움들의 탓으로 기인한다. 애초에 그 권역에 적합한 경험의 방식을 이해하는 것조차 너무나 어렵다. 여기에 "특히 근대 실증 학문의 기원으로부터 오는 [...] 역사적 선입견들" 또한 어려움을 더한다(120).

§33 객관적 학문의 일반적 문제 내 부분적 문제[Teilproblem]로서 "생활세계"의 문제. 후설은 여태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서 모든 학문 그리고 실천적 행위는 생활세계를 근거로 가진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이제 생활세계가 그 자신만으로도 정당하게 탐구의 주제가 되었지만, 대체 이 탐구가 구체적으로 돌파해야 할 과제들은 무엇이며 그로부터 어떤 철학적 의의가 도출될 수 있을지를 바로 알기는 어렵다. 나아가 생활세계라는 주제가 "객관적 학문 일반이라는 전체 주제 내의 보조적이고[dienend] 부분적인[partiell] 것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세계는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 자체를 근거 지우는 데 반해, 객관적 학문은 객관적 인식의 가능성을 즉 자신의 가능성을 결코 이해해내지 못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학문의] 작동으로부터 물러나고 그것보다 상위의 관점을 취하는 채, 그것의 이론과 결과들 일반을 술어적 사고와 진술의 체계적 맥락에서 조사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 또한 서로 함께 노동하는 학자들에 의해 실천되는 작용들의 삶--그들의 목표 설정, 주어진 목표에서의 종결[Terminieren im Ziele], 그리고 종결해주는 명증[--]을 조사해야 한다."(122) 이에 더해 학자들이 특히 그들의 진술 방식과 관련해 생활세계에 의지하는 방식들을 탐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탐구는 객관적 학문의 일부로, 그 부분적인 주제로서 편입될 수 있다. [과학적 사실의 생산 과정에 대한 브루노 라투르의 인류학적인 탐구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브루노 라투르·스티브 울거 지음, 이상원 옮김, 『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구성』, 한울아카데미(2019) 참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속에 사는 인간들을 위한 생활세계에 고유한 존재의미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생활세계의 존재방식의 문제는 객관적 학문의 의견과 인식들의 작동을 중지한 채로 해소되어야 하므로--그래야만 어떤 객관적, 학문적 과제가 이 세계의 존재 방식에 걸맞게 발발하는지 알 수 있다--객관적 학문의 문제와는 궤를 달리 한다. 전자의 문제는 후자의 문제 전체를 완전히 집어삼킨다(engulf[verschlingen]). 이제 생활세계의 본질과 그것을 학적으로 취급하기 위해 요구되는 적절한[angemessen] 방법론을 밝히는 것이 관건이다.

§34 생활세계에 대한 학문의 문제의 설명[Exposition].

a. 객관적 학문과 학문 일반 사이의 차이. 그런데 여기서 객관적 지식이 아닌, 즉 객관적 학문 일반에 속하지 않는 학문 또는 학적 탐구라는 것이 과연 가능하냐는 의문이 인다. '학문적'이라 함은 본성적으로 '객관적'인 것이 아닌가? 이 의문에 대해 후설은 '객관적 학문'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문제가 있으며, 그 특수한 개념은 학문 일반의 개념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응수한다. 후자의 개념에는 생활세계에 대한 학문이 포함되는데, 이 학문은 다른 모든 학문들을 정초하므로 보다 우월한 가치를 가진다. 애초에 객관적 진리의 관념은 경험에서 검증되는 전학문적이고 학문외적인 삶에서의 진리의 관념[Idee]과 대비됨으로써만 비로소 규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생활세계에 대한 학적 탐구를 수행할 때는 그 어떤 심리물리적, 심리학적 해석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자연과학적] 감각자료를 곧장 신뢰하는 것도 위험하다.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전학문적 세계-삶의 "순전히 주관적-상대적" 직관"이다(125)*. 이러한 직관은 전통 철학에서 에피스테메에 밀리는 독사라는 경멸적 지위를 부여받았으나, 생활세계에서는 그런 '독사'만으로도 굉장히 잘 검증된 인식과 진리가 안전하게 또 필연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상술한 경멸은 그런 경멸을 하는 학자라고 하더라도 생활세계로부터 결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꾸지 못한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제시한 '현상'의 개념과 무척 유사하다.

b. 객관적 학문을 위한 주관적-상대적 체험들의 사용, 그리고 객관적 학문들에 대한 학문(밑줄은 필자, 원저자는 강조) 학자들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면 생활세계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후설은 아인슈타인이 자신과 동일한 경험의 세계를 가진 미켈슨의 연구를, 그를 어떤 이론적 구축물이 아니라 인간존재로서 취급하면서 참고했던 점을 예로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자신의 '객관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생활세계의 '주관적-상대적' 요소를 마치 극복해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여기서 간과되는 점은 객관적 탐구 가운데서도 주관적-상대적인 것은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계속해서 작동하며, "즉 명증의 원천, 검증의 원천으로서 모든 객관적 검증을 위한 이론적-논리적 존재타당성을 궁극적으로 정초"해준다는 것이다. "가시적인 측정의 등급들, 눈금들 등은 환상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들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생활세계에서 타당한 무언가로서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객관적 탐구의] 전제다."(126, 강조는 필자)*

*Q. 생활세계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객관적 학적 탐구를 정초해준다는 것인지, 여기서 제시된 예시들--미켈슨의 인간됨, 눈금의 자명한 존재타당성--로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후설이 생활세계에 두고 있는 비중에 비해 그것이 수행하는 기능이 너무나 사소해 보인다. 내가 예시들을 잘 이해한 것이 맞는가?

c. 주관적-상대적인 것은 심리학의 대상인가? 자연주의자들은 보통 주관성의 권역을 심리학이 탐구할 몫으로 돌린다. 하지만 다시금, 생활세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물을 때는 그 어떤 객관적 학문의 의미도 침투적으로 들여오면 안 된다. 반대로, 애초에 이 생활세계로부터 어떻게 본질적으로 객관적 학문인 심리학이 가능해지는지가 문제시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객관적-학문적 분과 자체의 근본적 의미를 규정하는 대조로서 객관성과 생활세계의 주관성 사이의 대조를 선명하게 이해해야 한다."(127)

d. 원칙적으로 직관 가능한 것의 우주로서 생활세계. 원칙적으로 직관 불가능한 "논리적" 기초물[Substruktion]로서 "객관적-참된[objektiv-wahre]" 세계. 객관성의 이념은 근대 학문과 '학문'이란 단어의 의미를 압도적으로 지배해왔다. 자연을 학적으로 "참된", 객관적 세계로 생각하는 갈릴레이적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은 한 이와 같은 지배는 자연주의의 지배 또한 함의한다. 이와 같은 소위 객관적, 참된 세계는 "이론적-논리적 기초물, 원칙적으로 지각 불가능한 무엇인가의 기초물, 원칙적으로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로서 경험 불가능한 것이며, 반면 생활세계 속의 주관적인 것은 그것이 모든 면에서 모두에게(in allem und jedem) 현실적으로 경험 가능하다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해 두드러진다(distinguished[ausgezeichnet]). 생활세계는 근원적 명증들의 왕국이다[Die Lebenswelt ist ein Reich ursprünglicher Evidenzen]."(127) 그 속에서는 사물이 그 자체로서[als "es selbst"], 현실적, 상호주관적으로 경험될 수 있는 것으로서 현전하거나 현전화되며 매개적 인식, 즉 귀납조차 직관 가능한 무엇의 귀납으로서 단순한 사변의 기초물이 아니다. "상상 가능한 모든 검증은 명증의 이러한 양상들을 소급지시"하며, 사변의 기초물이 현실적 진리치를 가지기 위해서는 생활세계의 근원적 명증[Urevidenz]으로 되돌아가 연관되어야만 한다(128). 객관적인 것은 결코 그 자신으로서 경험될 수 없다[Das Objektive ist eben als es selbst nie erfahrbar]. 마치 이념적 대상의 무한성, 예컨대 무한한 수 전체가 경험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객관적-논리적 성취들의 명증이 전학문적 존재의미를 가지는 생활세계의 숨겨진 원천들에 의해 정초되기 때문에 생활세계에서의 주관적 명증의 타당성은 객관적 명증의 타당성보다 더 견고하고, 가치있으며 존엄하다.

e. 주관적 구조물(constructs[Gebilde])로서 객관적 학문들--그 자체로 생활세계의 구체[Konkretion]에 속하는 특수한[besondere], 이론적이고-논리적인 프락시스의 그것으로서. 객관적 학문은 생활세계에, 그것에 속하는 근원적인 명증들에 뿌리내리고 있음으로 인해 비로소 세계에 대한 의미의 지시를[Sinnbeziehung auf die Welt] 가질 수 있으며, 전학문적 인격의 성취로서 그 자체로 생활세계에 속한다. 그 어떤 이념성이든 그것은 "인간의 형성물"로서 "인간의 현실성과 잠재성에 본질적으로 관련되며 그리고 따라서 생활세계의 구체적 통일성에 소속"된다(130).*

*Q. 이러한 주장이 심리학주의에 대한 후설의 이전의 이의 제기들과 어떻게 양립 가능한가?

cf. "Aber wie jede Idealität ändert nichts daran, daß sie menschliche Gebilde sind, auf menschliche Aktualitäten und Potenzialitäten wesensmäßig bezogen, und doch zu dieser Konkreten Einheit der Lebenswelt gehörig, deren Konkretion also weiter reicht als die der "Dinge"."(Hua VI, 133)

 가장 근본적으로, 과학자도 일단은 생활을 가지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객관적 세계 자체는 이제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가? 이제 객관적 학문의 개념들은 그것의 전학문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주관적 생활세계와 소위 객관적이고 참된 세계 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한 수수께끼는 철학하는 행위 자체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의문에 답하고자 하는 동기는 진지한 철학자라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f. 철학의 부분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도리어 보편문제[Universalproblem]로서 생활세계의 문제. 여태까지 탐구된 바에 따르면, 진리에는 두 종류가 있다. 바로 일상에서의 상대적, 상황적, 실천적 진리[die alltäglich-praktischen Situationswahrheiten, freilich relativ]와 학적 진리[die wissenschaftlichen Wahrheiten]이다. 그러나 학적 진리는 인간존재의 이론적 실천의 성과로서 상황적 진리에 의해 정초되며, 상황적 진리를 사용하고 싶어하고 사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생활세계와 관련한 모든 것은 단순히 이론에 대한 광적인 집착 때문이 아니라 자체적인 '객관성'과 학적으로 탐구될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탐구되어야 한다. 다만 어떤 방법론을 활용해 그것에 접근할 것인가가 관건일 뿐이다. 최초의 탐구는 논리적, 학문적, 이론적 사고와 직관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순수한 사고가 직관 없이도 자명성을 가진다는 생각은 기만적인 환상이다. 직관의 진정한 의미와 중요성을 간파하는 순간부터 객관적 학문은 결코 자족적이지 않으며--심지어는 논리학마저 그러하다--단순히 철학의 부분적 문제임이 밝혀진다. [논리학에 대해서마저 선행적인] 생활세계야말로 철학의 보편적인 문제거리가 되는 것이다. 

Q. 생활세계는 어떤 양상으로 논리학을 정초할 수 있는가?

§35 초월론적 환원의 분석학[Analytik]. 첫째: 객관적 학문의 환원[die Epoché von der objektiven Wissenschaft]. 생활세계라는 새로운 학문의 장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환원의 형태를 띠는 여러 방법론적 단계들을 거쳐야 한다.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모든 객관적 학문들에 대한[hinsichtlich] 환원"이다. 단순히 우리네 삶에서 마치 객관적 학문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상상하며 그것들을 추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학문의 인식들에 대한 모든 참여[Mitvollzug]의 에포케, 그것의 참됨 또는 거짓됨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그 어떤 비판적 입장-취함[Stellungnahme], 심지어는 그들을 인도하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라는 이념에 대한 그 어떤 입장-취함에 대한 에포케"가 수행되어야 한다(135). 객관적 이론적 관심들을, 그러한 지식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 학문과 그에 종사하는 학자들이 생활세계로부터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생활세계에 존재하지만, 현상학자가 그들의 관심을 공유하지 않고 현상학자에게만 고유한, 여기서는 생활세계 및 생활세계적 시간성의 탐구를 향하는 직업적 태도(vocational attitude[berufsartige Einstellung])를 취할 뿐이다. 사실 이러한 환원은 일상적으로도 빈번히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특수한 직업적 행위에 대한 습성적 관심을 발동할 때, 생활 속 다른 관심들에 대해서는 판단이 중지되며 선택된 행위에 적합한 시간성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후설은 현상학자의 태도가 "직업적 성격"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상술한 환원은 "성취의 습성적 에포케"이며* 계속해서 반복하여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세계 및 생활세계적 시간성의 탐구에 대한 관심이 다른 직업적 관심과 평등하다고 말해선 안 된다. 생활세계 및 생활세계적 시간성의 탐구는 단순히 지적인 유희가 아니며, 본질적으로 일종의 인격적변신[personale Wandlung]으로서 "종교적 개종[religiöse Umkehrung]의 시작과 비교 가능한" 것이며 "인류 자체에 과제로서 부여된 가장 위대한 실존적 변신[으로서]의 중요성"을 담지한다(137, 강조는 필자). 적절한 에포케를 통해 현상학적 태도를 취하여 생활세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인류 [또는 적어도 그들의 공무원인 철학자]가 완수해야 할 실존적 과제이자 목표라는 것이다. 이것이 후설이 유럽 인류의 실존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의미의 원천으로서 제공하는 것이다.

*Q. 관심이나 성취가 '습성적'이라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6 객관적 학문들의 환원 이후 어떻게 생활세계가 학문의 주제가 될 수 있는가? 객관적-논리적 아프리오리와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 사이의 원칙적 구분[prinzipielle Scheidung]. 상술한 에포케에서 현상학자는 생활세계 자체와 그것에 고유한 존재의 방식을 주제화하기 위해 여타의 모든 학문적, [그리고 실천적] 관심을 삼갔다.* 각 자아에게 그의 생활세계는 주관적, 상대적 인식만을 가지게 해주는 사물들의 세계 지평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러 자아가 모여 객관적,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진리를 목표로 삼아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며, 사물의 예시마다 달라지지 않는 사물의 정체성을 발견해 생활세계를 능가하고 즉자를 확보하고자 하는 작업을 삼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을 삼간다면, 대체 생활세계에 대한 학적 주장을 확립하게 해주는 탐구의 장을 여는 다른 방식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Q. 실천적 관심 또한 삼가지는 것이 맞는가?

A. 생활세계에만 배타적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로 장을 시작하니 그렇지 않을까?

 이에 대해 후설은 "생활세계가 그것의 모든 상대적 특성들 속에서도 일반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것[dass doch die Lebenswelt in allen ihren Relativitäten ihrer allgemeine Struktur hat]"을 지적한다.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에 묶여있는 이 일반적 구조 자체는 상대적이지 않다. 우리는 그것에 그것의 일반성 속에서 주의를 기울일 수 있고, 그에 상응하는 신중함[Vorsicht]을 기하면서, 모두에게 똑같이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최종적으로[ein für allemal] 그것을 고정시킬 수 있다[feststellen]." 로고스, 보편적 방법적 규범들에 대한 아프리오리한 학조차 이러한 생활세계의 구조를 미리 전제한다. 단, "전학문적으로 세계는 이미 시공간적인 세계"이며 여기에는 그 어떤 수학적으로 순수한 요소도 정밀성도 물리학적 물체도 자연과학적 인과성도 없다(139, 강조는 원저자). 이러한 것들은 생활세계에 있는 이것들의 일종의 상응물을 각 분과의 학자들이 제 나름의 기획을 가지고 이론적으로 이념화해야만 도출될 수 있다. 이러한 이념화는 반대로 생활세계를 소급지시하는 것이자 그로부터 타당성을 정초받는 것이다[Diese Rückbezogenheit ist die einer Geltungsfundierung]. 객관적 학문의 아프리오리는 생활세계의 아프리오리를 이념화함으로써 그 의미와 타당성을 부여받는다. 그러므로 전자를 먼저 학적으로 탐구한 뒤 어떻게 그 원천으로부터 후자가 매개된[mittelbar] 이론적 성취로서 나타나는지 따져야 한다.

 이처럼 후설은 두 종류의 아프리오리, 두 종류의 보편적 구조를 구분한다. 이 분리가 곧 첫 번째 환원의 성과[Erwirkung]다. 첫 번째 환원은 현상학자로 하여금 "객관적-논리적 수준의 보편적 아프리오리가 [...] 그 자체로 선행하는 보편적 아프리오리, 정확히 말해 순수한 생활세계의 그것 속에서 정초된다"는 통찰을 가능케 해준다(141). 이에 더해, 자족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논리학마저 아직 학적으로 정식화된 바 없는 생활세계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므로 소박한 학문이라는 점을 밝혀준다. 생활세계의 본질에 대한 순수하고 철저한 근본학 없이 논리학은 공중에, 아무 근거 없이 떠있는 것[schwebt sie grundlos in der Luft]이나 다름없으며 아프리오리에 대한 학문으로서 자신에게 어떤 과제와 규범이 주어져있는지도 모른다. 

§37 생활세계의 형식적이고 가장 일반적인 구조들: 한편에 사물과 세계, 다른 한편에 사물에 대한 의식. 형식적이고 일반적으로, "세계는 [시공간적 존재자로서] 사물들의 우주"이다. "그러므로 이 존재자들의 본질을 위한 구체적으로 일반적인 교설[konkret allgemeinen Wesenslehre diese Onta]로서 이해되는 생활세계 존재론의 과제가 여기서 발견된다."(142, 강조는 필자) 그러나 생활세계에 관한 것이되, 존재론적이지 않은 일반적 반성--언제나 이미 생활세계 속에 깨어있는 채 살아가며 실천적 관심을 가지는 인간 존재로서의 우리에 의한--이 보다 먼저 착수되어야 할 더 거대한 기획이다. 후설은 생활세계에서의 인간의 삶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세계에-대한-확실성-속에서-살기이다. 깨어있는 삶은 세계에 대해 깨어있음, 세계에 대해 그리고 세계 속에서 현실적으로 체험하고 현실적으로 세계의 존재적 확실성이라는 효과를 발동시키며 사는 자기 자신에 대해 항상적이고 현행적으로 "의식하며" 있음이다."(142-3, 강조는 원저자)*

cf. 환원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후설이 아직 초월론적 자아가 아닌 인간존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

*"Leben ist ständig In-Weltgewißheit-leben. Wachleben ist, für die Welt wach sein, beständig und aktuell der Welt und seiner selbst als in der Welt lebend "bewußt" sein, die Seinsgewißheit der Welt wirklich leben, wirklich vollziehen."(Hua VI, 145)

 세계는 사물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미리 주어지고 둘은 서로 분리불가능한 통일체를 이루지만, 우리가 사물을 의식하는 방식과 세계를 의식하는 방식은 상이하다. 우리는 사물을 "원칙적으로 [...] 세계-지평 내에 있는 사물들 또는 대상들로서 의식한다." 반면 세계는 존재하는 대상들의 지평으로서 의식되며, 이 지평은 "특별하게 의식되는 대상들[sonderbewußte Objekte] 없이 현행적일 수 없다." 또한 모든 [의식되는] 대상이 저마다 고유한 존재타당성의 양상을 담지하는 반면, "세계는 하나의 존재자[Seiendes]로서, 하나의 대상으로서 존재하지 않고 그것에 적용되면 복수형이 아무 의미를 갖지 못하는 그런 독특성[Einzigkeit]을 가지고 존재한다."(143, 강조는 원저자)* 사물과 세계의 상이한 존재방식은 그에 상응하여 상이한 의식의 상관적 유형들을 지시한다(prescribe[vorschreiben]).

*Q. 양상성과 복수화 불가능성이 어째서 서로 대비되는 짝을 이루는 것처럼 서술되는가? 둘은 완전히 다른 범주의 특성들 아닌가?

★ §38 생활세계를 주제화하는 두 가지 가능한 근본방식들: 소박하고 자연적인 곧장-몰두하는 태도[Geradehineinstellung]와 생활세계의 주어짐의 방식에 대한 '어떻게'[das Wie]와 생활세계의 대상들을 향한 시종일관된[konsequent] 반성적인 태도의 이념 세계 그리고 세계의 대상들에 대해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른 모든 [태도]보다 우연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인 이유 때문에 절대적으로 앞서야만 하는[vorangehen muß] 자연적으로 정상적인 방식이다. 이 방식은 어떤 대상이 주어지든 그것을 향해, 그러므로 세계-지평을 향해 정상적이고 끊어지지 않는 불변성[항구성, Beständigkeit] 속에서, 모든 작용들을 관통하는 종합적 일관성 속에서 곧장 몰두하며 사는 방식이다." 여기서는 "우리의 모든 관심들이 대상 속에 목표를 가진다[alle unsere Interessen haben ihre Ziele in Objekten]. 미리 주어진 세계는 우리의 모든 목표를 포함하는 지평이다. [...] 세계는 우리의 모든 작용들, 체험의 작용이든, 인식의 작용이든, 또는 외적 행위의 작용이든지 간에 그 안으로 향해지는 보편적 장이다." 심지어는 가상마저 현실성의 양상으로서 이 지평으로서의 세계에 포함된다. 그러나 그저 미리 주어진 세계를 주제화되지 않은 지평으로서 가지는 자연적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깨어있는 삶의 방식, 세계를 [최초로] 주제화함으로써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 이 방식에서는 "주어짐의 방식들의 '어떻게'와 존재자들 자체에 대한 계속적이고 보편적인 관심이 [그것들에] 곧장 몰두하는 식으로가 아니라 도리어 그것들의 '어떻게'와 관련한 대상들로서 확립된다."(144, 강조는 필자) 상대적 타당성과 현상, 견해의 변화 가운데서 어떻게 세계의 보편적 타당성이 우리에게 존재의미를 가지게 되는지, 어떻게 보편적 지평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불변적 의식이 가능한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심의 총체적 변화"를 통해 현상학자는 "지평-타당성들의 지향적 중첩으로 인해 계속해서 생산되는 총체" 속 개별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종합의 상호 분리불가능한, 타당성 검증이나 무효화에 있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형들을 탐구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세계가 어떻게 "종합적으로 연결된 성취들의 우주"의 상관자로서 "그 존재의미와 존재타당성을 자신의 존재구조의 총체성 속에서 획득하는지"가 밝혀질 것이다(145).

 후설은 이 두 번째 태도가 지니는 관심의 배타성을 무척 강조한다. "그것의 불변적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흘러가면서 종합적으로 연결된 채 세계의 단적인[schlichten] "존재"에 대한 통일적 의식을 불러오는 주어짐의 방식들, 현출과 그 속의 타당성 양상들의 방식들의 주관적 변양(alteration[Wandel])"만이 관심의 대상이다(146). 두 번째 태도 가운데서 생활세계의 작동 방식('어떻게')는 새로운 학문의 장으로서 탐구되며, 이 학문은 "그것이 의미를 궁극적으로 부여한다는 데서 오는 힘, 모든 객관적 정초의 진정한 힘을 공급하는 궁극적 근거들의 학문"으로서 여기에는 세계 지평 속에 사회적 상관관계를 맺으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 존재들에 대한 탐구도 포함된다(146-7).

 상술한 탐구의 첫 번째 단계로서 모든 객관적 학문들에 대한 환원을 수행했을 때, 현상학자는 "명백히 계속해서 세계의 토대 위에 서있다. [그러나] 세계는 이제 우리를 위해 전학문적으로 타당한 생활세계로 환원되어있다. 단지 우리가 학문들로부터 오는 그 어떤 종류의 지식도 전제로서 사용하지 않을 뿐이며, 우리는 학문들을 그것의 참됨에 대한 우리만의 입장을 취하지 않는 채로 그저 역사적 사실들로서만 고려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생활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는 역사학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역사학 또한 결국 세계의 타당성을 미리 전제하고서만 성립할 수 있는 객관적 학문일 뿐이며 "순수하게 주관적인 것의 우주"를 파고들지 않는다(147).

*"Wir bemerken dabei, daß jener nächste Schritt, der anfangs zu helfen schien, jene Epoché, in der wir uns aller objektiven Wissenschaften als Geltungsbodens entheben mußten, keineswegs schon genügt. Im Vollzug dieser Epoché stehen wir offenbar noch weiter auf dem Boden der Welt; sie ist nun reduziert auf die vorwissenschaftlich uns geltende Lebenswelt, nur daß wir keinerlei Wissen, das aus den Wissenschaften herstammt, als Prämisse verwenden [...]"(Hua VI, 150, 강조는 필자.)

★ §39 삶에 대한 자연적 태도의 총체적 변화로서[totale Änderung] 초월론적 에포케의 특유한 성격[die Eigenart] 자연적 태도를 완전히 포기하면 "세계의 미리-주어짐 자체"["Vorgegenheit der Welt als solcher"],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의식적 삶 속에서 의미와 존재타당성을 유지하는지가 탐구의 주제가 된다. 이러한 탐구는 궁극적으로 "자연적 삶과 그것의 주관성이 궁극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며 그에 대한 대답으로 해당 주관성을 "순수하게 타당성을 발동시키면서 기능하는 주관성으로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자연적 세계-삶에서 세계-타당성을 발동시키는 삶은 자연적 세계-삶의 태도 내에서 [자신이] 연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요구되는 것은 태도의 전면적 변형, 완전히 독특한, 보편적 에포케이다."(148, 강조는 원저자)*

*여기서 환원은 두 번째 단계에 이른다. 객관적 학문에 대해서만 에포케가 수행되는 첫 번째 단계에서는 환원하는 자아가 여전히 생활세계 안에서 그것을 근거로 생활하는, 다만 객관적 학문의 전제를 활용하지 않는 인간존재로 설정되는 반면, 에포케가 보편화되는 두 번째 단계에서는 환원하는 자아가 생활세계보다 위에, 그것을 관조할 수 있는 위치에 서는 초월론적 주관으로 설정된다. 요컨대 두 단계 사이의 차이는 에포케의 적용 범위의 차이이자, 태도의 변경 정도상의 차이(일면적, 부분적 ➔ 전면적, 총체적)다. (양적 척도의 관점, 질적 척도의 관점) 후설은 이러한 차이 또는 환원의 단계 구분을 명시적으로 공식화하지는 않지만 여러 인상적인 대목들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①객관적 학문의 효력을 배제하는 판단중지/에포케(아직 상호주관적 인간공동체로서의 생활세계에 대해서는 곧장 몰두하는 태도로 남을 수 있음)➔②생활세계의 주어짐의 방식을 학적으로 주제화(상호주관적 인간공동체로서의 생활세계에 대한 현상학적 반성의 태도로 돌입, '환원' 완성)➔③원초적 환원을 통한 상호주관성 정초
 

§40 총체적[전면적, totalen] 에포케를 수행함의 진정한 의미를 둘러싼 어려움들. 그것을 모든 개별적 타당성을 단계별로 단념함으로 잘못 파악할 유혹[die Verführung, sie als eine schrittweise zu leistende Enthaltung von allen einzelnen Geltungen mißzuverstehen]. 그런데 후설은 상술된 총체적[전면적] 에포케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되어야만 방법으로서의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가 모호하다고 지적한다. 자연적, 정상적 삶에서 자아는 주변세계의 대상들에 향해져있으며, 이 대상도 대상에 대한 자아의 의식도 모두 "침묵하는, 은폐된, 그러나 함께 기능하는 타당성들, 살아있는 지평"에 의해 둘러싸여있다. 능동적 자아는 언제든, 예컨대 과거의 습득물[Erwerbe]을 다시 직관화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 지평의 일부를 자발적으로[willkürlich] 주제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적 삶에서 발동된 하나의 타당성은 반드시 "하나의 분리 불가능한, 상호관련된 삶의 복합체를 이루는 [...] 모호하지만 상황에 따라 활용 가능한[dunkler, aber gelegentlich verfügbar] 재발동가능한 타당성들[reaktivierbarer Geltungen]의 필연적 하층토(subsoil[Untergrund])"를 미리 전제한다(149).

 후설은 대상 인식의 지평을-구비하는-성격[Horizonthaftigkeit]이 총체적 에포케의 수행 방식에 대해 해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개별적인 타당성의 수행들을 단계별로 단념해나가는 것은 목표를 달성시켜줄 수 없는데, 왜냐하면 에포케의 각 경우는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타당성의 양상을 "세계의 자연적 근거 위에" 창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포케는 일격에 자연적 태도에서의 모든 타당성의 수행과 네트워크를 작동 밖에 두어야만 한다. 여태까지 한 번도 중단된 적 없었던 삶의 방식을 단번에 중단시킴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이 획득된다.* "달리 말해, 우리는 그러므로 그것을 통해 세계가 진행되는 삶 속에 소박하게 몰입해있는 이들을 위해 "거기" 있는 보편적 의식적 삶(개별-주관적인 그리고 상호주관적인) 위의[über] 태도를 가진다."(150, 강조는 원저자) 나아가 이 초월론적 에포케는 최종적인 것으로서 지속되는 습성적 태도로서, 결코 일시적이거나[vorübergehend] 여러 반복들 가운데서 우연적이고 고립된 채로 남는 작용이 아니다.

*"Die Enthaltung vom Vollzug einzelner Geltungen [...] schafft nur für eine jede einen neuen Geltungsmodus auf dem natürlichen Weltboden; und nicht besser wird es, wenn wir einzelweise, und sei es auch in infinitum, nämlich für alle von nun ab uns je sich anbietenden eigenen und fremden Geltungen, in einem vorgreifenden universalen Entschluss Vollzugsenthaltung üben wollen. Es ist aber anstatt dieser Universalität der Enthaltung in Einzelschritten eine ganz andere Weise der universalen epoché möglich, nämlich die mit einem Schlage den durch die Gesamtheit des natürlichen Weltlebens und durch das gesamte (ob verborgene oder offene) Geflecht der Geltungen hindurchreichenden Gesamtvollzug außer Aktion setzt, eben den, der als einheitliche “natürliche Einstellung” das “schlicht” “geradehin” Dahinleben ausmacht. Durch die Vollzugsenthaltung, die diese ganze bisher ungebrochen verlaufene Lebensweise inhibiert, wird eine völlige Umstellung des gesamten Lebens gewonnen, eine durchaus neue Weise des Lebens.”(Hua VI, 153, 강조는 필자)

§41 진정한 초월론적 에포케는 "초월론적 환원"을 가능하게 만든다 -- 세계와 세계-의식 사이의 초월론적 상관관계의 발견과 탐구. 진정한 초월론적 에포케는 현상학자로 하여금 "가장 강하고 가장 보편적인 그리고 동시에 가장 숨겨진 내면적 유대[inneren Bindung], 즉 세계의 미리-주어져-있음[과의 유대]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준다. "이 해방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 속에서[Mit und in dieser Befreiung] 주어지는 것은 세계 자체와 세계-의식 사이의 보편적, 절대적으로 자기폐쇄된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족적인[eigenständigen] 상관관계의 발견이다. 후자[세계-의식]로 사념되는 것은 세계의 타당성을 발동시키는[die Weltgeltung leistend], 그것의 지속되는[fortdauernden] 습득물 속에서 세계를 항상 가지고 그것을 항상 능동적으로 새로이 빚는[gestaltenden] 주관성의 의식적 삶이다."(151) 이 세계-의식은 한 마디로 의미와 존재타당성을 구성하는 의식이다.

 상술한 에포케를 통해 성취되는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현상학자는 체험의 새로운 방식을 획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세계의 존재나 객관적 진리들, 과거의 개인적 습득물 또는 공동체의 역사를 상실하지는 않는다. "그는 단지--철학자로서, 그의 관심 방향의 독특성 속에서[in der Einzigartigkeit seiner Interessenrichtung]--그의 세계-삶의 전체 자연적 수행을 계속하기를 스스로 금지할 뿐이다. [...] 모든 자연적 관심들은 작동 밖에 놓인다. 그러나 세계는, 이전에 그리고 지금까지도 나를 위해 그것이었던 그대로, 나의 세계, 우리의 세계, 인류의 세계로서 [...]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 순수하게 그것에 존재의미를 주는, 그것의 타당성을 통해 세계가 애초에 "있는" 주관성의 상관자로서 우리의 시선 하에 있을 뿐이다."(152) 미리 주어지는 생활세계의 즉자적 존재에 대한 소박한 신념을 탈피하게 해주는 환원 이후에 세계는 특유한 하나의 현상이 된다.*

★ cf. 데카르트적 환원과 비교했을 때 강조점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인식이 오류 가능하므로 그 타당성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자는 동기보다, 나의 관심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신경을 끈다는 동기가 강하다. 또한 세계의 (질서의) 전면적 소멸 가능성을 경유하느냐의 여부에서도 차이가 난다.

*"Gerade dieses Bodens habe ich mich durch die Epoché enthoben[2격을 해방시키다], ich stehe über der Welt, die nun für mich in einem ganz eigenartigen Sinne zum Phänomen geworden ist."(Hua VI, 155, 강조는 원저자)

§42 초월론적 환원이 현실적으로 수행될 수 있는 길들을 구체적으로 윤곽 지어야 한다는[Vorzeichnung] 과제 ""그" [자연적] 세계를 초월론적 현상 "세계"로 환원하는 성취[수행, Leistung]"는 결국 인류를 현상세계의 상관자인 초월론적 주관성으로 환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인류가 "언제나 궁극적으로 기능하며 그러므로 "절대적인" 초월론적 주관성의 자기-객체화"의 결과라는 점을 더 이해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 주관성이 세계를 존재의미로서 조명하는 방식을 어떻게 명증적으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후설은 "에포케에 의해 자유로워진 시선은 마찬가지로,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험하는 시선이어야 한다"고 지적한다(153). 다만 태도의 전면적 변형으로 인해 모든 [자연적] 세계-경험이, 그 속에서 세계와 그에 대한 자연적 경험이 "현상"으로서 경험되는 초월론적 경험으로 변화할 뿐이다. 이처럼 후설은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의 문제와 계속해서 씨름한다.

*방법에 대한 구체적 이해의 용이성 역시 각 환원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43 "데카르트적 길"과 대조되는 것으로서 [이] 환원의 새로운 길의 성격규정 진정한 초월론적 환원이 구체적이고 아무 부조리 없이 수행되고, 절대적으로 궁극적인 근거들로의 환원을 현실적으로, 모든 편견으로부터 탈피해 성취하기 위해서는 환원 자체 그리고 그와 관련된 과제들의 의의가 해명되어야 한다고 후설은 생각하는 것 같다. 새로운 환원의 길은 [두 단계에 걸쳐] 전개되면서 "가는 길에 획득된 유의미한 통찰들의 샘플들에 의해 풍요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해당 통찰들을 위해 그리고 에포케 자체를 위해 그것들의 궁극적 의미와 가치를 확보해주는 원칙적 자기이해까지 획득했다."(154-5)

*이 대목은 데카르트적 길에 비해 생활세계를 통한 길이 절차를 둘로 분리함으로써 얻는 유용성을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저 통찰들은 34-8절에서 개진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지막 문단은 무척 중요하므로 원문 전체를 인용한다.

★ "Ich bemerke nebenbei, daß der viel kürzerer Weg zur transzendentalen Epoché in meinen “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 den ich den “cartesianischen” nenne (nämlich als gewonnen gedacht durch bloße besinnliche Vertiefung in die Cartesianische Epoché der “Meditationes” und durch kritische Reinigung derselben von den Vorurteilen und Verirrungen Decartes’) den großen Nachteil hat, daß er zwar wie in einem Sprunge schon zum transzendentalen Ego führt, dieses aber, da jede vorgängige Explikation fehlen muß, in einer scheinbaren inhaltsleere zur Sicht bringt, in der man zunächst ratlos ist, was damit gewonnen sein soll, und gar, wie von da aus eine neue und für eine Philosophie entscheidende, völlig neuartige Grundwissenschaft gewonnen sein soll. Daher erliegt[실패하다, 굴복하다, 지다] man auch, wie die Aufnahme meiner “Ideen” gezeigt hat, allzuleicht, und gleich bei den ersten Anfängen, den ohnehin sehr versucherischen Rückfällen in die naiv-natürliche Einstellung."(Hua XI, 157-8, 강조는 필자)

cf. §44-47은 작업물이 내 부주의로 날아가서 짤막한 개조식 요약으로 갈음한다.

★ §44 생활세계의 사물들의 현실성과 관련한 보편적 에포케에 의해 규정되는 이론적 관심의 주제로서 생활세계 ➔ 무엇 자체가 아닌 그 무엇이 우리에게 '어떻게' 주어지느냐에 대한 배타적[ausschließlich] 관심. 여기서의 에포케가 단지 탐구영역을 고립시키는 역할에만 봉사한다는 후설의 강조에 유의할 것.*

*"Darin liegt also eine Art universaler Epoché, die hier nur dazu dient, das Thema der weiteren Untersuchungen auszosondern, von deren möglichen Ergebnissen wir übrigens noch gar keine Vorstellung haben."(Hua VI, 159, 강조는 필자)

§45 감성적[sinnlich] 직관 속에서 순수하게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것들[Gegebenheiten]에 대한 구체적 해명의 시작들 ➔ 지각에 대한 현상학적 분석. 현상다양체로부터 하나의 동일한 대상(현상다양체가 담지하는 대상-극)의 종합, 파지를 통한 인식의 점진적 완성, 의미 지평의 동반.

§46 상관관계의 보편적 아프리오리 ➔ 현행적으로 현시된 것과 함축된 것, 주제화된 것과 지평에 남아있는 것 사이의 상관관계. 존재의미와 양상은 의식의 특수한 성취라는 것.

Q. 파지와 예지는 현전에 속하는가, 현전화에 속하는가?


§47 탐구의 추가적 방향성들에 대한 지시: 키네스테제[Kinästhese], 타당성 변양[Geltungswandel], 지평의식, 그리고 경험의 공동화[Vergemeinschaftung]라는 주관적 근본현상들 ➔ 
살아있는 신체의 내면적 키네스테제 vs 외면적 물리적-실제적 운동. 키네스테제의 '만약-그렇다면[Wenn-so]' 관계에 의한 지각의 체계적 질서화, 조화의 형성. 조화의 끊김으로 인한 타당성 변양. 지각은 언제나 지각장 내의 지각, 지각 대상은 언제나 사물의 장들 속에 놓여있으며 결국 지각적 세계로서의 세계를 가리킨다는 것(내부 지평뿐만 아니라 외부 지평도 가짐). 사물의 무리[Gruppe]가 세계인 것은 아니고, 세계가 그 속에서 스스로를 현시함. 사물의 무리는 "가능한 지각들을 위한 사물들의 우주[Universum der Dinge möglicher Wahrnehmungen]"로서 세계의 한 섹터[Ausschnittes]에 불과할 뿐(162). 세계 지각 속 필연적인 타 인간존재들과의 접촉. 경험의 공동주체들[Die Mitsubjekte]에 의한 무한한 상호접촉 가능성의 지대 형성. 지각의 공동화를 통한, 공동체를 위해 계속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모두의 공동 지평으로서 하나의 동일한 세계. 타당성의 상호주관적 조화 또는 부조화로 인한 타당성의 공동적 변양. 현상의 변화무쌍함으로 인한 '사물 자체'의 경험 불가능성.

Q. 상호주관적 차이들이 통일될 수 있다는 점이 모두에게 사전적으로 확실하다는 후설의 주장은 어떤 근거를 가지는가?
A. 저마다 관점, 시점은 달라도 결국 동일한 경험의 지평으로부터 취해진 것이라는 후설의 진단. 근원만큼은 모두가 같다.

cf. "Einstimmigkiet in der Gesamtwahrnemung der Welt", "Miteinanderleben", "Konnex haben"(Hua VI, 166, 강조는 원저자)
 

§48 존재하는 모든 것은--그것의 의미가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영역에 속하든--상관관계들의 주관적 체계에 대한 지표다. "세계가 그를 통해 미리주어지는 현출의 주관적 방식들의 다양성에 대한 이 배타적 집중[ausschließlichen Vertiefung]"의 성과물은 우연적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상상 가능한 인간 존재도 상술된 것과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할 수 없다. 후설에 따르면 그에게 세계는 그의 의식 삶 속에서 그리고 다른 인간 존재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 속에서 미리 주어져야만 한다. 다시 말해, "세계[...]와 그것의 주어짐의 주관적 방식들 사이의 상관관계"는 본질적이며, 단 한 번도 철학에서 탐구된 적 없는 철학적 기적(wonder[Staunen])이다(165, 강조는 필자). 기존의 철학자들은 같은 사물이 서로 다른 이들에게 서로 다르게 현상한다는 그 차이에만 주목했지 [현상들의 조화나 동일한 대상으로의 종합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상술한 상관관계에 대한 탐구는 본질적으로 시공간적인 세계의 모든 존재자와 그것의 주관적 주어짐에 적용 가능한 "고정된 유형학"을 제공한다. "모든 것[존재자]은 그러므로 가능한 경험의 [범위] 내에서 결코 순전히 감각적인 성격만을 가지지 않는 그것의 고유한 주어짐의 방식들과 상관관계를 가지며, 모든 것은 그 자신의 타당성의 양상들종합의 특수한 방식들을 가진다." 경험과 명증은 유형화될 수 있으며 달리 말해 '학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를 보아도, 나를 위해 그리고 모든 상상 가능한 주체에게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타당한 모든 존재자는 그러므로 상관적으로--그리고 본질적 필연성을 가지고--[실현 가능한 체험들의] 체계적 다수성들의 지표다. 각자는 주어짐의 현실적이고 가능한 경험적 방식들의 이념적 일반적 집합[ideelle Allgemeinheit]을 지시한다. 각 주어짐의 방식은 모든 현실적 구체적 경험이 이 총체적 다수성으로부터 주어짐의 방식들의 조화로운[einstimmig] 흐름, 기대하는 지향을 연속적으로 충족시키는 조화로운 흐름을 불러내도록(verwirklicht) 하는 이 하나의 존재자의 현출이다."(166, 강조는 필자) 여기서 지향성은 곧 각 주체의 코기토에 해당하며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이해된 '지향의 방식'이 곧 코기타툼을 이룬다.

§49 "의미의 근원적 형성[Ursprünglicher Sinnbildung]"으로서 초월론적 구성의 예비적[vorläufig] 개념. 여태까지 수행된 범례적 분석들의 제한된 성격. 해명의 추가적 지평들에 대한 지시[Andeutung]. 여태까지 탐구된 지향적 성취들은 고립된[vereinzelt] 개인의 것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는 성취 속에서 함께 불러내지는[vergemeinschafteten] 전체 상호주관성을 취급하고 있다--그리고 여기서 "존재자[Seiendes]", "주어짐의 방식들[Gegebenheitsweisen]", "종합들" 등의 개념들이 반복적으로 상대화된다."(167)* 각 주체들의 종합은 서로 중첩되어 종합의 보편적 통일성을 이룬다. 이로써 세계는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된다. 우리를 위한 세계는 "기초적 지향성들로부터 형성된 의미의 [상호주관적] 구조[ein Sinngebilde aus elementaren Intentionalitäten]"로서 이해 가능해진다. 지향한다는 것은 종합을 통해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며, "의미란 타당성의 양상 속의, 즉, 타당성을 발동시키는 지향하는 자아-주체들과 관련된 것으로서의 의미 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레디메이드[Fertig-Seienden]처럼 받아들여지는 존재자로부터 그것의 지향적 근원 및 의미 형성의 [근원적] 통일체로 파고들어가는 작업이 요구되는 것이다(168, 강조는 필자).

*Q. 후설이 '상대화'로서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다. 53절에서도 주관성의 개념이 상대화된다는 유사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난해하다(179).

**"Deren[in der Intentionalität] eigenes Sein ist nichts anderes als Sinnbildung mit Sinnbildung zusammen fungieren, in der Synthesis neuen Sinn “konstituierend”. Und Sinn ist nie anderes als Sinn in Geltungsmodis, also bezogen auf Ichsubjekte als intendierende und Geltung vollziehende. Intentionalität ist der Titel für das allein wirkliche und echte Erklären, Verständlichmachen."(Hua VI, 171)

 나아가 상술된 분석은 오직 지각의 대상이 되는 현재의 세계만을 다뤘지만, 이는 세계의 한 층위일 뿐이다. 회상과 예상은 지각의 지향적 변양태로서 각각 과거와 미래에 있는 존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한편 연속성의 종합은 이산성의 종합보다 특권적 지위를 가지며, 후자를 분석하는 데 근거가 된다. 현상학적 탐구에서 하나의 문제는 다른 문제를, 하나의 지평은 새로운 지평을 열며 무한한 발견들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가능케 한다.* 이때에 에포케를 수행하고 있는 "정신의 순수한 틀을 유지하는 것, 미지의 세계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의 어려움 또한 대두된다(169). [이는 후설이 데카르트적 초월론적 환원의 단점으로 지적했던 것이기도 하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평들이 일깨워지는 모든 운동이 한 의미의 통일성을 향해 간다는 후설의 주장은 어떤 근거를 가지는가?

A. 의미형성의 보편적인 형식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50 '에고-코기토-코키타툼'이라는 제목 하에 모든 작업 문제들[Arbeitsprobleme]을 질서화하기 자아는 모든 타당성의 수행자로서 인식의 매 순간 자신의 지향을 충족시키겠다는 목표 또는 기획을 가진다. 한편 자아는 자아-극으로서 당장은 더 이상 지각되지 않지만 한때 지각되었던 것들을 [파지로서] 자신의 의미함 속에 유지하기도[im meinenden Griff behalten] 한다. "다른 한편, 촉발들은 자아를 향해 간다(go toward[auf den Ichpol hin gehen]). 그것은 자아를 더 세거나 덜한 고집을 가지고 끌어당기며[vordringlich anziehen], 경우에 따라서[eventuell] 자신에게로의 전환[Zuwendung]과 진정한 능동성을 동기부여한다."(171, 강조는 원저자)

 후설은 자아의 이와 같은 특징들을 서술하면서, 데카르트의 언어를 빌려와 현상학적 분석이 취할 수 있는 상이한 방향성들을 '에고-코기토-코기타툼'이라는 제목 하에 정리한다. 에고는 자아-극 그리고 무언가를 향해 가는 방향성[Richtung auf etwas]에, 코기토는 종합적으로 함께 묶인 현출로서의 주관적인 것 그리고 무언가의 현출[Erscheinung von etwas]에, 코기타툼은 대상-극 그리고 자아-극의 지향성이 그 현출들을 통해 향해있는 통일체로서의 대상적인 무언가에 상응한다. 이들은 모두 지향성의 일반적 개념의 상이한 면모들을 반영한다. 후설에 따르면 이 주제들은 서로 분리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탐구될 때에는 한 번에 하나씩 탐구되어야 하며, 그것도 데카르트가 취한 순서와 정반대의 순서로 탐구되어야 한다. 우선은[Das Erste] [기존에는] 단적으로[schlicht] 주어졌던 생활세계를 새로운 관심의 방향성과 엄밀한 환원 속에서 "현출의 방식들의 다수성과 그것들의 지향적 구조들로 돌아가 탐문하기 위한 지표, 가이드라인[Index, Leitfaden]"으로서 탐구해야 한다(172, 강조는 원저자). 둘째로는 자아-극과 그것에 특유한 시간화의 작용을 탐구해야 한다[Eine neue Blickrichtung, in der zweiten Reflexionsstufe, führt auf den Ichpol und das seiner Identität Eigene]. 자아-극은 시간화[Zeitigung]를 통해 스스로를 자신의 시간양상성들 속에서 지속하는[dauernd] 자아로서 구성해내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시간의 흐름 가운데서도 자아는 하나의 동일한 자아가 되며, 현재의 자아는 과거의 자아와 접촉하고 소통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동일적인 주관성, 즉 구성적으로 기능하는 자아는 오직 상호주관성 안에서만 자신일 수 있다는 점은 사정을 복잡하게 만든다.* 후설은 여기서 자아와 타자 사이의 '나-너-종합'[Ich-Du-Synthesis], 나아가 '우리-종합'[Wir-Synthesis]에 대해 말한다. 이 또한 시간화의 일종으로서 자아-극들 사이의 동시성 그리고 모든 자아가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인격적 지평을 구성한다. 이 지평은 결국 보편적 사회성, 인류 그리고 모든 자아-주체들의 "공간"에 해당한다.

*⟪위기⟫의 전, 중반부에서의 후설은 상호주관성의 필연성에 대해 별도의 논증을 제공하지 않는다. 분석되는 생활세계는 이미 상호주관적인 것으로 상정되어있다. 54절에 가서야 이러한 소박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일어난다.

§51 "생활세계의 존재론"이라는 과제 상술한 모든 탐구가 학적인 탐구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현상학적-초월론적 진리"가 고정된, 본질적인, 그리고 순수하게 아프리오리한 유형들로 이루어져있다는 점 때문이다. 생활세계 속 대상들의 우주로 구성되는 생활세계는 사실 그 어떤 초월론적 관심 없이도, 즉 자연적 태도 속에서도 일관적이고 조화롭게 직관되고 직관 가능한  순수하게 경험적인 세계로서 학적인 탐구의 주제가 될 수 있다. 생활세계의 모든 실천적 구조들은 주관성과 관련되어있으며, 주관성의 변화무쌍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삶과 그에 근거를 둔 학문은 "유형들의 합법적 집합[wesensgesetzliche Typik]"에 구애된다(173). 그러므로 순수한 명증을 통해 이 집합을 규명하는 '생활세계의 존재론'이 성립할 수 있다. 후설에 따르면 기존의 근대 과학은 [이러한 생활세계의 우선성을 간과하고] 즉자적으로 참된, 수학적 형식에 의해 기초 지어진 세계의 관념을 전제함으로써 현실적 명증, 경험적 직관 또는 직접적 자기부여로부터 오는 본질적 통찰의 존엄성을 갖추지 못했다.

 생활세계의 존재론을 수립하는 자연적 태도에서 다시 초월론적 태도로 태도를 변경하면, 생활세계는 자신의 기존의 본질을 보유하면서도 "순전한 초월론적 "현상""으로 스스로를 변형한다. 이제 생활세계는 "구체적 초월론적 주관성 내부의 말하자면 순전한 "구성요소""가 되며 그것의 아프리오리는 초월론적인 것 일반의 보편적 아프리오리의 한 층위로 재인식된다. 이처럼 생활세계를 현상으로서 보는 태도를 가이드라인 삼아 출발해, 사물을 구성하는 주어짐의 방식들의 다수성 및 그 본질적 형식들이나, 주체들의 공동체 등의 부분적 주제들에 개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서로에 의해 정초되어있는 부분적 태도들"로 나아갈 수 있다(174). 궁극적으로 현상학자는 초월론적 환원에 대한 탐문이라는 보편적 과제에 이른다.

§52 역설적 수수께끼들의 도래[Das Auftauchen paradoxer Unverständlichkeiten]. 새로운 철저한 고려들의 필요성. 여태까지의 반성은 자연적이고 객관적인 모든 존재의 타당성 주장을 탐구의 권역으로부터 배제한 채 세계와 공동체 속에서 세계의 타당성을 성취하는 주관성으로서의 인류 사이의 상관관계를 취급했다. 그런데 후설은 이로부터 크게 세 가지의 역설적 수수께끼들이 도래한다고 말한다.

 첫째, 결국에는 현상학자도 참된 존재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수립하고자 하지 않는가? 만일 그 진리가 '객관적 진리'와 다른 종류의 것이라면, '주관적 진리'라는 두 번째 진리 개념을 상정하고자 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 후설은 "자연적, 객관적 세계-삶은 세계를 영원히 구성하는 초월론적 삶의 단지 특수한 양상일 뿐으로, 이 양상 속에서 살아가는 초월론적 주관성은 구성하는 지평들에 대해 의식하지 않으며 그것들에 대해 [앞으로도] 의식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러하다"(174-5)고 말한다. [달리 말해, 별도의 진리 개념을 상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객관적 진리'가 초월론적-현상학적 진리의 한 특수한 양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는 "[생활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직접적으로 주어진 것을 안전하게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로서" 인간의 실천의 필요로부터 [파생적으로] 기원한 것이며, 급진적인 에포케를 수행한다고 해서 이 진리들의 존재의미가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인용). 다만 '객관적 진리'만을 쫓은 기존의 철학은 구성하는 초월론적이고 구체적인 주관성은 보지 못하고 구성된 대상-극들만을 취급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보편학이 될 수 없었다.

 둘째, 에포케를 통해 현상학자는 모든 자연적 인간적 삶의 관심들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닌가? 이 오해에 대해 후설은 자연적 삶에서 발생하는 작용들을 현상학자 역시 겪어나가며(live through) 다만 자연적이지 않은 태도에서 그러할 뿐이라고 단호하게 부정한다. 세계에 곧장 몰두해 사는 자연적 태도에서 "세계는 검증 가능한 것으로 당연시 여겨지는 것의 총체성이다. 그것은 겨냥함[Abzielung]을 통해 "거기" 있으며 존재하는 것--"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향한 계속해서 새로운 겨냥함들을 위한 근거이다."(176-7) 그러나 환원을 통해 현상학자는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이미 결과들을 가지는, 이미 사전적인 겨냥함과 그 충족을 통해 세계를 가지고 있는 주관성으로 되돌아간다."(177, 강조는 원저자) 타당성에 대한 모든 '가짐'은 목표[Ziel]를 가진 채 겨냥하는 성취[수행]의 산물, 즉 자아의 산물이다. [달리 말해 자연적, 인간적 삶의 관심들을 여전히 탐구하되, 그것을 구성된 객체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주관성과 관련하여 탐구한다는 것이다. '태도 변경'으로서의 환원의 의미가 여기서 선명해진다.]

 셋째, 환원을 통해 구성하는 삶이 어떻게 그것의 개별적 사실성 속에서 기술될 수 있는지가 모호하다. 이에 후설은 사실적 존재를 분류하고, 경험 가운데서의 귀납적 일반성의 윤곽을 그려내는 기술적 학문과 궁극적 일반성만을 취급하는 법칙에 대한 학문 사이의 구분은 객관성의 권역에 자리하는 것이므로 같은 구분을 초월론적 권역에 요구할 수 없다고 받아친다. 이에 더해 그는 "사실에 대한 경험적 학문의 유비물, 개별적 초월론적 상관관계들을 그것들이 사실적으로 발생하고 사라지는 가운데 확립한다는 의미에서 경험에만 기반해있는 귀납적 학문으로서 초월론적 존재와 삶에 대한 "기술적" 학문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한다. 흐르는 삶은 붙잡기 어려운(elusive[unfaßbar]) 것으로서 그 어떤 '이것임' 또는 '그러그러함'도 규정 가능하도록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형상적인[eidetisch] 방법을 통해서, 즉 "초월론적 성취들의 본질적 형식"을 탐구함으로써만 초월론적 자아와 관련된 사실들이 규정 가능하다(178).*

★*Q. 이 (불)가능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본질 직관, 형상적 환원도 결국 포착된 사실들로부터 공통점을 추출하는 작업이 아닌가? 애초에 본질 직관과 귀납 추론 사이의 차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

§53 인간의 주관성이라는 역설: 세계를 위한 주체인 동시에 세계 속의 객체이기 나아가 후설은 모든 존재하는 객체들이 그 속으로 용해되는 보편적 상호주관성은 명백히 인류[Menschheit]일 수밖에 없는 반면, 인간의 주관성은 오직 세계의 구성요소적 부분(component part[ein Teilbestand der Welt])이라는 역설을 제기한다. 세계의 부분에 불과한 인간의 주관성이 어떻게 전체 세계를 자신의 지향성을 통해 구성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한 답으로서, 철학자가 되어서도 그저 인간은 세계를 위한 주체이자 세계 속의 객체라는 관념에 만족할 것인가? 그러나 후설에 따르면 에포케는 "세계에 속하는 주체-객체 상관관계를 초월한(above) 태도를, 그러므로 초월론적 추제-객체 상관관계에 초점을 두는 태도를" 현상학자에게 부여한다. 이때에 세계는 우리를 위해 존재하며 우리들의 지향적 삶으로부터, 성취들의 아프리오리한 유형들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의미를 긷는다[schöpfen]. 이러한 세계는 논증적으로[argumentativ] 구축되거나 신화적 사고로써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제시될 수 있는 것이다[aufweisbaren]. 후설은 현상학적 사유가 그 어떤 기존의 철학적 전통에도, 심지어 논리학에도 기대선 안 된다는 무전제성의 원리를 다시금 강조하면서, 이 근거의 부재가 오히려 자기정초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현상학의 자기정초는 소박한 세계를 현상의 우주로 변형시키는 근원적 자기반성을 통해 가능하다. 아직 탐구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기능하는 지평들로부터 비롯하는 역설들에 계속해서 사로잡히는 것이 현상학의 본질적으로 필연적인 운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54 역설의 해소:

a. 인간 존재[Menschen]로서의 우리,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능하는-성취하는 주체들로서의 우리 후설은 53절에서 제기된 모순적 질문을 해소하기 위해 자아에 대한 심화된 탐구가 요구된다고 암시한다. 소여의 방식과 대상-극 사이의 상관관계를 우선적으로 반성하느라 "'나'의 관점에서 본, 물론 나의 "속에서의" 상호주관성의 구성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182). 후설은 세계를 공동체적 삶의 지향적 구조로서 구성하는 '우리'는 누구냐고 묻는다. '우리'는 세계의 실제적 존재자들일까? 그러나 모든 실제적 존재자들은 현상으로서, 지향성에 의해 존재의미를 획득하는 대상-극들이 아닌가? 이에 후설은 긍정적으로 답한다. 에포케를 통해 인간 존재는 현상이 되었으며, 에포케의 적용을 받는 한 그 누구도 소박하게 그리고 단적으로 인간 존재로서 타당할 수 없다. 각 "나"는 작용, 습성, 능력의 자아-극으로서 세계를 향해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나"는 단순히 자아-극일 뿐 아니라 모든 성취함과 성취된 습득물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 어떤 영혼도, 심적 삶도 없으며 실제적 심리물리적 인간 존재도 없다. 이것들은 모두 "구성된 극으로서의 세계"에 속한다(183).

b. 시원적 자아[Ur-Ich]로서, 나는 세계를 구성하는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의 내부에 공동주체로서의 초월론적 타자들에 대한 나의 지평을 구성한다[Ich konstituiere meinen Horizont der transzendentalen Anderen als der Mitsubjekte der die Welt konstituierenden transzendentalen Intersubjektivität]. 후설은 여태까지의 탐구 방식에 소박성이 숨겨져 있었다고 말하면서, 에포케의 수행자가 '나'라는 점, 그로써 나타나는 세계-현상은 배타적으로 내것이라는 점, 따라서 모든 타인과 타인의 작용-삶 역시 '나의' 에포케에 포함된다는 점이 간과되었다고 지적한다. "에포케는 진정으로 철저한 철학의 근본적 방법적 요구사항인 독특한 종류의 철학적 고독[philosophische Einsamkeit]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184, 강조는 필자). 이 고독 속에서는 타인, 우리, 그리고 공동주체들의 공동체 전체가 자연적 타당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에포케에 포함된 현상이 되며, 다른 모든 인간들 가운데서 '나'의 특권이 단연 두드러진다.

 사정이 이러하다고 해서 '나'를 단지 여러 초월론적 자아들 중 하나로 간주했던 기존의 성찰들이 정당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원초적 "나"를 뛰어넘어 곧장 초월론적 상호주관성으로 비약한 데는 방법론적으로 잘못이 있었다. '나'는 우선 사물들의 "원초적[primordiale]" 권역을 구성한 뒤 그로부터 출발해 자신의 변양물로서 타자를 지각하는 구성적 성취에 성공한다. 마치 회상이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로 변양시키듯, 타자지각[Fremdwahrnehmung] 역시 "나의 시원적 존재[Urpräsenz]를 순전히 현전화된 시원적 현전으로 탈현전(depresentation[Ent-Gegenwärtigung])"시킨다. 이로써 '또 다른 나'가 별도의 지향적 작용성질을 통해 함께 현전하는[kompräsent] 것으로서의 존재타당성을 획득하게 된다(185).

 요컨대 현상학자는 자아에서 출발해야만 초월론적 상호주관성과 그 공동화, 그리고 모두를 위한 세계라는 사태, 나아가 어째서 각 초월론적 "나"가 결국 인간 존재로서 필연적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해명할 수 있다. 각 인간 존재는 초월론적 자아가 스스로를 인간 존재로서 자기-객체화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모든 구성에 있어서 '나' 즉 자아의 중심적 입장을 굳히는 이러한 분석이 상호주관적 공동체로서의 인류에 대한 앞선 탐구에 근거로서 선행되었어야 했다. 

Q. 상호주관성에 대한 발생적 현상학적 분석은 아직 어디서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Q. 논증이 성공한 건가?

§55 절대적으로 독특한, 궁극적으로 기능하는 자아로 그것을 환원시킴으로써 에포케의 우리의 첫 적용을 원칙적으로 수정하기[Korrektur] 세계는 조화롭고 자기검증하는 인식 가운데서 우리에게 의심되지 않는 존재의 타당성을 가지고 미리 주어진다. "나는 [내가] 이 세계 속에 사는 인간임을 확실하게 생각하며, 나는 조금도 이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 실재론을 의미한다면, "이보다 강력한 실재론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구체적인 세계-현상에서 시작하되 두 번째, 또는 에포케의 재형상화(reshaping[Umgestaltung])를 통해 초월론적 자아의 [근원적] 구성 및 타당성 정초기능에 눈떠야 한다. "에포케의 시작에서 자아는 필증적으로 주어지지만, "침묵하는 구체성[stumme Konkretion]"으로서 그러하다. 그것은 세계-현상으로부터 되돌아가 탐문하는 체계적 지향적 "분석"을 통해 해명, 표현으로 가져와져야 한다. 이 체계적 과정을 통해 현상학자는 우선적으로[zunächst] 세계와 인류 속에서 객체화된 초월론적 주관성 사이의 상관관계를 획득한다."(187)

 그런데 후설은 여기서 세계를 이성으로써 타당해지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 광인, 아이, 동물의 초월론적 주관성을 해명하는 데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후설에 따르면 "성숙하고 정상적인 인간존재"들만이 "모두를-위한-세계, 즉 문화의 세계의 완전한 의미"를 알기 때문에 그들을 기준으로 삼아 일종의 유비를 통해 '비정상적'이지만 생명을 가진 다른 모든 것의 초월론성의 방식[ihre Weise der Transzendentalität]을 해명해야 한다(187). 이에 더해 발생성[Generativität], 초월론적 역사성, 사회 속 인간의 존재, 탄생과 죽음의 의미, 성별, 잠이나 의식을 잃음 등 '무의식'의 초월론적 구성이라는 문제들 또한 대두된다. 기존의 철학에서 다루어졌던 그 어떤 문제도 초월론적 현상학에게 접근 불가능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초월론적 현상학이 에고 코기토로부터 출발해 안전한 객관적 지식을 연역하고 확보하는 데카르트주의라는 비판은 가당치도 않다. "중요한 것은 객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 연역하기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189) 사태를 초월론적으로 이해 가능하도록 설명하는 것은 각 객관적 학문을 위해서도 유의미한 작업이다. 예컨대 초월론적 현상학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연주의적 인식론이나 논리학의 우상화로부터 오는 그릇된 인식을 막아줄 수 있다.

"Es gilt nicht, Objektivität zu sichern, sondern sie zu verstehen. [...] Deduzieren ist nicht erklären. [...] Das einzig wirkliche Erklären ist: transzendental verständlich machen."(Hua VI,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