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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현상학

세바스찬 가드너,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입문> ~pp.212

세바스찬 가드너, 강경덕 옮김,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입문⟫, 서광사, 2019.

 

 ⟪존재와 무⟫는 인간 의식의 존재양식으로서의 '무'와 대상의 존재양식으로서의 '존재'를 구분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확보하는 동시에 사물의 외부적 실재를 긍정한다. 이처럼 사르트르는 그 유명한, 결여로서의 대자존재와 있음 자체로서의 즉자존재의 구분을 통해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론을 존재론을 위해 전유하는 데 성공한다. 이 구분은 인간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규정할 뿐 아니라 타자, 감정, 신체 등에 대한 사르트르의 고유한 분석을 위해서도 일관적인 설명의 토대를 마련한다. 세바스찬 가드너의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입문⟫은 사르트르의 논증들을 매우 치밀하게 소개함으로써 입문서답지 않은 난이도를 자랑한다. 한편으로는 깊이있는 주석서를 손에 넣어 기쁘지만 현상학 전공자에게조차 이렇게 어려우면 좋은 입문서인 게 맞나 싶은 의구심도 든다. 내가 아직 실력을 충분히 갈고닦지 못했겠거니 생각하는 게 좋겠다. 사르트르의 기초존재론과 완전존재론에 대한 부분까지 읽으면서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을 발췌해 인용한다. (⟪존재와 무⟫에 대한 인용의 페이지 수는 실제 책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일반론

“자유라는 속성과 인간 정체성의 규정, 이 둘 중에 그 어느 것에도 상대방에 대한 우선권을 부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이 양자에 대한 개념을 동시에 형성하는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50).”

“따라서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사르트르의 대답은 나는 자신을 실존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존재라는 것이다(53).”

“만일 존재가 나타남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라면, 이 드러남을 행하는 대상에 ‘대해’ 무엇인가를 식별해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에서 대상이 주체에게 주어진다면 그 존재 또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부조리하고 무용한 것이다. 이는 존재와 존재의 발현 가능성의 동시성을 재확인한다. [...] 존재의 현상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추가적인 이해를 요구하는 실체에 대한 심화된 사실을 구성한다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80-81).”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 사이 구분 비판]

의식이란 무엇인가?

“사르트르는 이것이 나타남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인식 관계일 수 없음을 보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존재는 인식의 [대상이 아닌 초현상적 가능] 조건이다. [...] 외양의 존재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것이다(82-83).”

“[...] 사르트르는 의식이 단지 대상을 향한 지향 관계와 또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나아가는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바로 이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86). [의식 자체가 지향성이다.]

“의식은 필연적으로 그 자신에 대한 의식, 전반성적인 자기의식이다(87).” [이는 일반적인 대상-의식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의식에 대한 사고 일반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의식은 자율적이고 절대적이지만, 그 자신의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는 비실체적 절대이다(91).” [스피노자적이지 않다.]

“의식의 실존은 절대적 우연성이다. 의식의 비실체성은 서로 연결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의식이라는 존재의 우연성과 숨어서 뒷받침하는 기체가 없는 순수한 나타남이라는 특징을 모두 지칭한다(94).”

대상에 대한 의식

“사르트르는 후설이 바로 이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질료 또는 종합이라는 개념을 도입했지만, 후설의 [이론은] 질료가 의식과 사물 모두의 속성을 드러내야 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비일관적 효과를 초래했다고 주장한다.”(97) [의식 또한 수동적이어야 대상과 상호작용할 수 있다. 의식은 전적으로 능동적이거나 자발적이지 않다.]

“의식이 의식의 현존 속에서 대상을 향해 자신을 초월해 가는 [지향적]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대상의 초-현상적 존재뿐이다(102).” [전반성적 의식의 지향성은 외부세계의 실재를 존재론적으로 증명한다.]

“정확히 사르트르는 관점주의의 입장을 택하고 이를 강화하면서 (그리고 그럴 때만) 무관점주의적 실재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존재와 무⟫의 부제인 ‘현상학적 존재론에 대한 시론’은 단순히 사물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비추어 사물이 어떠해야 한다고 추정하는 방식을 묘사하는 겸손하고 무해한 프로그램을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토대가 완전한 관점주의적 특징 속에서 드러나게 될 때만 [...] 우리가 사물을 그 자체로 알 수 있다는 사르트르의 메타철학적 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153)

“사르트르는 의식의 구조로서 초월(성)을 대자의 구조로 설명한다. 의식은 대자의 목적론이 대자의 초월을 요구하기 때문에 대상을 의도한다. 그리고 이 초월의 한 측면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인식은 ‘직관'이자 ‘사물에 대한 의식의 현전'이다. 사르트르가 설명하기를 이러한 직접적 현전은 부정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 근원적으로 “즉자와의 관계를 근거로 하여” 자기 자신을 생산해야만 하는 대자, 다시 말해, 사물로 있지 않은 것으로서 자기 자신을 구성하는 대자에 의해 이러한 직접적 현전이 필요해진다. [...]  대자의 존재가 실제로 인식과 동연적이다[외연이 같다]. 그리고 인식은 긍정의 의미를 담지한다. 즉자가 알려지고 세계로서 지향적으로 긍정되는 것은 의식의 ‘내적 부정의 이면’이다(184).”

즉자존재와 대자존재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정당화되거나, 필요하거나 가능한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성과 양태성을 넘어서기 때문에 즉자존재는 우연적이다 [...] 현상의 초현상적 존재가 곧 즉자존재인 것이다. [...] 대자존재의 형이상학적 특징은 즉자존재의 형이상학적 특징의 정반대이다. [...] 대자존재는 “현재가 아닌 것 그리고 현재의 것이 아닌 것”이자 “되어야 할 것으로[서의] 존재”로 정리된다(104-5).”

“사르트르의 존재론적 관계 개념은 하이데거의 후설 비판에 비추어 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가장 기초적인 지향성의 형태가 인지적 특성을 가질 수 없고, 따라서 의식의 성격도 가질 수 없다며 후설의 주장에 반대한다. 사르트르는 기초적 지향성이 비인지적이라는 하이데거의 의견에 동조하지만, 지향성과 의식을 동일시하는 후설의 입장을 지지한다. 따라서 그는 기초적인 지향성의 형태가 실용적(pragmatic)이라는 하이데거의 테제를 거부한다.”(110)

“나무뿌리에 대한 일상적인 지각과 구토를 일으키는 철학적 지각을 구별 짓는 것은 예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과 결여한 것 사이의 미묘한 대조이다. 즉자존재를 파악하는 것은 대상을 인간실재에 관여하지 않는 것, 의식의 대해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 것, 우리와 관련이 없는 것 또는 우리를 ‘향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즉자존재가 ‘무차별적'이라는 사르트르와의 진술에 부합하는데, 그 이유는 이 진술이 즉자존재로서 사물은 그 사물에 어떤 구별이 이루어지든 간에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138).”

“즉자로서 대상(대상에 대한 즉자존재)은 대상들이 ‘O는 F이다'라는 우리의 판단에 조응하는 구조를 소유하고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주어-서술어 판단에 대한 형이상학적 순응성을 가능하게 하는 사물 속의 차원이다(139).”

“사르트르는 대자가 필연적으로 자신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자신을 향해 있다고 주장했다. 자아성은 그것이 부재하는 것으로 주어지는 한에서, 즉 부재하는 현전으로서 나에게 주어지는 한에서 이 이상적 실체에 대한 나의 관계다(167).”

“[...]시간과 대자의 동일성을 깨닫고 나면 왜 시간이 존재하는가, 왜 시간은 지금과 같은 차원을 갖게 되었는가, 왜 시간은 흐르는가와 같은 초월적 질문들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193).”

“사르트르는 내가 나와의 동일성을 성취하기 위해서 존재의 총체성을 횡단하며 세계를 가로질러 나 자신에게 끝없이 되돌아가는 이 구조를 ‘자기성의 회로’라고 불렀다(168).”

“모순 없이 우리 자신에 대해 생각하거나 우리 자신을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곧 사르트르의 최종 테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99).”

부정과 무의 실재성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르트르는 부정을 인지의 초월적 조건으로 만든다. 사르트르는 모든 사고 개념과 모든 사고 행위가 부정과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부정은 대상을 개별화하거나 또는 대상의 무엇인가를 서술할 때처럼 모든 개념의 적용에 전제된다. X를 F라고 판단하는 것은 X가 Y와 구별된다고, 즉 Y와 같지 않다고 규정하는 것이다(115).”

“우리의 정신적 상태를 포함해 만일 현실이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이 실증적(positive) 성격을 띠고 있다면, “판단의 부정적 형태를 생각해 보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않았을까?””(116) [부정은 실재하는 것이다.]

“부정된 것은 기대와 다른 인간의 지향성을 전제한다. 그러나 이는 정립적 의식의 초월적 대상이다. [...] 모든 부정성은 어떤 존재에 관한 것이다 [...] 사르트르는 부정에 의해 존재가 재구성되는 작업을 ‘무화’라고 부른다. [...] 의식은 무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이다(118-9).” 

“따라서, 존재와 무의 진정한 관계는 비대칭적 모순의 관계이다. 즉 대칭적 대립의 관계가 아니다. 부정은 앞서 존재했던 것에 대한 부정이다. [...] 무는 존재의 의존하고 [...] 존재의 무화를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121-2).”

“마지막으로 사르트르는 즉자존재와 대자존재가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의 문제로 돌아오면서 [...] 대자가 무화를 겪은 즉자라고 제안한다(124).”

“원초적으로 의식은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예시해 주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을 경험해야만 한다. 따라서 의식은 자신을 무로서 경험해야만 한다. [...] 근원적(original) 부정은 대자가 사물로 있지 않은 것으로서 자기를 구성하는 부정을 의미한다(128-9).” [인간존재와 무의 동일화 원칙]

“사르트르의 관점은 즉자가 존재론적 우위(primacy)를 가지고 있는 반면 대자는 방법론적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코기토는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열심히 읽으려고 했는데 잘 이해하지 못하니 서럽다. 유난히 무기력하고 힘빠지는 한 주다. 독일로 유학을 가는 게 맞는 것 같다는 판단이 선 후로 조금 싱숭생숭해진 것 같다. 석사논문을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고... 하루종일 머리가 띵하고 빈혈이 있는 것처럼 어지럽다. 여태까지 살아온 대로 계속 살면 되는데 뭐가 이렇게 힘든지.